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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치명적이다'! 
'왜?'
'여자니깐!'
여자는 '아름다워서, 위험해서, 위대해서' 치명적이다.
누구에게?
다름아닌 남성권력에게!!
 
남성이 지배자로 군림하는 시대가 시작되자 모든 권력은 남성성과 합체한다.
교회와 군주, 왕실과 문중은 남성권력의 화신이다.
여자는 신성한 권력에 대해 도전할 수 있는 유일한 위험세력이다.
모든 여자는 남성을 유혹해 권력의 비밀을 탐지해내는 데릴라거나
경국지색의 양귀비거나 요녀 장희빈이다. 
지배자인 남성권력에게 여성과 남성이 우열이 아닌 상호 의존적 관계임을 주장하고,
동등한 대우를 요구하는 선지적 여성은 바로 '마녀'였다.
그리고 간혹 남성권력에 균열을 주는 전위적 여성이 출몰했지만
가차없이 색출되었고 무자비하게 처단당했다.
'왜? '
'여자니깐!!'

그렇게 남성권력은 탕녀와 마녀, 요조 숙녀와 열녀를 만들었고
나혜석을 처단하고 신사임당을 옹립했다.

인류는 자신의 어머니가 여성이고, 자신의 딸이 또한 여성임을 자각하는데 수천년의 세월을 필요로했다. 여자가 여류작가가 되고 다시 여성작가가 되는데도 만만치 않은 세월이 필요했다.  문명의 진보는 여성과 남성의 상호의존성과 동등성은 증명했고, 그리고 드디어 여성이 작가가 되고, 작가가 여성이 되는 시대가 도래했지만 마녀사냥꾼은 자본의 숲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위대한 마녀사냥꾼은  여성의 상품화라는 신 병기로 무장한채 숲을 나왔고 순식간에 지구를 정복했다. 이제 자본화된 남성권력은 실효성을 잃은 마녀를 대신해 비쥬얼 섹시스타를 앞세우며 지구의 절반인 여성에게 우상숭배를 강요한다. 이렇게 자본의 시대에 여자는 '상품'으로 거듭났다. 섹시한 상품이길 거부하는 여성은 이제 찌질이거나, 루즈다. 성형과 다이어트는 여성이 인간이 되기위한 최소한의 조건이 되었다.
섹시스타는 외친다.
'섹시 천국! 불신 지옥!' 

지배권력에 대한 반역의 음모는 권력의 바같에 웅크린 바로 그 찌질이와 루즈들 사이에서 피어나기 마련이다. 새로운 혁명은 남성권력의 바같에서 앙칼진 목소리로 일어난다. 여성은 남성지배사회를 전복하려는 반란의 주모자들이다. 그 반란녀들이 예술이란 무기를 들고 일어났다.  그녀들은 지배권력의 바닥을 보았고 예술이란 무기를 벼려 지배자 남성의 등에 칼이 아니라 꽃을 꽂는다. 예술이라는 신병기는 꽃잎처럼 부드러워 적을 상처내지 않은채 굴복시키고, 거위털보다 부드러워 뭇생명이 깃든다.  차가운 금속성 칼날을 삭히는 촉촉함과 생명의 온기를 가져 인프루앤자보다도 빠른 전염성을 가진 그녀들의 무기는 위험하다 못해 치명적이다 .그래서 여성예술가는 모두 전위이고 혁명가다.



그런 시대, 그런 세상에서 필자 제미란은 한국의 대표적 여성예술가를 찾아나섰다. 그리고 그녀들과 포옹하고, 대화하고, 차와 밥을 나누며 그녀들의 예술세계를 헤집고, 느끼고, 참여한다. 그리고 그 흔적은 온전히 한권의 책안에 담아냈다.
한국 현대 미술을 대표하는 14명의 여성 작가를 담고있는 [나는 치명적이다-경계를 넘는 여성들, 그리고 그녀들의 예술]은 여성적 삶이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영위되고 예술로 승화되는가를 보여주는 여성작가론이자 동시에 여성예술론이다. 여자인 나는 어떻게 작가로 살아가는가, 그리고 동시에 여성작가인 나는 어떻게 자신의 정체성을 작업속에 온전히 녹여넣고 나만의 내밀한 세계를 창조하는가를 탐색해 나가는 필자 제미란은 사실 또 다른 작가이기도 하다.

