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더보기

최고임금 : The Case for A Maximum Wage  /Sam Pizzigati 지음/ 허윤정 옮김

필자 샘 피지게티는 날로 심화되고 있는 소득 불평등이 인간의 삶에 가하는 근본적인 해악을 주목하고 이를 해소하거나 완화할 최소한의 해결책으로 [최고임금]을 제안한다. 우리나라는 작년에 한 진보정당이 총선 공약으로 [최고임금제]를 채택했지만 아직은 우리 사회에 생소하고 현실적인 실현가능성에 대해서는 비관적인 상황이다. 최고임금제와 쌍을 이루는 제도인 [최저임금제]는 미국의 경우 1930년대 대공황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사회적 합의 과정을 거쳐 노동권의 강화의 일환으로 도입되었다. 우리나라는 1986년에 최저임금제가 도입되었고 거의 4반세기를 운용해 왔는데 아직도 제도 본래의 취지를 궁극적으로 실현하기에는 갈 길이 멀다. 1986년에 입법되고 1988년에 처음으로 정해진 최저임금은 시간당 462원이었다. 그렇게 시작해서 20218720원까지 점진적으로 인상되었다. 하지만 매년 열리는 최저임금위원회는 노사정(민간)위원간의 줄다리기를 넘어 한쪽이 퇴장한 가운데 확정되는 우여곡절을 겪으며 사회적 부의 증가속도, 노동 생산성의 상승폭, 부의 편중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턱없이 부족한 최소치의 증가율로 강요되어 왔고, 그나마도 경기 불확실 등 경제 지표가 악화되면 가장 우선적으로 억제하여 노동 측의 희생을 강요해 왔다.

그리고 이 과정은 늘 이데올로기 공격과 병행되어왔다. 최저임금인상이 중소상인의 경영을 악화시켜 폐업이 속출하고 따라서 일자리가 줄어드는 주요인인 듯 선전하고, 노동자에 대한 최소한의 인간적 삶을 보장하기 위한 사회적 합의로 이루어진 최저임금의 기본 정신마저 왜곡해 오고 있다. 나아가 애초에 최저임금은 열등인종을 노동시장에서 배제하기 위해 도입되었다는 음모론적 주장도 서슴지 않고 있다.

최고임금에 대한 공격도 최저임금에 대한 공격의 연장선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무엇보다 자본가의 창의성, 열정을 억압한다는 논리가 가장 일반적인 반대논리로 동원될 것이고 이는 한명의 뛰어난 사업가가 10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자본 측을 옹호하는 주장을 뒷받침할 것이다. 과연 그런가에 대한 답변은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인간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 위에 제시되어야하고, 보다 바람직한 인류공동체의 전망 속에서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이에 앞서 최소한 인간은 경제적 이해관계에 국한해서 행위하지 않는다는 것, 인간의 창의성이 경제적 강제로부터 자유로울 때 최고조로 실현된다는 사실을 환기하고 싶다.

이 책의 서문에서 인류가 얼마나 불평등한가라는 사실을 통계수치를 통해 보여주고, 이 또한 나날이 더 악화되고 있음을 구체적인 연구성과를 정리해 제시하면서 왜 불평등을 해소해야하는가에 대한 당위성을 제시하고 있다.

1장 과하다는 것의 정의에서 필자는 어느 정도의 임금 격차가 적절한지, 어느 수준이 우리가 용인할 수 있는 수준인지에 대한 논의를 다각도로 전개하면서 사회적 개입의 정당성, 적절성을 검토한다. 하지만 이 부분은 임의적이고, 상황적일 수밖에 없음을 인정한다. 그렇다고 해도 논의 자체가 불가능하지 않고 사회적 숙의와 합의 과정을 통해 절절한 수준을 제어해 나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분명한 것은 지금의 임금격차, 자산보유 격차는 극악할 정도로 지나치고 이것을 줄여나가는 것이 인간의 삶을 개선하는 역사적 진보의 방향이다는 것이다. 2장 최고배수의 마법에서 필자는 적절한 불평등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그렇다면 어느 수준인가를 묻고 불평등을 최소화하는 것이 개인의 품위있는 삶을 보장하는 첩경임을 다양한 통계자료를 통해 보여준다. 또한 불평등 해소책으로 상향평준화의 방법(최저임금)과 하향평준화의 방법(최고소득)을 제시하면서 소득불평등 해소가 궁극적으로 자산불평등의 해소를 가져올 것이라고 낙관한다. 또한 법적 강제와 더불어 공익에 기여하는 기업에 대한 공적 지원, 사업기회 제공 등을 하는 공공지갑을 통해 기업이 자발적으로 최고임금제에 참여하도로 유인을 제공할 것도 제안한다.

