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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2C 외씨버선길 개발을 위한 제주올레 체험연수를 떠나다.

2010년 5월 13일 아침, 안동상공회의소 마당에 차를 세우고 대절한 버스에 올랐다. 일행은 모두 스무명 남짓, 봉화군과 영양군, 영월군과 청송군에서 공무원 14명과 민간인 4명해서 18명이 함께했고, 그리고 인솔자인 경북북부연구원 사무국장이 같이했다.
대구공항에서 경북대 권오상 교수가 합류하고, 제주공항에 도착하자 생산성본부 관계자 가 합류하고 저녁에 따로 합류하신 분까지 합쳐 일행은 총 25명이 되었다.

이번 제주행의 목적은 경북 북부지역의 낙후지역으로 알려진  봉화,영양,영월,청송의 4개군이 합쳐 청정 오지라는 지역조건에 맞는 걷기길을 만들어 나가는데 제주 올레길의 성공사례를 배우는 것이다. 걷기가 붐이되고, 지리산 둘레길, 북한산 둘레길, 소백산자락길, 부안 마실길 등
전국에 갖가지 걷기길이 생겨나는 시점에 BY2C라 불리는 4개군도 가칭 '외씨버선길'이라는 걷기 길을 추진하기 위해서란다. 그동안 몇번의 심포와 회의가 있었다고 했지만 참가하지 못했고 간접적으로 그런 길을 만든다는 소식만 들어오다 이번 제주 올레길 탐방길에 따라 나서게 된 것이다.

어쩌면 2여년동안 드문드문이지만 마을걷기를 하고 
그 소식을 마을 홈페이지 등에 올려온 까닭에 봉화군청의 
업무관계자가 청해준 것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담당자는
내가 이번 연수에 따라 나서게 된 것은 그런 연유가 아니라고 했다.  
1년전 제주 올레길을 맛만 보고 언제 다시 차근차근히
걷고 싶은 마음이 마음 한구석에 있었기 때문에
청을 쉬 받아들여 이날 여정에 함께하게 되었다.


연수일정은 1일차에 올레7코스를 걷고, 밤에 워크삽을 가지고
2일차에는 오전에 사단법인 제주올레의 안은주선생으로 부터 
'올레기획의 의의와 지역사회의 변화'라는 내용의 강의 듣고
오후에는 10코스를 걷는 것으로 짜여져 있었다. 
전체적으로 빡빡한 일정이었지만 올레길을 걷게된다는 기대와
우선 봄날 제주도를 다녀올 수 있다는 기대만으로도 
가슴부푼 여정이 되었다.


숙소인 풍림리조트에 도착하자마자 짐도 풀지 못한채 올레를 나섰다.
올레길 7코스는 외돌개에서 월평항구까지 총 15km의 코스지만 
풍림리조트가 그 코스 중간에 있는 까닭에 풍림리조트에서 역으로
7코스의 출발점인 외돌개로 방향을 잡았다.
일행이 대부분 산골에 사는 분들이라서 그런지
단지 바닷가를 걷는다는 것 만으로도 다들 상기된 표정이셨다.
처음부터 올레길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올레길이 인기를 끌면서 갑자기 영업에도 큰 도움도 얻게되었던
풍림리조트는 올레길 관련한 안내데스크나 물품기증테이블, 올레우체국등을 운영하고,
무료셔틀 버스를 운행하고 화장실까지 개방하였다.
그와같은 취지로 개방한 풍림리조트의 정원을 통해
바닷길을 걷기 시작했다.
청명한 하늘을 지고 따갑지 않은 봄햇살을 받으며
맘껏 바닷바람을 쐬며 걷는 올렛길은 편안했고 평화로웠다.
멈추면 살아나는 걱정거리도 길을 가면 다 가벼워지는가보다.
사실 쉼없이 마주치고, 스쳐지나가는 올레꾼은 다 나름의 사연을 안고 살아가고
그만큼의 고뇌와 삶의 짐을 지고 있겠지만
길위에서만은 순례를 떠나는 도반들 모양 한가지로 평화로운 표정이었다.


