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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일찍 눈을 뜨고 계속 침낭 속에서 미기적거렸다. 10여명이 다이님 룸에서 같이 잠을 자다보니 먼저 일어나 서성일 수가 없었다. 그래도 불편함보다 정겨움이 더 컸다. 뿔뿔히 자신의 방으로 흩어지지 않고 트레커랑 가이드와 포터랑, 롯지 식구들 까지 다이님룸에 소복히 모여서 같이 잠자리에 누우니 한 방에 4형제가 같이 지내던 어린 시절이 생각 났다. 창밖에 새벽 어스름이 비추기 시작하자 이불을 걷고 일어나 밖으로 나갈 준비를 했다. 일출 장면을 사진에 담겠다고 캠프에서 10여분 거리인 View Point까지 올라갔다.
6시 30분, 일출 장면을 찍기에는 이미 늦어버렸는지 날이 훤하다. 살을 애는 얼음 바람을 맞으며 한국인 트레커들과 같이 사진을 찍고, 청명한 하늘과 맞닿은 안나푸르나 연봉을 바라보는데 갑자기 산 정상이 황금빛으로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낮은 산은 어둠속에서 갑자기 산 전체가 드러나는데, 안나푸르나는 아침 어스름 속에 산 전체가 먼저 드러나고, 다시 햇살이 산 정상을 비추기 시작하면  황금빛으로 불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안나푸르나는 백설의 설산으로 돌아왔다. 절로 탄성을 지르며 열심히 카메라의 셔터를 눌렀다.


주위를 둘러보니 1980년에 태어나 2006년에 이곳에서 생을 마감한 한 남자의 위령탑이 깨어나는 안나푸르나를 바라다 보며 우뚝하니 서 있었다. 그는 이곳에 남아 아침 햇살 받으며 깨어나는 안나푸르나를 영원히 지켜볼 것이고, 우리는 오늘 하산하면 남은 삶동안 다시 이곳 안나푸르나를 오기는 힘들 것같았다. 산과 산을 지키는 낯선 한 영혼에게 아쉬운 작별인사를 남기고, 더 이상 추위를 참지 못해 도망치듯 숙소로 돌아왔다.


하산길도 파샹이 앞장을 서기로 했다. 다른 팀들보다 먼저 롯지를 나섰다. 어제 상행 중에는 눈과 구름속에 숨어 자태를 드러내지 않았던 마차푸차레 정상이 우리의 정면을 막아섰다. 아무것도 없는 설원의 끝에 위압적으로 서 있는 마차푸차레지만 어쩌면 그냥 계속 걸어 쉬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이 느껴졌다. ABC코스에 접어들면서, 아니 포카라에서 부터 너무 자주 봐서 이미 친숙해져 버린 탓일거다. 간드룩에서 다이님룸에서 만난 폴라드인 트레커는 다음 기회에 마차푸차레 정상을 등정해 보고싶다며 파샹에게 등정을 위한 허가 과정이나 최소 인원, 비용 등에 관해 물었던 적이 있었다. 이렇게 마주 보는 것 만으로도 좋지만 기회가 되고 여건이 된다면 나도 일생에 한번쯤은 저런 산에 오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나이는 쉰을 넘었고, 평생 높은 산은 한번도 타본 적이 없고, 시간도 비용도 내기 힘든 주제에 꿈도 야무지다며 스스로 핀잔을 주고는 걸음에 속력을 붙였다.



올라올 때, 그렇게 힘든 길이었는데 내려갈 때는 너무 쉽다. 근 3시간을 걸어 올라갔던 MBC에서 ABC가던 길은 1시간만에 주파했다. 어제는 눈속에 길을 서둘러야했지만 오늘은 쾌청한 날씨에 하산길이니 길을 서둘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파샹은 저만치 앞서가고 나도 모르게 발길이 빨라졌다. 오전 중에 데우랄리를 스쳐 지났고 점심은 히말랴야에서 먹게 되었다. 상행 때의 꼭 2배 속도로 걸은 셈이었다. 히말라야를 출발해 도반과 밤부까지는 거의 쉬지 않고 내려왔다. 밤부가 가까워지자 쾌청했던 하늘에 짙은 구름이 몰려오고 한방울 두방울 진눈깨비가 내리더니 롯지에 도착하니 진눈깨비는 비로 변해있었다. 우산도 비옷도 없는 상황에서 비를 맞아가면서까지 하산할 만한 이유는 없었다.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며 밀크커피를 마시며 30분 정도를 쉬다보니 호주 청년트레커 두 커플은 비닐을 뒤집어 쓰고 상행길에 나섰고, 오래전에 한번 왔던 길을 다시 찾아왔다는 일본인 트케커도 비를 맞으며 상행길에 올랐다.


