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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든 여정이다. 딸에 오후 5시쯤 도착하기 까지 쉬지 않고 걸었다. 하산이라고 느긋하게 내려올 수도 있었지만 남은 15일의 일정을 고려해 시간을 아껴야했다. 사실 남은 여정이 빡빡해서라기 보다는 욕심이 앞섰기 때문이겠지만 베시사하르에서 포카라로,  포카라에서 ABC코스를 다녀오고 다시 포카라에서 좀 느긋한 시간을 갖고 싶었다. 베시사하르로 되돌아 내려오는 여정에서는 올라갈 때보다 꼭 2배의 속도로 걷기를 강행했다. 차메에서 출발해 상행 때 하루 걸리던 티망까지 반나절도 걸리지 않고 내려왔다. 티망에서 점심을 먹기에는 너무 일러 다나큐까지 더 내려와서야 늦은 점심을 먹었다.
  



티망에 도착할 때 쯤 혹시 배가 고프지 않냐고 파샹에게 물었다. 네팔리들은 보통 아침을 먹지 않거나 간단히 해결하고 오전 11시전에 이른 점심겸 아침을 먹는다고 들었다. 그래서 포터를 위해 점심을 11시정도는 먹을 수 있도록 여정을 배려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혹시 오전 일정이 늦어지면 꼭 파샹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우리가 파샹을 생각하는 만치 또 파샹은 우리 생활습관에 자신을 맞추려 했고 그러다보니 12시 이전에 점심을 먹는 경우가 드물었다. 하지만 오늘은 탄촉에서 블랙티를 한잔 나눈 것을 제외하곤 간식도 휴식도 없이 계속 걸었다. 혹시라도 파샹이 배가 고프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역시 파샹은 또 'No problem!'이다.


점심을 좀더 내려가 다라파니 정도에서 먹기로 결정하고 티망을 스쳐지나갈 때 상행 때 묵은 롯지 앞을 지났다. 마당에서 롯지 사오니(주인아주머니)가 우리 일행을 알아보고 인사를 했다. 파샹과 무슨 이야긴지 짧은 대화를 나누고는 집안으로 들어갔다. 배낭을 돌담에 내려놓고 잠시 쉬고 있자니 사오니께선 파샹을 줄 차 한 잔과 책을 한 권 들고 나왔다. 퍄상이 얼굴에 가득 웃음을 지으며 나에게 책을 건넸다. 그 책은 내가 상행 때 짐을 줄인답시고 룸 탁자에 남겨두고 온 [바가바드기타]가 아닌가. 매정하게 버린 강아지가 다시 돌아왔다면 아마 그런 기분이었을 것이다. 반갑기도 하고 좀 머슥하기도 한 이중적인 감정이 일었다. '내가 잊고 간 것이 아니라 버린 것이다'고 말을 하기에는 책보기가 낯부끄럽기도 했고, 책을 챙겨놓았다가 전해주는 사오니의 정성과 그 책을 자랑스레 건네주는 파샹의 우쭐함에 찬물을 끼얹기도 싫었다. 무조건 반가운 표정을 짓고 고맙다는 인사를 드렸다. 사실 별반 반갑지 않은 [바가바드 기타]가 다시 나의 품에 돌아왔다. 어쩔 수 없는 인연인가 보다. 폭설이 와서 쏘롱라가 막히지 않았다면, 티망을 지나면서 묵었던 롯지 앞을 지나는 시간에 사오니가 마당에 나와 있지 않았다면, 그렇지 않더라도 사오니께서 불쏘시개로 태우거나 그냥 쓰레기로 버려버렸다면, 혹은 롯지 룸에 두었다가 어떤 한국인 트레커가 한국책을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에 가져가 버리기라도 했다면 다시 만날 수 없는 책이 아닌가? 다시 내 손에 들어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우연이 겹치고 또 겹쳤는지를 생각하니 [바가바드기타]를 다시는 가벼히 여길 수 없게 되었다. 억만겁의 인연이 겹쳐 나의 손에 돌아온 [바가바드 기타]를 그동안 짐이 줄어 여유로와진 배낭에 고히 모셨다.


티망에 도착하기전에 차메와 티망사이에 있는 탄촉이란 마을에서 블랙티를 한잔 나눌 때 작은 소동이 있었다. 티하우스에 배낭을 내려놓고 차를 시키는데 바로 차메서 부터 상하행 여정을 같이 하고 있는 한국 남녀 청년과 그들의 포터가 도착했다. 블랙티 6잔을 시키고 그들이 내놓은 네팔 쿠키를 나누며 담소를 즐기고 있는데 화장실 갔던 아내가 화장실 자물쇠와 키 뭉치를 변기에 빠뜨려 버렸다며 난감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지만 '돈'이 들어가야 하는 상황인 것같아 짜증이 났다. 그런데 웬걸 티하우스의 여주인은 또 'No problem'이란다. 이런저런 여행후기에서 네팔리들과의 나쁜 해후에 대한 글들을 읽은 적이 여러번 있었지만 우리가 라운드 중에 만난 인연은 하나같이 선하고 친절한 네팔리 뿐이었다. 가난한 살림에 자물쇠는 돈이 들어가야 하는 공산품으로 적어도 블랙티 몇잔을 팔아서는 살 수 없는 값이 분명했지만 여주인은 꽨찮다는 것이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고 길을 떠나려다 마음에 남는 미안함때문에 아내와 잠시 답례를 고민했다. 아내는 한국에서 가져왔지만 많이 입을 기회가 없었던 자신의 추리닝 상의를 배낭에서 꺼내 티하우스의 사오니에게 드렸다. 한국돈으로 오육만원은 족히 하는 추리닝이 아까웠지만 아내는 미련이 없어 보였고, 추리닝을 받은 사오니는 의외의 선물에 너무 즐거운 표정을 지으니 잠시 들던 아깝다는 생각이 싹 사라졌다.



