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연수 이튿날, 민박집 할머니가 차려주시는 아침을 먹고,  담장넘어 석류꽃이 만발한 민박집을 뒤로하고 버스에 올랐다. 계획대로라면 매동마을을 먼저 방문해 마을위원장으로부터 마을 사업에 대해 듣고 매동마을에서 상황소류지까지 걸을 예정이었지만 아침부터 내리는 비에 일정을 바꾸었다. 먼저 출발지였던 인월로 돌아가 인월에서  비전마을 가는 길중 산길을 피하고 농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걷기를 하는 동안 내내 비가 내렸다. 비옷으로 몸은 감쌌지만 무릎아래는 비에 젖고 무릎위는 땀에 젖어 길을 걷는 상쾌한 기분을 느끼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래도 퇴약볕을 모면하고 빗길을 걷는 것도 나름의 운치는 있었다. 비때문에 사진도 찍을 수 없고, 머리까지 뒤집어 쓴 비옷을 때리는 빗소리에 사위에서 들려오는 자연의 소리를 모두 들을 수 없는 것이 아쉬웠지만 비를 뿌리는 구름이 지리산을 감아도는 풍경을 바라다보며 빗속의 농로를 걷은 기억은 오래도록 나의 뇌리에 남아있을 것이다. 


처음에 망설였던 빗길을 걸으며 빗길을 걷는 재미에 빠져들기 시작하고 마침내 예정된 하루 일과를 무시하고 그냥 계속해서 길만 걸을 수 있다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 무렵 걷기는 끝이 났다. 이번 여행의 목적이 지리산길 벤치마킹인 연수다 보니 실제 길을 걷는 시간은 그리 넉넉할 수가 없었다. 두시간도 채 걷지 못하고 다음 목적지인 매동마을을 향해 버스에 몸을 싣었다.

매동마을은 녹색체험마을로 운영되어 왔지만 마을 사업의 성과가 그리 크지 않았는데 최근에 들어 마을을 지나가는 지리산 둘레길이 만들어지고 나서 마을 방문객과 민박손님, 그리고 각종 체험객이 부쩍 늘어난 대표적인 마을이라고 했다. 매동마을을 방문한 이유는  걷기 길이 마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살펴보고 길과 마을의 건강한 관계에 대한 고민을 진천시키기위해서였다.    


마을사업이 활발한 전국의 이런저런 마을들을 많이 방문해 봤지만 잘되는 마을의 공통점 중 하나는 좋은 마을 지도자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매동마을 역시 다르지 않았다.  이영오 추진위원장은 과장없이 마을 사업의 과정과 현시상을 낱낱히 말씀해 주셨다. 주민간의 이해관계 대립으로 인한 갈등, 체험프로그램 운영의 어려움, 그리고 진정한 마을활성화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들을 과감없이 털어놓으시고, 우리 일행과 격의 없는 질의 응답시간을 가졌다. 사실 나는 마을 지도자를 뵙기만해도 가슴이 뭉클하다. 얼마나 힘든 길을 걸어오셨을까. 그리고 앞으로도 얼마나 어려운 길을 가야만할까하는 생각에 그분들의 선택앞에 숙연해 지기 때문이다.

이영오 매동마을 위원장과의 대화에서 마을 사업이 기반하고 있는 마을의 공동체성이 과연 존재하는가하는 문제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시대에 추구할 수 있는 새로운 공동체성의 성격이나 형태가 무엇인지, 낡은 공동체성이 과거지향적인 향수로 포장되어 마을사업의 토대로 삼기 때문에 현제 마을사업들이 지지부진하고 적지않은 마을에 분란을 일으키게 되는 건 아닌지 하는 정답없는 토의를 계속 나누고 싶었지만 역시 충분한 시간을 가지지 못한 채 이날 3번째 프로그램이 진행된 인월 지리산길 안내센타로 향했다


