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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일찍 일을 마치고 이른 오후에 샤워를 하기 위해 보일러에 불을 넣고 물이 따뜻해 지기를 기다렸다. 이 무료한 동안에 나는 컴퓨터를 켰고, '지하철 패륜녀' 사건을 알리는 기사를 읽고 동영상까지 보게 되었다.  항상 그렇지만 이런 종류의 기사나 동영상을 보고나면 일단 불쾌한 기분에 사로잡히고, 그리고 쓸데없는 호기심으로 시간을 낭비한 자신을 자책하게 된다. 그러면서 자신도 모르게 몇번을 곱씹어 가며 그 사건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게 된다. 오늘도 그랬다. 그래서 이왕 이렇게 된거, 이 사건과 관련한 나의 생각을 정리해 본다.

먼저, 나는 이 '사건'의 진상을 알 수가 없을 것 같다. 다른 많은 사람들도 '사실 관계'에 대해 목말라하고 있지만 그들 역시 이 사건의 진상을 알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다시말해 그 할머니가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출퇴근하는 사람들이면 다 알 정도로 무례한 행동을 일삼던 할머니인지 아닌지, 봉변을 당한 여학생이 재미교포인지 아닌지, 그리고 여학생이 두 차례나 사과를 했는지 아닌지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지만 사실 대부분의 의견은 억측일뿐 이 사건의 '진상'을 아는데는 별로 도움이 안될 것 같다. 하지만 사실은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 사건을 기사화한 언론사 기자양반들도 사건의 진상에는 관심이 없다. 기자들이 원하는 것은 진실이 아니고 '논란'자체이기 때문에 '사실관계'에 별로 개의치 않는다. 나는 오늘, 단지 그 '논란'을 소비한 바보같은 뉴스 소비자였을 뿐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나는 이 사건의 두 당사자에 대한 선악을 재단할 능력도 자격도 없다. 이 사건을 다룬 기사와 관련한 댓글들에 비추어 보면 '할머니'가 잘못했다는 사람도 있고, 여학생이 잘못했다는 사람도 있고, 더 많은 사람들은 양자를 다 나무라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그 두사람은 이번 사건의 피의자가 아니고 피해자라고 본다. 사실 나는 이 사건의 동영상을 찍어 유튜브에  올린 사람의 진의를 알수 없다. 패륜 여학생 혹은 패륜 할머니를 우리 사회에 고발하려는 선한 의지로 그랬는지, 아니면 단순한 장난으로 그랬는지 알수 없다. 분명한 것은 그가 동영상을 찍어 누구나 접근가능한 유튜브에 올린 행위는 이 동영상에 찍힌 여학생과 할머니에 대한 인격적 모욕행위이다. 나는 공공의 공간인 지하철내에서 난투극을 벌린 두 사람보다 그 장면을 동영상으로 찍어 인터넷에 퍼트린 사람의 행위가 더 반사회적 이라고 본다.  

그리고 나는 이번 사건을 통해 우리사회에서 통념상 받아들여지고 있는 '예의도덕'의 한계 를 짚어보고 싶다. 적어도 양식있는 사람이라면, 버르장머리 없는 연소자를 연장자가 머리 끄댕이를 잘아 끌고 다녀도 좋다는 식의 낡은 도덕을 주장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사회에는 연장자의 연소자에 대한 예의, 상관의 부하에 대한 예의, 선생의 학생에 대한 예의 혹은 인권의식이 심각하게 결여되어 있다. 사회적 갑의 사회적 을에 대한 횡포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관계, 정부나 기업의 중앙부서와 하부부서의 관계, 혹은 돈줄을 쥔자의 거래처나 하청기업의 관계에 만연해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와같은 의식에서 이번 사건을 버르장머리 없는 여학생이 저지른 '패륜녀' 사건으로만 규정하는 것에 대해 나는 우선적으로 반대한다.  

이것저것 떠나 내가 이번 사건을 통해 가지는 가장 크게 느끼는 문제점은 왜 우리사회에는 "**남" 사건이 아니고 "**녀" 사건만 난무하는가 하는 것이다. 내가 알기로는 우리 사회에 난무하는 폐륜적 사건을 저지르는 대부분의 사람은 남자일뿐아니라, 거리에서나 공공장소에서 사회적 통념을 넘는 무례한 언행을 일삼는 사람들 역시 대부분 남자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사진이나 동영상을 통해 만천하에 공개되어 '개망신'을 당하는 사람은 거의 항상 여자다. 나는 남자고, 세상을 살아오면서 그런 패륜적 행동을 술에 취해서든 맨 정신에서든 여러번 해 왔고 앞으로도 그러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없다. 그런데 내가 그런 행위를 할 때 누군가가 동영상을 찍어 인터넷에 퍼뜨린다면 나는 결코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법적인 조치를 하던지 아니면 나의 행위를 동영상으로 찍어 인터넷에 퍼뜨린 사람이 누군지 알게 된다면 개인적 응징도 마다할 것 같다. 사실 대부분의 남자는 나의 이런 입장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누구나 다 알기때문에 '남자'는 이런 동영상의 피해자가 되는 경우가 드물다고 본다. 결국 "**녀" 사건의 저변에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마초이즘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폭력이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드는 궁금증은 이 동영상이 매개한 사회적 공분을 통해 우리사회를 정화하는데 도움이 되었을까, 아니면 동영상의 당사자를 응징함으로써 그들이 자신의 잘못된 행위를 '반성'하고 '회개'하는 계기를 주는데 도움이 되었을까 하는 것이다. 절대 그렇지 아닐 것이다. 단지 대중의 사회적 좌절감이나 원망을 엉뚱한 대상을 항한 분노로 해소하는데 도움이 되었을 뿐이 아닐까? 바로 그런 사회적 역할을 하던 가장 대표적인 의식이 바로 중세의 '마녀사냥'이 아니었던가!  확신하건데 '**녀 사건'은 중세 마녀사냥의 현대판 한국 버전일뿐이다. 

다시한번 정리하면 내가 이해하는 '지하철 패륜녀'사건은 어떤 할머니의 한 여학생에 대한 단순 폭행 사건을 동영상으로 찍어 공개적인 매체에 올린 인권침해 사건일뿐이다. 따라서 '지하철 패륜녀 사건'이라는 명칭을 유력언론사의 기자가 만들었는지 아니면 동영상 유포자가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근본적으로 잘못된 명칭이고, 그리고 이 사건이 전개되는 전 과정의 저변에는 우리사회에 만연한 남성우월주의와 인권의식 결여를 드러낸 사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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