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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24일 복통 중에 짐을 싸서 닥신칼리를 거쳐 파르핑에서 하루를 접고, 25일 분가만티를 통해 다시 파탄으로 복귀 1박을 하고, 26일 카트만두의 숙소 마야거르츄로 돌아가 이후 여정을 20여일동안 같이할 또 다른 일행 M과 D를 맞았다.

 

전날 복통으로 아무 것도 못하고 있는 사이 L은 타멜 거리를 카메라에 담으며 혼자 돌아다녔다. 계속 숙소에서 밍거적 거리고 있기에는 시간이 아까웠고, 어렵게 네팔에서 만난  L을 고려해도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타멜만치 친숙해져 버린 라트나 버스파크로 향했다. 일차 목적지를 Shree Dakshinkali Temple로 정했다. 버스를 찾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진 않았고 일부노선이 파업 중이었지만 다행히 닥신칼리행은 운행 중이었다. 

 

 

닥신칼리로 가는 길은 도심을 벗어나자마자 비포장길이었다. 앞을 분간하기 힘들만치 두터운 먼지가 일고, 엉성한 창틀을 통해 실내로 밀려 들어왔다. 마스크를 했지만 숨쉬기가 쉽지 않았다.  차안의 공기는 탁했고 그렇다고 창문을 열 수도 없는 두어시간을 견딘뒤에야 닥신칼리 입구의 버스파크에 도착했다. 먼지만 아니었으면 버스를 타고 온 2시간이 나름 즐거운 여행길이었을테고, 바같의 풍경에 좀더 몰입할 수 있었을 텐데 많이 아쉬웠다. 사실 여행 중에 사전 공부 없이 만나는 풍경은 무미건조할 수 있다. 순간순간 스쳐 지나가는 풍경에 스토리를 입히고 나의 기억 속에 저장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일정한 사전 정보를 가지고 바라다보는 풍경일 때 비로소 의미를 가지고 나의 것이 되기가 훨씬 쉬울 것이다. 사실 그런 면에서 닥신칼리는 나에게 미지의 장소였다. 제물로 희생된 동물의 비피린내가 진동하는 끔직한 흰두사원이라는 것 말고는 아무런 이해도 없었다.

 

닥신칼리는 외래 관광객이 그리 많이 찾지 않는 곳 같았다. 버스를 같이 타고온 승객들은 대부분 현지인으로 사원에 참배를 오거나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나들이라도 온것 같았다. 한무리의 젊은 아가씨들이 버스에서부터 우리에게 대화를 시도했다. 낯선 외국인을 보고 반갑고 호기심이 일었는지 어디서 왔는지, 왜 왔는지, 어디로 갈건지 등등을 물었지만 우리의 영어는 짧고 단편적인 대화를 넘어설 수 없었다. 버스파크에서 내리자마자 현지인이 가는 식당에서 간단한 식사를 하고 사원을 향해 걸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계곡 속에 '피비린내 나는' 사원이 자리하고 있었다.  다행히 이날은 재물을 희생하는 의식이 많지 않은 날인지 핏빛 바닥을 맨발로 지나가야하긴 했어도 직접 살육장면을 보지 못했다. 흰두교도가 아닌 사람은 들어갈 수 없다는 성전도 바로 옆의 통로를 지나며 볼 수 있었는데 선입견이 준 느낌 때문에 오래 머물고 싶지는 않았다. 사원을 지나 오르막을 한참 올라 전망대가 있었지만 전망대로 올라가는 입구의 기념품 가게와 노점상을 구경하며 그들의 삶을 느끼는 것 만으로도 닥신칼리 방문은 충분했다.

닥신칼리에 오래 머물지 않고 바로 파르핑을 물어 걷기 시작했다. 한번씩 차가 지나갈 때 마다 바람방향을 살피며 먼지를 피해 뛰어야했는데 다행스럽게 길은 멀지 않았고 파르핑 시내는 금방 나왔다. 많지 않은 네팔 여행중에 만난 도시는 늘 사원과 사원을 찾는 순례객을 위한 숙소가 혼재되어 었다. 생활과 종교를 따로 데어놓을 수 없을 만치 삶이 종교와 밀착되어 있는 것 같았다. 파르핑도 다르지 않았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골목길을 지나 신시가지로 접어들기 전에 만난 숙소를 다 지나치고 막상 숙소를 찾기 시작할 무렵에는 마땅한 곳이 나타나지 않았다. 한산한 가게앞에서 현지인에게 숙소를 물었더니, 네팔에서 늘 그랬지만 주변의 사람들이 다 몰려 들어 나에게 길을 알려주기 위해 의견을 모았다. 네팔리의 친절함은 내가 경험한 세계에서는 의문의 여지 없이 최고였다.