필자가 14명의 여성예술가의 아뜨리에를 찾아 나선 것은 단지 그들 작가를 만나 담소를 나누고, 그들의 예술세계를 향유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그녀는 그리움이 된 그림을 찾아 자신의 예술세계를 모색하고 구축하기 위한 순례의 길목에서 단지 14명의 여성예술가를 우연히 마주친 것인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값싼 기획출판물과는 달리 [치명적이다]는 필자 제미란이 자신의 삶을 관통하는 예술적 탐색과정, 그리고 그녀들과의 맞남으로 응축된 자신의 삶의 기록을  통해 독자적인 예술적 고뇌에 이르고 있다. 그래서  [치명적이다]는 결국 미술가 제미란의 예술론이기도 하다.

제미란이 만난 14명의 여성작가는 사실 제각각이다. 그들을 한권의 책으로 묶는 끈은 여성성뿐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여성성을 예술로 구현해낸 작가가 있는가하면 여성주의적 자각을 작업으로 승화시킨 작가도 있다. 그것을 여성적 미술과 여성주의 미술로 나누어도 좋을지 모르겠다. 나아가 그녀들은 회화와 설치, 행위예술과 공예를 아우른다.

필자의 입담과 필력을 따라가다보면 나는 어느새 14명의 그녀들을 아우르는 여성미술의 고갱이를 대면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나는 책을 덮으면서도 그들 14명의 여성작가가 가진 공통분모에 이르지 못했다. 그것은 한국의 여성미술의 지평이 그만치 넓어지고 깊어졌기 때문인지 모른다.  여성미술이 미술의 한 파트가 아니라 미술전체를 아우르는 현대미술의 트렌드라고 보아도 부족함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필자가 초두에 던지 '공명(共鳴)'이라는 화두앞에 다시하번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다. 공명은 동일한 삶의 기반, 경험의 공유를 넘어 존재기반의 본질적인 동질성에 기반하는지 모르겠다. 한국적 현실에서 여성으로, 여성 예술가로 살아가는 14명의 작가가 일으키는 공명의 사이클 어디쯤에 필자 제미란은 자신의 자리를 확보하고 있지만, 그 끄트머리 어디쯤 미미한 구석에 독자인 나의 자리역시 가지고 싶다.
김원숙, 김은주, 김주연, 함연주, 유미옥, 윤석남, 윤희수, 류준화...... 제미란, 그리고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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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위의 미술관>을 썼던 제미란님이 새 책을 내었네요.
국내외 14명의 대표적 여성작가를 만나 대화하면서,
그들의 예술세계를 깊이 들여다보고,
그 과정에서 얻은 필자와의 개인적 교감까지
한권의 책으로 고스란히 담아내었네요.
김원숙, 윤석남, 함연주, 윤희수 등을 포함해
저의 아내 류준화도 14명의 작가중 한명으로 포함되었는데,
표지 그림이 지난 2009년 11월 가나아트에서 가진 개인적에 출품했던 
아내의 작품 [물의 몸]이라서 더 자랑스럽네요.

책이 도착하는데로 열심히 읽고 한편의 초라한 서평이라도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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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위의 미술관]
제미란
이프, 2007년 10월 

필자 제미란은 어느날 보따리를 쌌는가보다. 그리고 길을 나서 사무치게 그리워했던 그림과 작가를 만나고, 눈물 콧물 훌쩍거리며 밤새 수다를 떨고 회포를 풀었단다. 그 여정이 가진 의미를 좀 번듯하게 정리하자면 필자에게 그림을 보러 떠나는 일은 ‘순례’의 여정이자 여행자를 위한  "치유"의 과정이었고, 그리고 그 여정을 이 책에 담았단다.


그런데 그림을 찾아 떠나는 여정은 사실 평범할 수 있다. “길에서 쓴 그림일기”인가하는 책도 그렇고 뭐 ‘길’과 ‘화가’, 혹은 ‘길’과 ‘문학’을 짝 짓는 일은 ‘결혼중매업’만치 ‘통속적’이다. 자칫 제목만으로는 통속이라는 늪에 빠질듯 위태롭던 이 책이, 독자인 나에게 이필하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여성미술 순례’라는 소제목이다.


좀 어거지로 느껴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필자가 그토록 그리워했던 그림과 작가가 다름 아닌 “여성”이란 사실은 이 시대, 우리에게 뭔가 특별한 데가 있다. ‘계급’이라는 화두가 잠복하면서 ‘여성’과 ‘환경‘이 시대정신을 담는 화두로 급속히 대체되던 시대를 청년으로 살았고, 그 열정으로 나머지 삶을 꾸려나가고 있는 세대가 바로 필자 그리고 독자인 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뭇 싱겁게 끝나 버릴 수 있었던 ‘이산가족 상봉’이, 필자와 필자가 만난 작가와의 사이에 ‘여성’이라는 공통성에 기반 한 정서적 공감대 혹은 세계관이 있어 이토록 애절하고 신파적인 감동을 줄 수 있게 한 것이 아닐까 감히 짐작해 본다. 하지만 도대체 그 “여성”의 삶이라는 공통성이 뭐길래, 도대체 그 “여성성”이 갖는 세계관의 차이가 뭐길래 사상적 동지를 만난듯 필자와 작가는 그토록 애절할 수 있었을까?


