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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시읽기의 즐거움], 강신주, 동녘, 2010.

 

21명의 철학자와 21명의 시인을 짝지어 그들의 사유가 기반한 공통된 정신을 축출하고 추적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 결과로 태어난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을 읽고 독자로서 다시 요약하고 정리하는 일 역시 쉬운 일일 수 없다. 따라서 이책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되읽어 봄으로써 그 어려움을 대신한다.

 

‘철학의 능선’을 오르던 필자는 문학의 장르중 고도감이 제일 높은 시와 철학이 공유한 동일한 정신에 주목한다. 능선은 쉽게 오를 수 없지만 도달하면 좋은 조망을 얻을 수 있다. ‘철학’도 마찬가지로 결국 우리 삶을 조망하기 위한 여정이다. 플로로그에서 필자는 인문학의 정신을 드러내는 이성복 시인의 잠언집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2001)의 한 구절을 인용한다.

“일상적 삶은 ‘느낌’에서 ;사실‘로, ’위험‘에서 ’안전‘으로의 끊임없는 이행이다. 예술이 진정한 삶을 복원하기 위한 시도라면, 예술은 일상적인 삶과는 반대 방향으로 진행할 것이다. 즉 사실에서 느낌으로, 안전에서 위험으로.”

일상적 세계를 동요시키고 낯선세계로 접어들게 하는 것이 바로 인문학적 성찰의 성격이다. 이는 “진정한 삶을 복원하기 위한 시도”이고 “철학은 삶을 낯설게 하는 기술“이다. 그래서 시와 같은 예술과 철학은 동일한 정신을 공유한다.

시에는 주관적이고 낯선 이미지들이, 철학책에는 이해하기 힘든 추상적 용어들이 산재한다. 이것은 시인과 철학자가 친숙한 세계가 아닌 원초적으로 낯선 세계를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 현상이다. 따라서 시와 철학은 독자에게 폭력적으로 다가갈 수 있다. 그 난해함은 일상적 삶을 동요시키는 불쾌함에서 비롯된다. 시는 기존의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낯선 상처 혹은 어떤 감각을 새로운 말을 만들어 말하려고 하는데서 아이러니를 발생시킨다. 그래서 시는 어렵다. 철학은 개념들을 창조하고 그것을 논리적으로 엮음으로써 새로운 사유 문법을 만드는 학문이다. 그래서 철학은 기존의 그물로 잡을 수 없는 새로운 물고기를 잡기위해 새로운 그물을 짜는 일과 같다.

흔히 시는 주관적인 것이고 철학은 객관적 혹은 보편적인 것이라는 인상을 가진다. 하지만 시는 가장 주관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가장 보편적일 수도 있다. 철학은 가장 보편적인 것 같지만 실은 가장 주관적인이기도 하다. 사실 시와 철학은 인문학의 양끝단에 위치한다. 그렇지만 시와 철학은 이성복의 말처럼 “진정한 삶을 복원하기 위해” 친숙한 세계를 낯설게 하는 인문학의 본령에 충실한 것들이다.

낯선 느낌은 철학을 포함한 모든 인문학적 경험의 출발점이다. 시인은 그 느낌을 포착해 전달하려고 온갖 단어와 상징을 찾고, 철학자는 기존의 개념을 새롭게 정의하거나 혹은 새로운 개념을 창조함으로써 그 낯선 느낌을 보편적인 논리로 포착하려고 한다. 그래서 철학과 시는 어렵다.

철학자와 시인들이 우리를 ‘사실’과 ‘안전’의 세계에서 ‘느낌’과 ‘위험’의 세계로 내모는 진정한 속내는 스티노자의 자유정신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주저 [윤리학]에서 ‘코나투스의 윤리학’ 피력한다. 코나투스는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려는 힘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기 위해 타자와 연결되어야한다.

들뢰즈는 인간이 과거에 만들어진 주름을 가지고 있고, 현재에도 주름을 계속 만들고 있는 존재라는 자각을 피력한다. 이것은 우리가 유한자이기 때문이다. 한계가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외부가 있다는 것, 즉 타자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외부 혹은 타자가 우리 삶에 마주쳤을 때 우리에게는 생각지 못한 새로운 주름이 만들어 진다. 타자와의 마주침으로 ‘정치’가 발생한다.

스피노자의 사유로 되돌아와서 보자. 인간은 “기쁨을 지속하고 슬픔을 피해야만 한다.” 스피노자가 말한 코나투스의 윤리학을 기쁨의 윤리학이라 부르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나의 기쁨은 타자의 기쁨을 방해해서는 안되고 결국 기쁨의 윤리학은 나만의 기쁨이 아니라 모두의 기쁨을 지향하는 것이다. 여기서 자유라는 개념의 의미가 분명해 진다. 그래서 기쁨의 윤리학은 자유의 정치학으로 변모한다. 피에르 크라스트르라는 정치인류학자가 국가가 없는 사회를 지향했던 인디언 사회에서 발견한 것도 바로 이런 자유정신이다. 기쁨과 자유, 이것이 철학과 시를 포함한 모든 인문학의 궁극적인 꿈이자 인문학이 존재하는 이유이다.

 

철학의 대중화와 인문학의 보편화를 추구하는 강신주의 지적 여정의 선상에 있는 [철학적 시읽기의 즐거움]은 인문학의 양극단에 선 철학과 시를 마주하게 함으로서 우리 삶을 낯설게하고 궁극적으로 “진정한 삶을 복원”하고자 한다. 저자의 의도가 얼마나 성공적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시와 철학이 ‘일상적 삶을 낯설게 함으로써 진정한 삶을 복원하는 것’이라는 필자의 문제의식, 그리고 진정한 삶을 위한 자유의 정치학으로 전개되어가는 필자의 사유의 여정에 전적으로 공감이 간다. 하지만 박노해와 김남주를 위시한 21명의 시인과 아감벤과 데리다를 포함한 21명의 철학자를 한권의 책에서 만나는 것은 참 버거운 일이다. 감칠맛나는 지적 소품과 장치,  그리고 매혹적인 필자의 글발에 취해 한권의 책을 훗딱 읽어버린 뒤 짧은 꿈에서 깬듯 알지못할 허전함이 남는다. 아마도 그것은 필자의 폭넓은 지식에 압도되었지만 '대중적 인문학 상품'의 달콤하지만 깊지안은 뒷맛때문이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순한 나열이 아니라 자유의 정신을 뼈대로 이들을 살로 내장으로 근육으로 만들어 한권 책을 저술할 수 있는 필자의 발랄한 상상력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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