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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 하루전이라고 급할 것은 없지만 마지막 남은 시간을 아껴 숙소를 나섰다.  타멜거리로 나와 아침 일찍부터 문을 연 베이커리에서 따끈따끈한 빵과 진한 커피를 들고 여분의 빵을 가방에 담아 길을 나섰다. 갓 깨기 시작한 타멜거리에는 택시들이 늘어서기 시작했다. 빵집을 나서자마자 택시를 잡았다. 좁은 택시 안에 굵은 향을 2개나 피우고 있던 기사와  300루피에 흥정을 하고 보드낫을 향했다. 역시 난폭운전을 했다. 제발 천천히 가자고 외쳤지만 그는 'God bless you!'를 읊조리며 전혀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그는 지름길인지 좁은 골목으로 접어 들어 노폭에 아랑곳없이 과속과 곡예운전으로 금새 보드낫에 도착했다.

보드낫은 네팔의 사원답게 문앞부터 아수라장이었다. 택시와 사람, 상인과 순례객, 네팔리와 관광객이 뒤엉킨 사이를 뚫고 정문을 향해 다가가자 거지와 사두들의 내민 손이 정신을 빼놓았다. 1인당 160루피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선 보드낫은 사진을 통해 미리 낯을 익힌 반구형의 탑을 중심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부처의 눈을 그려놓은 탑은 거칠지만 위엄있고, 단조로운 형태지만 나름 조형미를 갖추고 있었다. 네팔내 최고의 티벳 불교 성지로 알려진 보드낫은 종교를 넘어 티벳 문화와 삶, 전체를 느낄 수 있는 특이한 곳이었다. 머리 장식을 유별나게 하는 네팔 젊은 남성들의 모습도 눈에 띄이고 티벳 승려의 행렬도 이어졌다. 병든 노인네들의 힘겨운 발걸음과 젊은이의 발길 또한 붐비는 보드낫의 풍경은 어쩌면 '티벳'에서 종교의 지배력을 잘 드러내 주는 곳이기도 했다. 티벳 불교에 대해 아는 바가 없지만 스투파를 둘러싼 종교 물품을 파는 가게며 관광기념품 가게며 레스토랑, 호텔의 모습 그리고 보드낫 구역에 속하면서 원형 스투파와 그를 둘러싼 원형의 상가건물뒤 골목으로 들어가면 다양한 채소와 생활용품을 파는 시장이 들어서 있었다. 식육점까지 버젓이 사찰의 영역안에서 조금도 어색하지 않게 공존하면서 또 다른 내세의 삶을 꿈꾸게 만드는 티벳 불교는 이미 '종교'가 아니라 티벳탄의 삶 자체로 보였다. 또한 티벳불교는 티베탄에겐 이미 정치적, 현실적 권력이기도 한 것 같았다.

전날 파샹을 만났을 때 오늘 파샹 역시 보드낫에 올 일이 있었다고 했지만 우리가 보드낫을 떠나기전까지 파샹을 만날 수 없었다. 우리가 너무 이른 시간에 보드낫에 왔기 때문인 것 같았다. 다시 택시를 타고 퍄슈파나트로 향했다. 보드낫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파슈파나트는 네팔 흰두교도의 성지로 나는 그냥 흰두교식 '화장장'으로 알고 있던 곳이었다. 사원은 역시 입구부터 상인과 사두들, 그리고 거지와 순례객에다가 우리같은 관광객들까지 뒤엉켜 장터를 이루고 있었다. 한사람당 500루피의 입장료를 내고 사원을 들어서니 가족을 잃은 슬픔을 종교적 의식을 통해 극복하고자 하는 망인의 가족들과 더불어 이 모든 과정에 개입하여 삶을 이어가는 사두와 점성술사 그리고 자칭 '가이드'들의 발길 또한 분주했다.

