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한 아름의 여행서적들이 생겼다. 만만찮은 책값때문에 구입을 망설여왔던 걷기길 관련 여행서적들을 공짜로 얻어다가 책상위에 쌓아놓았다. 책무더기를 바라 보니 마음 든든한게 올해 겨울나기는 심심하진 않을 것 같았다. 망설임없이 첫 책으로 서명숙의 [꼬닥꼬닥 걸어가는 이 길처럼]을 집어 들었다. 재작년에 한번 그리고 작년에 한번 다녀온 제주 올레길에 대한 기억이 여전히 강렬하게 남아있어서이기도 했고, 요즘 내가 맡아 하고 있는 일이 [외씨버선길] 봉화구간의 스토리 자원조사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내가 알고 있는 제주 올레길은 단지 걷기길의 성공적인 개발사례만이 아니다. 올레길은 '길'을 떠나서도  단연 최고의 '지역 개발' 분야의 성공사례이다. 지역 개발 현장은 항상 "가치의 실현과 주민의 경제적으로 윤택한 삶에 대한 욕구"가 충돌하는 현장이기도하다. 그런데 어떻게 필자 서명숙은 우리 사회를 온통 지배하고 있는 스스로 이름 붙인 '공구리주의'에 맞서 올곧게 생태적 가치, 원시적 공동체성을 지켜내면서도 '올레길'을 통해 지역민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정신적으로도 풍성한 삶으로 변화시킬 수 있었는지 경이롭기만하다. 나의 올레길에 대한, 올레길을 일구어낸 필자에 대한 놀라움과 존경의 마음으로 이 책을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이 책 [꼬닥꼬닥 걸어가는 이 길처럼]은 서명숙 자신이 기록한 올레길의 역사이자 올레주의의 이론서이면서 동시에 걷기길을 만들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제시된 실무지침서이다. 이책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로 끝이난다. 어떤 사람들을 만나 작당을 하고 어떻게 길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에서 봉착한 난관들을 헤쳐나갔는지 읽어 내려가다보면 어느 순간에 이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이 길에 대한 이야기인지 아니면 필자 개인의 삶의 과정 속에서 얽힌 사람들과의 인연에 대한 에세이 인지 혼동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결국은 올레길이 구상되고 현실화 되는 과정 맡바닥에 놓여 있는 가장 중심적인 토대가 바로 사람에 대한 그녀의 사랑임을 이야기 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서귀포 시장 한 구퉁이에서 [서명숙상회]를 꾸려왔던 어머니, 그녀의 든든한 동반자인 두 분의 남동생, 그리고 대포동의 네 여자, 그리고 그녀의 생각에 공감하고 힘이 되어 주었던 기업가들의 이야기들.  그러나 무엇보다 감동적인 이야기는 바로 이름없는 올레꾼들의 가슴저미는 구구절절한 삶의 이야기들이 나닐까 한다.  병든 육체와 상처입은 마음을 안고 길을 나서는 사람들이 올레길을 걸으며 병을 치유하고 생명의 건강성을 회복해 나가는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가슴한쪽 구석이 따뜻해져옮을 느낀다. 

올레길은 경쟁만능주의와 속도전에 지쳐 병들어가는 현대인에게 삶의 원시성을 회복케하고 자연과 조화로운 삶을 향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자 하는 그녀의 애틋한 인간애에서 시작되었다. 아니 올레길을 만들어 나가는 일은 무엇보다 그녀 자신을 치유하고 구원하기 위한 구도의 과정이 아니었을까? 이 책을 읽는 내내 한 야심가의 욕망의 실현과정과 또 한 연약한 인간의 구도과정 사이에서 그녀의 올레길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다. 올레길은 '옳음과 현실적 욕망'을 통일시킨 건강한 지역개발의 사례이듯 그녀에게 이 길은 자아실현과 구도의 과정이 통일되는 지점에 위치해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필자 서명숙은 올레길의 제안자이자 기획자이고, 사람을  모아서 일을 도모하는 조직가이자, 구상을 실무적으로 처리해 현실화시켜내는 사업가이기도 하다. 그녀는 온갖 모습으로 이 책의 갈피갈피마다 얼굴을 내민다. 그러나 그 모든 아이텐티티를 떠나 그녀는 그냥 "제주의 여자"라고 부르고 싶다. 거친 바닷바람을 맞으며 거센 파도를 맞서 삶을 일구고 지켜내온 제주의 여자는 모두 '설문대 할망'이다.  설문대할망같은 파워와 카리스마을 가지고 제주를 깊이 사랑했기에 '올레길'이 태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첫번째 올레길에서는 그저 풍광에 넋을 잃고 길이 좋아, 마냥 바닷바람에 취해 아무 생각없이 걸을 수 있었다. 두번째의 올레길은 봉화군등 4개 시군이 함께 만들려고 하는 [외씨버선길]을 위한 워크삽을 통해서 만나게 되었다. 이 때도 나는 그냥 한도  끝도 없이 올레길을 걷고싶었지만 [워크삽] 일정때문에 길걷기 욕구를 제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아쉬움이 많았지만 다행히 처음으로 올레길을 만들어나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사단법인 올레의 일꾼인 안은주선생의 강의를 통해 감히 [올레주의]라고 이름 붙혀도 좋을 올레길만의 정신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만난 올레길을 필자 서명숙을 통해 더욱 깊이 알게 해준 이 책을 만나게 된 인연이 고맙다.

'올레길'은 걷기길의 가장 성공적인 사례만이 아니다. 올레길은 반토목주의에 입각한 지역개발사업의 전형을 제시한다. 나는 그것을 '올레주의'라고 이름붙이고 싶다. 
책을 덮으며 외친다.