신현주 인월안내센타장님과 실무자 한분이 지리산길의 구축과 운영 전반에 대한 설명을 해주시고, 그리고 질의 응답을시간을 가졌다. 이분들과의 토의를 통해서도 제주 올레길에서 느꼈던 똑같은 문제의식을 인식할 수 있었다. 대중의 사랑을 받는 '길'을 '상품'이 아니라 가치와 문화로 승화시키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 '길'의 원초적인 푹력성을 순화시켜 어떻게 사물과 생명, 사람과 마을을 잇는 생명의 길로 전환시킬 수 있을지 고민할 수 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알수도 있을 것 같았다. 길을 통해 낙후된 지역사회에 활력을 불어넣고 지역공동체를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활성화시키는 일은 예상치 못한 많은 문제에 봉착할 수도 있고, 애초에 구현하고자 했던 가치를 오히러 갉아먹을 수 있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고 '지리산길'을 만들어나가는 이분들과의 만남을 마지막으로1박2일의 짧은 지리산 연수는 끝이 났다. 여전히 비가 내리는 88고속도로를 타고 대구를 지나 봉화로 돌아왔지만 아직 '외씨버선길'은 보이지 않고 마을과 길이 만나는 그 어디쯤에서 시작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외씨버선길은 나에겐 아직 먼 길이다. 
반응형
반응형

주초에 감자밭에서 풀을 메다가 전화를 받았다. BY2C(봉화, 영양, 영양, 영월, 청송)의 지자체간 협력사업으로 추진중인 '외씨버선길' 추진 사업단에서 지난 봄 제주 올레길에 이어 지리산 둘레길 벤치마킹을 떠난단다. 처진 밭일을 어떻게든 마무리해야한다는 당위와 '지리산'이 발하는 강력한 유혹사이에서 잠시 갈등했다. 하지만 나의 자제력은 오래가지 않았고 동행을 약속하고 배낭을 챙기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사업단의 일원이 아니라 봉화군의 주민으로서 봉화군청 공무원4명과 동행하게 된 것이다. 그간 '외씨버선길'사업의 추진 과정을 간접적으로 넘겨다 보면서 여러가지 측면에서 부정적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지만, 나에게는 '지리산'을  공짜(!)로 갈 수 있다는 한가지 이유만으로도 동행의 이유가 충분했다.


7월 15일 오전 9시 30분 안동 상공회의소 마당에 스무명 남짓의 일행이 모였다. 이내 버스는 달리기 시작했고 3시간만인 오후 1시경 88고속도로 지리산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지리산 자락이 지나가는  남원시 인월면에 도착했다. 먼저 도착해 있던  '외씨버선길' 사업을 주관하는 경북북부연구원관계자와 이번 연수를 주관하는 한국생산성본부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곧장 식당으로 향했다. 남원의 특산물인 붕어를 주재료로 만들 '어탕'으로 거뜬한 점심을 들고 식당에서 멀지 않은 '지리산길 안내센타'를 들러 이번 연수의 첫프로그램인 사단법인 숲길의 이상윤 상임이사의 특강을 들었다.  


안내센타는 아직 충분한 안내 시스템이 구축되지 않아 보였고, 안내 책자나 여타 지리산길 안내 건텐츠가 구비되어 있진 않았지만 나름대로 운치를 가진 공간이었다. 산림청의 국유림관리사무소로 사용되던 공간을 사단법인 숲길에서 위탁받아 관리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는데, 방문객의 발길이 끊이질 않고 늘 붐비는데 비해 근무직원도 적고 편의 시설도 부족했다. 하지만 걷는 길을 찾아 오신 분들은 이미 불편함을 감수할 심리적 준비가 되어있는 분들이라고 본다면  시설의 부족은 별반 문제될것이 없고 단지 안내 시스템의 개선이나 컨텐츠의 확보는 필요해 보였다.


숲질 이상윤 이사의 특강은 인상적이었다. 강사의 외모가 주는 인상부터  '지리산길'이 담고 있는 가치를 체현하고 있는듯, 소박하고 관행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차림의 강사는 강의 스타일 역시 범상하지 않았다. 5분강의 후 질문과 답변으로 채우기로 했던 특강은 강사의 강의가 표명했던 것보다 훨씬 길어지면서 충분한 질의 응답시간을 가지지 못했지만 나름대로 '지리산둘레길'의 가치가 어떻게 사업과정에서 구체화되고, 현실화되었는지 이해하기에 충분했다. 지향하는 가치가 있고, 그 가치를 구현하고자하는 사람이 있은 연후에 물리적 공간에서 지리산길이 태어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실제 외씨버선길 사업을 추진할 주체에게 들려주는 것 만으로도 중요한 의미가 있는 강연이었다.  
      