좁고 험한 길도 있고,  길같지 않은 해안을 걷기도 했지만 누구도 길을 문제라고 느끼지 않았다. 간혹가다 굴러다니는 쓰레기와 쉼없이 마주치고 스쳐지나가는 올레꾼들이 사실 조금은 성가시게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어디 이런 길을 혼자만의 호젓한 길로 누릴 수 있단 말인가! 
사실 올레 7코스는풍림리조트와 월평포구사이의 강정항에 해군기지가 들어오는 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평화의 길에 군사기지가 들어오는 계획이 철회되고 다시 평화로운 바닷마을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평화에대한 기원으로 피어올랐다. 어쩌면 나중에 올레길 7코스는 '평화의 길'로 재명명될지도 모를 일이다.  


7코스 앞 바다에 떠있는 범섬을 바라다보며 걷다보면 법환포구가 나오고 이어서 수봉로와 수봉교를 지났다. 수붕교를 지나자 얼마 안있어 서귀포여고인근에서 이날 길걷기는 접게되었지만 누구도 외돌개까지 걷지 않게된 것을 탓하지도 않았고 그냥 넉넉한 표정들이셨다. 걷기가 더이상 싫어서일까 아니면 그만치 걸은 것만으로도 마음의 풍요를 한껏 느길 수 있었기 때문일까?  올레길을 벗어나 우리 일행을 싣기 위해 불러놓은 버스에 몸을 싣고 숙소로 향하는 길은 고단했지만 편안했고 아쉬웠지만 섭섭하지 않았다. 일정이 일부 어긋나면서 첫날의 여정을 다하지 못했지만  7코스를 걷고 돌아가는 나의 뇌리에는 걷기 길에 대한 이러저런 상념들이 떠올랐다.


걷기가 붐인 것은 확실한데, 일시적일까 지속적일까? 제주올레길이 성공했다고 각 지자체마다 이런저런 걷기길을 만드는 게 붐이다. 이제 우리 봉화에도 걷기길을 만들려고 하는데 사실 너무 늦은 것은 아닐까? 도대체 봉화는 어떤 테마의 걷기 길이 가능하고, 어떻게 만들어 나가야 올레길처럼 환경친화적이고 주민참여적인 프로그램으로 안착할 수 있을까? 사실 이번 연수는 그와같은 물음에 대한 답의 실마리를 찾기 위한 것이었지만 두어코스 걸기로 그 실마리를 얻기는 애시당초 불가능했다. 하지만 안을 만들기 이전에 기본적인 전제들, 기초해야될 가치들, 실행단계에서 지켜야될 원칙들에 대한 생각만이라도 정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저런 생각이 이어지고 버스는 숙소에 도착했다. 첫날의 일정은 저녁 시간에 생산성본부의 정혜선박사님의 강의를 마지막으로 끝맺음을 했다. 