밤부에서 묵기에는 시간도 좀 남았고, 오늘 숙소 예정지로 잡았던 시누아도 머지않아 우리도 마음을 고쳐 먹고 비를 맞으며 하행길에 나섰다. 다행히 길을 나서자 비는 더 가늘어졌고, 시누와가 가까워지면서 아예 그쳐 버렸다. 시누와에서는 만날 사람이 있었다. 이번 여행을 강력이 권유한 후배다. 그는 다른 일정으로 네팔에 들어왔는데 오늘 쯤 서로 교행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다. 한국을 떠나기 전 미리 전해 받은 일정표는 잃어버렸고, 여행 시작일과 기간 정도만 기억하는 상태에서 파샹에게 물으니 시누와나 촘롱 정도에서 만나지 않을까 예상을 했다. 그러데 그 예상은 정확히 적중했다. 시누와에 들어서니 첫집 헛간에서 바삐 움직이며 조리 중인 사람들이 보였고, 단체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길가 쓰레기 장에는 한국어로 '당면'이 선명하게 쓰인 포장지가 나뒹굴고 있었다. 이 계절에 단체 손님이라면 당연히 한국인일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물어보니 혜초여행사라고 했다. 네팔리 사이에서도 '혜초여행사'는 아주 유명한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혜초 여행사의 단체손님이라니 거의 확실해 보였다.


시누와에 도착한 것이 오후 5시였는데 의외로 Upper Sinuwa는 붐볐다. 2개의 롯지가 영업중이었지만 한 집은 혜초여행사 그룹이 독차지를 하고 있었고, 나머지 한 집으로 여러 무리가 모여들었다. ABC를 같이 걸은 호주청년들, 한국 청년커플, 한국 여선생님, 그리고 상행하는 낯선 한국 청년들이 7~8명이 뒤늦게 들이닥쳤고, 외국인 트레커도 두어명 더 합류했다. 작은 다이닝룸이 곽찼다. 거기다가 나의 손님까지 합류하니 스토브를 켜지 않아도 좋은 만치 사람의 온기가 다이님룸에 가득했다. 3000m이하로 내려왔으니 제일먼저 담배 생각이 났다. 그리고 낯선 땅에서 만난 후배 내외와 함께, 그리고 ABC를 같이 오르고 내린 동행 트레커들과도 한잔 나누고 싶었다. 락시 한병과 후배가 가져온 유명한 "한라산소주"를 딱 한잔씩 나누었다. 많은 아쉬움이 남았지만 후배는 내일 ABC로 올라가야 될 형편이라 일찍 숙소로 갔다. 그리고 한국인 여선생님과 좀더 대화를 나누었고, 그 대화를 통해 그분이 직면한 삶의 문제와 관계가 나의 삶의 지향, 나의 삶의 방식을 되돌아 보게하는 적지않은 영감을 주었다. 그녀 덕분에 친환경 농업, 마을 공동체, 진보적 삶과 정치적 실천 등 평생의 화두가 안나푸르나에서 다시 되살아나게된 셈이었다.


