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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구리는 유해조수다. 유해조수는 농작물 등에 해를 끼치는 동물로 법적으로 지정되어 있어 정해진 기간에 죽여도 좋은, 아니 죽일수록 좋은 동물이다. 그런데 그 유해의 기준을 사람이 정하니 사람에 해로운 동물이 정확한 뜻일 것이다. 산골로 찾아들어와 자연 속에서 살면서 그림을 그리던 화가아저씨는 너구리와 그것도 자신의 참깨 농사를 방해하는 유해조수인 너구리와 맞닥뜨린다. 그런데 웬걸 서로 적대하면 박멸해야 될 너구리와 화가는 인간과 유해조수의 관계가 아니라 친구로 대면한다. 먼저 말을 건넨 건 너구리지만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던 귀를 가진 것은 예술가 아저씨다.


이렇게 소통을 시작한 너구리와 화가아저씨는 이야기를 나누고, 먹을거리를 나누고 마침내 삶을 나눈다. 그 둘의 이야기에 매료되어 몰입해 들어가다 보면 독자인 나도 어느새 너구리의 친구가 되고 화가아저씨의 이웃이 되어 그들과 같이 꿈을 나누게 된다. 너구리와 화가아저씨의 티격태격 입담에 책을 읽는 내내 가슴 따뜻해져 오고 얼굴에 웃음 가득 머금을 수 있지만 [참깨밭 너구리]는 사실 슬픈 이야기이다. 단지 너구리가 죽어서가 아니다. 모든 생명은 죽기 마련이고 죽음자체가 슬프기도 하지만 그 보다는 어떤 죽음인가가 그 슬픔을 결정짓기 때문이다.


너구리의 죽음을 통해 화가아저씨의 마음을 읽어본다. 너구리와 꿈을 나누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너구리는 그냥 유해 조수의 한 마리일 뿐이다. 올무를 놓고 몽둥이를 들고 너구리를 찾아 휩쓸고 다니는 너구리 사냥꾼은 사실 우리사회의 지배자들이다. 그들은 재벌이고 공안이고 검찰이고 언론이고 청와대다, 그들이 쫒는 것은 너구리가 아니라 너구리가 가진 불온한 꿈이다. 우리사회의 수많은 꿈 많은 그래서 불온한 너구리들은 그렇게 비극적인 죽음을 맞고 있다.

 

어쩌면 참깨밭 너구리는 화가 아저씨가 새로운 삶을 시작한 그 산골짜기에서 원래부터 살고 있던 놈이 아닐지도 모른다. 현대문명의 천박함이 싫어, 온갖 부정한 것들이 판치고 부정의가 지배질서를 이루는 세상이 싫어 산속마을을 찾아들어온 화가아저씨가 가슴속에 품고 들어와 산속에 풀어준 자신의 분신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처자식을 건사하는 것은 둘째고 자신이 먹을 것 조차 벌지 못하는 무능력한 너구리는 동시에 화가아저씨의 모습이기도 하다. 주제넘게 인류의 종말이나 지구 생명체의 종말 정도가 아니라 우주 전체의 종말을 걱정하는 너구리의 무모함은 화가아저씨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다. 화가 아저씨는 순수예술 종말론이 횡행하고 시장에 굴복한 상업의 한 품목으로 전략한 그림을 통해 시대에 뒤떨어지게도 아름다움의 궁극에 도달하려고하지만 처자식 먹여 살리는 것을 고사하고 자신의 입에 풀칠조차 하기에 힘든 궁색한 처지다.

 

너구리의 사유방식은 인간 문명과 대척점을 이룬다. 매너리즘에 빠져있는 인간의 사유방식, 문제 제기 방식이나 해결 방식의 근거를 근본적으로 묻는다. 너구리는 화가 아저씨의 소유권에 기반한 사고, ‘상식에 입각한 처신에 일침을 가하고, 삶의 이유가 되는 궁극적인 물음을 잃어버린 화가아저씨를 비소한다. 왜 사는지, 우리는 무엇인지. 우주의 끝은 어디인지... 화가아저씨는 너구리를 통해 비로소 긍극적인 질문들을 되찾는다. 그리고 삶 전체를 던져 진리를 추구하는 너구리의 삶을 통해 진실, 진리, 그리고 궁극적인 아름다움을 구하기 위해 싸우는 자신의 결기를 세운다.

 

참 오랜만에 읽은 동화다. 동화를 규정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단순히 아이들을 위한 책을 다 동화라고 하기는 힘들 것이다. 적어도 내가 아는 동화는 아이들에게 세상의 싸늘한 진실을 분석적 언어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 세상의 꿈을 꾸게 하는 그런 책이다. 동화적 환상이란 말이 그래서 나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책 [참깨밭 너구리]가 어린이만을 위한 책이 아니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화인 것은 싸늘한 현실세계를 투영한 너구리와 화가아저씨가 살던 마을 너머에 있을 그 어떤 세상에 대한 어렴풋한 꿈을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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