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행복한 인문학]은 무슨 뜻일까? 인문학을 하면 행복해진다? 아니면 인문학은 의당 인간의 행복에 복무해야한다. 그것도 아니면 인문학은 당연히 행복학이다? 아마 다 맞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지금 까지 인문학은 인간의 보편적 행복에 기여해오지 못했는가? 아마도 이책은 그점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한 대중인문학 강연의 성과물일 것이다. 지금까지 인문학이, 아니 일반 학문과 지식이 인간 개개인의 행복과 인류공동체의 선을 증진하는 데 기여하지 못했고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로 역할하거나, 학자 개인의 지적 교양적 수단 혹은 생계 수단에 불과했던 측면이 있다. 그래서 '지식소매상'이라는 자조가 학자의 입에서 스스럼없이 흘러나오고, 인문학 무용론을 넘어 '인문학의 종말론'까지 회자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물론 이는 우리 사회가 가진 특수성에 기인 한 바도 크다. 전통사회가 붕괴되고 급속히 산업화되는 과정에서 전통적 인문학은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고, 급조해서 수입한 서구의 인문학은 아직 내재화되지 못한 이런 상태에서 오직 경제성장, 경제대국의 길로 매진해온 우리에게 '인문학'은 거의 말라붙은 개뼈다귀 취급을 받았으니 말이다.
그런데 몇년전부터 갑자기 '인문학강좌'붐이 일었다. 2006년 '가난한 이를 위한 희망수업'으로 잘 알려진 미국의 교육자 얼 쇼리스의 방한 즈음해서 한국에도 인문학 강좌가 종교단체나 시민사회단체를 중심으로 우후죽순처럼 개설되었다. 2010년 현재는 이곳 경북 봉화군까지 인문학 강좌가 개설되었다는 플랭카드가 거리에 걸려 있을 정도이니 이는 필시 전국적인 현상일거다. 그런데 왜 지금 인문학일까?

막연히 드는 두요인은 서로 상극적이다. 우리사회가 언제부턴가 일정하게 경제적으로  부유하게 되어 이제 인간의 가치, 삶의 질을 뒤돌아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일정한 경제성장을 뒤이어 국가부도사태라는 IMF와 양극화의 심화가 인간 개개인의 행복과 삶의 안정성을 근본으로부터 흔들어 놓았다. 바로 이 두 요인이 부딧는 자리에 인문학이 개입한다. 쉬운 일이 아니다. 고고한 인문학이 천박한 시장거리에서 '무식한'대중을 만나 소통한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하지만 부정적인 시각도 없지않다. 인문학이 고작 자본주의체제의 패해를 뒤치닥거리함으로써 체제 안정성을 강화하는데 기여해도 좋은가, 오갈데 없는 고학력 실업자들 푼돈벌이 시켜주기 위한 수단아니냐는 의혹이 그것이다.
사실 이런 부정적 의문을 해소하는 길은 인문학이 복지를 강화하고 경쟁을 완화하여 인간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사회적 시스템을 제도화하는데 어떤 역할을 하는가를 보여줄 수 밖에는 없어 보인다.
이런 의문의 이면에는 최근의 '인문학 강좌'를  이전의 소위 '의식화'와 어떻게 다른가 하는 문제의식이 있다. '의식화'가 체제저항적 계급의식을 고양하고, 개인을 변혁의 주체로 세우기 위한 학습과정이었다면, 인문학강좌는 체제 내적 인간 개인의 정신적 만족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체제에 순치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지점에서 갈라지는 의견은 봉합하기란 쉽지않다. 근본적인 인식의 기반, 가치 기반 자체가 다를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논의를 진전시키는 일은 쉽지가 않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그래서 [인문학강좌]가 무의미하던가 유해한가 하는 의문에만 답하고 싶다.  모든 시대, 모든 국면에서 근본주의 기획이 항상 올바른 선택, 최고의 지고지순한 도적적 결정으로 통용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지금 자본주의의 근본적 변혁이 가로 막힌 지점에서 상처받은 체제내적 인간의 개인적 행복을 도모하는 것이 바로 올바른 진보의 태도인지도 모른다. 문제는 어떻게 그것을 제도화하고 보편화 함으로써 인간 삶의 가능성을 한단계 끌어올리냐하는 데에 있다고 본다.
사회밖으로 내팽겨치진 '하류인간'을 사회와 다시 소통할 수 있게하는 매개로서의 인문학,
'인간'의 무리에서 이탈한 무리를 다시 인간으로 복귀시키는 치유의 인문학을 통해 "일상화된 모욕사회"를 극복하고 인간 개개인이 주체의식을 회복함으로써 얼 숄리스가 제안한 윤리적 민주주의의 구현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근본적인 처방이 어디있겠는가?
사실 다운그레이도와 귀농, 자발적 가난이 유행인 것만치 체제는 간고하고 개인은 무력하다. 지금 반체제가 아니라 탈체제하는 개인이 늘어나지만 언젠가는 체제에 대한 근본적 물음에 봉착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까지 살아야되는 개개인 삶의 소중함은 더 이상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그 소중함을 찾는데 인문학이 조금이라도 기여한다면 단연 인문학은 행복학일 수 있을 것이다.
 
이책 [희망의 인문학]을 읽는 재미는 무엇보다. 인문학 강의에 참가한 학자들의 글 중간중간에 게제된 수강생의 글을 읽는 데에 있다. 형언할 수 없는 깊은 공감과 애틋한 개개인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절절히 느끼게 해주는 이들 글들이 "희망의 인문학 강좌"를 통해 나같은 필부도 공유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경이롭다.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