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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성벽력에 창문이 흔들리고, 장대비가 창을 때리는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는데 새벽에 눈을 뜨니 언제 그랬냐는듯 하늘은 시치미를 떼고 파란 얼굴로 우리를 맞이했다. 창 넘어 멀리 마차푸차레와 안나푸르나 남봉이 황금빛 아침 햇살을 받으며 신비한 자태를 드러냈다. 안나푸르나의 중심으로 떠나는 아침, 밤새 우리를 불안하게 했던 비가 씻긴듯이 지나가고 이렇게 청명한 하늘과 말숙한 산의 자태를 대하니 절로 힘이 났다. 


하지만 상쾌한 아침은 호탤과의 마찰로 끝이 났다. 호텔 터치네팔에서 아침부터 온수 문제로 한바탕했다. 네팔에 들어온지 보름이 되었지만 아직까지 한번도 롯지나 레스토랑에서 클레임을 제기한 적이 없었다. 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왔기 때문에 어지간한 것은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네팔리의 친절에 마음 편안한 여정이었기 때문이기도했다. 그런데 아내는 이날만은 그냥 넘어가기가 힘들었는지 바로 호텔 카운트로 따지러 내려갔다. 전날 저녁 스텝이 룸차지 1000루피에 24시간 온수 샤워가 가능하다고 했던 것은 순전히 거짓말이었다. 다시 안나푸르나로 떠나기에 앞서 머리라도 감고 싶었던 아내는 결국 프론트에 내려가 항의를 하게 된 것이었다. 아내의 항의를 무시하다 재차 항의를 한 뒤에야, 스탭들이 가스통을 짊어지고 오르락 내리락 거린 끝에 다른 호실에 온수가 나오도록 설치했으니 샤워를 하라고 했다. 샤워는 포기하고 그냥 머리만 감고 식사시간을 기다렸다.


그런데 다시 아침 식사도 문제가 되었다. 전날 8시에 예약해 둔 음식을 시간이 다된 뒤에야 단체 손님이 많아서 조리가 불가능하다고 알려왔다. 짧은 영어에 따질 엄두도 나지 않고, 이렇게 좋은 아침에 더이상 투닥거리는 것도 싫어 그냥 간단한 음식으로 되는데로 달라고 했더니, 기름에 튀긴 빵과 커리 한종지를 내 놓았다. 주는 데로 먹고 룸에 올라와 짐을 싸고 카운트로 내려가 계산을 하니 마당에는 호텔에서 불러놓은 택시가 도착해 있었다.


택시비를 물으니 나야풀 가는 로컬버스 터미널까지 200루피라고 했다. 그러면서 택시기사는 아예 1시간 30분이 걸리는 나야풀까지 1,500루피에 바로 가자고 제안했다. 로컬버스는 일단 기다려야하고, 시간도 30분에서 1시간이 더 걸리고, 위험하고, 지저분하고, 좁아서 불편하단다. 다 맞는 말이었다. 파샹까지 나서서 그냥 택시로 가자고 종용했다. 터미날에서 배낭을 들고 내리고 ,버스를 기다렸다가 다시 버스 지붕에 배낭을 싣고 타고 내리고 하는 그 모든 것이 귀찮은 눈치였다. 3일간의 강행군에 지친 파샹을 위해 500루피 정도 돈을 더 쓰고 택시로 나야풀까지 가기로 마음먹었다. 단 조건을 달았다. "만약 당신이 천천히 안전하게 운전할 것을 약속한다면 이 택시로 나야풀까지 가고 그렇지 않다면 내리겠다." 당연히 기사분은 "OK!"를 외쳤고 네팔 온 뒤 처음으로 베스트 드라이버를 만났다.