3슈퍼리치 없는 사회는 사회에 만연한 불평등이 신분상승 강박과 과소비 그리고 개인의 좌절과 무력감을 얼마나 초래하는지 보여주면서 극단적 불평등을 조장하는 체제가 동시에 영웅적 자선을 옹호하는 모순을 고발한다.

4장과 5장을 통해 필자는 더 공정한 사회로 갈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구체적 방법론을 제시하면서 마지막으로 현시점까지 다양한 국가의 여러 층위에서 시도된 실행 사례를 제시함으로써 보다 평등한 세상을 향한 인류의 오랜 꿈의 현실성을 확증한다.

최저임금이 가난한 자의 소득을 상향시켜 불평등을 줄이는 시도라면 최고임금은 부자들의 소득을 줄여 불평등을 줄이는 시도다. 이 둘은 서로 상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러 상호 상승작용을 일으켜 보다 평등한 사회로 인류가 진입하는데 도움이 되는 제도다. 이책은 그와 같은 명제를 증명하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고, 우리에게 아직은 생소한 최고임금제도가 왜 필요한지. 어떻게 현실화할 것인지, 그리고 도입이후에 우리의 삶이 어떻게 바뀔 것인지를 보여주는데 주력하고 있고 좁은 지면에 비해 상당한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 책은 불평등 해소와 정의의 문제를 제기하고 설득력을 얻어가는 과정이 난해하고 논리적 비약을 동반하거나 정서적 공감에 의존하지 않는다. 많지 않은 분량이면서, 새로운 시대적 아젠다를 대중적 언어와 객관적 자료로 잘 설명해 내고 있는 친절한 책이다. 보다 평등한 세상의 꿈을 키워가는 많은 독자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반응형
반응형


얼마전 최저임금위원회가 노동자 단체를 배제한 상태에서
내년도 최저임금을 처리했다.  시급 4,580원을 날치기 처리하면서 언론은 6% 라는 상승율을 전면에 내세우며 날치기처리의 부당성과 4,580원의 초라함을 숨기려 했다.
분배의 정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는 미래가 없다는 단순한 사실을 외면하고, 가진 자들만을 위한 세상으로 몰아가는 자본가들의 부에 대한 극악한 집착과 맹목이 두렵기조차하지만 최저임금의 비현실성과 부당성을 떠나
우리 사회에 드리우고 있는 그늘이 너무나 많고 또 짙다. 그중에서 노인 노동에 대한 부당한 댓가와 처우가  가장 큰 그늘중의 하나이지 않을까 생각된다.


몇일전 몇년째 고추가루를 보내드리고 있는 부산의 한 냉면집의 부탁으로
고추를 구하러 영주의 고추도매상거리를 찾았다. 벌써 7월 하순을 접어드는 탓에 마을에도 고추가 떨어져 시장을 찾았지만 도매상거리서마저 고추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한달여만 있으면 햇고추가 나오기 시작할터이니
묵은 고추를 쌓아둔 가게가 없었다.

몇집을 스쳐지나가다가 할머니 한분이 가게 앞마당에서 고추 꼭지를 다듬는 모습을 발견하고 고추맛을 보고, 주인할머니를 만나  가격을 흥정하고, 구입을 결정했다. 문제는 고추가루를 급히 보내어야하다보니 현장에서 바로 고추를 다듬어 가는 편이 나을것 같아 꼭지를 다 따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주인할머니가 이웃가게에서 고추꼭지를 딸 할머니를 한분 더 구해오시어 주인할머니를 포함해 3분의 할머니가 고추 꼭지를 따기 시작했다. 그동안 나는 농협마트에서 시장을 보고 1시간만에 돌아왔지만 아직 작업은 진행중이어서 작업하시는 할머니들과 잠시잠깐동안  꼭지 따는 노임에 대해 이런저런 말씀을 나누었다.


