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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에서 있은 [협동조합 운동가 양성 집중교육]을 다녀왔다.

28일 아침 태풍 볼라벤이 서해로 올라오는 시간에 봉화를 출발해,

태풍이 서해안에 상륙할 때쯤 교육이 진행대전에 도착했다.

 

이번 교육은 지금까지 '전국농민회총연맹'과 '농업농민정책연구소 녀름'의 주관으로

주로 '농협 개혁'을 위한 운영실무를 중심으로 진행되어 오던 것을

최근 협동조합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놓아짐에 따라

'협동조합' 정신과 의의 등에 대한 농민의 이해를 높이기위한 강좌를 중심으로 만든 과정이다.

 

봉화군 농민회 명호지회는 '협동조합'이 자본주의의 근본적 대안이 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자본주의의 고통을 줄여주는 사회적 장치 정도가 아닌가하는 이해만 가지고

마을 사업을 현재의 영농조합법인 형태에서 '사회적 기업'을 거쳐

'협동조합'으로 나가는 것이 바람직한지,

그리고 협동조합이 정확이 무엇을 말하고 어떤 사례들이 있는지

배우기 위한 확인 차원에서 이번 교육을 참가하게 되었다.

 

원래 제주도가 교육장소 였지만 태풍으로 항공기가 결항되면서

급히 대전의 카토릭 청소년 수련관인 대철회관으로 교육 장소가 변경되었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가 바람에 심하게 흔들리는 와중에 도착해 보니

50여명의 수강 신청자 중에 열두어명만이 참가를 했고,

예정시간을 넘긴 오후 2시쯤 강의가 시작되었다.

 

 

 

 

첫날 강의는 장원봉 사회투자지원재단 상임이사님의

[사회적 경제와 협동조합]이란 주제의 강의와

녀름연구소의 이호중 팀장의 [괴산불정농협의 성과와 과제]라는 사례 발표로 진행되었다.

막연히 알고 있던 협동조합이 어떤 역사를 가지고 진행되어왔고

무한 경쟁이 전일화된 신자유주의 현실 속에서

어떻게 존립하고 작동하고 있는지 이해를 높일 수 있었다.

특히 예천 참우작목반 최병용 대표의 발표는

나같은 농민에게도 희망을 주는 값진 사례였다.

 

다음날은 스페인의 몬드라곤 사례를 통해 '협동조합'이 

자본주의의 파고로 부터 어떻게 인간적 삶을 지키고 고양시킬 수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고,

이어서 한겨레 두레공제조합 연합회 대표이신 박승옥님으로부터 협동조합의 가치와 원리,

혐동조합운동사 등에 대한 강의를 들을 수 있었다.

예정되었던 남무현 불정농협협동조합장님의 강의는

조합장님이 태풍으로 인해 농작물 피해가 극심한 현장을 떠날 수 없어 무산되었다.

 

이번 교육을 통해 앞으로 비나리마을 사업을

어떤 전망을 가지고 해 나가야할 지 길을 찾는데 많은 시사점을 얻었다.

막연한 마을 활성화는 물론 아니지만,

마을공동체의 심원한 내적 변화는 어떻게 도모해 나갈지 고민이 많았고,

특히 변화과정에 마을 주민의 참여를 어떻게 이끌어낼지

작목반의 형태서 부터 여타 다양한 마을 사업의 실험들을 진행해 왔지만

사실 뚜렷한 답을 차고 있지 못한 상황에서 '협동조합'은

좀 더 구체적인 마을사업의 바람직한 상을 만들어나가는데

충분한 범례가 되는 것 같았다.

특히 몬드라곤의 사례는 가슴뜨겁게 다가왔고

예천참우의 사례는 우리가 가진 희망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줬다.

 

이번 교육을 통해 이해한 협동조합은 이해에 기반하지만 경쟁이 아니라

지역 공동체내의 신뢰와 협동에 기초해서

사회적 경제를 이뤄내는 수단으로 이해되었다. 

협동조합은 공동체 구성원의 생활경제의 틀을 보다

협력적 차원으로 끌어올림으로써

'삶' 자체의 변화를 도모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희망을 주었다.

영농조합법인 형태로 시작한 비나리마을 사업을

앞으로 협동조합의 형태로 나아갈 수 있기위해 어떤 준비가 필요한지

맨 바닥으로부터의 고민을 다시 시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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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창을 받아 슬픈 경우도 있다.
봉화군 농민회 명호면지회를 재구성하자마자 전농으로 부터 표창을 받았다.
농업이 기울고, 농민이 줄고 그리고 그보다도
더 빠르게 농민회가 와해되어 왔기 때문일까,
100여개 시군농민회 중 5개 농민회가 표창을 받았는데
그 중 봉화군은 면지회 구성이 사유였다.

