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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방은 없었지만 베시사하르 최고급이라는 호텔 투쿠체서 온수로 샤워를 하고 숙면을 취한뒤  예약한 아침을 먹기 위해 다이닝 룸으로 내려왔다. 전날 마이크로 버스 시간을 알아보고 8시 출발을 위해 7시 30분에 아침 식사를 예약해 둔 상태였다. 버스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배낭까지 다 챙겨 내려왔는데 호텔 종업원들은 그제사 움직이기 시작하는 눈치였다. 식사를 예약해 둔 시간을 넘기고도 전혀 서두는 기색이 없었다. 결국 시간은 촉박해지고 예약했던 메뉴를 취소하고 간단한 누들수프로 급히 아침 허기를 떼우고 호텔을 나섰다.  호텔 앞 도로에서 이내 도착한 마이크로 버스 지붕에 배낭을 싣었다. 마낭에서부터 계속 마주쳤던 호주 청년 커플도 같은 호텔에서 묵고 똑같이 아침을 기다리다 포기하고 같은 마이크로 버스에 짐을 싣었다. 


 
출발시간을 넘긴 마이크로버스는 승객에게 타라는 말도 없었고 다른 승객들로부터도 짐만 받아 지붕에 싣었다 . 짐을 싣던 버스는 우리에게 아무런 이야기도 없이 갑자기 출발해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어떤 상황인지 몰라 파샹에게 물어봐도 자기도 무슨 일인지 모르겠단다. 호주 커플은 우리를 쳐다보고 우리는 호주 커플을 쳐다보며 서로 지금 상황을 이해하고 공감하려 노력했지만 도대체 상황파악이 되질 않았다. 막 깨어나는 베시사하르 거리를 둘러보며 시간을 보냈지만 차가 떠난지 30분이 되어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도저히 더 참을 수가 없어 파샹을 앞세워 버스매표소로 가 물어보니 별거아닐거다, 차 기름 넣으러 간것 아니냐는 확실하지 않은 답변을 전해줬다.


더이상 자세한 상황 파악을 포기하고 버스가 떠난 자리가 시야에 들어오는 반경내에서 그냥 베시사하르 거리를 구경하고 있으니 9시 30분이 넘어 우리 배낭을 싣은 마이크로 버스가 원래 떠났던 자리로 되돌아왔다. 기사도 조수도 아무런 해명이 없고 1시간 30분을 기다린 네팔리들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표정이다. 출발시간이 어떻고 승객에게 사전 설명을 해야되는것 아니냐는 식의 논쟁은 전혀 성립할 수 없는 상황이다. 포카라에 오늘 가기만 하면 되는것 아니냐는 승객들의 느긋함이 부러웠다. 나역시 출발 시간을 아무 설명없이 1시간이상 기다리게 한 것에 대한 원망보다, 그나마 도망가지 않고 버스가 돌아와준게 어디냐는 안도감이 더 컸다.

버스는 이내 출발했지만 시가지를 벗어나기까지 조수는 계속 문짝에 메달려 '포카라'를 외쳤다. 몇명의 승객이 더 탔지만 남은 좌석이 한두개 남은 상태에서 시가지를 벗어났다. 한 5분이나 달렸을까 핸드폰을 받고 통화하던 기사는 갑자기 좁은 길을 억지로 유턴을 해 다시 베시사하르로 향했다. 시내에 들어선 버스는 한참을 달려 주택가 골목까지 들어가 중년부인 한분을 태웠다. 순전히 짐작이지만 사적으로 아는 사람의 연락을 받고 승객을 더 실으러 돌아온 것 같았다. 신기하게도 승객들은 여전히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었고 ,기사 역시 전혀 미안한 기색이 없었다. 버스를 예정시간보다 1시간 30분이나 늦게 출발시키거나, 버스의 노선을 벗어나 기사 마음대로 차를 운행해도 되는, 이 모든 것이 용납되는 네팔의 교통문화가 황당하고도 재미있었다.