할머니 말씀에 따르면 고추 꼭지를 따는 노임은 꼭지를 딴 고추 1kg당 300원에서, 상태가 좋지않아 가위로 병든부위를 오려내는 작업을 할 경우 1kg에 600원까지 받으신단다.   내가 2시간가량을 기다려 받은 고추는 36kg이니깐 할머니 3분이 2시간 가량 작업을 해서 15.000원정도의 작업비를 번 셈이었다. 시급으로 따진다면 할머니 한분당 약 2500원정도씩이 되었다.

미안한 마음에 한개 600원짜리 얼음과자를 사드렸지만 그 얼음과자 한개값이면 고추꼭지를 2kg이나 따야한다는 사실에 죄지은 마음이 들었다. 이런 일감조차 많지않아 보통 하루에 만원 정도의 벌이가 되지만 그냥 심심풀이로 나오신다고 할머니는 변명아닌 변명을 늘어놓어셨다. 고추 꼭지를 따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런 작업은 심심풀이로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다. 손가락도 아프고, 어깨쭉지며 허리며 한시간만 작업해도 가위를 집어던지고 싶을 만치 고통스런 작업이다. 아무리 만성이 되었다고 해도 고추꼭지를 따고 일어서는 할머니는 한참을 허리를 펴지 못하고, 고통에 찬 신음소리를 내시고야만다. 분명한 것은 이 일이 절대로 심심풀이 일 수 없다는 사실이다.

요즘 길을 가다보면 '노인일자리사업'이란 글자가 찍인 초록색 조끼를 입고
쓰레기를 줍고 풀을 베는 노인분들의 무리를 만나볼 수 있다. 들어보니 하루 4시간 일주일 2~3일 일하고 월 20만원 가량을 받으신단다. 정확한 임급과 노동조건은 모르겠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퇴약볕아래 쓰레기를 줍고 계신 할머니 할아버지를 보는 것만으로도 울컷 화가 치민다. 우리사회가 노인분들에게 눈꼽만하 임금으로 길가 쓰레기까지 줍게만드는 것을 목도하는 일은 참으로 고통스럽다.

그것을 '생산적복지'라고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노인네 한분한분은 우리 사회에 충분한 자기역할을 다해 오신 분으로 응당 노후가 보장되고 적절한 보상이 주어져야 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런 일자리조차 수요는 많고 공급은 달려 거의 경쟁적으로 담당공무원에게 매달리는 노인분들이 많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그리고 단지 돈이 아니고 존엄한 삶을 위한 '일'에 대한 요구가 더 클 수 있다는 것도 거짓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는 평생을 충분히 노동해온 할머니 할아버지의 손에  집게를 들리고 쓰레기를 줍게 해서 월 20여만원의 댓가를 주는 제도를 무슨 노인일자리 복지정책인양 하는 것이 너무나 못마땅하다.

적어도 노인노동에 대한 정당한 댓가가 어떻게 주어질 수 있을지, 노인노동력을 활용할 수 있는 '존엄한' 일자리는 어떻게 만들어져야하는지 고민하는 것이 바로 노인복지정책을 만드는 일이 아닐까 생각된다.

노인들이 주눅들지 않고 당당해 질 수 있는 사회가 진짜 선진국이다. 
노인분들에게 그분들이 받아야할 응분의 댓가를 지불하는 사회가 바로 공정한 사회이다.  