전문산악인이 아닌 나같은 사람이 접근할 수 있는 한계점인 ABC를 딛고, 다시 하생길에 영인 아빠를 만나니 나의 이번 여정은 끝나가는 기분이다. 이제 이삼일이면 포카라에 들어갈 것이고. 이삼일 더 포카라에서 헤메다가, 또 카트만두 거리를 이삼일 더 걸으면 귀국해야한다. 귀국을 생각하기 시작하니 딸이 더 보고 싶어졌다. 전날 밤 아내도 꿈속에서 딸아이를 보았단다. 네팔에 도착하자마자 핸드폰이 고장이 나고, 달리 전화걸 수단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냥 한국과의 모든 연락을 끊고 지내고 싶었다. 익숙한 세상이랑 한달쯤 철저히 단절한다고 내 삶에 무슨 변화가 있겠냐는 객기 아닌 객기였다. 그래도 포카라에 가면 근 한달만에 사랑하는 딸에게 전화를 해야겠다. 우리 딸이 너무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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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잘 자지 못했다. 평소보다 제법 늦게까지 다이님룸에서 다른 트레커들과 노닥거리다 방에 들었지만 옆방에 든 호주트레커들이 늦게 까지 떠들어 되었다. 지금까지 묵은 롯지 대부분은 방과 방사이 벽체를 합판 한장으로 막아놓았는데 이곳 히말라야 롯지도 마찬가지였다. 또 벽쪽으로 침대가 붙어 있어, 마찬가지로 옆방의 침대가 합판 한장 넘어 붙어있다보니 밤이 깊어 조용해지면 옆방 손님의 숨소리까지 들릴 정도였다. 그런 방에 묵을수록 소음을 내지 않기 위해 신경을 써야하는데 옆방의 청년들은 전혀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여행 초반에 티망의 롯지 2층에서 묵을 때 밤에 잠시 화장실을 다녀온 적이 있었다. 그런데 다음날 1층에서 묵었던 네팔리들이 내가 밤새 쿵쿵 거리고 돌라다녀 자신들의 잠을 깨웠다며 항의성 농을 걸었다. 사실은 내가 아니고 옆방의 트레커가 배탈이났는지 밤새 들락날락 거린 거였다. 아뭏튼 롯지는 최소한의 재료로 만든 숙소기때문에 단열이나 방음 같은 거는 전혀 고려치 않고 지은 집이다. 그래서 늘 옆방에 젊잖은 손님이 들기를 기원해야하는데 어제는 재수가 없었다.


찌뿌등한 몸을 이끌고 밤새 눈이 내린 길을 나섰다. 여전히 눈발을 계속 휘날리고 안나푸르나 연봉들은 구름 속에 사라지고 없었다. 흰쿠동굴에 이르자 상행인 트레커들이 소복히 바위 아래 모여 있었고, 잠시 쉬는 사이 하행길 트레커들도 바위 밑으로 모여들었다. ABC(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상황이 궁금했는데 무사히 다녀오는 사람들은 만나니 조금은 안도가 되었다. 그들 대부분은 한국인이었다. 하행인 트레커들은 조금은 과장된 표정으로 자신들이 얼마나 힘들게 다녀왔는지 이야기했고, 그리고 기상으로 봐서 오늘 상행인 사람들이 베이스캠프에 도달할 수 있을 지 걱정이라며 겁을 주었다. 사실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고도가 4200m라는 사실도 조금은 부담스러웠고, 꼭 거기까지 가야할 이유도 없었기에 MBC(마차푸차레 베이스 캠프)에서 머물고 내일 아침 일찍 배낭을 두고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까지 다녀오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오늘의 기상과 다른 여건의 변화에 달려 있는 것이기에 그대까지 어떤 결정도 내리지 않았다.


흰쿠동굴을 떠난뒤 곧 바로 데우랄리에 도착했다. 눈발을 계속 굵어지고 그만치 시야는 점덤 좁아져 갔다. 뜨거운 블래티를 한잔하고 온수로 물통을 채웠다. 시누와를 지나면서부터 1리터 페트병에 담긴 공산품인 미네랄워터는 더이상 팔지 않았다. 지고 올라오기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다. 대신 '따토파니'라고 자연수를 끓여서 팔았다. 미네랄워터보다 값은 싼데 물맛은 별로고 간혹 모레같은 불순물도 보였다. 사실 네팔리들은 그 물을 끓이지도 않고 그냥 마시는데 아무런 탈이 없다. 하도 여행안내정보에서 자연수를 마시지 말라고 해서 계속 미네랄워터만 사서 마셨는데 좋은 선택인지는 잘 모르겠다.