1990년 전국농민회총연맹이 결성되고 나서,
농촌 공동체를 지키고 농업의 가치를 확산하기 위해 투쟁해 왔지만  
농업의 붕괴와 농촌 공동체의 와해를 막아내는데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고,
희망을 꺽지 않았다.

면지회 구성조건인 5명이상의 회원으로
봉화군농민회 명호지회를 만들려고 했는데
구성이 되자마자 10명이상이 가입을 하고
다시 스무명가까이 조직이 불어나게 되었다.

정부와 농협의 지원을 받는 많은 농업인 단체들이 있지만
많은 농민들은 한국 농업과 농촌의 이익을 대변하는 조직에
목말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언제가는 약사들이 약사회에 가입하고,
변호사는 변호사회에 가입하듯이
농민이면 당연하게 농민회에 가입하여
농민의 이해를 관철하고 농촌공동체와 농업을
지켜나갈 수 있을 날이 올것이라 믿는다.

그 길로 나아가는 선봉에 봉화군 농민회 명호지회 깃발이
항상 휘날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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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부터 농사를 지었으니 벌써 올해까지 꼭 15년이 되었다.
그동안 우여곡절도 많고 적지 않은 변화도 있었지만
꼭 그때 15년전 내가 첫발은 디뎠던
비나리마을의 가을을 잊을 수 없다.

그 고즈넉한 가을 하늘아래 펼쳐진 평화로운 마을전경...
살다보면 사람일은 알수 없으니 내가 설혹 비나리마을을 떠나
또 다른 낮천 거리에 헤메게 될지라도
그 때 그 비나리마을의 풍광은
고스란히 나의 가슴에 남아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해 두해 농사를 지어 가면서
그 평화로운 풍경뒤에 감춰진 한국 농촌의 참담한 현실을
눈으로 몸으로 느껴갈 수 밖에 없었다.
말로서, 글로서 알고 있덨던 실상보다 춸씬더
참혹한 농촌의 실상은 그 어떤 처방으로도 회복이 불가능해 보였고,
한 때는 내 자식을 키우며 살아갈 터전으로 받아들일 수 없어
탈농을 생각해 보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어떻게든 살아보겟다고 농사를 벌이고,
정부가 지원하는 이런 저런 마을사업을 벌이면서도 
그 어떤 것도 근본적인 처방이 될수가 없다는 점에
늘 목말라하면서 결
국 농촌, 농업의 문제는
농민이 주체적으로 나서  

해결할 수 밖에 없음을 절감했다.
그래서 농민회에 가입하고 농민동지들과 전망을 찾고
한국 농촌의 미래 비젼을 공유하고자 했지만
처음 몇년은 우선 내 농사기반이라도 닦고 나서 가입하자고
미루게 되었고,
다음 몇년은 이런저런 마을 사업에 정신이 팔려
미쳐 농민회 가입을 생각지도 못했고,

그리고 최근까지는 농민회의 이념적 지향에서 동의하지 못하는
몇가지 점들과
지역농민회와의 연결의 어려움 때문에
가입을 미루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전 미뤘던 농민회 가입이 이뤄지고
지난 금요일에는 명호면에서 농민회가 소집한
자역 농업인대표자 회의(?)에 참가하게 되었다.
나선 자리, 두려운 자리였지만
농민회의 뚝심과 지역사회에서 갖는 영향력을 몸소 느낄수 있었고,
비록 조직이 쇠락했지만 여전히 농민들 사이에서는
농민회가 살아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농민회 회원 개개인의 무한정한 헌신의 삶을 목도할 수 있었고,   
그동안 관변단체로 여겨 배제했던 농업경영인회 등도
농민회와 동반자로서
투쟁에 같이 나서는 모습을 확인하는 기쁨도 있었다.

나아가 지역 각종 농민단체의 조직원으로 활동하시는
지역 형님들 선배님들의

건강한 삶의 모습으로부터도 많은 영감을 받을 수 있었다.
지역의 다른 농민단체 형님들께서도
지금은 와해된 봉화군 농민회 명호면 지회를 복원하는 과제를
맡기면서
도와주시겠다고 나서는데 고무되어
나는 연말까지 봉화군 농민회 명호면 지회를
복원하겠다는 공언을 하기도 했다.  


이날 회의를 통해 10월 10일 경북도내 각 시군 농민단체와 마찬가지로
봉화군 농작물피해대책위원회에서도
버스 10대 이상을 동원하기로 하고, 

이에 명호면은 버스 한대를 맞춰 각 단체가 인원과 비용을 배정하여  
경북 도청앞으로 집결 [경북농민대회]에 참가하기로 결의 했다.

농민회를 가입하자마자 벌써 몸이 바빠지게되었다.
아직 밭에 할일도 태산인데 내 주머니에서 비용을 갹출해 가면서
집회에 참가하게 되니 이게 무슨 망조인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농사 15년 만에 농민회 가입을 통해
나의 삶이 또 다른 비약을 하게 된 것임을 확신하다.
나는 이제 진짜 농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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