2박3일중 둘째날은 사실 여행일정상으로도 보면 가장 중요한 날이다.
오는 날, 가는 날이 아니라 온전히 하루를 통으로 영행에 받칠 수 잇는 날이기 때문이다.
아니나다를까 이날 일정은 아침식사가 끝나자마자 사단법인 제주올레의 안은주 선생의 강의로 시작되었다.  안은주 선생의 강의 내용을 다 정리할 수 없지만
먼저 제주 올레길의 현황에 대한 걸로 성공리에 지역사회에 정착해 들어가고 있다는 점과
두번째 그와같은 성공을 위해 견지했던 원칙들에 대한 태도로 집약되었다.
먼저 작년에 제주 전체 관광객은 약 540만명이었는데 그중 5%정도가 순수한 올레꾼이란다. 2007년개장 원년에 약 3000명이 걸었던 올레길이 2009년에 25만명이상이 걷게 되었고 올해는 아마 작년의 2배에 이를 것으로 짐작된다. 올레길에 들어간 예산 대비 관광객 유치 효과로 본다면 어떤 사례와도 비교할 수 없는 성공작임이 분명하다. 사실 제주는 비싸고 개발된 관광지로 인식되면서 한때 관광객이 줄고 특히 생태를 중시하는 젊은 여행마니아들로부터 외면받아온 게 사실이다. 올레길은 단순히 년 20만명의 제주 관광객을 늘인 것 만으로는 그 의의를 다 평할 수 없고 오히려 부수적으로 제주의 그런 부정적 이미지를 일소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된 점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제주올레는 2009년 한국의 10대 히트상품에 선정되었다. 제주 올레는 어느새 단순한 길이 아니고, 제주가 나아갈 길, 어쩌면 인류의 미래로 통하는 새로운 트랜드, 새로운 가치로 통하는 시대의 길인지도 모른다. 
아직까지 우리사회는 토건국가로 개발독재적 발상이 통용되는 휘귀한 나라에서 여성적인 감수성과 생태주의를 가치기반으로하고, 그리고 목적이 아니라 과정을 소중히 여기는 올레길이 이처럼 붐을 일으킨다는 것은 어쩌면 새로운 시대의 문에 우리사회가 들어섰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올레길을 통해 제주는 단기관광에서 장기 체류형관광으로, 단체관광에서 개별관광으로, 그리고 대중교통을 이용한 관광으로 급속히 자귀기 시작했고, 길을 따라 게스트하우스와 구멍가게가 증가하고 궁극적으로는 마을이 활성화되는 엄청난 변화를 격고 있다.
단적으로 서귀포만 보드라도 재래시장 매출이 17%나 증가하고, 적자를 면치 못했던 공용버스의 승객이 400%나 증가했다. 그러다보니 서귀포재래시장을 '서귀포올레시장'으로 이름을 바꾸게 되었고, 올레길을 처음 시작한 서명숙 이사장의 고향집이 있기도 했던 서귀포시장에는 설립자의 고향집이던 '서명숙상회'를 복원해서 올레 관련 기념품가계로 상인회에서 운영하기로 했단다. 길거리 마다 '올레'가 들어간 상호가 늘어나고 아침식사를 제공하는 식당이 늘어나고, 올레짐꾼(올레꾼 짐 배달서비스)같이 올레꾼을 대상으로한 갖가지 일자리마저 생겨나게 되었다. 그뿐아니라 올레관련한 다양한 기념품과 문화상품이 개발되고, 이렇게 개발된 상품은 지역사회에 일자리를 제공하고 활력을 부어넣는 사회적 기업을 탄생시켰다. 
한국관광, 나아가 한국사회의 미래를 볼려면 바로 올레길이 가리키는 곳을 보면된다고 할 수 있을 만치 올레길은 관과상품을 넘어 한시대의 조류를 형성하는 문화아이콘이자 시대의 트랜드마크가 된 셈이다. 


올레길이 그처럼 단기간에 주요한 문화적 현상으로 자리잡게 되는데는 설립자들의 올곳은 가치관과 이를 견지하기 위한 사업의 원칙이 있었음을 알수 있었다. 그들이 제시하는 올레길을 만드는 원칙은 사실 대단한 것이 아니지만 근본적인 것이었고, 소소한 것이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것들이었다. 가능한한 있는 길을 이용하고, 그리고 사라진 옛길을 찾고, 새길을 만들어도 곂코 노폭은 1m이상으로 만들지 않고, 개인소유의 당을 지나는 길도 가능하면 올레가 소유하지 않고 오직 통행만 보장받는가 하면, 화장실 등 기초 인프라도 최대한 기존 시설을 개방하게하여 지역 사회가 올레길을 만드는 일에 참여하도록 끌여들였다. 차라리 매입을 하고 예산을 다내어 시설을 건설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지만 제주올레는 이 어려움을 마다않고 감수하면서 오늘의 올레가 가능하도록 만든것이다.