베시사하르에서 포카라까지 이어지는 풍경은 슬픈 아름다움이 넘쳤다.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계단 논들, 흙먼지 날리는 길가의 낡은 주택들, 떼국물 떨어지는 아이들의 차림... 소읍을 지날 때마다 조수는 '포카라'를 외쳤고 나중에는 차 지붕까지 승객들이 올라탔다. 차창 밖으로 펼쳐진 네팔 농촌의 풍경을 사진기에 담고 싶었지만 좁아 터진 차 안에서 사진을 찍기에는 너무 힘들었다. 포카라로 가는 길에 펼쳐진 네팔 농촌의 풍경을 카메라가 아니라 내 눈을 통해 마음속에다 수천 컷이나 퍼 담았다. 그리고 나는 70년대 초반 철없던 소년으로 돌아가 한껏 뛰어 놀던 진해 장복산언저리의  닭소리, 개소리, 차소리, 아이들 소리를 듣고, 밥냄새, 똥냄새, 사람냄새 그리고 삶에서 묻어나는 모든 인간적인 요소가 뒤죽박죽 혼란스러운 속에서 애틋히 지켜나왔을 사람의 따사로운 온기를 느끼며 졸고 있었다.


버스는 베시사하르를 떠난 지 3시간만에 포카라에 접어 들었다. 포카라로 들어서는 진입로를 따라 한무리의 시위대가 지나갔다. 또 얼마를 달리니 각가지 전통의상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행진하고 있었는데 구릉족의 민족 축제가 열리고 있다고 했다. 드디어 활력이 넘치는 도시다운 도시, 포카라에 도착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포카라 표지판을 본지 한참을 지나서야 시내 한 복판에 버스는 섰고, 승객들 대부분은 종점이 어딘질 몰라 내리기를 망설였다. 파샹 역시 버스를 타고 포카라에 와 본적이 없는 표정이다. 조수의 알아들을 수 없는 고함소리를 듣고서야 파샹과 버스를 내리고 지붕위의 배낭을 받아내렸다. 순간 우리는 일군의 사람들로 포위되었다. 택시기사며 호텔 메니저라는 사람들이 제각각 뭐라고 외치면서 명함을 건네고 우리 배낭을 잡아 당겼다. 상황파악이 안되는 중에 파샹은 우리보다 더 당황스런 표정이다. 이들을 완전히 물리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고, 자의반 타의반으로 올라탄 택시는 우리 일행과 자칭 호텔 메니저라는 사람을 싣고 포카라의 최종 목적지 레이크사이드로 향했다. 뒤돌아보니 버스를 내렸던 거리가 Prithri Chowk였다.
카트만두보다는 그래도 잘 정비되고 쓰레기도 덜한 포카라 시내를 가로질러 트레커들의 본거지인 레이크 사이들를 향해 택시는 달렸다. 쏘롱아를 넘어 서너번 정도 포카라에 왔던 적이 있다는 파샹은 서울에 올라온 촌 아이처럼 들떤 표정이었고, 연신 고개를 두리번 거리며 도시 풍경에 빠져들었다.


택시는 이내 레이크 사이드의 한 호텔에 도착했다. 호텔의 스텝들이 대하는 것으로 비추어 볼 때 호텔메니저라며 우리와 같이 동행한 사람은 사실 이 호텔의 스텝이 아니라 그냥 거리의 삐끼였다. 그들 끼리 한참을 수근거린 뒤에야 온수 샤워가 가능한 룸의 숙박료가 1층은 8불, 2층은 10불, 3층은 15불이라며, 2층은 레이크만 보이고 3층은 안나푸르나와 레이크를 다 볼 수 있다고 했다. 나는 호텔 마당에서 배낭을 지키고 있고, 아내만 룸을 보러 올려보냈다. 이왕이면 조망이 좋은 방을 얻을 생각이었지만 황당하게도 2,3층 방은 모두 예약이 끝나버렸다고 했다. 사실 이미 레이크 사이드에 도착했으니 널린게 호텔이라 우리는 아무 걱정이 없었지만 우리를 안내한 '삐끼'는 당황스런 기색이 역력했다. 연신 'My mistake. I'm Sorry!'를 외치며 이 호텔보다 더 좋은 조건의 다른 호텔로 안내하겠다며 앞장을 섰다. 


