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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혈은 가장 귀한 생명을 나누는 일이기는하지만,
아무나 할 수 있는 그런 흔한 보시나 자선은 아닙니다.

나의 피는 나에게 속해있어, 누구도 나의 허락을 맏지 않고 빼앗거나
침해할수 없는 나만의 고유한 자산입니다.
하지만 나의 육체에 속해 있는 피는,
생명현상의 일부이다보니 끊임없이 소멸하고 생성하는 과정에 있어
일정한 양을 나눠도 아무런 문제가 없고,
결코 절대량이 줄어들지 않는 무한자산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혈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삼년전에 이웃에 사는 예연이 아빠의 권유로 헌열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어느새 헌열의 기쁨에 중독이 되어 정기적인 헌혈자가 되었습니다.
헌혈을 하고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의 존재이유도, 
내 삶의 가치도 느껴지지만 무엇보다 내 삶이 내 혼자만의 삶이 아니라는
타인과의 유대와 일체감같은 것이 느껴집니다.

그렇게 좋은 헌혈이지만 아무나 아무 때나 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난 월요일 예연이 아빠랑 봉화읍에 같이 나갈일이 있었습니다.
봉화읍에서 볼일을 마치고 예연이 아빠가 이왕 나온 김에 안동에 들러
헌혈이나 하고오자는 제안을 하셨습니다.
봉화읍에는 헌혈을 할 수 있는 기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산골사는 사람이 헌혈을 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대부분 주말에나 이웃의 혼례 등으로 안동이나 영주같은 도시에 나갈 일이 생기는데
헌혈은 평일에나 할 수가있습니다.
그래서 헌혈을 하기 위해서는 꼭 평일에 따로 시간을 내어
차로 한시간 거리인 안동시까지 나가야만 합니다.

이날도 예연이 아빠께선 이왕 봉화읍 나온 김에 안동까지 가자고 하셨지만
봉화읍에서 안동까지는 차로 한시간 거리나 되고,
우리가 살고 있는 명호면 비나리에서 안동까지 거리나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그래도 이날은 안동에 소소한 몇가지 볼일도 있고해서
혼쾌히 안동 헌혈의집까지 동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안동으로 달리는 동안 예연이 아빠는 지난 헌혈날짜를 계산해 보고
헌혈한지 채 두달이 안된것같다고 하시면서 헌혈의 집으로 전화를 하셨습니다.
헌혈의 집에서는 두달이 되기에는 일주일이 모자란다고 확인을 해주었습니다.
원칙적으로 헌혈한지 두달이 안되면 헌혈이 불가능하지만
이왕나선길이니깐 가서 사정하면 헌혈을 할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는 버리지 않았습니다.
 
월요일 오후의 헌혈의 집은 젊은 청년들로 붐볐습니다.
 안동시내의 대학교 학생들로 보이는 10여명의 남녀학생들이
모둠으로 헌혈을 하고 있었습니다.
먼저 예연이 아빠가 간호사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헌혈을 하려했지만,
모든 것이 전산처리되어 있어 원천적으로 헌혈을 할 수가 없다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래도 저라도 헌혈을 하겠다고 30여분 이상을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저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간호사앞에 앉아
몇가지 질문에대한 답을 하면서 혈압을 재었습니다.
혈압은 정상이고 드디어 손가락 끝에서 검사를 위한 채혈을 하려는 순간
간호사께서 최근 해외여행 사실 확인란에 체크한 것을 보시고
해외여행뒤 한달이 경과하지 않은면 헌혈을 할 수가 없다고 판정하셨습니다.
뭐 일본인데 어떨려구요 하면서 둘러됐지만
결국 저 역시도 헌혈을 하지 못하고 되었고 
예연이 아빠와 저는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헌혈의 집을 나와야했습니다.
우리보다 더 미안해하는 간호사의 배웅을 받고 돌아서며
예연이 아빠와 저는 동시에 마주보고 한마디를 툭 던졌습니다.  

"헌혈하기가 쉽지가 않네요"

사실  헌혈하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무엇보다 머저 자신의 생명을 타인과 나눌 의사가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피를 나눌 의지를 실현하기 위해선
바로 자신의 건강이 확보되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그 둘만 갖추었다고 헌혈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해외여행 여부, 약물투여 여부, 거주지역문제, 병력 등등 
조건이 하나 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헌혈은 더 값진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어려운 관문을 뚫고 내 피를 타인과 나눌 수 있게 되었을 때
세상에 그 어떤 것과도 바꿀수 없는 성취감을 느끼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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