위험한 추월이나 급발진, 급제동 없이 천천히 모는 택시를 타고 느긋하게 나야풀로 향했다. 멀리 안나푸르나 흰봉우리가 드러나는 위치에서는 "Take Photo!"를 외치며 택시를 길가에 세워주기까지 했다. 정말 처음으로 긴장감없이 차를 타고 포카라 에서 나야풀까지 산자락에 터를 잡고 살아가는 네팔리의 삶을 느껴 볼 수 있었다. 포카라 시내를 벗어나면서 S자 고갯길을 끝없이 오르고 그리고 끝없이 내려오니 나야풀이었다. 길은 분명히 'Highway"였는데 바닥은 페이고 일부는 아예 포장의 흔적조차 없는 구간이 허다했다. 아무데나 아무런 표지도 없이 공사를 벌여놓고 길을 막고 있는 곳도 몇군데 있었다. 뭐 그래도 네팔리들은 아무도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지 않았다, 여기는 네팔이니깐!!


나야풀에 도착하자마자 블랙티를 한잔씩 마시고 걷기 시작했다. 나야풀의 체크 포스크에 등록을 하고, 곧이어 침룽으로 향하면서 한번 더 체크포스트에서 체크를 한뒤 사울리바자르로 향했다. 안나푸르나로 들어가는 입구인 나야풀은 한국의 여느 국립공원 입구처럼 상가들이 즐비하고 사람의 발길이 붐볐다. 하지만 안나푸르나를 향해 10분 20분 올라갈수록 상점도 민가도 드물어지고, 침룽을 지나고 사우디바자르가 가까워지면서는 트레커들의 발길도 줄어들었다. 상행 트레커는 만나기가 어려웠고 간혹 하행 트레커를 싣은 택시가 우리를 스쳐 내려가기도 했지만 우리가 만만 하행 트레커 거의 대부분은 한국인이었다. 파샹이야기로는 안나푸르나 겨울은 트레커의 발길이 줄어 비수기라고 하지만 오히러 한국인 트레커가 집중적으로 몰려 "Korean Season"이라 부른다고 했다.



사울리바자르에서 점심으로 달밧을 먹고 한가로이 햇살을 받으며 한참을 쉬다가 다시 걷기를 시작했다. 길따라 조각밭에는 유채꽃이 이쁘고 나락을 베어낸 빈논 한켠에 자라고 있는 감자며 양배추며 마을 양파의 파릇한 잎이 싱그러웠다. 한국의 늦은 가을이나 이른 봄처럼 공기는 차지만 햇빛을 따사로운 길을 걸었다. 산길이 아니라 들길을 걷는 편안함이 좋았다. 안나푸르나에서 흘러내리는 모디강(Modi Khola) 을 거슬러 좀더 올라가니 산등성이를 따라 간드룩으로 가는 길과 모디강을 따라 시와이(Siwai)쪽으로 갈라지는 갈림길이 나왔는데 파샹을 지름길을 안다며 오른쪽 갈림길인 시와이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길이 복잡하지 않아 어떻게든 간드룩 가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보였는데, 어느 순간 파샹은 헤메기 시작했다. 만나는 네팔리마다 몇번을 길을 물은 파샹은 자신감이 없는 표정으로 간드룩을 포기하고 임레, 쿠미, 지누단다를 거쳐 촘롬으로 바로 갈 것을 제안했다. 간드룩과는 점점 거리가 벌어져 간드룩을 갈려면 가파른 돌계단길을 두 시간이상 계속 걸어야만 된다는 것이었다.


간드룩은 이번 여행을 떠나오기 전에 사전 조사를 통해 알게된 마을이었는데 가파른 계단 논 끝에 형성된 척박한 삶의 조건을 가진 마을이지만 아름답고 풍성한 그런 꿈의 마을같은 느낌으로 느껴져 꼭 가보고 싶었던 마을이었다. 파샹은 가능하면 덜 걷고 편안한 길을 선택하려 했지만 이 지점에서 처음으로 내가 고집을 피웠다. '나는 농사꾼이고 역시 산골에 산다. 그래서 네팔여행중에 간드룩이라는 마을에 하루 지내면서 내가 사는 마을과 꼭 비교해 보고 싶었다. 나에게 간드룩은 이상적인 꿈의 마을로 느껴진다. 그래서 좀 힘들더라도 간드룩을 가고싶다.' 고.