[올레주의] 만세! 만만세!!
반응형
반응형



BY2C(봉화, 영양, 영월, 청송)라고 불리는 경북과 강원도의 지자체가 시군간 공동사업의 하나로 '외씨버선길'을 만든다. 주관을 (사) 경북북부연구원이란 곳에서 맡았고, 그 산하에 일종의 '사업단'을 지난 7월 1일자로 발족시켰단다. 이 사업과 관련하여 봉화군민의 한사람으로 지난 5월 제주 올레길 연수에 이어 이번 지리산둘레길 벤치마킹을 다녀왔다. 하지만 두번의 연수를 통해서도  안타깝게도 '외씨버선길'의 성공에 대한 확신은 아직 없다. 그 이유중 가장 중요한 것은 두번의 연수를 통해서도 외씨버선길의 실체에 대해 별로 듣지 못했다는 것이다. 조지훈의 시 [승무]의 한구절에 나오는 '외씨버선'으로 BY2C를 대표하는 걷기길의 이름으로 삼는다는 것과 이 지역의 문화적 자연적 자원을 통합한 '생태관광길'을 만든다는 것과 이미 일부 예산은 내려와 있고, 3년간 총 100억이 투자될 거라는 사실이 내가 아는 '외씨버선길'에 대한 전부다.

2009년 이웃과 떠난 봉화군 명호면 관창리의 마을길걷기

아직은 충분히 알지 못한 상태에서 드는 생각이지만  두번의 연수를 통해 만난 올레길과 둘레길의 사례와 '외씨버선길'은 거의 완전히 서로 대척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가치를 찾아 길을 기획하고, 그 가치를 중심으로 사람이 모여 가장 생태적이고 공동체적인 방식으로 만들어 나가는 길이 올레길과 둘레길이라면 외씨버선길은 어쩌면 가장 개발주의적이고 토목주의적인 사업방식에 기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외씨버선길'은 길의 실체보다 예산이 먼저 확보된 성과주의적이고  예산따먹기식 사업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관과 관변단체가 토목주의적 사업 방식으로 추진하는  '걷기 길 만들기'는 사실 형용모순이다. '걷기길'을 만드는 과정이 바로 그와같은 토목주의,  개발만능주의의 주류문화에 대한 저항이자 대안의 모색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몰각한 걷기길 만들기는 애시당초 불가능하다. 걷기길은 길의 원초적 폭력성을 극복하고 마을과 마을,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을 잇는 생명의 길, 순환의 길이다. 
 
올레길이나 둘레길은 단지 물리적 공간에 놓여있는 길이 아니다. 흙바닥위에 길이 놓이기 전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더불어 나눌 가치가 확보되고, 사람의 마음과 마음을 잇는 정신의 길, 마음의 길이 먼저 형성되었다. 그와같은 과정없이 뜬금없이 '예산'만으로 만들어지는 길은 말이 '걷기길'이지 기존의 '도로'에 다르지 않다.  '외씨버선길' 만들기에 다리를 놓고 고속도로를 건설하는 토목공사적 마인드로 접근할 경우 그 결말은 말할 필요도 없이 비극적일 것이다.

그래서 '길의 가치, 길의 정당성에 대한 지역주민의 승인과정이 있는가?' 는 물음은 길을 만드는 과정 끝까지 되풀이 해서 묻고 또 물어야하는 '주문'이다. 그 과정을 무시한 대표적 사업이 바로 MB의 4대강폭거다. 그래서 사람들은 4대강 사업의 비극적 종말을 예견한다.  외씨버선길은 그와 같은 오류을 피해야한다. 시작부터 잘못끼워진 단추라면 다시 풀어 처음부터 다시꿰거나 덜 궨 아랫단추부터라도 재대로 궤어야 한다. 안동의 퇴계예던길의 사례가 바로 지역주민과의 공감없는 사업의 어려움을 잘 보여주고 있다.

멀리보면, 스페인의 카미노 데 산티아고나 일본의 시코쿠 순례길이 천년넘어 이어지고 세계인으로부터 사랑받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낸다면, 다리를 놓고 고속도로를 건설하는 토목공사적 마인드로 '걷기길'을 만들어 봤자 끝내 실패하고 말 이유들을 충분히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걷기길은 순례길이고, 치료의 길이고, 화해와 소통의 길이다. 단순화하면 길은 문화고 가치다.

외씨버선길'의 앞날이 순탄하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을 피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외씨버선길' 정신의 부재다. 제주 올레길과 지리산 둘레길의 정신이 무엇인지 제시하라고 누군가 요구한다면 버벅거릴 수 밖에 없겠지만 '올레주의' '지리산주의'라고 해도 좋을 그 나름의 독특한 가치가 있고 철학이 있다. 그런데 '외씨버선길'은 나름의 고유한 '정신'이나 '가치' 나아가 테마 자체가 없거나 너무나 미약하다. 조지훈이 인지도가 높은 시인이고, 승무가 그의 대표적인 시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래도 2% 부족함을 지울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외씨버선길' 만들기를 반대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걷기는 시대의 트랜드를 넘어 인간 삶의 필수행위의 하나로 자리잡을지 모른다. 따라서 '외씨버선길'이 단지 올레길이나 둘레길보다 늦게 시작해서 실패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러면 어떻게 외씨버선길을 만들면 좋을까? 앞으로 마을길을 걸으며 수없이 곱씹고 고민해야할 것이다.
단지 현 사업단이 운영되는 3년의 사업기간이 사업의 완성이 아니라 외씨버선길의 초석을 닦는 기간이어야한다는 것과 더불어 '외씨버선길'을 만드는 과정이 단기적 프로젝트의 성공사례나 중안중부예산 따오기의 성공사례가 아니라 수백년을 이어질 명품길을 만든 사례가 될 수 있길 바랄 뿐이다. 