오전 강의를 마치고 오후는 화순항에서 식사와 함께 올레길 10코스 걷기를 나섰다.응회암으로 이루어진 해안절벽을 따라걷고, 산방산을 오르고, 하멜 전시관을 지나, 사계화석발견지, 마라도선착장, 그리고 송악산과 알뜨르비행장을 지나 모슬포항까지 이어지는 10코스는 전날 걸은 7코스와는 달리 바다와 산이 어우러진 길이었다. 바닷가를 걷는 멋과 산길을 걷는 흥을 함께 느낄 수 있었던 송악산길은 비록 험했지만 힘든지 몰랐다. 말을 방목하는 목장을 가로지르고 평지로 내려선 뒤 도로를 따라 알뜨르비행장과 모슬포항으로 이어지는 길 어디쯤에서, 뒤에 쳐진 일행을 실은 버스를 만나 10코스 걷기가 마무리되었다.  


2박 3일이지만 결코 짧지 않은 일정이 마무리단계에 접어들면서 연수의 목적인 봉화,영양, 영월, 청송을 잇는 외씨버선길을 어떻게 만들어 나갈 건지에 대한 고민이 되살아났다.
무엇보다 먼저 지금 걷기붐이 일어나게된 시대적 흐름, 가치의 변화에 주목하고 올레길이 성공할 수 있었던 사업의 발상에서부터 조직, 추진 원칙과 가치지향 등 어느 것 하나도 놓치지 않고 세밀히 검토한 뒤 꼭 '외씨버선길'이 필요하거나 가능하다고 판단되었을 때 시작해야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다른 사업들처럼 예산먼저 따고 그 돈을 어떻게 쓸것인지를 고민하는 과정이 반복된다면 결코 외씨버선길을 성공할 수가 없을 것이다. 왜 해야하고 어떻게 하면되는지 먼저 이해하고 그렇지 않다면 과감히 포기할 수도 있는 열린 자세로 사업에 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걷기 길은 단순한 관광아이템이 아니라 새로운 '가치'의 실현이라는 핵심토대를 놓치지 않는 사업 과정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여정에서 막 돌아 온 지금 아직까지 생각은 정리되지않고 산만한 상념만 남아있지만 오래시간 곱씹고 자료를 찾고 고민하는 과정이 뒤따른다면 비록 외씨버선길이 후발주자지만 그래서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것이라 생각해 본다.   

마을사업에 관여한지 10여년만에 처음 접한  완벽한 지역사업 성공사례인 올레길을 만날 수 있은 것은 나에게 큰 행운이었다.  행복했던 여행의 기억을 가져다 준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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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3월 29일
전날 저녁에 있은 전시 오픈과 저녁 술자리에도 불구하고
또 하루의 걸음을 위해 일찍 눈을 떳다.
간단한 아침을 먹고 카멜리아힐을 나서 무조건 한라산쪽으로 향했다.
등산정보도 없고 정확한 길도 모르지만
마냥 북동쪽으로 걷다보면 한라산이 나온다는 무모한 믿음하나에 의지한채
이날 하루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길을 나선지  1시간 만에 1115번길을 만나 다시 남동쪽으로 방향을 잡아 탐라대학교방향으로 계속걸었다. 길을 가며 도로표지판에 의지해 한라산을 찾는 무모한 짓을 포기할 때즘 이미 점심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무작정 길가는 차를 향해 손을 들었지만 다 지나가고 마침 택시 한대가 정차했다.  '한라산 갑시다!'는 저의 무모한 요구에 기사님 왈 이미 입산시간이 지났고, 한라산이 그렇게 뒷동산오르듯 만만한 산이 아니란다. 차라리 가까운 윗세오름이라고 한라산의 두번째 봉우리를 오르는게 나을 거란다.  그리고 본인은 사정상 그쪽 손님을 태울 수가 없고 동료를 불러주겠단다. 택시가 떠나고 또 한참을 걷다가 떠나간 택시 기사의 동료로부터 전화가 오고 곧 택시도 왔다.