시와이로 가는 길은 'Old Road'라고 불렀는데, 새길이 나면서 지금은 트레커의 발길이 많이 준 논두렁길이었다. 목이 말랐지만 티하우스를 쉬 만날 수 없을 정도로 쇠락한 한가롭고 호젓한 길이었다. 특히나 모디강 계곡을 건너 나란히 형성된 란드룩을 마주보면서 걸을 수 있어 너무 좋았다. 파샹이야기로는 나야풀이 안나푸르나 여정의 출발지가 되기 전까지는 페디를 시작으로 란드룩을 거쳐 안나푸르나 산군속으로 트레커들이 들어갔다고 했다. 그런데 파샹은 내가 내려오는 길에 란드룩을 가자고 하니깐 란드룩은 숙소도 별로고 음식도 좋지 않다고 하면서 난색을 표했고, 또 오후에 유일하게 만난 한국인 트레커도 자신은 란드룩을 통해 올라갔는데 지금 내려오는 이 길이 더 좋다며 란드룩을 권하질 않았다. 그래도 나는 상행길에는 간드룩을 가고, 하행길은 꼭 란드룩으로 가야지하고 마음 먹었다.


마실 물이 떨어져 목이 마를 때 즈음, 시아와를 지나며 티하우스를 만났다. 애타게 찾던 티하우스를 만나 반가웠지만 우리를 더 애타게 기다렸을 한 소년을 만났다. 어디에 찔렸는지 부딪쳤는지 알수 없지만 한쪽 발이 퉁퉁 부은 소년이 티하우스 앞에서 우리와 마주치자 애처로운 얼굴로 다가와 자신의 발을 가리키며 말을 걸었다. "Have you medicine?" 말을 하지 않아도 상황이 이해되는 그런 국면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가진 것은 몇개의 대일벤드와 후시딘 그리고 아스피린이 거의 전부였다. 발은 곪는지 퉁퉁부어 있었지만 의학적 지식도 없고 약품도 없으니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그냥 후시딘을 발라주고 대일밴드 여분과 통증을 줄이는데 도움이 될지 몰라 아스피린을 주었지만 별로 도움이 될것 같지 않았다.


블랙티를 마시고 미네랄워터를 한병사서 다시 길을 나섰다. 이내 임레라는 곳을 지나게 되고 그곳에서부터 왼쪽 가파른 다락논 언덕을 치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논두렁사이로 게속 이어지는 가파른 길은 모두 돌담과 돌바닥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밤새 내리던 열대성 소나기가 쓸고 지나간 돌길은 말끔히 씻겨져 있었고 그 길을 먼지라고는 한톨도 없는 투명한 공기를 들이쉬며 걷다보니 가파른 길이 주는 고통도 잊을 정도로 좋았다. 돌담에 앉아 잠시 쉬다보며 옷길을 파고드는 찬바람에 몸을 움츠렸지만 걷고 있는 동안에는 땀이 이마에 맺힐 만치 따뜻한 하루가 계속되었다. 몇일뒤면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의 설원에서 시린 손을 비비며 따뜻한 날들을 그리워할까 믿어지지가 않았다.



파샹은 오늘 자신이 실수하는 바람에 간드룩 가는 길을 잘못들어 여정이 힘들고 늘어졌다면 미안해 했다. 그러면서 한 농가에 들어가 사탕수수대를 샀는지 3자루 들고 와 하나씩 주면서 목이 마를 때 정말 좋다며 어떻게 껍질을 까서 씹어서 단물을 빨아 먹을 수 있는지를 보여 주었다.  Old Road로 선택하는 바람에 두어시간을 더 걷고, 가파른 오르막에 숨막혔지만 나는 트레커가 거의 없는 아름다운 돌담길, 언덕길을 한도 끝도 없이 걸을 수 있었서 좋아다며 파샹을 격려했다. 올라가도 올라가도 줄어들지 않던 길이 멀리 높은 산에 해거름이 드리울 때쯤 거의 간드룩에 도달한 것 같았다.