숙소를 잡고, 창을 통해 해지는 파르핑의 삶을 바라다 보면서 하루를 정리했다. 타멜거리를 떠나 닥신칼리를 경유해 파르핑까지 많은 풍경을 하루동안 스쳐 지나쳤다. 나에겐 풍경이었지만 그곳에 터잡아 살아가는 네팔리에게는 구구절절한 삶의 현장일진대 여행자의 눈으로 오늘 하루 그들의 삶을 모욕하지 않았기를 빌었다. 그리고 낯선 나라를 이렇게 여행자로 떠돌 수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말할 수 없는 축복이거늘 나는 왜 늘 나의 삶을 스스로 부정하고 탈주를 꿈꿀까 스스로에게 반문했다. 일상이 주는 안락함과에 겨워 방랑의 낭만을 갈구하는걸까? 나는 진정 무엇에 목말라하는지 스스로 물었지만 답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남은 일정의 여행은 순례가 되어야했다.

안개속을 번져오는 노래소리에 눈을 뜨며 parphing의 아침을 맞았다.  신을  찬미하고 새로운 하루를 맞은 생명의 환희를 담은 어린 여학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까이에 여학교 기숙사라도 있는건지 아니면 사원에서 들려오는 소린지 알수 없었지만 나는 궁금하지 않았다. 나에겐 그냥 파르핑 전체가 사원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방을 나와 아침 햇살에 삶이 피어나는 파르핑의 시가지를 내려다 봤다. 게스트하우스 4 층에서 내려다보이는 앞집 옥상에는 향을 올리고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는 여인이 보였다. 그녀는 어떤 신에게 무엇을 축원하고 소원했을까 알 수 없었지만 나는 단지 어둠을 이기고 아침을 맞는 모든 삶앞에 우리는 숙연해진다는 사실을 알수 있었다. 그녀 역시 자신의 안녕과 욕망의 충족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생명의 안녕과 존재의 기쁨을 축원했을 것이라고 믿어졌다.

숙소를 체크아웃하고 인근의 바라이요기니 템플을 향했다. 나의 새벽잠속으로 달콤하게 녹아들었던 찬송이 사원에서 울려나왔다. 이제는 어린 여학생의 목소리가 아니라 삶의 경륜이 묻어나는 탁한 목소리였다. 가사를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는 찬송이지만 그 절실한 축원의 마음을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찬송장면을 사진으로 남기고도 싶었지만 그냥 마음에 담고 사원을 나왔다. 계단을 내려오자 맞닥뜨린 남루한 요들의 불편한 적선요구를 외면하고. 계단 모퉁이에서 농산물을 펼쳐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아주머니들과 눈을 맞춰 웃음을 나누고 도로를 만나는 길모퉁이 까페에서 아침을 청한다.

 

 

분가마티는 지도상 직선거리로 얼마되지 않았지만 파르핑과 분가마티를 가르고 있는 바그마티 강 때문일까, 마땅한 버스 노선을 찾을 수 없었다. 파탄까지 나가서 다시 분가마티로 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택시는 어떻게든 분가마티로 바로 갈수 있을 거란 기대를 가지고 물어보니 한 기사가 선듯 나서주었다. 안도하며 올라탄 택시는 카트만두 쪽으로 달리기만 하고 분가마티는 더 멀어지는 것 같았다. 기사도 나중에는 길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지 지나는 다른 기사나 주민에게 묻기 시작했고, 다시 방향을 파르핑 쪽으로 잡아 왔던 길을 되돌아왔다. 결국은 분가마티에 도착하지 못한 택시는 우리를 한적한 강가의 철제 다리 근처 마을에 내려놓고 도망가듯 사라져 갔다.

 

 

걷기 위해 온 네팔이니 우리는 개의치 않고 걷기 시작했다. 강이라기 보다 하수구에 더 가까운 바그마티 강을 건너고 다시 강을 따라 북쪽으로 방향을 잡아 한참을 헤메야했다. 강을 벗어나자 연두색으로 살아나는 밭둑길이 나오고 멀리 시가지가 시야에 들어왔다. 아직 1월에 불과해지만 아열대기후인 네팔의 들녘은 벌써 봄를 닮아 있었다. 정갈하고 아름다운 전원 도시로 알려진 분가마티로 향하는 들길은 아름다웠다. 겨우 길을 찾고 따가운 햇살을 맞으면 오르막길을 올라 분가마티를 만났다.

 

도착한 분가마티는 남루했다. 지난 지진의 여파때문일까, 시가지 자체가 여느 다른 도시와는 달리 낡고 지저분했다. 뿌연 먼지를 뒤집어 쓴 건물들은 위태로웠고, 방치되어 있었다. 인적이 드물고 생기없는 골목길을 돌아 겨우 물어 찾아간 민속박물관은 초라했다. 지금까지 카트만두나 포카라를 중심으로 주요한 도시만 돌아다닌 끝에 처음으로 관광루트에서 벗어나 만난 도시가 분가마티가 아닐까는 생각도 들었다. 지금까지는 네팔의 허상들이었고, 분가마티가 네팔의 진상이란 말인가, 알수 없었다. 버스파크 근처에서 너무 싼 가격에 놀란 식당에서 모모와 사모사 그리고 콜라로 점심을 해결하고 파탄행 버스에 몸을 맡겼다.