폭설로 안나푸르나 라운드 코스가 막히면서 많은 트레커들이 포카라로 몰려와 비수기임에도 호텔이 거의 만원이라고 했다.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바로 옆에 있는 Touch Nepal Hotel에 방을 얻었다. 숙박비 1,000루피에 핫샤워가 가능하고, 학국 음식을 먹을 수 있고 한국인이 운영하는 '산촌다람쥐'가 바로 붙어 있었다. 스텝이 이끄는 데로 호텔 뒷편으로 이어진 흐름한 식당으로 따라가니 한국음식 냄새가 확 느껴졌다. 산촌다람쥐 주인장을 소개받고 다시 호텔 룸으로 돌아와 짐을 풀었다. 호텔은 단체 어린이 손님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아이들이 떼거리로 호텔 복도를 몰려다니고, 잘 보인다던 페와 호수는 아예 보이질 않았고, 안나푸르나 연봉은 산정상만 조그만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날이 저물기 전에 서둘러 호텔을 나섰다. 산촌다람쥐에서 늦은 점심으로 돼지제육볶음을 먹고 말로만 들어오던 레이크사이드 거리를 돌아 페와 호수가를 걸었다. 포카라는 안나푸르나를 찾는 외국인 들이 꼭 거쳐가야만하는 네팔 최고의 현대 도시이자 관광의 중심지라고 했다. 하지만 현대적인 도시라고 하기에는 너무 낙후되었고 호텔 방이 동이날만치 많은 트레커들이 몰려왔다고 했지만 거리는 한산했다. 안나푸르나 산속에 오래 머물다 내려온 사람들에게 포카라는 분명 파라다이스같은 도시로 다가갔을 것이지만, 나는 아직 현대문명이 그렇게 반가울 만치 오래 산속에 있지도 않았고, 포카라를 즐길만한 마음의 준비도 없었다. 쇼핑말고는 또 무엇을 할지 망설이다가 날이 저물고, 점심때 먹은 돼지고기 제육볶음에 반한 파샹이 다시 원하는 'Korean Food'을 찾아 산촌다람쥐로 돌아왔다.


저녁을 먹고 올라간 룸에는 잘 나온다던 온수가 어느 수도꼭지에서도 나오질 않았고 전기는 사위가 어두워진뒤 한참만에야 들어왔다. 사설전기에 연결된 희미한 보조등 하나에 의지해 룸에 머물렀지만 레이크 사이드 거리는 암흑천지로 변했다. 날이 저물면서 시작한 비는 어느새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우로 바뀌고 바람마져 거칠게 호텔 창을 두드리니 호텔 룸이 영락없는 감옥같이 느껴졌다. 레이크사이드 거리는 불빛 하나없이 완전히 문을 닫았고 우리가 머무는 호텔은 로비나 다이닝 룸이 휴식을 취할 만한 시설이 못되었다. 비가 때리는 창 넘어 번쩍이는 번개빛에 드러나는 도시의 윤곽 넘어 눈속에 묻혀있을 안나푸르나를 걱정했다. '눈때문에 안나푸르나 라운드를 포기 했는데, 이러다간 ABC(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코스 마저 포기해야되는거 아닌가?' 걱정을 안고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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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킹을 떠나온 뒤 가장 잘 잤다. 한번을 침대에서 떨어지고 새벽3시에 깰 때까지 뭔가 조금은 불안하고 종잡을 수 없는 꿈속을 헤맸다. 잠도 깊고 꿈도 깊어 눈을 뜨니 갑자기 방안이 낯설고 여기가 어딘지 깨닫기에는 조금의 시간이 걸렸다. 집 나온 지 2주가 다 되어 가는데 아직 시차 적응이 안 되는 건지 아니면 고도 탓인지 늘 새벽 일찍 눈이 떠진다. 시차나 고도 탓이 아니라 저녁시간에 마땅히 할 거리를 못 찾아 초저녁에 잠이 들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저녁을 먹고 룸으로 돌아오면 추위 때문에 바로 침낭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경우도 있었지만 들어와도 약한 조명 때문에 헤드라이트에 의지해 책이라도 보고 일기라도 적다 보면 쉬 눈도 피곤해 지고 졸리워 진다. 그러니 초저녁에 잠에 골아 떨어지고 꼭 새벽 3시면 잠이 깬다. 그때부터 이리 뒤척 저리 뒤척이면서 창이 밝아 오기를 기다린다.