마지막 언덕길을 오르며 길가에 홀로 남겨진 병들고 야윈 조랑말 한마리와 마주쳤다. 파샹 이야기로는 그 조랑말은 평생을 힘든 짐을 나르다 이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홀로 남아 있는 것이라고 했다. 늙고 병든 조랑말이 더이상 짐을 나를 수 없을 만치 쇠약해지면 주인은 조랑말에 달려있던 모든 인공적인 장신구나 안장, 연장 등을 풀어주고 홀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한적한 풀밭에 풀어 놓는다고 했다. 그리고 몇일 뒤 조랑말이 숨을 거두면 불교식으로 장례를 치뤄주고 흰천으로 몸을 감아 매장을 해준다는 것이었다. 평생 인간을 도와 고생한 조랑말을 위해 장례나마 예를 갖쳐 정성껏 치뤄주는 네팔리들의 숭고한 삶의 자세가 너무나 아름답게 느껴졌다.


쓸슬이 죽음을 맞는 조랑말을 뒤로하고 언덕을 오르자 이내 간드룩 입구가 나타났다. 도착한 간드룩은 내가 꿈꾸던 그런 곳은 아니었지만 나름의 삶을 꿋꿋하게 영위하는 아름다움 사람들이 사는 그런 마을같았다. Mudi Hotel에 여정을 풀고, 하산중인 폴란드인 트레커와 짧은 영어로 대화를 나누고, 한국인 청년 2명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풀란드인 트레커는 한국을 잘 알고 있었고 한국인 친구도 있다고 하면서 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에서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까지 보통은 두어시간이면 여유있게 주파가 가능하지만 지금은 폭설로 어림이 없다고 했다. 자신은 장장 4시간 넘어 걸려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고 했다. 거기다가 어제 비가 고스란히 안나푸르나에는 눈으로 내렸을 걸 생각하니 혹시 라운드에 이어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마저 포기해야되는 상황이 될까 걱정스러웠다.


달빛 받은 안나푸르나, 마차푸차레, 히운출리가 창으로 가득 비치는 방에서 길고 추운 간드룩의 밤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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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째 비걱정을 하면서 잠이 들었다.
건기에 이게 무슨 일이람! 물소리에 흠뻑 빠져 깊은 잠이 들었다가 창문을 스미는 빛을 느끼며 놀라 깨었다. 눈을 뜨자마자 오늘 날씨가 어떤지 제일 먼저 궁금했다. 창문에 비치는 밝은 기운과는 달리 여전히 귓가에는 물소리가 맴돌았다. 이상하다 싶어 창을 열어  젖혔을 때 왠걸, 검은산과 대비되며 더욱 파랗게 보이는 하늘이 눈안에 가득찼다. 나도 모르게 '우와' 함성을 질렀다. 지난 밤 폭포와 강물과 비가 어우려져 내던  물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는데, 밤새 빗소리가 슬그머니 빠져버린지도 모르고 아침을 맞은 것이다.
 


마당을 내려서니 롯지 주변에는 온통 조랑말이다. 롯지는 트렉커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짐을 지고 올라가는 사람들과 조랑말 무리에게도 쉬어가고, 자고 가는 곳이었던 것이다. 다이닝 룸에서 우리 부부와 독일인 트렉커 3명, 그리고 2마리의 검은 개와 하산중인 백인 트렉커 한명이 같이 식사를 했다. 그동안 마부는 조랑말들에게 옥수수가 든 자루를 하나씩 입에다 달아주었다. 입에 옥수수가 든 자루를 달고 각자 머리를 처박고 자루안에서 우물우물 아침을 먹는 모습이 너무 재미있었다. 아마 모든 조랑말이 고루 먹을 수 있도록 하는 조치 같았다.