히말라야에서 흰쿠동굴을 지나 데우랄리까지 꼭 2시간이 걸렸다. 쉬엄쉬엄 걷기도 했고 눈때문에 빨리 걸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데우랄리를 나와 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로 향했다. 밤새내리던 눈은 하루종일 끊이질 않았고 고도를 높일수록 점점 더 거세졌다. 데우랄리를 지나면서부터는 설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고 오직 맹목적인 걸음에 몰두하게 되었다. 마음속에 조금의 두려움도 싹트고, 특히나 데데우랄리지나 MBC가는 계곡에서는 나도 모르게 마음이 달아오르고 서둘기까지 했다. 파샹 이야기로는 삼년전 바로 이 계곡에서 눈사태로 십여명이상의 트레커와 포터가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사태가 일어난 코스는 약 15분 걸리는 계곡길이었는데 왼쪽 사면의 경사나 쌓인 눈을 봐서는 사태가 일어날 지역같지 않았다. 파샹에게 물어보니, 그 경사의 상단부에 눈이 쌓였다가 일시에 무너져 내리는 특수한 지형탓에 사고가 잦다고 했다.


데우랄리에서 MBC까지 다시 2시간이 걸려 오후 1시경 MBC에 도착 했다. ABC에서 이제 막 도착했다는 한국인 남성 한분은 거의 사력을 다해 내려오다 여러번 넘어지고 굴렀다면서 계속 하행을 할지 어쩔지 걱정이 태산같았다. 무리하지 않는게 좋을 듯 했지만 그렇다고 추운 롯지에 계속 머물수도 없는 상황이라 그분은 결국 계속 하행을 하기로 하고 롯지를 나섰고, 다음은 우리가 결정을 할 차례가 되었다. 계속 ABC까지 올라갈지 아니면 MBC에 머물다 내일 아침 ABC까지는 가벼운 차림으로 다녀와서 하산을 할지 아직 결정하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점심을 먹고 나니 더 이상 고민이 필요 없게 되었다. 호주청년, 한국청년 할 것 없이 모두 ABC까지 올라가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고 보니 우리 부부만 덩그러니 MBC에 남을 이유가 없어 보였다. 차라리 먼저 롯지를 나섰다. 우리 포터 파샹은 MBC에 올라온 예닙곱명의 네팔리 중에서 가장 젊었다. 꼭 그래야만하는 것은 아닌것 같았지만 다른 네팔리들이 파샹에게 제일 앞에서 길을 뚫고 나갈 것을 종용했다. 파샹이 맨앞에서 길을 찾고 우리 부부가 뒤따랐다.


MBC부터는 눈발도 눈발이지만 안개인지 구름인지 사방천지에 아무 것도 볼 수가 없게 되엇다. 눈과 구름이 발밑과 머리 위, 그리고 사방에서 우리를 감쌌다. 사방팔방이 흰색이고 우리는 그속에 갇혀버렸다. 사방 10m의 공간에 갇혀 그밖의 상황을 알 수없는 채로 그냥 맹목적으로 걷고 또 걸었다. 길은 눈속에 숨고 산은 구름 속에 숨었다. 사람의 발길은 눈속에 묻혔고, 우리 뒤를 따라 올라오던 트레커들은 안개속에 숨었다가 간혹 흐르는 구름이 엹어지면 나타나기도 했지만 너무 멀리 떨어져 갔다. 나의시야는 1m앞의 발자욱에 묶이고 그 냥 발길을 이어갔다. 아무런 이유도 없다. 합리도 사리도 판단도 없이 그냥 걸었다. 구름속에 잠시 나타났던 ABC는 아무리 걸어도 가까워져 오는 것 같지가 않고 어느새 짙은 구름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렇게 3시간을 걸으니 멀리 ABC 안내간판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기쁨 마음에 달려가 아내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캠프로 올라갔다.