하루 종일 걸을 때는 사실 아무 생각이 없다. 그냥 걷는다. 그리고 생각은 꼭 이렇게 이른 새벽에 침낭 속에서만 하는 것 같다. 어제 하루 어떤 길을 걷고, 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어떤 풍경 속에서 보냈는지 되짚어 보고 오늘 보낼 하루의 여정을 머리 속에 그려본다. 오늘은 마르샹디강 서편을 따라 Nayagon까지 간다. 시간은 남을 것 같은데 Nayagon을 지나 Khudi까지 가기에는 너무 멀고 그 사이에는 묵을 수 있는 롯지가 없다. 그리고 내일 베시사하르를 거쳐 포카라로 간다.



창문에 엹은 새벽 빛이 비치기 시작하고 조랑말 방울소리가 은은히 들려온다. 무거운 짐을 지고 힘든 길을 올라가기 위해 새벽부터 부산을 떠는 조랑말의 울음소리가 새벽 안개를 타고 번져왔다. 조랑말 소리가 꿈과 현실의 경계에 나의 의식을 한참 붙들어 놓는다. 더 이상 침낭 속에 머물 수 없을 만치 창이 밝아오고 나서야 침대를 내려섰다.


참 오랜만에 핫 샤워를 하고, 푹 잠을 잔 덕분에 출발하는 몸이 가벼웠다. 그래도 여정에 지침 몸, 오르막이 나오면 호흡이 가쁘고 힘겹긴 마찬가지였고, 다시 내리막이 나오면 고장 난 오른쪽 4번째 발가락이 쑤시고 아팠다. 그래도 고개를 들면 흰 눈을 지고 있는 아득한 산허리에 수백 겹으로 첩첩이 쌓인 5평 다락 논 산자락이 눈에 들어오고, 산꼭대기 언덕 위에 옹기종기 부락을 이루고 살아 온 네팔리의 삶의 무게가 가슴에 다가왔다. 여행자의 몸으로 안나푸르나 산허리를 주유하는 나의 삶은 얼마나 사치스럽고, 그에 반해 저들이 지고 사는 삶의 무게는 얼마나 무거운가! 하지만 그 무거운 삶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네팔리의 터전인 안나푸르나는 또 얼마나 깊고 숭고한지 한발한발 내딛는 발걸음마다 되새겼다.


딸에서 참체까지는 순탄한 내리막길이 이어졌다. 온화한 햇살 속을 마르샹디 계곡을 따라 걸으며, 간혹 상행하는 트레커와 나마스테!’를 주고 받았다. 트레커들과 네팔리들이 겨울을 견딜 양식과 생필품을 싣은 조랑말 대열과 조우했고, 강 건너 너럭바위 위에서 놀고 있는 원숭이들과 알아듣지 못하는 인사를 나눴다. 식생은 바뀌어 바나나 같은 열대 과일들이 눈에 들어오고 강물은 점점 푸르러갔다. 눈이 끝나는 길부터는 먼지가 일기 시작했고, 길은 조랑말 똥으로 덮혀 있었다. 하지만 조랑말 똥과 먼지는 거슬리지 않았고 우리의 발걸음은 탄력이 붙기 시작할 때쯤 참체에 도착했다.


 

상행 때 점심을 먹었던 롯지에서 블랙티를 한잔하고 있는데 위에서 만났거나 같은 롯지에서 머물렀던 트레커들이 하나둘 몰려왔다. 3명의 독일인 그룹과 단독 트레킹에 나선 호주인 그리고 한국인 청년이 마을로 들어섰다. 독일인 그룹은 차를 타지 않고 베시사하르까지 끝까지 걸어갈 태세였고, 호주인은 불불레에서 상행할 때 마르샹디 동편의 구 코스를 걸었는데 그 길이 너무 이상에 남아 다시 그 길로 걸어서 불불레까지 갈 예정이라고 했다. 이틀 전 차메에서 같이 출발했던 한국 학생들은 차가 들어올 수 있는 첫 마을인 참체에서 짚을 타고 떠나 베시사하르까지 가서 다시 로컬버스를 타고 오늘 포카라에 입성할 거란다. 서로의 행운을 빌며 학생들을 싣은 차는 출발했고 우리는 학생들이 짚을 타고 지난 길을 걸으며, 이제 평생 다시 못올 것 같은 마르샹디강을 눈이 시리도록 보고 또 보며 걸었다. 참체에서 자가트까지 1시간, 자가트에서 다시 상계까지 1시간을 더 걸었다.