반응형
반응형

대학을 들어가자마자 딸은 호기롭게 외쳤다. 온종일 도서관에서 살면서 엄청나게 독서를 할거고, 친구도 다양하게 많이 사귈거고, 그동안 미룬 기타도 서클에 가입해 열심히 배우고 그리고  아르바이트도 할거라고!! 아빠 입장에서 딸의 다짐들에  대해 처음부터 초칠 수는 없고 '그래야지' '그래 열심히 해봐라'라고 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청춘은 허비하는 와중에 그 소중함이 드러나는 것임을 스스로 체득했던 아빠입장에서는 그와 같은 딸의 다짐들이 젊은 객기이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그리고 한 학기가 흘렀다. 한학기동안 두어번 집에 내려왔고, 그리고 일주일에 두어번씩 전화통화를 했는데 딸은 많은 다짐 중에 두개 정도는 실현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이 되었다. 첫째는 기타 써클에 가입해 열심히 기타를 치고 있다는 것이고 그리고 친구를 많이 사귀는 건지는 몰라도 친구들이랑 열심히 논다는 것이다. 주말이면 혜화동에서 친구들이랑 연극보기로 되어 있다는 둥, 강남에서 식사약속이 있다는 둥 엄마아빠는 영 뒷전이었다. 그렇게 한학기가 흘러가고 드디어 첫 여름방학을 맞아 딸아이는 많은 다짐들 중의 하나인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겠다고 선언했다. 사실 우리나라 아르바이트 처우수준이 형편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차라리 부모가 좀더 고생을 하더라도 그 시간에 딸아이가 공부나 더 열심히 했으면 하는 바램을 이야기했다. 대학 등록금은 다른 선진국 수준을 추월하고, 임금은 후진국 수준에 머물러 있으니 아르바이트를 해서 대학을 다니고 공부를 한다는 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하기에 장기적으로 보면 차라리 공부 좀 더 하는게 낮다는 것이 아빠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한 고집하는 딸아이는 여기저기 아르바이트를 알아보더니. 결국 수원시내의 한 문구점에서 주말 이틀을 일하기로 결정했다고 했다. 

일자리를 찾은 딸아이에게 축하를 할 겨를 도 없이 두주가 지난뒤 딸아이는 별안간 아르바이트를 그만두었다고 했다. 고작 4일 일하고 그만두었냐고 놀렸지만 딸아이는 나름대로 고민도 하고 또 짧은 아르바이트 경험속에서 많은 것을 느끼고 생각했는가 보다. 먼저 아르바이트생에 대한 처우에 대해 엄청난 불만을 토로했다. 하루 12시간을 가게안에서 손님을 안내하고, 물건을 찾아주고, 돈을 받아 계산을을 하고, 틈틈히 흐트러진 상품진열장을 정리도 하고 하지만 딸아이가 받는 임금은 너무 초라했다. 시급 3500원!   하루 12시간을 일하고 일당 42,000원을 받기에는 억울해서 더 이상 일을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법정 최저임금이 4,110원인 것을 확인한 딸아이가 문구점 주인에게 따지니깐 식사를 제공하기 때문에 밥값을 치면 법정 최저임금 이상이 된다며 알바비 인상에 동의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렇게 딸아이의 첫 아르바이트는 끝이 났다.  

하여튼 딸아이는 처음으로 이 징긍징글한 자본주의 세상에서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한 것이고, 그것도 하루 12시간이라는 장시간 근무를 견뎌야했고, 그 긴 시간을 거의 서서 걸어다니며 손님을 대하는 노동을 한 것이다. 다리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고 엄청나게 힘든 시간을 겪은 딸아이는 나름대로 할말이 많았는지 알바를 그만둔 날 30분을 넘게 엄마랑 통화를 했다. 그리고 와이프가 딸아이랑 통화한 많은 말중에 전한 유일하게 기억에 남는 것은 아빠의 사랑을 처음으로 뼈저리게 느꼈다는 어쨌다나~~

'먹고사니즘'이 뭔지. 나날이 경쟁을 격화되고, 복지는 개선되지않거나 후퇴하고, 기득권의 탐욕을 갈수록 크지니 이 암담한 현실에서 한국의 부모들은 자식의 '경쟁력'을 키우기 위한 밤낯으로 공부타령이나 하고 있고, 뼈빠지게 벌어 오직 자식 교육에 올인하는 불구적 삶을 당연지사로 받아들이며 묵묵히 견뎌내고 있다. 이런 현실을 전언이나 이론이 아니라 몸소 느껴야했던 딸아이의 다음 선택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참혹한 생존경쟁의 장에 자식을 내 보내는 부모의 마음은 무겁기만 하다. 그렇더라도 아빠의 입장에서는 딸아이가 이번 아르바이트 경험을 세상에 대한 절망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세상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높이고 자신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또 자신의 삶에 대한 스스로의 책임을 절감하는 그런 기회였기를 빈다.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