매표소에서 부터 우리를 따라 나선 '가이드'는 시간당 얼마간의 돈을 요구하며 조금은 성가시게 따라 붙었다. 거부의사를 밝히자 그는 떨어져 갔지만 또 다른 가이드가 다시 우리를 따라 붙었다. 한국어가 농통하지는 않았지만 기본적인 단어는 구사하는 네팔리였다. '화장', '제사', '부자;, '보통사람', '시체' , '3시간', '오천루피' 등의 단어를 구사하며 다가선 두번째 가이드마저 사양했지만 그를 통해 나는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부자를 화장하는 곳과 보통 사람을 화장하는 곳이 다르고, 보통사람들은 오천루피의 비용을 내고 화장을 하고, 시신을 화장하는데는 약 3시간 정도의 시간이 걸리고, 강 한쪽의 사각형 돌판은 화장을 하는 곳이고, 맞은 변 둥근 돌판은 제사를 지내는 곳이라는 사실까지 고스란히 그를 통해 들었지만 나는 팁도 주지않고 그를 내쳐버렸다. 누군가에게 서비스를 받고 돈을 지불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다보니 가이드의 도움을 받는 일이 왠지 어색하기만했다. 구체적인 지식을 얻지 못하더라도 그냥 혼자 조용히 사원의 분위기나 살피며 걷고싶기도 했다. 나중에 생각하니 내가 너무 위축되어 가이드를 거부한 것은 옳지 않은 선택으로 여겨졌다. 혹시라도 이와 비슷한 다음 기회가 있다면 꼭 가이드비를 부담해서라도 도움을 받기로 마음 먹었다.

파슈파티나트의 화장장은 흰두들이 성스러운 강으로 여기는 갠지스강의 지류인 바그마티강을 따라 늘어서 있었다. 파수파티나트를 가로 지르는 바그마티강은 작은 규모에다 수량도 많지 않았고, 시신을 태운뒤에 쓸어넣은 쓰레기와 위에서 부터 유입되는 생활폐수 등으로 강물이 시커멓게 썩어 있었다. 하지만 그 더러운 강물로 시신을 닦는 의식을 치루고 그 강물로 세수를 하고 몸을 씻으며 흰두들은 마음의 평화를 얻고 있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그 강물에 들어가 시신에서 나온 금이빨 같은 것을 얻기위해 강바닥을 뒤지고 있었다. 성스러운 바그마티강에 들어가 하루종일 강바닥을 뒤지는 사람들은 강물에 오래 머문 만치 더 많은 시바신의 가호를 받고, 동시에 강을 통해 물질적 구원까지 받고 있었다.

화장장을 들어서니 막 불붙기 시작한 시신과 다타들어가 뼈만 남은 것 같은 시신 그리고 저멀리 막 종교의식을 치루며 화장을 준비하는 한무리의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화장을 진행하는 사람은 시신이 타들어가는 모습이 흉칙하게 드러나지 않도록 계속해서 시신에 짚을 얹었다. 이전에 덜 탄 시신의 일부를 원숭이들이 들고 다니며 뜯어 먹는 경우도 있다고 들은 적이 있었는데 사원안을 돌아다니는 원숭이 떼가 많았지만 다행히 화장터까지 접근하는 놈은 없어 보였다. 화장중인 시신들은 지키고 있는 가족이나 지인들이 많지 않아 보였는데 화장을 준비하며 종교의식을 치루고 있는 무리는 재법 많은 사람들이 같이 하고 있었다. 죽음이 삶을 이기고, 삶의 증거인 육체마저 지우는 의식이 화장이지만 그래도 한 생명으로 세상을 살다가는 그 순간이나마 누구도 쓸쓸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전의 가난이 죽어서도 계속되고, 생전의 부귀와 영화를 죽어서도 누리는 것을 보면 그래도 죽음보다 삶이 더 강한 것 같았다.

화장을 준비 중인 무리에서 한 여성의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곧 화장을 시작하기위해 강물로 시신의 발을 닦는 마지막 의식을 치루는 과정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죽은 자의 아내로 보였다. 이제 곧 사랑했던 사람의 시신에 불이 붙고 그가 한 생명으로 이세상을 살았던 물직적 흔적이 지워져버리게 된 순간 그녀는 종교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죽음의 고통 그리고 슬픔에 몸부림쳤다. 결국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죽음의 한계, 그 상실과 잊혀짐의 공포를 어떻게 '종교'가 전부 구제해 줄 수 있겠는가. 정신줄을 놓고 발작적으로 시신을 붙들고 오열라는 그녀의 모습에 나또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애써 눈물을 감추고 바그마티강건너 돌계단을 한참 올라 부도들이 늘어서 있고 그 사이를 원숭이 떼가 한가로이 놀고 있는 언덕위 유적지를 걸었다.