자가트에서 점심을 먹었다. 달밧! 파샹은 거의 매끼를 달밧만 먹었다. 물론 아침은 누들 수프 같은 간단한 메뉴를 선택했지만 점심과 저녁의 꼭 달밧이다. 달밧은 밥과 콩국, 커리와 나물 한가지로 이루어진 네팔리의 가장 보편적인 식단인 것 같았다. 콩국은 식당마다 한국의 메주콩을 재료로 하는 집이 있고, 또 팥이나 녹두 같은걸 재료로 하는 집이 있는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 커리는 감자, 야채 등의 재료의 변화에 따라 조금의 차이가 있었는데 가장 변화가 많은 것이 바로 나물이었다. 고도가 높지 않은 마을에서는 식사를 주문받고 나서 밥을 안치고, 밥이 되는 사이 텃밭에서 한국의 유채같은 것을 뜯어와 삶아서 나물을 무쳐내었다. 나물거리가 없는 곳에서는 한국의 김치와 거의 유사한 "achar"라고 불리는 저장 음식을 내어놓는다. 무우말래이나 당근, 혹은 고추같을 걸 주재료로해서 숙성시킨 아자르를 우리부부는 '네팔 김치' 라고 불렀고, 파샹은 '피클'이라고 했다. 상행길에 딸에서 맛을 본 뒤, 묵는 롯지마다 달밧을 시키면 꼭 아자르가 있는지 물어본다. 나중에는 투명 용기에 담긴 아자르가 식당 구석이나 찬장에 있는지 살피게 되었고, 훅시라도 발견하게 되면 '저게 무어냐' ' 곡 한국 김치같다' '맛좀 볼 수 있느냐'고 물었다. 한번 두번 얻어 먹고나서는 달밧에 아자르 대신 야채나물이 나와도 꼭 아자르를 추가로 얻어 먹었다. 오늘도 자가트에서 달밧에 따라 나온 갓 뜯어온 싱싱한 나물무침에 아자르까지 푸짐하게 먹고 나서 롯지를 나섰다.



상행길에 묵었던 시리사우르를 지나자 맑았던 하늘에 짙은 구름이 몰려들고 이내 한방울 두방울 비를 떨어트렸다. 파샹은 지난 이틀간의 강행군에 지쳤는지 'Hard Walking! Hard Today!"를 연신 외치며 차를 타고 싶은 눈치다. 상계에서 차를 타면 오늘 중으로 베시사하르에 도착하고 내일 점심을 포카라에서 먹을 수 있다며 계속 유혹한다. 사실 우리도 무리한 하산으로 지쳐 있는 상황에서 파샹의 유혹을 물리치기 어려웠다. 하지만 참체에서는 1인당 1200루피나 하는 차비도 만만치 않았고, 또 특별히 차를 타야 할 이유도 없어 차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었다. 사실 깍아 지른 절벽 위로 이어지는 좁고 가파르고 파이고 거친 노면의 길을 브레이크도 핸들도 기어도 믿을 수 없는 차를 타고 싶지가 않았다. 걷기 위해 온 여정을 줄이기 위해 그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 굳이 차를 탈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참체에서 외면했던 차를 상계에 이르러 결국 탈 수 밖에 없었다. 마침 상계에 이르자 빗방울이 굵어지고 출발 직전의 짚 차까지 대기하고 있었다. 어쩔 도리 없이 짚에 올랐다.