부메랑 롯지의 사오지가 길 떠나는 우리에게 맑게 개인 하늘을 가리키며 'Clear sky! Good luck!'을 외치며 활짝 웃어주셨다. 기분 좋은 출발을 하고, 파샹이 'Short cut'이라며 제안하는 길을 벗어난 가파른 산등성을 한참을 올랐다. 그때서야 저 멀리 롯지에서 막 출발해 우리를 뒤따르는 독일인 트레커들의 모습이 보였다. 포터나 가이드 없이 2명의 남자와 한명의 여자가 모두 100리터짜리로 보이는 배낭을 지고 있었다. 큰 키에 건장한 체격 때문인지, 100리터 짜리 배낭을 지고 걷는 그들의 모습이 우리가 조그만 백펙하나 짊어지고 걷는 모습과 별반 달라보이지 않았다. 아내와 잠시 외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보통 네팔리의 두배는 되어 보이는 저들의 저 건장한 체격만으로도 최초의 조우에서 저들은 얼마나 우월해 보였고, 또 네팔리는 얼마나 주눅이 들었을까. 외모가 주는 선입견은 어떻게 형성이 되는건지 외모가 강박이 된 한국에 사는 사람으로서 한참을 이야기를 나누며 길을 걸었다.


차가 들어올 수있는 마지막 마을인 참체에 도착했다. 얼마전까지만해도 상계까지 차가 들어왔는데 최근에 사륜짚차가 참체까지 들어올 수 있게 된었단다. 지금도 로컬버스는 불불레까지만 들어오는데, 길 공사가 진척되면서 차가 올라갈 수 있는 한계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오래전 안나푸르나 라운드 출발점은 베시사하르였다고 한다. 해가 가고 길이 만들어지면서 라운드 출발점이 점점 북쭉 마을로 옮겨져왔다. 아직도 과정을 중시하는 서양 트레커들중 일부는 고집스럽게 베시사하르부터 라운드를 시작하기도 하지만, 결과를 중시하는 풍조는 라운드 출발점을 점점 북쪽으로 옮겨버렸다. 라운드 코스에서 실제적으로 배제된 마을들은 손님이 줄어들면서 차차 사그라들고 있었다. 베시사하르는 그나마 람중주의 수도라서 괜잖아 보였지만 불불레를 기점으로 롯지의 외관이 확연히 달라보였고, 벌써 불불레마저 기울어가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었다. 더 많은 트레커를 끌어들이기 위한 길때문에 그렇게 사라져가여하는 마을들이 생긴다는 사실이 가슴아팠다.
 

 
참체를 지나자 다시 흰눈 쌓인 산넘어에 짙은 구름이 이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비가 대수냐, 그냥 하루 더 머물면 되지!'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도 이 비가 산정에서는 눈이고, 눈이 길을 막으며 일정은 중단되고, 일정이 중단되면 다시 올라온 길을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면서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참체에서 만난 트레커들은 피상에서 눈에 길이 막혀 쏘롱라 패스를 포기하고 하산중이라고 했다. 피상에는 눈이 30~40cm나 쌓였고, 쏘롱라는 짐작하기 조차 어려울만치 많은 눈이 쌓였다고했다. 지난 이틀 내린 비가 모조리 산정에서는 눈으로 쌓인 것이다. 올라 가면서 내려오는 트렉커들을 한명 두명 만날 때 마다 걱정은 점점 현실성을 얻었다. 아직 눈을 밟지도 않았는데 벌써 멀리 눈덮인 산정을 올려다보면서 구체적으로 하산을 고려해야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어떻게 온 안나푸르나 라운드인데 피상에서 돌아가다니... 파샹말로는 짐작할 수가 없단다. 나는 정답을 빨리 얻기를 원했고 산은 쉬 그 답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May be... May be...' 파생을 말끝을 흐리며 쏘롱라 패스가 불가능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가능하다고도 할수 없단다. 일단 마낭 까지 3일 정도 더 올라가야하니깐 그때까지 바람이 눈을 쓸어가거나, 햇살이 좋아 눈이 녹거나, 그것도 아니면 쏘롱라를 넘기 위해 대기중인 트레커들이 모여 무리지어 함께 쏘롱라 패스를 시도해 볼 수가 있을 거하고 했다. 모든 것은 바람과 햇빛 그리고 운수에 달린 셈이다.