참 많은 여성 작가의 구구절절한 삶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필자가 명시적으로 “여성”을 이야기하는 것을 별로 보질 못했다. 오히려 필자는 작가와 그림을 마주한 개인적 소회와 ‘사적인 대화’를 통해 그 ‘여성성’을 구현해 내고 있는 듯했고, 그것을 읽어 내는 것은 순전히 독자의 몫으로 남겨놓은 듯했다. 그래서 더 ‘여성’적 글쓰기에 성공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또 하나, 독자는 호기심 하나로 필자의 생채기를 들여다 본다. 방관자의 특권일 것이다. 나는 필자의 ‘언어장애’를 시대적 상황과 개인의 충돌에서 빗어진 ‘개인’의 좌절로 읽었다. 필자는 한 특수한 시기의 삶이 가졌던 규정성에 의해 침묵이 강요되었던 자신의 정신적 고통 혹은 상처를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치유과정의 설득력이, 치유를 필요로 했던 상처의 ‘우연성’에 의해 손상받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왜일까? 동일한 시대 동일한 상황에서 비슷한 ‘증상’으로 고통 받닸던 기억이 있는 독자로서 필자에게 말을 걸고 싶다.


그토록 절실했던가? 스스로의 삶의 진정성에 그만치 충실했던가? 시대를 탓할 만치 우리는 당당한가? 아직은 잘 모르겠다. 뭐 시간이 흐른다고 알아질 문제도 아닐 것이다. 길에서 만나 작가들의 크기에 비해 필자의 고뇌는 너무 작은 것이 아닐까? 아니 그러한 나의 생각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 아닐까? 세상에 위대한 삶은 따로 있을지언정, 크기가 작은 삶, 가치가 작은 삶이 따로 있진 않을 것인데, 개인에게 사적인 고뇌는 세상의 전부일 수 있는 것 아닌가.


이렇듯 이 책은 나같은 나태한 독자에게도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그래서 귀찮을 수 있었다. 하지만 게으른 독자를 책 속에 빠져들게 하는 마력은 엉뚱하다. 책속에서 미술, 특히나 여성미술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독자인 내가 잘 잡히지 않는 갈피를 찾아 헤메다 문득 자신의 지난 시절 기억과 내면의 알리바이를 추적하고 있는 스스로를 섬짖 느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을 덮으며 중얼거렸다. “한번 더 읽어 봐야겠다.“



필자가 길에서 만난 니키 드 생팔, 키키 스미스, 루이 브루주아 등과 그들의 대표작들은 겨우 한두번 인쇄매체나 전자매체에서 마주한 것이 고작인 무식한 독자인 내가 필자 나름의 작가론이나 작품론이라 할 수 있는 해석과 의미부여에 대해 구구절절 토를 달거나 평가할 자질도 이유도 없다. 그냥 새 세상을 알아가는, 미지의 세계를 향해 낯선 대양을 항해하는 초보 항해사의 어설픈 설레임과 괜한 호기 아마 그것이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가졌던 지적, 정서적 반응의 전부였을 것이다. 하지만 ‘미술’ 바깥 세상을 살아가는 나는 팔자에 없던 낸시 스페로와 낸 골딩과의 교분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을 친절한 필자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이책을 통해 적어도 나의 무미건조한 삶에 삶이란 얼마나 구구절절한지, 그리고 치열하고 진실해야 하는 건지, 그리고 남성과 다른 여성의 삶은 떠 얼마나 다르게 절실한 것인지 새삼 느낄 수 있었는데 이는 다름아니라 미술 역시 세상을 이해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자기 표현의 한 양식이기 때문일 것이다.


책은 끝났지만, 아마 필자의 여정은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독자인 나는 책을 덮었지만, 그 여정의 동반자로서 여전히 길 중에 서 있다. 그리고 긴 여정을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계속할 할 것 같다. 그리고 필자와 필자가 만나 작가와 긴 인생의 도반이고 싶다. 

나는 이책이 많이 팔리면 좋겠다. 필자 제미란의 글맛을 두루 나누어서 좋고, 여성과 여성 작가에 대한 세상의 이해가 넓어져서 좋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미란은, 모든 독자가 만나서 와인 한잔 사 달라고 졸라 긴 이야기를 같이 나누고 싶은 그런 필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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