 

5일만에 다시 찾은 파탄이 반가웠다. 편한 잠자리와 풍부한 먹거리가 있고, 사람들의 활기와 아름다운 건축물이 즐비한 파탄으로 돌아왔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 벅찼다. 지난 몇일간 계속되는 복통으로 체력은 현저히 떨어졌다. 마땅히 먹을 것도 없었는데다가 무얼 먹어도 소화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몇일을 지내다보니 실제보다 훨씬 긴 여정을 다녀온듯 몸도 지쳤고 마음도 처졌다. 그래도 긴 흥정 끝에  Lalit Heritage Home에 짐을 풀었다. 파탄 드바르광장이 내려다 보이는 환상적인 조망의 룸에서 짐을 풀자 메니저가 커피를 날라왔다. 고마운 마음에 팁을 건넸지만 팁이 호텔비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며 사양했다, 고맙고 기분 좋았다. 커피향을 맡으며 아름다운 건축물이 조화롭게 모여있고 그 사이를 살아가는 인파를 행복한 눈으로 한참을 바라다 보다 어둠이 내리는 파탄의 아름다움에 흠뻑 젖어갔다.

 

처음으로 파탄에서 아침을 맞았다. 역시 신을 경배하는 찬양소리에 이른 잠을 깼다. 작고 아기자기한 룸때문인지 편안하고 아늑한 잠자리를 누렸다. 간혹 도시의 밤하늘을 울리는 개짓는 소리에 잠을 깨기도 했지만 나의 숙면을 방해하지 못했다. 밤새 도시를 뒤덮던 개울음 소리는 아침을 알리는 서광이 비치자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찬양소리 사이로 일과를 시작하는 사람들의 기척이 늘어만 갔다. 방을 나와 옥상을 올라갔다. 소박한 정원 넘어 파탄 두바르 스퀘어의 아름다운 풍광이 한눈에 들어왔다.

밤새 보이지 않던 숙박객들이 조식을 들기 위한 다이닝룸에 부쩍였다. 모처럼 한국인들도 만나고 지진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지원온 일본인들도 있었다. 일어를 하는 L은 일본인들을 고향사람 만난듯 반가워 대화를나누었다. 외국어가 절실해 지는 순간이었다. 한국에서 M과 D가 도착하고 안나푸르나 라운드를 준비하는 여정의 터닝 포인트에 도달하는 날, 우리는 타멜거리로 되돌아 가기 위해 Heritigi Home을 나섰다.  

교통체증으로 한국같으면 살인이라도 날것 같은 골목을 지나 타멜행 버스를 찾았다. 다시 돌아온 타멜거리를 걷고 숙소 마야거르츄에 짐을 풀었다. 일정 없는 하루를 한가롭게 보냈다. 오후에 M과 D가 도착해 반갑게 맞고 다시 타멜 거리로 나섰다. 타멜거리에서 제일 규모가 크다는 Shop Right Supermarket에서 트레킹 물품을 사고, 한국에서 일했던 네팔 노동자가 운영한다는 Small Star 주점에서 뚱바(Tungba)를 마셨다. 뚱바는 수수같이 보이는 꼭또라는 곡물을 발효해 통에 담은 뒤 뜨거운 물을 붓고 빨대로 마시는 네팔만의 술이었다. 왠지 술에 흠뻑 젖고 싶은 날이지만 불편한 속과 다음 여정을 위해 참았다. 

 

두달 여정의 절반이 지나는 밤 침대에 누우니 많은 생각들이 일었다. 나는 스스로에게 다그치듯 묻기 시작했다. 나는 네팔을 또 올까? 올 수 있을까? 오고싶을까? 아무 대답도 가능하지 않았다. 너는 네팔에 뭐 하러 왔지? 왜 네팔을 그토록 목말라했지? 질문은 이어졌지만 심경만 복잡해 질뿐 답을 구할 수 없었다. 나에게 네팔은 내 삶의 알리바이인가? 나의 순수를 보증해주는 방패일까? 위장막 혹은 화려한 목걸이같은 장식일까? 먼지와 차가운 방, 입에 맞지 않는 먹거리를 감수하고도 네팔을 찾은 나는 내 자신에게 얼마나 정직한 것일까 문득 묻고 싶어졌다.  집이 그립고 딸이 보고싶고 뽀득뽀득 윤기나는 접시에 상큼한 야채를 담은 그런 식탁보가 있는 아침이 그리워졌다. 아직 한달이나 남았잖아! 문득 조갑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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