자가트 입구를 들어서는 곳에 학교가 보였다. 어제 묵은 롯지의 사우지가 학교 교사라고 했었는데, 아침에 롯지를 나와 한시간쯤 지나 티하우스에서 쉬고 있다가 그를 다시 만났다. 학교로 출근 중이란다. 그는 담배를 원했고 나는 담배를 건네며 잠시 한두마디를 나누다 시간이 없다며 먼저 출발을 했다. 바로 그 사우지가 아이들을 가르키다가 나를 알아보고 반가운 인사를 하며 손을 흔들었다. "나마스테!!" 학교 건물은 수업중인 다른 학생들이 들어있는지 아니면 그냥 실외의 햇살이 좋아 실외수업을 하는 건지 알수 없었지만 10명의 아이들 세무리가 따로 수업을 받고있었다. 그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한참을 바라다 보았다. 저들의 가난을 뛰어 넘는 아름다움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나만의 감상에 불과한 것일까? 객관적인 행복을 평가하는 기준이 있고 그 기준에 비추어 저들의 삶이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걸까? 지금은 고난을 벗어난 자가 이제는 가진 자의 눈으로 가지는 복고적 취향일뿐일까? 이런저런 생각이 일었지만 나는 염치없이 얼굴가득 미소를, 가슴에 가득 온기를 얻고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자가트를 지나면서 조롱말 행렬이 이어진다. 조롱망은 이곳 안나푸르나의 유일한 교통수단이다. 피상을 지나 해발 3280m의 홈데에 비행장이 있어 소형비행기가 트렉커들을 싣어 나르기도 하지만 이곳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비행기를 이용한 운송은 꿈도 꾸지 못한다. 쌀과 커피, 나아가 집을 짓는데 쓰일 양철스레이트며 목재까지도 사람이 직접나르거나 조롱말을 이용한다. 대여섯마리 혹은 이삼십마리의 조롱말이 무리를 지어 등에 프로판 까스통이나 석유통, 음료수나 곡식 같은 무거운 짐을 지고 가파른 산길을 오른다. 아내는 길가로 비켜서며 저 조랑말들은 전생에 무슨 업이 많아 여기서 조랑말로 태어나 저 고생을 하냐며 안스러워한다. 그렇다고 조랑말을 이끌고 길을 가는 마부의 삶이 그 조랑말보다 뭐 특별히 나을 것도 없어 보였다.


가파른 돌길을 조리를 신고 오르락 내리락거리는 마부의 잰 발걸음이 위태롭고 안스럽다. 저 마부는 또 무슨 팔라자 저 고생일까? 조롱말은 태어나면서 자신을 소유한 주인의 삶에 곧바로 종속되었겠지. 선택의 여지 없이 짐꾼 조롱말로 거친 안나푸르나를 오르락내리락 거릴 수 밖에 없었겠지. 그렇다고 조롱말 무리를 부리는 마부의 삶은 또 어떤가. 초라한 몸골, 조롱말보다 더 거칠어 보이는 발, 일본 조리같은 값싼 슬리퍼에 의지해 가파르고 날카로운 돌길을 오르내리며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잇는 그의 삶이 조롱말의 삶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거의 하루종일 조랑말 무리와 헤어지고 다시 만났다. 한번 헤어진 무리와 다시 만나기도 했겠지만 안나푸르나를 오르는 사람들보다 조랑말 수가 훨씬 많게 느껴진다. 어쩌면 그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저 조랑말이 우리 부부가 먹을 쌀과 야채를, 그리고 안나푸르나 골짜기에 터잡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식량과 생필품들을 다 나르고 있으니 말이다. 조랑말을 보고 마부를 보고 그리고 어느새 나의 눈길은 퍄샹을 향했다. 걸음을 재촉해 파샹과 나란히 걸었다. "파샹, 나는 전통 네팔리 노래를 하나 알고 있다." 파샹에게 말을 건넸다. 'Really?' 아마 파샹은 내가 어떤 노래를 알고 잇는지 이미 짐작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Resam Phiriri!"