반응형
반응형

연수 이튿날, 민박집 할머니가 차려주시는 아침을 먹고,  담장넘어 석류꽃이 만발한 민박집을 뒤로하고 버스에 올랐다. 계획대로라면 매동마을을 먼저 방문해 마을위원장으로부터 마을 사업에 대해 듣고 매동마을에서 상황소류지까지 걸을 예정이었지만 아침부터 내리는 비에 일정을 바꾸었다. 먼저 출발지였던 인월로 돌아가 인월에서  비전마을 가는 길중 산길을 피하고 농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걷기를 하는 동안 내내 비가 내렸다. 비옷으로 몸은 감쌌지만 무릎아래는 비에 젖고 무릎위는 땀에 젖어 길을 걷는 상쾌한 기분을 느끼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래도 퇴약볕을 모면하고 빗길을 걷는 것도 나름의 운치는 있었다. 비때문에 사진도 찍을 수 없고, 머리까지 뒤집어 쓴 비옷을 때리는 빗소리에 사위에서 들려오는 자연의 소리를 모두 들을 수 없는 것이 아쉬웠지만 비를 뿌리는 구름이 지리산을 감아도는 풍경을 바라다보며 빗속의 농로를 걷은 기억은 오래도록 나의 뇌리에 남아있을 것이다. 


처음에 망설였던 빗길을 걸으며 빗길을 걷는 재미에 빠져들기 시작하고 마침내 예정된 하루 일과를 무시하고 그냥 계속해서 길만 걸을 수 있다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 무렵 걷기는 끝이 났다. 이번 여행의 목적이 지리산길 벤치마킹인 연수다 보니 실제 길을 걷는 시간은 그리 넉넉할 수가 없었다. 두시간도 채 걷지 못하고 다음 목적지인 매동마을을 향해 버스에 몸을 싣었다.

매동마을은 녹색체험마을로 운영되어 왔지만 마을 사업의 성과가 그리 크지 않았는데 최근에 들어 마을을 지나가는 지리산 둘레길이 만들어지고 나서 마을 방문객과 민박손님, 그리고 각종 체험객이 부쩍 늘어난 대표적인 마을이라고 했다. 매동마을을 방문한 이유는  걷기 길이 마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살펴보고 길과 마을의 건강한 관계에 대한 고민을 진천시키기위해서였다.    


마을사업이 활발한 전국의 이런저런 마을들을 많이 방문해 봤지만 잘되는 마을의 공통점 중 하나는 좋은 마을 지도자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매동마을 역시 다르지 않았다.  이영오 추진위원장은 과장없이 마을 사업의 과정과 현시상을 낱낱히 말씀해 주셨다. 주민간의 이해관계 대립으로 인한 갈등, 체험프로그램 운영의 어려움, 그리고 진정한 마을활성화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들을 과감없이 털어놓으시고, 우리 일행과 격의 없는 질의 응답시간을 가졌다. 사실 나는 마을 지도자를 뵙기만해도 가슴이 뭉클하다. 얼마나 힘든 길을 걸어오셨을까. 그리고 앞으로도 얼마나 어려운 길을 가야만할까하는 생각에 그분들의 선택앞에 숙연해 지기 때문이다.

이영오 매동마을 위원장과의 대화에서 마을 사업이 기반하고 있는 마을의 공동체성이 과연 존재하는가하는 문제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시대에 추구할 수 있는 새로운 공동체성의 성격이나 형태가 무엇인지, 낡은 공동체성이 과거지향적인 향수로 포장되어 마을사업의 토대로 삼기 때문에 현제 마을사업들이 지지부진하고 적지않은 마을에 분란을 일으키게 되는 건 아닌지 하는 정답없는 토의를 계속 나누고 싶었지만 역시 충분한 시간을 가지지 못한 채 이날 3번째 프로그램이 진행된 인월 지리산길 안내센타로 향했다


신현주 인월안내센타장님과 실무자 한분이 지리산길의 구축과 운영 전반에 대한 설명을 해주시고, 그리고 질의 응답을시간을 가졌다. 이분들과의 토의를 통해서도 제주 올레길에서 느꼈던 똑같은 문제의식을 인식할 수 있었다. 대중의 사랑을 받는 '길'을 '상품'이 아니라 가치와 문화로 승화시키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 '길'의 원초적인 푹력성을 순화시켜 어떻게 사물과 생명, 사람과 마을을 잇는 생명의 길로 전환시킬 수 있을지 고민할 수 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알수도 있을 것 같았다. 길을 통해 낙후된 지역사회에 활력을 불어넣고 지역공동체를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활성화시키는 일은 예상치 못한 많은 문제에 봉착할 수도 있고, 애초에 구현하고자 했던 가치를 오히러 갉아먹을 수 있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고 '지리산길'을 만들어나가는 이분들과의 만남을 마지막으로1박2일의 짧은 지리산 연수는 끝이 났다. 여전히 비가 내리는 88고속도로를 타고 대구를 지나 봉화로 돌아왔지만 아직 '외씨버선길'은 보이지 않고 마을과 길이 만나는 그 어디쯤에서 시작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외씨버선길은 나에겐 아직 먼 길이다. 
반응형
반응형

BY2C 외씨버선길 개발을 위한 제주올레 체험연수를 떠나다.

2010년 5월 13일 아침, 안동상공회의소 마당에 차를 세우고 대절한 버스에 올랐다. 일행은 모두 스무명 남짓, 봉화군과 영양군, 영월군과 청송군에서 공무원 14명과 민간인 4명해서 18명이 함께했고, 그리고 인솔자인 경북북부연구원 사무국장이 같이했다.
대구공항에서 경북대 권오상 교수가 합류하고, 제주공항에 도착하자 생산성본부 관계자 가 합류하고 저녁에 따로 합류하신 분까지 합쳐 일행은 총 25명이 되었다.