다나큐에 오후 1시쯤 도착해서 포탈라게스트 하우스에서 어제 눈에 젖은 옷을 햇살좋은 마당에 늘어놓고 달밧을 시켰다. 'Potala'는 티벳 불교의 성지 '포탈라궁'이나 포탈라궁이 있는 지역의 지명을 가리킬 것이다. 티벳탄이 운영하는 롯지답게 다이닝룸 한쪽에는 불교식 제단이 설치되어있고 제단앞에선 귀여운 두 아이가 놀고 있었다. 얼굴에 온통 콧물을 바르고 있어 더 귀여운 아이들이 사진기를 들이되자 이쁘게 웃어준다. 햇살이 비치는 창밖에는 맑은 하늘이 싱그럽고 눈이 가쉰 골목은 봄날의 나른한 오후 풍경같이 따사롭고 한가로왔다. 아름답고 평화로운 거리를 힘겨운 삶의 짐을 지고 상행하는 네팔리의 발길이 이어졌지만, 짐을 진 그분들이 이어가는 세상살이를 고달프게 느끼기엔 따스한 햇살과 파란하늘, 한가한 골목의 풍경이 너무 평화롭다. 같이 짐을 지고 올라가며 서로 농을 치는 네팔리의 표정에도 웃음이 한가득이다. 내 마음의 평화가 단지 투사되었을 뿐인지도 모르겠지만 그 순간 내 마음의 평화가 온 세상의 평화이기도 하다면 얼마나 좋을까는 생각이 들었다.


식사가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파샹은 '태양열 온수'가 된다며 머리를 감을 것을 권했다. 머리를 감은지 한참이나 되었고 슬슬 머리가 건질거리기 시작했지만 아직은 고도가 있어 추위가 겁이 났다. 파샹만 머리를 감고 아내와 난 사양했다. 양배추 볶음이 같이 나온 달맛을 맛있게 먹고 잠시 휴식을 취하니 막 도착했을 때 와는 달리 한기가 느껴졌다. 아내와 나는 머리를 감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안도하며 길을 나섰다.


다라파니를 지나고 카르테에 접어드니 휘날리는 적기가 우리 일행을 맞았다. 반가운 마음에 파샹에게 물어보니 마오주의자가 장악하고 있는 마을이란다. 몇년 전에는 정부군과 맞선 자치주로 전운이 감돌았는지 모르지만 이제 마오주의 정당이 집권당이 된 마당이니 더 이상의 긴장감은 없어 보였다. 단지 적기는 우리 마을이 어떤 사상을 공유하고 어떤 마을의 미래를 꿈꾸는지 나타내주는 표식으로만 다가왔다. 그들이 공유한 사상이나 공통의 꿈이 가진 현실성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여하튼 마을 공동체의 역동성이 살아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마을의 공기가 달리 느껴졌다. 여전히 인적은 많지 않았지만 햇살은 더 따스하고 마을이 가진 문화적 정치적 저력이 마을의 밝을 미래를 예견케했다.



상행길에 'South korea is good!'을 외치며 엄지손가락을 세워주던 네팔리를 만났던 지점의 롯지에 잠시 배낭을 내려놓고 차를 마셨다. 한 때 꿈꾸던 해방구를 네팔의 안나푸르나 산중에서 만난 셈이니 잠시 머물며 담배라도 한가치 안할 수가 없었다. 적기가 휘날리는 마을 '카르테'를 벗어나려는 찰나 '맛있는 김치있어요' 라고 쓰인 한글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작은 표지판은 성공한(!) 자본주의 국가인 한국에서 많은 트레커들이 오고 있고 또 한국에서 노동자로 일했던 네팔리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었다.  한글표지판이 보여 주는 현실과 마을 입구를 지키던 붉은 깃발이 품고 있는 꿈이 공존하는 카르테는 오래도록 기억될 것 같다.