택시비 2만원에 영실탐방로 입구까지 도착했다. 단체 등산객으로 보이는 무리들과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 그리고 가족 연인단위의 등산객으로 등산로가 미어터졌다. 입구 휴계소에서 우동을 한그릇씩 먹고  사람들의 발길에 휩쓸려 윗세오름을 향했다.  사람들이 많아도 산은 산대로 산다웠고 이어지는 등산로는 비록 가파른 곳도 많았지만 힘겹거나 지루한 코스는  거의 없었다. 멀리 서귀포를 넘어 태평양이 내려다보이는 등산로를 걷는 재미는 아름다운 산세와 더불어 등산객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주기에 충분했고 걷거 또 걸었지만 지치지 않았다. 정상에 오르고 초원이 펼쳐진 사이로 설치된 데크를 따라 한참을 걷기도 했는데, 정상부근에서 시작한 눈발을 맞으며  하산 코스를 어리묵탐방로로 잡았다. 한라산을 맛만본 두세시간의 등반과 하산으로 많은 아쉬움이 남았지만 윗세오름이 준 인상은 깊었고 그만치 많은 기억으로 남았다.


어리묵탐방로 안내소까지 내려와 서귀포행 버스를 기다렸다.
많은 사람들이 같이 길을 걸었지만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대부분 단체버스를 이용하던지 아니면 등반을 시작한 코스로 다시 하산을 했기때문이다.
서귀포로 향하는 길은 거의 롤러코스트 같았고 기사님은 무뚝뚝했다.
올레길 8코스를 맛보기위해 적당한 하차지점을 물었지만 대답은 없었고
무조건 중문단지에 하차를 하고 바다를 향해 걸었다.


제주 컨벤션센타를 만나고 왼쪽으로 길을 바꾸자 얼마안있어 아프리카 박물관이 나오고
다시 뒤돌아 주상절리가 유명한 열리해안길을 따라 걸고
다시 컨벤션센타를 오른쪽으로 끼고 중문해수욕장 쪽으로 향했다.
성천포구에서 중문해녀의 집을 만나 회도 한접시 맛보고
다시 해거름이 내릴 때까지 1100번 도로를 따라 북상하기 시작했다.
베릿내 오름을 따라난 계곡을 내려다보며  길을 걷다가 천제연폭포를 지나고
여미지 식물원도 지났다. 다 보고 싶은 곳이지만 이미 영업시간이 끝나 그냥 스쳐지나갔다.


내일이면 제주를 떠나 다시 일상의 늪으로 돌아가야한다는 강박때문일까.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길을 그곳이 정확히 어딘지도
또 어디로 향하는 길위인지도 확인하지 않은채
한참을 걷고 또 걸었다.
어둠이 두터워지고 허기가 진 뒤에야 
택시를 타고 숙소인 카멜리아 힐로 돌아왔다.
너무 많은 것은 보고 겪은 하루는 잘 정리되지 않았지만
밤은 깊고 잠은 편안했다.

그렇게 3박4일간의 제주 여행은 끝이나고 
대구행 비행기에 올라 다시 돌아올 일상을 생각했다.
언제까지 무엇을 해야하고, 
결제일은 언제고 그리고 누굴 만나야하고...
집나간 주인을 기다리는 '일상'의 충성심에 치가 떨리지만
그렇게 또 고스란히  나의 삶은 보전되고 이어지게되니 뭐 세상살이가 그렇커니 해야되겠지...
달라진 것 하나 없는 일상을 시작하며 또 다시 나그네의 모습으로 올레길을 걷는 나 자신을 만나보고 말거라는 대책없는 계획을 세웠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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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을 주제로한 리조트에서 가진 동백을 주제로한 전시회

2009 3월 제주도 서귀포에 위치한 리조트 카멜리아힐(http://www.camelliahill.co.kr/)의 부대시설인 [갤러리 카멜리아]에서 동백꽃을 주제로 한 전시회가 있었다

8천년 동안의 봄, 다시 8천년 동안의 가을 – 동백언덕을 노닐다

2009. 3. 28 () ~ 6. 14()