이번 제주행의 목적은 경북 북부지역의 낙후지역으로 알려진  봉화,영양,영월,청송의 4개군이 합쳐 청정 오지라는 지역조건에 맞는 걷기길을 만들어 나가는데 제주 올레길의 성공사례를 배우는 것이다. 걷기가 붐이되고, 지리산 둘레길, 북한산 둘레길, 소백산자락길, 부안 마실길 등
전국에 갖가지 걷기길이 생겨나는 시점에 BY2C라 불리는 4개군도 가칭 '외씨버선길'이라는 걷기 길을 추진하기 위해서란다. 그동안 몇번의 심포와 회의가 있었다고 했지만 참가하지 못했고 간접적으로 그런 길을 만든다는 소식만 들어오다 이번 제주 올레길 탐방길에 따라 나서게 된 것이다.

어쩌면 2여년동안 드문드문이지만 마을걷기를 하고 
그 소식을 마을 홈페이지 등에 올려온 까닭에 봉화군청의 
업무관계자가 청해준 것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담당자는
내가 이번 연수에 따라 나서게 된 것은 그런 연유가 아니라고 했다.  
1년전 제주 올레길을 맛만 보고 언제 다시 차근차근히
걷고 싶은 마음이 마음 한구석에 있었기 때문에
청을 쉬 받아들여 이날 여정에 함께하게 되었다.


연수일정은 1일차에 올레7코스를 걷고, 밤에 워크삽을 가지고
2일차에는 오전에 사단법인 제주올레의 안은주선생으로 부터 
'올레기획의 의의와 지역사회의 변화'라는 내용의 강의 듣고
오후에는 10코스를 걷는 것으로 짜여져 있었다. 
전체적으로 빡빡한 일정이었지만 올레길을 걷게된다는 기대와
우선 봄날 제주도를 다녀올 수 있다는 기대만으로도 
가슴부푼 여정이 되었다.


숙소인 풍림리조트에 도착하자마자 짐도 풀지 못한채 올레를 나섰다.
올레길 7코스는 외돌개에서 월평항구까지 총 15km의 코스지만 
풍림리조트가 그 코스 중간에 있는 까닭에 풍림리조트에서 역으로
7코스의 출발점인 외돌개로 방향을 잡았다.
일행이 대부분 산골에 사는 분들이라서 그런지
단지 바닷가를 걷는다는 것 만으로도 다들 상기된 표정이셨다.
처음부터 올레길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올레길이 인기를 끌면서 갑자기 영업에도 큰 도움도 얻게되었던
풍림리조트는 올레길 관련한 안내데스크나 물품기증테이블, 올레우체국등을 운영하고,
무료셔틀 버스를 운행하고 화장실까지 개방하였다.
그와같은 취지로 개방한 풍림리조트의 정원을 통해
바닷길을 걷기 시작했다.
청명한 하늘을 지고 따갑지 않은 봄햇살을 받으며
맘껏 바닷바람을 쐬며 걷는 올렛길은 편안했고 평화로웠다.
멈추면 살아나는 걱정거리도 길을 가면 다 가벼워지는가보다.
사실 쉼없이 마주치고, 스쳐지나가는 올레꾼은 다 나름의 사연을 안고 살아가고
그만큼의 고뇌와 삶의 짐을 지고 있겠지만
길위에서만은 순례를 떠나는 도반들 모양 한가지로 평화로운 표정이었다.


좁고 험한 길도 있고,  길같지 않은 해안을 걷기도 했지만 누구도 길을 문제라고 느끼지 않았다. 간혹가다 굴러다니는 쓰레기와 쉼없이 마주치고 스쳐지나가는 올레꾼들이 사실 조금은 성가시게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어디 이런 길을 혼자만의 호젓한 길로 누릴 수 있단 말인가! 
사실 올레 7코스는풍림리조트와 월평포구사이의 강정항에 해군기지가 들어오는 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평화의 길에 군사기지가 들어오는 계획이 철회되고 다시 평화로운 바닷마을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평화에대한 기원으로 피어올랐다. 어쩌면 나중에 올레길 7코스는 '평화의 길'로 재명명될지도 모를 일이다.  


7코스 앞 바다에 떠있는 범섬을 바라다보며 걷다보면 법환포구가 나오고 이어서 수봉로와 수봉교를 지났다. 수붕교를 지나자 얼마 안있어 서귀포여고인근에서 이날 길걷기는 접게되었지만 누구도 외돌개까지 걷지 않게된 것을 탓하지도 않았고 그냥 넉넉한 표정들이셨다. 걷기가 더이상 싫어서일까 아니면 그만치 걸은 것만으로도 마음의 풍요를 한껏 느길 수 있었기 때문일까?  올레길을 벗어나 우리 일행을 싣기 위해 불러놓은 버스에 몸을 싣고 숙소로 향하는 길은 고단했지만 편안했고 아쉬웠지만 섭섭하지 않았다. 일정이 일부 어긋나면서 첫날의 여정을 다하지 못했지만  7코스를 걷고 돌아가는 나의 뇌리에는 걷기 길에 대한 이러저런 상념들이 떠올랐다.


걷기가 붐인 것은 확실한데, 일시적일까 지속적일까? 제주올레길이 성공했다고 각 지자체마다 이런저런 걷기길을 만드는 게 붐이다. 이제 우리 봉화에도 걷기길을 만들려고 하는데 사실 너무 늦은 것은 아닐까? 도대체 봉화는 어떤 테마의 걷기 길이 가능하고, 어떻게 만들어 나가야 올레길처럼 환경친화적이고 주민참여적인 프로그램으로 안착할 수 있을까? 사실 이번 연수는 그와같은 물음에 대한 답의 실마리를 찾기 위한 것이었지만 두어코스 걸기로 그 실마리를 얻기는 애시당초 불가능했다. 하지만 안을 만들기 이전에 기본적인 전제들, 기초해야될 가치들, 실행단계에서 지켜야될 원칙들에 대한 생각만이라도 정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저런 생각이 이어지고 버스는 숙소에 도착했다. 첫날의 일정은 저녁 시간에 생산성본부의 정혜선박사님의 강의를 마지막으로 끝맺음을 했다. 