ABC에 도착하자 한치 앞을 볼 수 없게 내리던 눈이 먼추고 잠시 구름이 물러났다. 역시 우리는 운이 좋았다. 눈때문에 산을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도 없이 올라왔는데 석양을 받고 황금빛으로 피어나는 마차푸차레와 안나푸르나가 우리를 반겨줬다. ABC는 나같은 일반인이 안나푸르나봉에 접근할 수 있는 최고의 한계다. 5분정도 걸어서 View Point까지 가면 숙소 보다 해발이 조금 더 높아지겠지만 하여튼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에서 안나푸르나정상으로 진입해 들어가기 위해서는 엄격한 기준에 따라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한단다. 몇명의 셀파에 적지않은 입산료, 보험료 등을 부담해야되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생명을 담보하지 않으면 접근할 수 없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캠프에 도착하니 롯지 두군데가 문을 열고 있었다. 호주팀을 다른 롯지로 가고 우리 부부는 파샹의 권유로 캠프입구 오른쪽 롯지에 들어섰다. 이어서 한국인 여성 한 분이 들어오고, 해가 떨어질 무렵 한국 청년 커플까지 도착했다. 방은 배정되었지만 아예 방을 둘러보지도 않았고 저녁내내 다이닝 룸에서 지냈다. 4,200미터의 고도 때문에 모두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부풀었고, 또 고산증의 위험때문에 술도 한잔 나눌 수 없었지만 모두다 추운 방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눈꼽만치도 없어 보였다. 급기야는 네팔 여행을 떠나와 처음으로 다이닝 룸의 길다란 의자에서 롯지 식구와 한국인 트레커 그리고 네팔리 포터들 까지 모두 같이 자기로 했다. 외국에서 오랫동안 노동자 생활을 하셨다는 사오지는 이불까지 내놓으면 편의를 봐주셨다. 이렇게 내 생애 최고의 고지에서 얇지만 편안한 잠을, 꿈길 사나왔지만 마음 따뜻한 밤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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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방은 없었지만 베시사하르 최고급이라는 호텔 투쿠체서 온수로 샤워를 하고 숙면을 취한뒤  예약한 아침을 먹기 위해 다이닝 룸으로 내려왔다. 전날 마이크로 버스 시간을 알아보고 8시 출발을 위해 7시 30분에 아침 식사를 예약해 둔 상태였다. 버스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배낭까지 다 챙겨 내려왔는데 호텔 종업원들은 그제사 움직이기 시작하는 눈치였다. 식사를 예약해 둔 시간을 넘기고도 전혀 서두는 기색이 없었다. 결국 시간은 촉박해지고 예약했던 메뉴를 취소하고 간단한 누들수프로 급히 아침 허기를 떼우고 호텔을 나섰다.  호텔 앞 도로에서 이내 도착한 마이크로 버스 지붕에 배낭을 싣었다. 마낭에서부터 계속 마주쳤던 호주 청년 커플도 같은 호텔에서 묵고 똑같이 아침을 기다리다 포기하고 같은 마이크로 버스에 짐을 싣었다. 


 
출발시간을 넘긴 마이크로버스는 승객에게 타라는 말도 없었고 다른 승객들로부터도 짐만 받아 지붕에 싣었다 . 짐을 싣던 버스는 우리에게 아무런 이야기도 없이 갑자기 출발해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어떤 상황인지 몰라 파샹에게 물어봐도 자기도 무슨 일인지 모르겠단다. 호주 커플은 우리를 쳐다보고 우리는 호주 커플을 쳐다보며 서로 지금 상황을 이해하고 공감하려 노력했지만 도대체 상황파악이 되질 않았다. 막 깨어나는 베시사하르 거리를 둘러보며 시간을 보냈지만 차가 떠난지 30분이 되어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도저히 더 참을 수가 없어 파샹을 앞세워 버스매표소로 가 물어보니 별거아닐거다, 차 기름 넣으러 간것 아니냐는 확실하지 않은 답변을 전해줬다.


더이상 자세한 상황 파악을 포기하고 버스가 떠난 자리가 시야에 들어오는 반경내에서 그냥 베시사하르 거리를 구경하고 있으니 9시 30분이 넘어 우리 배낭을 싣은 마이크로 버스가 원래 떠났던 자리로 되돌아왔다. 기사도 조수도 아무런 해명이 없고 1시간 30분을 기다린 네팔리들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표정이다. 출발시간이 어떻고 승객에게 사전 설명을 해야되는것 아니냐는 식의 논쟁은 전혀 성립할 수 없는 상황이다. 포카라에 오늘 가기만 하면 되는것 아니냐는 승객들의 느긋함이 부러웠다. 나역시 출발 시간을 아무 설명없이 1시간이상 기다리게 한 것에 대한 원망보다, 그나마 도망가지 않고 버스가 돌아와준게 어디냐는 안도감이 더 컸다.