"레쌈 삐리리"는 네팔을 한번이라도 다녀온 사람이나 최소한의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다 아는 노래다. 일명 '트레킹 송'이라고도 알려져 있는데 트렝킹 중에 포터나 네팔리 주민들이 부르는 모습도 볼 수 있고, 카투만두나 포카라의 관광지에 가면 그냥 거리에서도 들을 수 있을 만치 대중적인 노래다. 한국의 아리랑 만치 네팔리와 삶이 녹아들어있는 레쌈피리리는 네팔리의 삶과 사랑을 담고 있지만 우리의 아리랑이 그렇듯 수많은 버젼이 있다. 그중에서 트렉커들에겐 "I am a donkey. You are a monkey."라는 가사가 가장 절실하게 마음에 다가올 것 같다. 내가 이 구절을 읊조리자 파샹을 박장대소한다. 그렇게 같이 웃고 있었지만 나의 마음 한 구석이 조금은 아려왔다. 나의 딸보다 어린 스무살 짜리 청년에게 짐을 들리고 산을 걷다니!





사실 누군가에게 나 자신의 짐을 맡긴다는 것은 참 곤혹스런 일이다. 어린 시절 '김일의 레스링' 만치나 나를 사로잡았던 '타잔'을 보면서, 흑인에게 짐을 맡기고 낭만적인 정글탐험을 하는 백인을 증오했던 기억이 났다. 그런데 지금 내가 그 백인의 역할을 하고 있는것이 아닐까? 분명히 괜한 자의식에 불과할 것이다. 포터를 고용하는 일만치 네팔을 위한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네팔포터인권협회'인지 하는 단체에서 20kg이하로 포터의 짐을 싸라고 권장하는 데로 배낭 3개를 각각 18kg, 15kg, 5kg으로 나누어 쌌다. 파샹은 18kg배낭에 자신의 짐 2~3kg을 합쳐 20kg 전후의 짐을 졌고, 나 역시 15kg짜리 배낭에 한번씩 지친 아내의 배낭을 덤을 들다보니 사실 파샹과 나의 짐 무게 차이는 별로 없었다. 그래서 퍄샹은 아내의 배낭을 자기가 지겠다고 몇번이나 제안했고, 연신 'You are strong!'을 외치며 나를 치켜세우기도 했다.


파샹은 고향이 에베레스트가 있는 솔로쿰부의 해발 3500m에 있는 마을이란다. 루크라비행장까지는 걸어서 1주일정도 걸리고, 차가 들어올 수 있는 길까지는 한 이틀 정도 걸리는 오지 마을이라고 했다.
아직 나이는 어리지만 3~4년 전부터 포터를 하고 있고 꿈은 전문 산악인이란다. 어차피 학교를 나와도 취업할 때가 없으니 전공은 의미가 없단다. 벌써 에베레스트의 7500m, 8250m정상까지는 여러번 등정을 했고, 안나푸르나 라운드도 5번째라고 했다. 그렇게 벌어 파샹은 전문산악인의 꿈을 키우면서 여동생을 카투만두로 불러 학교를 시키고 있었다. 건실하고 믿음직그럽고, 눈치 빠르고 재취있는 파샹과 동행하게 된 것은 이번 여정에서 만난 가장 큰 행운의 하나였다.