2박3일중 둘째날은 사실 여행일정상으로도 보면 가장 중요한 날이다.
오는 날, 가는 날이 아니라 온전히 하루를 통으로 영행에 받칠 수 잇는 날이기 때문이다.
아니나다를까 이날 일정은 아침식사가 끝나자마자 사단법인 제주올레의 안은주 선생의 강의로 시작되었다.  안은주 선생의 강의 내용을 다 정리할 수 없지만
먼저 제주 올레길의 현황에 대한 걸로 성공리에 지역사회에 정착해 들어가고 있다는 점과
두번째 그와같은 성공을 위해 견지했던 원칙들에 대한 태도로 집약되었다.
먼저 작년에 제주 전체 관광객은 약 540만명이었는데 그중 5%정도가 순수한 올레꾼이란다. 2007년개장 원년에 약 3000명이 걸었던 올레길이 2009년에 25만명이상이 걷게 되었고 올해는 아마 작년의 2배에 이를 것으로 짐작된다. 올레길에 들어간 예산 대비 관광객 유치 효과로 본다면 어떤 사례와도 비교할 수 없는 성공작임이 분명하다. 사실 제주는 비싸고 개발된 관광지로 인식되면서 한때 관광객이 줄고 특히 생태를 중시하는 젊은 여행마니아들로부터 외면받아온 게 사실이다. 올레길은 단순히 년 20만명의 제주 관광객을 늘인 것 만으로는 그 의의를 다 평할 수 없고 오히려 부수적으로 제주의 그런 부정적 이미지를 일소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된 점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제주올레는 2009년 한국의 10대 히트상품에 선정되었다. 제주 올레는 어느새 단순한 길이 아니고, 제주가 나아갈 길, 어쩌면 인류의 미래로 통하는 새로운 트랜드, 새로운 가치로 통하는 시대의 길인지도 모른다. 
아직까지 우리사회는 토건국가로 개발독재적 발상이 통용되는 휘귀한 나라에서 여성적인 감수성과 생태주의를 가치기반으로하고, 그리고 목적이 아니라 과정을 소중히 여기는 올레길이 이처럼 붐을 일으킨다는 것은 어쩌면 새로운 시대의 문에 우리사회가 들어섰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올레길을 통해 제주는 단기관광에서 장기 체류형관광으로, 단체관광에서 개별관광으로, 그리고 대중교통을 이용한 관광으로 급속히 자귀기 시작했고, 길을 따라 게스트하우스와 구멍가게가 증가하고 궁극적으로는 마을이 활성화되는 엄청난 변화를 격고 있다.
단적으로 서귀포만 보드라도 재래시장 매출이 17%나 증가하고, 적자를 면치 못했던 공용버스의 승객이 400%나 증가했다. 그러다보니 서귀포재래시장을 '서귀포올레시장'으로 이름을 바꾸게 되었고, 올레길을 처음 시작한 서명숙 이사장의 고향집이 있기도 했던 서귀포시장에는 설립자의 고향집이던 '서명숙상회'를 복원해서 올레 관련 기념품가계로 상인회에서 운영하기로 했단다. 길거리 마다 '올레'가 들어간 상호가 늘어나고 아침식사를 제공하는 식당이 늘어나고, 올레짐꾼(올레꾼 짐 배달서비스)같이 올레꾼을 대상으로한 갖가지 일자리마저 생겨나게 되었다. 그뿐아니라 올레관련한 다양한 기념품과 문화상품이 개발되고, 이렇게 개발된 상품은 지역사회에 일자리를 제공하고 활력을 부어넣는 사회적 기업을 탄생시켰다. 
한국관광, 나아가 한국사회의 미래를 볼려면 바로 올레길이 가리키는 곳을 보면된다고 할 수 있을 만치 올레길은 관과상품을 넘어 한시대의 조류를 형성하는 문화아이콘이자 시대의 트랜드마크가 된 셈이다. 


올레길이 그처럼 단기간에 주요한 문화적 현상으로 자리잡게 되는데는 설립자들의 올곳은 가치관과 이를 견지하기 위한 사업의 원칙이 있었음을 알수 있었다. 그들이 제시하는 올레길을 만드는 원칙은 사실 대단한 것이 아니지만 근본적인 것이었고, 소소한 것이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것들이었다. 가능한한 있는 길을 이용하고, 그리고 사라진 옛길을 찾고, 새길을 만들어도 곂코 노폭은 1m이상으로 만들지 않고, 개인소유의 당을 지나는 길도 가능하면 올레가 소유하지 않고 오직 통행만 보장받는가 하면, 화장실 등 기초 인프라도 최대한 기존 시설을 개방하게하여 지역 사회가 올레길을 만드는 일에 참여하도록 끌여들였다. 차라리 매입을 하고 예산을 다내어 시설을 건설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지만 제주올레는 이 어려움을 마다않고 감수하면서 오늘의 올레가 가능하도록 만든것이다.


오전 강의를 마치고 오후는 화순항에서 식사와 함께 올레길 10코스 걷기를 나섰다.응회암으로 이루어진 해안절벽을 따라걷고, 산방산을 오르고, 하멜 전시관을 지나, 사계화석발견지, 마라도선착장, 그리고 송악산과 알뜨르비행장을 지나 모슬포항까지 이어지는 10코스는 전날 걸은 7코스와는 달리 바다와 산이 어우러진 길이었다. 바닷가를 걷는 멋과 산길을 걷는 흥을 함께 느낄 수 있었던 송악산길은 비록 험했지만 힘든지 몰랐다. 말을 방목하는 목장을 가로지르고 평지로 내려선 뒤 도로를 따라 알뜨르비행장과 모슬포항으로 이어지는 길 어디쯤에서, 뒤에 쳐진 일행을 실은 버스를 만나 10코스 걷기가 마무리되었다.  