버스는 이내 출발했지만 시가지를 벗어나기까지 조수는 계속 문짝에 메달려 '포카라'를 외쳤다. 몇명의 승객이 더 탔지만 남은 좌석이 한두개 남은 상태에서 시가지를 벗어났다. 한 5분이나 달렸을까 핸드폰을 받고 통화하던 기사는 갑자기 좁은 길을 억지로 유턴을 해 다시 베시사하르로 향했다. 시내에 들어선 버스는 한참을 달려 주택가 골목까지 들어가 중년부인 한분을 태웠다. 순전히 짐작이지만 사적으로 아는 사람의 연락을 받고 승객을 더 실으러 돌아온 것 같았다. 신기하게도 승객들은 여전히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었고 ,기사 역시 전혀 미안한 기색이 없었다. 버스를 예정시간보다 1시간 30분이나 늦게 출발시키거나, 버스의 노선을 벗어나 기사 마음대로 차를 운행해도 되는, 이 모든 것이 용납되는 네팔의 교통문화가 황당하고도 재미있었다.



베시사하르에서 포카라까지 이어지는 풍경은 슬픈 아름다움이 넘쳤다.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계단 논들, 흙먼지 날리는 길가의 낡은 주택들, 떼국물 떨어지는 아이들의 차림... 소읍을 지날 때마다 조수는 '포카라'를 외쳤고 나중에는 차 지붕까지 승객들이 올라탔다. 차창 밖으로 펼쳐진 네팔 농촌의 풍경을 사진기에 담고 싶었지만 좁아 터진 차 안에서 사진을 찍기에는 너무 힘들었다. 포카라로 가는 길에 펼쳐진 네팔 농촌의 풍경을 카메라가 아니라 내 눈을 통해 마음속에다 수천 컷이나 퍼 담았다. 그리고 나는 70년대 초반 철없던 소년으로 돌아가 한껏 뛰어 놀던 진해 장복산언저리의  닭소리, 개소리, 차소리, 아이들 소리를 듣고, 밥냄새, 똥냄새, 사람냄새 그리고 삶에서 묻어나는 모든 인간적인 요소가 뒤죽박죽 혼란스러운 속에서 애틋히 지켜나왔을 사람의 따사로운 온기를 느끼며 졸고 있었다.


버스는 베시사하르를 떠난 지 3시간만에 포카라에 접어 들었다. 포카라로 들어서는 진입로를 따라 한무리의 시위대가 지나갔다. 또 얼마를 달리니 각가지 전통의상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행진하고 있었는데 구릉족의 민족 축제가 열리고 있다고 했다. 드디어 활력이 넘치는 도시다운 도시, 포카라에 도착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포카라 표지판을 본지 한참을 지나서야 시내 한 복판에 버스는 섰고, 승객들 대부분은 종점이 어딘질 몰라 내리기를 망설였다. 파샹 역시 버스를 타고 포카라에 와 본적이 없는 표정이다. 조수의 알아들을 수 없는 고함소리를 듣고서야 파샹과 버스를 내리고 지붕위의 배낭을 받아내렸다. 순간 우리는 일군의 사람들로 포위되었다. 택시기사며 호텔 메니저라는 사람들이 제각각 뭐라고 외치면서 명함을 건네고 우리 배낭을 잡아 당겼다. 상황파악이 안되는 중에 파샹은 우리보다 더 당황스런 표정이다. 이들을 완전히 물리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고, 자의반 타의반으로 올라탄 택시는 우리 일행과 자칭 호텔 메니저라는 사람을 싣고 포카라의 최종 목적지 레이크사이드로 향했다. 뒤돌아보니 버스를 내렸던 거리가 Prithri Chowk였다.
카트만두보다는 그래도 잘 정비되고 쓰레기도 덜한 포카라 시내를 가로질러 트레커들의 본거지인 레이크 사이들를 향해 택시는 달렸다. 쏘롱아를 넘어 서너번 정도 포카라에 왔던 적이 있다는 파샹은 서울에 올라온 촌 아이처럼 들떤 표정이었고, 연신 고개를 두리번 거리며 도시 풍경에 빠져들었다.