상계에서 짚을 타고 불불레까지 1시간 40여분동안 죽음의 도로를 달렸다. 길을 막는 염소떼들, 잘 키운 수박 통만한 돌들이 나뒹굴고 도저히 차가 다닐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길을 짚은 잘도 달렸다. 길은 좁고 왼편은 마르샹디 강이 흐르는 깍아 지른 절벽이었지만 상행인 차와 절묘하게 교행했다. 상행 때에 강 건너편에서 절벽 위에 걸쳐있는 실낱 같은 길을 보면서 무서워서 저 길을 어떻게 차가 다니겠냐고 했던 기억이 났다. 하지만 네팔리들에게 이런 도로를 차를 타고 달리는 일은 일상적인 것이 보명해 보였다. 파샹에게 깍아지른 절벽을 가리키며 '무섭지 않냐'고 물어보자 전혀 무섭지 않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젊은 운전기사는 초긴장한 모습으로 두 눈을 번들거리며 너무나 진지하게 운전을 했다. 한번씩 핸드폰을 받는 것 말고는 최선을 다하는 것 같은 기사의 운전 실력에 기대어 차를 탄지 2시간반만에 살아서 불불레에 도착했다.


불불레에 도착하자
Check Point에 들르기 위해 나 혼자 짚에서 내렸다. 팀스카드에 확인 도장을 찍고 나니 이제 안나푸르나 라운드는 미완으로나마 종결되었다는 사실이 실감났다. 오로지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불불레서 부터 베시사하르까지는 상행 때 고물 로컬 버스를 타고 달려 온 길이다. 베시사하르에서 불불레까지 들어올 때는 이 길 역시 그렇게 무서웠었는데 이제 다시 같은 길을 따라 짚을 타고 달리는 데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상계에서 불불레까지의 길이 워낙 거칠고 위험하다보니 불불레에서 베시사하르까지의 길은 안락하다 못해 졸립기까지 했다.


오후 5시에 아침에 세운 계획보다 하루 빨리 베시사하르에 접어들었다. 차가 시내에 들어오자 마자 기사는 운전대를 놓았고 다른 사람이 차에 올라 운전을 하기 시작했다. 왜냐고 묻자 파샹은 운전기사가 너무 지쳐 다른 기사에게 운전대를 넘긴 것이란다. 사실 그 거친 길을 초긴장한 상태로 상하행 다 운전을 하다보 면 지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승객보다는 그래도 운전기사가 훨씬 더 신경이 곤두섰을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파샹은 베시사하르에 도착하자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에베레스트 중턱에서 태어나 살다가 카트만두로 나온 파샹이 산보다는 도시를 좋아하는 건 당연할 것이다. 파샹은 신나는 발걸음으로 베시사하르에서 제일 좋은 호텔이라며 Tuckche Peak Hotel로 우리를 이끌었다. 호텔비가 부담되지 않을까 걱정스러웠지만 우리의 걱정에 아랑곳하지 않고 당당하게 앞장서는 파샹을 따라 호텔로 들어섰다. 남중의 수도인 베시사하르에서 가장 좋다는 호텔이지만 낡고 초라했고 요금도 700루피(한국돈 만원)로 그리 비싸지 않았다. 4층의 룸에 짐을 풀고 베시사하르의 거리로 나섰다. 이미 해는 떨어져 초저녁 인데, 하루의 노고를 접고 집으로 돌아가는 네팔리의 분주한 발걸음이 골목 가득 넘쳐났다. 몰려다니는 아이들, 어른들의 바쁜 발걸음, 야채가게 앞에 모여든 아주머니들, 길가에 앉아 분주한 골목을 바라다보며 지는 하루 해를 아쉬워하는 할머니들 사이를 뚫고 골목으로 접어 들었다.


상가와 접한 주택가 골목에는 네팔리의 삶의 소리와 향기가 넘쳐났다
. 모퉁이마다 구멍가게가 있고, 골목은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생동감 넘치는 목소리로 가득했다. 그리고 그 생동감을 지키고 키워준 가정의 따사로운 온기가 창문을 넘어 번져 나오고 있었다. 창에 희미한 불이 들어오고 나는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골목을 걸으며 깊은 상념에 빠져들었다. 19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까지 내가 '국민학교'를 다니던 시절의 진해시 여좌동 재건주택의 골목 속으로 나의 의식은 빨려 들어갔다. 다시 돌아가 어른의 눈으로 봤을 때 그렇게 좁을 수 없었던 그 골목이 그 아이의 눈에는 왜 그리도 넓고 풍성했는지. 그 골목을 이리저리 휩쓸고 돌아다니던 아이들의 무리가 보이고, 웃음소리,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그 속에 낯익은 한 아이가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멀리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만 놀고 들어 온나. 저녁 먹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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