참체에서 점심을 먹고, 마르샹디강과 나란히 길을 걸었다. 강 건너편은 깍아지른 절벽이지만 그 절벽을 깨고 길을 내고 있었다. 파샹이야기로는 벌써 3~4년째 공사중이란다. 말이 길 공사지 중장비를 볼 수도 없다. 그냥 다이나마이트와 사람의 힘을 주로 이용해 길 공사를 하다보니 진척이 없다고 했다. 머지않아 안나푸르나 라운드 코스가 차도로 대체되고 지금 걷는 이 길은 풀숲에 묻혀 사라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이길을 따라 이루어진 마을들 역시 수풀에 묻혀가겠지.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길 공사를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이 또한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세태의 흐름, 시대의 변화를 무시하고 그들의 '무지'와 '탐욕'을 비난하는 사람들의 뜻이 이해는 되지만 무조건 동의만을 할 수 없었다. 저 길을 통해 아이들은 도시로 떠나가겠지만, 그래도 저 길은 그들의 꿈이 이어지는 길이고, 그들을 위한 의료와 교육이 들어올 길이기도 하지 않은가? 그들의 불편함, 고통은 공유하지 않으면서 그들이 터잡고 살아가는 자연을 보전해라고만 하는 것은 이기적인 요구가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오후 2시반이되자 목적지인 딸에 가까워졌다. 오늘은 조금 일찍 걸음을 멈추고 양말도 빨고, 쉬기로 했다. 딸로 넘어가는 가파른 언덕을 마주하니 벌써 다 온 느끼이었지만 그 언덕을 오르는 일이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언덕에 접어들자 머릴 군이들이 나타났고 뭐라고 고함을 지르며 손짓을 해왔다. 한참 만에 파샹은 곧 건너 길공사장에서 다이나마이트 폭파가 있으니 빨리 몸을 피해라고 한다고 했다. 하지만 좁은 계곡에서 그것도 더 높은 위치에서 다이나마이트를 터뜨리면 도대체 어디로 몸을 감추라는 말인가. 오르막 길에 힘들어하는 아내를 재촉하여 땀을 뻘뻘 흘린뒤 군인들이 서있는 언덕위에 도착했다. 그 위치라면 폭파예정지보다 지대도 높고, 옆에 또다른 언덕이 막아서있기도 해서 안전해 보였다. 속속 도착하는 트레커와 네팔리, 그리고 군인들이 옹기종기 모여 폭파를 기다렸다. 산중에서 뜻하지 않은 구경거리를 만난 셈이었다. 군인들에게 물어보니 5분뒤 폭파한다고 했다. 땀을 뻘뻘 흘리고 올라왔는데 담배 한가치를 피우는 사이 땀이 가쉬고 한기가 들었다. 배낭을 열어 외투를 끄집어 내다가 보니 커피믹서가 한껏 부풀어 있었다. 고도 2,000m도 되기 전에 기압차로 인해 저렇게 커피믹서가 부풀어 오르니 고도 4천 5천에서는 커피믹서가 터지고 사람의 몸도 한껏 부풀어 오른다는 말이 실감이 났다. 트레킹 안내 간판을 읽고 있는데 갑자기 폭파는 일어났고 돌가루 먼지가 계곡을 덮고 멀리 딸쪽으로 날려가는 것을 보면서 가던 길을 마저 가기로 했다.


 5분도 걷지 않아 멀리 딸이 보이기 시작했다. '딸'은 좁은 계곡이 갑자기 넓어지면서 강물이 느려지고 모래밭이 넓게 형성된 지형에 자리잡고 있다. 강과 높다란 암석절벽사이에 형성된 모래밭에 세워진 마을이 조금은 위태롭게 느껴졌다. 우기에 강물이 넘치기라도 하면 도망갈 때도 없어 보였지만 어쨌던 사람들이 잘 살고 있으니 그런 일은 없었는가 보다. 역시 파샹의 선택에 따라 Peaceful Lodge에 짐을 풀고, 양말을 빨고, 맛있는 식사를 하고, 강물소리와 롯지 뒷편 절벽으로 부터 떨어지는 폭포소리에 빠져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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