택시는 이내 레이크 사이드의 한 호텔에 도착했다. 호텔의 스텝들이 대하는 것으로 비추어 볼 때 호텔메니저라며 우리와 같이 동행한 사람은 사실 이 호텔의 스텝이 아니라 그냥 거리의 삐끼였다. 그들 끼리 한참을 수근거린 뒤에야 온수 샤워가 가능한 룸의 숙박료가 1층은 8불, 2층은 10불, 3층은 15불이라며, 2층은 레이크만 보이고 3층은 안나푸르나와 레이크를 다 볼 수 있다고 했다. 나는 호텔 마당에서 배낭을 지키고 있고, 아내만 룸을 보러 올려보냈다. 이왕이면 조망이 좋은 방을 얻을 생각이었지만 황당하게도 2,3층 방은 모두 예약이 끝나버렸다고 했다. 사실 이미 레이크 사이드에 도착했으니 널린게 호텔이라 우리는 아무 걱정이 없었지만 우리를 안내한 '삐끼'는 당황스런 기색이 역력했다. 연신 'My mistake. I'm Sorry!'를 외치며 이 호텔보다 더 좋은 조건의 다른 호텔로 안내하겠다며 앞장을 섰다. 


폭설로 안나푸르나 라운드 코스가 막히면서 많은 트레커들이 포카라로 몰려와 비수기임에도 호텔이 거의 만원이라고 했다.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바로 옆에 있는 Touch Nepal Hotel에 방을 얻었다. 숙박비 1,000루피에 핫샤워가 가능하고, 학국 음식을 먹을 수 있고 한국인이 운영하는 '산촌다람쥐'가 바로 붙어 있었다. 스텝이 이끄는 데로 호텔 뒷편으로 이어진 흐름한 식당으로 따라가니 한국음식 냄새가 확 느껴졌다. 산촌다람쥐 주인장을 소개받고 다시 호텔 룸으로 돌아와 짐을 풀었다. 호텔은 단체 어린이 손님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아이들이 떼거리로 호텔 복도를 몰려다니고, 잘 보인다던 페와 호수는 아예 보이질 않았고, 안나푸르나 연봉은 산정상만 조그만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날이 저물기 전에 서둘러 호텔을 나섰다. 산촌다람쥐에서 늦은 점심으로 돼지제육볶음을 먹고 말로만 들어오던 레이크사이드 거리를 돌아 페와 호수가를 걸었다. 포카라는 안나푸르나를 찾는 외국인 들이 꼭 거쳐가야만하는 네팔 최고의 현대 도시이자 관광의 중심지라고 했다. 하지만 현대적인 도시라고 하기에는 너무 낙후되었고 호텔 방이 동이날만치 많은 트레커들이 몰려왔다고 했지만 거리는 한산했다. 안나푸르나 산속에 오래 머물다 내려온 사람들에게 포카라는 분명 파라다이스같은 도시로 다가갔을 것이지만, 나는 아직 현대문명이 그렇게 반가울 만치 오래 산속에 있지도 않았고, 포카라를 즐길만한 마음의 준비도 없었다. 쇼핑말고는 또 무엇을 할지 망설이다가 날이 저물고, 점심때 먹은 돼지고기 제육볶음에 반한 파샹이 다시 원하는 'Korean Food'을 찾아 산촌다람쥐로 돌아왔다.


저녁을 먹고 올라간 룸에는 잘 나온다던 온수가 어느 수도꼭지에서도 나오질 않았고 전기는 사위가 어두워진뒤 한참만에야 들어왔다. 사설전기에 연결된 희미한 보조등 하나에 의지해 룸에 머물렀지만 레이크 사이드 거리는 암흑천지로 변했다. 날이 저물면서 시작한 비는 어느새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우로 바뀌고 바람마져 거칠게 호텔 창을 두드리니 호텔 룸이 영락없는 감옥같이 느껴졌다. 레이크사이드 거리는 불빛 하나없이 완전히 문을 닫았고 우리가 머무는 호텔은 로비나 다이닝 룸이 휴식을 취할 만한 시설이 못되었다. 비가 때리는 창 넘어 번쩍이는 번개빛에 드러나는 도시의 윤곽 넘어 눈속에 묻혀있을 안나푸르나를 걱정했다. '눈때문에 안나푸르나 라운드를 포기 했는데, 이러다간 ABC(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코스 마저 포기해야되는거 아닌가?' 걱정을 안고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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