리조트 카멜리아 힐 內 갤러리 카멜리아

강석문, 김경신, 노석미, 류준화, 박형진, 최혜인, 황희진


카멜리아 힐은 5만여평의 정원을 20여년을 가꾸어 온 양언보 사장의 일생의 역작이다. 전시회에 맞춰 참여 작가의 가족까지 초청해주신 양언보사장과의 식사자리에서 간략하게 나마 카멜리아힐의 역사에 대해 들을 수 있었지만 한 명의 농부가 지금의 카멜리아힐을 일궈내는 과정은 짧은 식사자리에서 나눈 담소 정도로 다 전해 듣는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할 것이다. 남들 다 감귤 농사에 올인 할 때, 그리고 감귤 농사가 한창 큰 돈이 될 때 양사장은 감귤 나무를 베어내기 시작했고 그 자리에 동백을 심었다고 한다. 주위의 만류와 어리석은 짓에 대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동백나무를 심은 것은 단지 동백나무에 매료되어 그 아름다움에 빠져버린 자신의 내면의 욕구에 따른 것일 뿐이란다. 물론 농장 외의 다른 사업을 벌여가며 돈을 벌어야 했지만 그렇게 벌어들인 돈도 고스란히 감귤농장을 지금의 [카멜리아힐]로 바꿔나가는데 밀어 넣었단다. 그렇게 20년의 세월을 받쳐 지금은 서귀포의 한 명소로 자리잡을 카멜리아 힐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단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했을 뿐인데 결과적으로 사업적 성과도 낳은 경우를 언론 등을 통해 종종 접하게 되는 데 바로 카멜리아힐이 그 대표적인 경우의 하나인 것이다.

 


34일동안 머문 카멜리아 힐은 그야말로 동백정원이었다. 겨울의 여왕이라 불리는 동백을 전세계를 누비며 5백여종의 희귀종까지 모아 동백정원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은 한편의 드라마 같았을 것이지만 그 과정이 힘들었을 만치 지금의 그 결과물은 희양찬란 했다. 국내 유일의 동백을 테마로 한 리조트인 카멜리아힐에는 물론 동백나무만 있는 것은 아니다. 구석구석 돌 하나, 풀꽃 하나까지 정성을 다해 가꾸어 놓은 정원은 그렇다고 드러나게 인공적이지도 않았다. 화려한 동백꽃과 어우러진 정원의 아름다움은 그 공간에 들어 오는 모든 사람이 단지 그 사실 만으로 자신의 존재감이 고양됨을 느끼고 그리고 삶과 세상의 존귀함을 느끼게 해 주었다 그것은 자연과 인공의 조화의 극치를 보여주는 아름다움의 힘인지 모르겠다.


카멜리아힐이 오랜 준비기간을 걸치면서 일부 시설이 완비되는대로 이용이 되어 왔지만 2008년 11월이 되어서야 최종적으로 완공되었다. 화려한 준공식을 가진뒤 얼마되지 않은 시점에 동백을 주제로한 리조트인 카멜리아힐에서 동백을 주제로한 전시회를 가지게 된 것은 어쩌면 참 자연스럽고 꼭 필요한 일이기도 했다.
한국의 현대미술을 이끄는 젊은 작가들과 함께 [동백언덕을 노닐다]전에 작가의 한명으로 참가한 와이프 덕에 농부의 한명으로 성공적인 삶을 살아오신 카멜리아 힐 양언보 사장민도 만나고, 아름다운 카멜리아 힐에 매료되기도 했지만 사실 가장 큰 수확은 다른데 있었다.
바로 카멜리아힐을 노닐면서 자연스럽게 제주 올레길로 접어들었다는 사실이다. 올레길에 대한 사전 정보를 가지고 전시여행을 우리 부부의 올레길 걷기 여행으로 계획을 세웠지만 사실 막연하고 확정적이지도 않았었다. 하지만 동백길을 걷는 재미가 쉬 올레길을 걷을 용기를 가져다 주었고 그리고 마침내 카멜리아 힐을 나와 올레길 10코스를 항해 걸음을 옮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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