2박 3일이지만 결코 짧지 않은 일정이 마무리단계에 접어들면서 연수의 목적인 봉화,영양, 영월, 청송을 잇는 외씨버선길을 어떻게 만들어 나갈 건지에 대한 고민이 되살아났다.
무엇보다 먼저 지금 걷기붐이 일어나게된 시대적 흐름, 가치의 변화에 주목하고 올레길이 성공할 수 있었던 사업의 발상에서부터 조직, 추진 원칙과 가치지향 등 어느 것 하나도 놓치지 않고 세밀히 검토한 뒤 꼭 '외씨버선길'이 필요하거나 가능하다고 판단되었을 때 시작해야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다른 사업들처럼 예산먼저 따고 그 돈을 어떻게 쓸것인지를 고민하는 과정이 반복된다면 결코 외씨버선길을 성공할 수가 없을 것이다. 왜 해야하고 어떻게 하면되는지 먼저 이해하고 그렇지 않다면 과감히 포기할 수도 있는 열린 자세로 사업에 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걷기 길은 단순한 관광아이템이 아니라 새로운 '가치'의 실현이라는 핵심토대를 놓치지 않는 사업 과정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여정에서 막 돌아 온 지금 아직까지 생각은 정리되지않고 산만한 상념만 남아있지만 오래시간 곱씹고 자료를 찾고 고민하는 과정이 뒤따른다면 비록 외씨버선길이 후발주자지만 그래서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것이라 생각해 본다.   

마을사업에 관여한지 10여년만에 처음 접한  완벽한 지역사업 성공사례인 올레길을 만날 수 있은 것은 나에게 큰 행운이었다.  행복했던 여행의 기억을 가져다 준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반응형
반응형


2009년 3월 29일
전날 저녁에 있은 전시 오픈과 저녁 술자리에도 불구하고
또 하루의 걸음을 위해 일찍 눈을 떳다.
간단한 아침을 먹고 카멜리아힐을 나서 무조건 한라산쪽으로 향했다.
등산정보도 없고 정확한 길도 모르지만
마냥 북동쪽으로 걷다보면 한라산이 나온다는 무모한 믿음하나에 의지한채
이날 하루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길을 나선지  1시간 만에 1115번길을 만나 다시 남동쪽으로 방향을 잡아 탐라대학교방향으로 계속걸었다. 길을 가며 도로표지판에 의지해 한라산을 찾는 무모한 짓을 포기할 때즘 이미 점심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무작정 길가는 차를 향해 손을 들었지만 다 지나가고 마침 택시 한대가 정차했다.  '한라산 갑시다!'는 저의 무모한 요구에 기사님 왈 이미 입산시간이 지났고, 한라산이 그렇게 뒷동산오르듯 만만한 산이 아니란다. 차라리 가까운 윗세오름이라고 한라산의 두번째 봉우리를 오르는게 나을 거란다.  그리고 본인은 사정상 그쪽 손님을 태울 수가 없고 동료를 불러주겠단다. 택시가 떠나고 또 한참을 걷다가 떠나간 택시 기사의 동료로부터 전화가 오고 곧 택시도 왔다.



택시비 2만원에 영실탐방로 입구까지 도착했다. 단체 등산객으로 보이는 무리들과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 그리고 가족 연인단위의 등산객으로 등산로가 미어터졌다. 입구 휴계소에서 우동을 한그릇씩 먹고  사람들의 발길에 휩쓸려 윗세오름을 향했다.  사람들이 많아도 산은 산대로 산다웠고 이어지는 등산로는 비록 가파른 곳도 많았지만 힘겹거나 지루한 코스는  거의 없었다. 멀리 서귀포를 넘어 태평양이 내려다보이는 등산로를 걷는 재미는 아름다운 산세와 더불어 등산객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주기에 충분했고 걷거 또 걸었지만 지치지 않았다. 정상에 오르고 초원이 펼쳐진 사이로 설치된 데크를 따라 한참을 걷기도 했는데, 정상부근에서 시작한 눈발을 맞으며  하산 코스를 어리묵탐방로로 잡았다. 한라산을 맛만본 두세시간의 등반과 하산으로 많은 아쉬움이 남았지만 윗세오름이 준 인상은 깊었고 그만치 많은 기억으로 남았다.


어리묵탐방로 안내소까지 내려와 서귀포행 버스를 기다렸다.
많은 사람들이 같이 길을 걸었지만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대부분 단체버스를 이용하던지 아니면 등반을 시작한 코스로 다시 하산을 했기때문이다.
서귀포로 향하는 길은 거의 롤러코스트 같았고 기사님은 무뚝뚝했다.
올레길 8코스를 맛보기위해 적당한 하차지점을 물었지만 대답은 없었고
무조건 중문단지에 하차를 하고 바다를 향해 걸었다.


제주 컨벤션센타를 만나고 왼쪽으로 길을 바꾸자 얼마안있어 아프리카 박물관이 나오고
다시 뒤돌아 주상절리가 유명한 열리해안길을 따라 걸고
다시 컨벤션센타를 오른쪽으로 끼고 중문해수욕장 쪽으로 향했다.
성천포구에서 중문해녀의 집을 만나 회도 한접시 맛보고
다시 해거름이 내릴 때까지 1100번 도로를 따라 북상하기 시작했다.
베릿내 오름을 따라난 계곡을 내려다보며  길을 걷다가 천제연폭포를 지나고
여미지 식물원도 지났다. 다 보고 싶은 곳이지만 이미 영업시간이 끝나 그냥 스쳐지나갔다.