강연이 끝나고 인월안내센타를 나선 일행은 다리를 건너 안내센타앞 하천을 따라 (사)숲길에서 나오신 두분의 '길동무'와 같이 '지리산둘레길'순례를 시작했다.  큰 산아래 큰물이 지고, 큰 하천이 생겨난다고 지리산 아래 오랜 세월 물살에 씻긴 바위가 아름답게 강바닥을 이루고 있는 인월천은 넉넉한 품모를 가지고 있었다. 큰물이 진 흔적을  담고 있고 언제라도 다시 큰물이 지나가도 좋을 넉넉한 인월천을 따라 지리산 둘레길은 '중군리'로, 황매암과 수성재로, 그리고 배너미재를 넘어 첫날의 기착지인 장항마을로 이어졌다.     






길을 걸으며 '길'이 무엇인지, 길을 왜 걷는지 끊임없이 곱씹어 생각했다. 길을 걷는 것은 욕망을 가라앉혀 마음을 쉬게하고 다리를 놀려 몸을 다스리는 수양이자 구도의 과정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날의 걸음은 '새길을 만들기 위한 벤치마킹'이라는 목적이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탓인지 끝없이 길에 대해 고민으로 채워졌다. '길은 삶의 흔적'이고, 삶의 흔적은 원초적으로 폭력적이기에 어쩌면 길은 인간의 폭력성의 흔적인지도 모른다는 강사의 문제제기가 귓전에 맴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걷기길'을 만들고, 또 걷는가? '현대 과학기술에 의한 극대화된 폭력(도로)을 인간의 원시적 건강성에 기댄 작은  폭력(걷기길)으로 치유한다'는 것일까?    


내가 생각하는 걷기길의 가치는 마을과 마을을 잇는 길의 복원을 통해 무너져가는 농촌마을공동체를 살리는 데에 있다. 마을과 마을의 소통, 농촌과 도시와의 교류, 주민과 주민간의, 주민과 도시민간의 소통이 가져올 활력이 기대되는 그런 길이 아니라면 일반적인 등산로나 도시주변의 산책길, 관광지의 일반적인 관광코스와 다른 바가 무엇이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그리 단순한거 같지 않다. 과연 지리산 둘레길이 지나는 마을이 둘레길을 찾는 발길이 늘어남으로써 활력을 찾고 공동체성이 강화되었는가, 그리고 앞으로 계속 그럴 가능성이 있을까하는 물음에 긍정적 답변을  바로 내어놓기에는 망설여지는 부분이 있다. 마을방문객이 늘고 민박수요가 늘어나면서 마을내 긴장과 갈등이 늘고 마을의 풍광마저 변해버릴 위험에 노출되는 예들을 무수히 보아왔기에  드는 생각이다. 그렇다고 길을 통한 이익없이 마을을 길가에 내어놓는다는 것은 가능하지도 정당하지도 않은 일 아닌가.  그렇다고 지금까지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개발이익'에 대한 기대를 전면에 내세워 '걷기 길'을 만들고 관광상품화에 성공한다고 그 길이 지역주민의 삶에, 마을공동체에 긍정적인 영향을 가져올 것인가 확신할 수 없다. 
 

생각은 또 다른 생각으로 이어지고 또 길은 길대로 이어져 우리의 걸음은 계속되었다.  잠마철에 걷는 산길은 만만치가 않았다. 무더운 날씨에 숲속가득한 습기속을 걷자마자 옷은 땀으로 흠뻑 젖어들었다.  일행중 두어명이 더위에 지쳐 빈혈을 일으켜 잠시 긴장하가도 하고 걸음이 지체되기도 했다. 하지만 넉넉한 지리산의 품속을 거닐며 한껏 산기운을 들이마시며 두눈 가득 산하로 채우고 있는 시간은 행복했다.  


이날의 걸음은 짐을 풀고 휴식과 잠을 청할 '장항마을'에서 끝이 났다. 마을 이장님의 배정에 따라 일행은 각자의 민박집으로 흩어지고 마을은 이내 산그늘속으로 둘어갔다. 어둠이 마을을 덮고 멀리 개짖는 소리를 느끼며 빠져드는 잠은 행복했다. 걷기가 주는 육체적 피로감조차 길이주는 축복 임을 절감하며 나의 지리산길과의 첫 날은 끝이 났다.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