아침 일찍 시작한 여정을 끝내고 타멜로 돌아오니 늦은 점심시간이었다. 안나푸르나 여정을 준비하며 알게 되었던 한국 식당 '소풍'으로 향했다. '소풍'은 산을, 네팔을 사랑했던 남녀가 만나 그 사랑의 증표로 남긴 타멜 뒷골목의 소박한 식당이었다. 산에서 만나 사랑하고, 산에 더 가까이 지내기 위해 타멜에 식당겸 여행객의 쉼터를 열었지만, 아내는 이내 병이 들고 영영 세상을 등져버렸다고 했다. 그들 부부가 꿈꾸었던 '소풍'은 이제 네팔 여성들의 손에 운영되고 있었다. 주인이 바뀌었는지, 어떤 형태로 운영되고 있는 지는 알 수 없지만 여전히 '소풍'은 소박한 쉼터로 우리를 맞았다. '소풍'은 안나푸르나로 히말라야로 떠나거나 되돌아 온 사람들에게 휴식을 취하며 지난 여정을 곱씹고 새로운 꿈을 꿀 수 있게 하는, 산과 세상을 잇는 간이역으로 남아있었다.

소풍에서 '떡뽁기'를 먹고 타멜 거리로 나와 어제 눈여겨 보았던 선물가게에서 작은 목각 몇가지를 구입했다. 생각보다 싸게, 오랜 흥정이 필요없이 새와 소와 물고기, 사자 등의 동물을 부조로 새긴 목각 몇개를 사고나니 작은 배낭이 한짐이 되었다. 숙소로 돌아가 배낭을 내려놓고 다시 타멜 거리로 나왔다. 서점을 들러 네팔 전통문양집고 여신에 대한 책을 사고, 선물가게에서 허브차를 사고, 수퍼마켓에서 유명한 인도산 립그로스인 '립밤'을 샀는데 그래도 시간이 남았다. 남은 시간동안 가 볼 만한 곳으로 [Garden of dreams]로 정하고 찾아나서니 타멜쵸크를 지나 왕궁 쪽으로 방향을 잡자마자 바로 그곳이었다.

높은 담으로 둘러싸진 '꿈의 궁전'은 카트만두 시내를 처음 걸었을 때 이미 그 앞을 지나갔던 곳이었다. 까페와 레스토랑이 있는 작은 공원 정도로 생각하고 들어선 '꿈의 궁전'은 군인인지 경찰인지 정복차림의 근무자가 있고 입장료를 받고 있었다. 매표소를 지나 궁전안으로 들어서니 '꿈의 궁전'은 네팔과는 다른 그리스 로마 시대의 정원인양 서구적 형태의 건축물과 조경으로 꾸며진 대저택으로 보였다. 나눠준 안내문을 보니[꿈의 궁전]은 1920년대 쯤 한 장군의 사저로 지어졌다가 그의 실각으로 방치된 뒤 정부에 귀속되었다고 했다. 그 뒤 호주정부의 지원으로 원래 규모의 절반정도로 복원된뒤 네팔 정부 문부성 관리하에 유료 공원으로 개방하고 있다고 했다.

'꿈의 궁전'은 카트만두의 연장이 아니라 철저히 단절된 서구적 공간으로 다가왔다. 건축물은 물론이고 너른 정원, 정원에 깔린 잔디, 아름다운 조경수들, 장미덩쿨, 분수와 파고라, 벤치등 모든 것이 서구적 조형미를 띠고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카트만두 시내 한 복판에 있는 공간이 고요하기기까지 했다. 어느 것 하나 카트만두스러운 점이라곤 없는 '꿈의 정원'이지만 다행히 정원을 노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네팔리였다. 사실 '꿈의 궁전'은 카트만두를 찾고 안나푸르나나 에베레스트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찾기에는 뭔가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서구적 멋을 한껏 낸 정원이지만 서구인이 혹하기에는 뭔가 부족했다. 적어도 네팔을 찾는 서구인 대부분은 특히나 더욱 네팔스러운 것들을 찾아 나설 것이기 때문이다. 정원 구석구석의 벤치에는 청춘 남녀들이 뜨겁게 포옹을 하고 사랑을 속삭이고 있었고 우리는 그 사이를 지나 정원을 한바퀴 돌고 못들어진 야외 까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해가 떨어지는 카트만두의 별천지 '꿈의 정원'에서 커피 향에 취해 지난 여정을 되돌아보고 내일이면 돌아가야 될 한국에서의 생활을 가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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