내일이면 제주를 떠나 다시 일상의 늪으로 돌아가야한다는 강박때문일까.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길을 그곳이 정확히 어딘지도
또 어디로 향하는 길위인지도 확인하지 않은채
한참을 걷고 또 걸었다.
어둠이 두터워지고 허기가 진 뒤에야 
택시를 타고 숙소인 카멜리아 힐로 돌아왔다.
너무 많은 것은 보고 겪은 하루는 잘 정리되지 않았지만
밤은 깊고 잠은 편안했다.

그렇게 3박4일간의 제주 여행은 끝이나고 
대구행 비행기에 올라 다시 돌아올 일상을 생각했다.
언제까지 무엇을 해야하고, 
결제일은 언제고 그리고 누굴 만나야하고...
집나간 주인을 기다리는 '일상'의 충성심에 치가 떨리지만
그렇게 또 고스란히  나의 삶은 보전되고 이어지게되니 뭐 세상살이가 그렇커니 해야되겠지...
달라진 것 하나 없는 일상을 시작하며 또 다시 나그네의 모습으로 올레길을 걷는 나 자신을 만나보고 말거라는 대책없는 계획을 세웠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반응형
반응형

2009년3월 27일 오후 제주공항에 근 15년만에  발을 내딛었다.
낡은 기억속엔 아무 것도 참조할 만한게 없었고 모든 것이 낯설었다.
공항을 나서자마자 꽉찬 주차장에는 온통 렌터카 천지였고,
주차장을 가로질러 공항앞 도로로 나가는 길은 찾기 어려웠다.

아내의 작은 전시회가 있었고, 덤으로 올레길이라 불리는
제주도의 봄길을 걷기위한 여정이기에
대중교통과 도보만으로 이동하기로 마음먹은대로 버스를 찾아나섰다.
행인에게 몇번이나 노선을 물었는데 친절하기는 했지만 정확한 정보는 없었고,
몇번을 반복해서 묻고 매번 물을 때마다 다른 답을 얻으며 
제주시내를 헤맨뒤에샤  버스안에서 친절한 한명의 문화관광해설사를 만났다.
그분의 안내를 받아 겨우 목적지를 향한 버스에 오를 수 있었지만
기사분이 또 우리를 목적지보다 두어구간 지나서 내려주었다.
그렇게 도착한 일차목적지 카멜리아힐은 농사를 지으며 농장을 꾸리고
그 농장을 도시민이 찾는 농원으로 만들어나가길 꿈꾸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려볼 수 있는 아름다움을 갖춘 리조트였다.


그날 오후 내내 아름다운 동백숲으로 이루어진 정원을 거닐며  
아름다운 펜션과, 카페 그리고 갤러리를 구경하고 
제주에서의 한가롭고 평화로운 첫날을 보냈다.
저녁 늦게 도착한 다른 작가분들과 그 가족들이 들여닥치자
작은 술자리도 마련되었지만 피곤한 몸을 일찍 잠자리에 누였다.

3월 28일 아침일찍 창을 비집고 들어오는 제주의 햇살에 눈을 뜨고
창릉 열고 제주의 바람을 맞았다.
그리고 간단한 아침식사후 저녁 5시 예정인 전시오픈 전에
제주 올레길을 찾아 카멜리아힐을 나섰다.
길을 나서 한적한 시골길을 남쪽으로 한참을 걸어 
1136번 도로를 만나고 1136번도로를 따라
자동차박물관을 지나 국도를 벗어나 왼쪽으로 작은 도로를 따라 다시 화순항으로 남하했다.


올레길 9코스의 종점이자 10코스의 출발점인 화순항을 향해 가는 길은
봄볕과 봄바람이 길을 걷는 사람을 서정을 부추키고
힘든줄 모르고 내딛는 발걸음마다 살아있음의 기쁨이 느껴졌다.
길을 걸으며 이렇게 벅차오르는 생명의 활홀경을 맛볼 수 있다는 사실이
어떻게 이 시대에 걷기가 붐이 될 수 있는지를  말해주었다.
아직도 개발광풍과 경제지상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이지만
그런 못된 지배가치와 지배계급을 대체할 새로운 가치,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반란은 이렇게 작고 가벼운 발걸음에서부터 시작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갈대와 모래사장이 맞아주는 화순항을 향해가는 길은
제주도만이 보여줄 수 있는 이국적인 정취를 한껏 느낄 수 있었다.
식생이 달라서겠지만 유독 제주는 육지와는 다른 풍경으로 다가왔다.
제주의 봄을 상징하는 유채꽃, 가로수로 늘어선 야자수들, 
이른 봄이지만 겨울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수 없는 풍경,
구멍뚤린 돌로 쌓은 돌담, 밀감밭 그리고 길가의 풀들 조차
제주는 완벽하게 육지와 달랐다.
눈에 들어오는 모든 풍경이 일시에 나를 향해 외쳤다.
'당신은 일상을 벗어나 자신의 삶의 터전과는 다른 어떤 곳에 들어섰다. 
그 전의 삶은 잊고 맘껏 즐기시라. 이곳은 당신의 일상밖이니...'
그렇게 제주는 관광을 업으로 먹고사는 지역이 되었나 보다.


화순항을 벗어나 역으로 올레길 9코스를 시작하자마자
화순삼거리 조금 못미쳐 송도식당인가 하는데서 점심을 먹었다.
올레길관련 정보를 구하다 알게된 조그만 식당인데
주인의 친절과 가격 대비 맛도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마침 그 앞을 지나갈 즈음 점심시간도 되어 들어가
소문대로  친절한 아주머니께 비빔보리밥을 시켜 먹었다.
역시 소문대로 만족스런 식사를 하고
다시 걷기 시작하자마자
[성박물관]이란 곳을 지나게 되었는데
언제 또 이곳을 지날까 싶어 박물관에 들러 잠시 구경도 했다.
입장료가 아깝기는 했지만 의외로 관람객도 많았다.




박물관을 벗어나 1132번 국도를 따라 동쪽으로 방향을 잡고 걷가보니
금세 안덕계곡이 나왔다. 계곡에서 오랜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
잠시잠깐 안덕계곡을 걷고 이내 다시 창천삼거리까지 걸었다.
참천삼거리에서 북쪽으로 방향을 잡아 1136번 국도를 따라 올라가면 숙소인 카멜리아힐이지만
국도를 따라 걷기만 하는 여정을 피하기위해
창천삼거리에서 다시 유턴해서 내려오다가 북쪽방향으로 농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국도를 벗어나는 순간 진짜 올레길을 걷게된 셈인데,
대충 짐작으로 방향을 잡아 숙소와 어긋나지 않도록 주의를 하긴 했지만
의외로 엉뚱한 곳으로 길이 빠져 예상보다 훨씬 많은 걸음이 필요했고
그만치 제주의 삶과 자연을 좀더 깊숙히 느켜볼 수 있는 귀한 기회도 가졌다.

하루 20여 km를 걷고 다시 돌아온 카멜리아 힐의 저녁은 
또 얼마나 풍요롭고 아늑했는지,
이날 하루의 여정은 오랜동안 기억에 남아 
나의 가난한 마음에 작은 여유를 가져다 주었다.
    
반응형
반응형

 
동백을 주제로한 리조트에서 가진 동백을 주제로한 전시회

2009 3월 제주도 서귀포에 위치한 리조트 카멜리아힐(http://www.camelliahill.co.kr/)의 부대시설인 [갤러리 카멜리아]에서 동백꽃을 주제로 한 전시회가 있었다

8천년 동안의 봄, 다시 8천년 동안의 가을 – 동백언덕을 노닐다

2009. 3. 28 () ~ 6. 14()

리조트 카멜리아 힐 內 갤러리 카멜리아

강석문, 김경신, 노석미, 류준화, 박형진, 최혜인, 황희진


카멜리아 힐은 5만여평의 정원을 20여년을 가꾸어 온 양언보 사장의 일생의 역작이다. 전시회에 맞춰 참여 작가의 가족까지 초청해주신 양언보사장과의 식사자리에서 간략하게 나마 카멜리아힐의 역사에 대해 들을 수 있었지만 한 명의 농부가 지금의 카멜리아힐을 일궈내는 과정은 짧은 식사자리에서 나눈 담소 정도로 다 전해 듣는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할 것이다. 남들 다 감귤 농사에 올인 할 때, 그리고 감귤 농사가 한창 큰 돈이 될 때 양사장은 감귤 나무를 베어내기 시작했고 그 자리에 동백을 심었다고 한다. 주위의 만류와 어리석은 짓에 대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동백나무를 심은 것은 단지 동백나무에 매료되어 그 아름다움에 빠져버린 자신의 내면의 욕구에 따른 것일 뿐이란다. 물론 농장 외의 다른 사업을 벌여가며 돈을 벌어야 했지만 그렇게 벌어들인 돈도 고스란히 감귤농장을 지금의 [카멜리아힐]로 바꿔나가는데 밀어 넣었단다. 그렇게 20년의 세월을 받쳐 지금은 서귀포의 한 명소로 자리잡을 카멜리아 힐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단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했을 뿐인데 결과적으로 사업적 성과도 낳은 경우를 언론 등을 통해 종종 접하게 되는 데 바로 카멜리아힐이 그 대표적인 경우의 하나인 것이다.

 


34일동안 머문 카멜리아 힐은 그야말로 동백정원이었다. 겨울의 여왕이라 불리는 동백을 전세계를 누비며 5백여종의 희귀종까지 모아 동백정원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은 한편의 드라마 같았을 것이지만 그 과정이 힘들었을 만치 지금의 그 결과물은 희양찬란 했다. 국내 유일의 동백을 테마로 한 리조트인 카멜리아힐에는 물론 동백나무만 있는 것은 아니다. 구석구석 돌 하나, 풀꽃 하나까지 정성을 다해 가꾸어 놓은 정원은 그렇다고 드러나게 인공적이지도 않았다. 화려한 동백꽃과 어우러진 정원의 아름다움은 그 공간에 들어 오는 모든 사람이 단지 그 사실 만으로 자신의 존재감이 고양됨을 느끼고 그리고 삶과 세상의 존귀함을 느끼게 해 주었다 그것은 자연과 인공의 조화의 극치를 보여주는 아름다움의 힘인지 모르겠다.


카멜리아힐이 오랜 준비기간을 걸치면서 일부 시설이 완비되는대로 이용이 되어 왔지만 2008년 11월이 되어서야 최종적으로 완공되었다. 화려한 준공식을 가진뒤 얼마되지 않은 시점에 동백을 주제로한 리조트인 카멜리아힐에서 동백을 주제로한 전시회를 가지게 된 것은 어쩌면 참 자연스럽고 꼭 필요한 일이기도 했다.
한국의 현대미술을 이끄는 젊은 작가들과 함께 [동백언덕을 노닐다]전에 작가의 한명으로 참가한 와이프 덕에 농부의 한명으로 성공적인 삶을 살아오신 카멜리아 힐 양언보 사장민도 만나고, 아름다운 카멜리아 힐에 매료되기도 했지만 사실 가장 큰 수확은 다른데 있었다.
바로 카멜리아힐을 노닐면서 자연스럽게 제주 올레길로 접어들었다는 사실이다. 올레길에 대한 사전 정보를 가지고 전시여행을 우리 부부의 올레길 걷기 여행으로 계획을 세웠지만 사실 막연하고 확정적이지도 않았었다. 하지만 동백길을 걷는 재미가 쉬 올레길을 걷을 용기를 가져다 주었고 그리고 마침내 카멜리아 힐을 나와 올레길 10코스를 항해 걸음을 옮기게 되었다.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