오후 5시에 오늘의 목적지 딸에 도착했다. 역시 '김치있어요'라고 씌여 있는 마르상디 호텔 마당에는 노란 단국화가 길손을 맞이했다. 이츰 룸에 짐을 풀고 마당에 내려와 파란 벤치에 앉아 커피를 한잔하며 딸에 내리는 저녁 어스름을 맞았다. 오늘 하루 상행 이틀분 여정을 주파하며 고도 약 2,700미터에서 1,700미터까지 1,000미터를 내려왔다. 이틀동안 백설의 설국에서 초록의 겨울 아열대 지역까지 약 46km를 걸어 고도를 1,700여미터 줄인 셈이다. 이틀 연속된 강행군으로 몸은 지칠데로 지쳤지만 핫샤워를 하고, 파샹이 좋아하는 피자까지 시켜 푸짐한 저녁상에 로컬와인까지 한잔 나누니 몸이 봄햇살에 눈처럼 녹아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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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지붕을 때리는 빗소리와 마르상디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에 흠뻑 젖어 아침을 맞았다. 난감한 상황이다. 바람이 숭숭 지나가는 방안에 갇혀 하루를 지체하기에는 주변 상황이 너무 좋지 않다. 고산지대로 접어들려면 한참을 멀었지만 비때문인지, 계곡을 따라 흘러내리는 찬바람때문인지 어슬어슬 춥다. 사실 딱히 비를 피해 돌아다닐 만한 곳도 없어 만약 출발하지 않는다면 하루종일 롯지안에서 왔다갔다 하는 수 밖에 없다. 일단 아침을 먹고 짐을 챙긴뒤 커피를 마시며 날이 개이기를 기다렸다. 난방이 되는 곳이라면 데크에 앉아 하루종일 마르상디 강을 내려다보면서 커피나 마시며 보내는 것도 썩 나쁘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 즈음 다행이 빗방울이 가늘어지고 바람이 잦아들었다.



한국에서 미리 챙겨온 1회용 비옷이 3개 있어 하나씩 걸치고 길을 나서기로 했다. 파샹은 비속을 걷고 싶어하지 않은 눈치였지만 나의 조갑증이 그 정도의 비에 하루를 지체하는 걸 용납할 수가 없었다. 길을 나섰다. 길 양쪽으로 몇개의 롯지가 자리 잡고 있는 불불레의 골목길을 벗어나자 편안한 시골길이 이어졌다. 마르샹디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코스다 보니 길은 강과 가까워졌다가 다시 멀어지고, 멀어졌다가 다시 가까와졌다. 비가 내리는 아침 나절에 길을 가는 사람이 드물었지만, 간혹 어디 장에라도 가는 듯한 주민들과 마주쳤다. 오솔길에서 일대일로 마주치는 주민들을 외면할 수도 없는 노릇, 나도 모르게 목례를 했다. 한번 두번 마주치면서 그들로부터 돌아오는 인사는 한결같이 '나마스테!'였고 어느사이 나도 그들과 같이 합장을 하며 '나마스테!'를 자연스레 읇조리기 시작했다.


'나마스테!' - 내안의 신이, 당신 안의 신께 안부를 묻습니다. 나라마다 인사말이 다 다르지만, 내가 아는 한 '나마스테!'같이 절실한 인사말은 아직 보지 못했다. "나는 한국에서 온 여행객이고 당신은 네팔리지만 우리는 그냥 스쳐지나가며 의례적인 인사를 나누는 것이 아니다. 당신과 내가 국적이 다르고 인종이 다르고 어쩌면 재산이나 학식, 신분이나 사회적 지위가 전부 다를 지 모르지만 그 껍데기를 모두다 벗어던지고, 이 순간 오직 당신과 내안의 가장 순수한 자아가 마주친 것입니다. " 이날이 다 가기 전에 '나마스테!'가 입에 익었지만, 나는 이번 여정이 다 끝나도록 그 의미를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불불레를 떠난지 한시간이 되기 전에 다시 빗방울이 굵어졌고 우리는 다행히 티하우스를 만나 비를 피하기로 했다. 커피와 블랙티 등과 간단한 과자와 음료수를 파는 1평가량의 판자집에 비때문인지 아침부터 노인과 중년의 네팔리가 차를 마시고 있었다. 트레커들이 익숙한 분들이시겠지만 비를 피해 들어 온 낯선 방문자에게 많은 관심을 보였다. 커피를 주문하고 국적을 묻는 그분들과 한국에서 가져간 과자를 나누며 동문서답식 대화를 표정으로 나누는 사이 비가 잦아 들었다. 다시 길을 나서고, 나디바자르를 지날 무렵 비가 그치고 파란 하늘과 흰구름이 걸린 산의 상큼한 자태가 눈에 들어왔다. 비옷을 벗어버리자 발걸음이 더욱 가벼워졌다. 비가 그쳐서인지 길을 따라 만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그 사이에 어디부턴가 'Sweet!''을 외치며 손을 내미는 아이들과 마주치기 시작했다.


여행안내책자에서 네팔아이들에게 과자를 주면 충치가 늘어 결국 건강상의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에, 그보다는 어려서부터 구걸 습성을 키운다는 이유로 과자를 나누어 주는 것을 피하라고 조언했다. 충분히 공감하면서도 막상 그런 아이들을 막딱뜨릴 때는 어찌 처신해야할 지 혼란에 빠졌다. 단것을 원하는 아이들의 욕구는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닌가. 나중에 일어날 건강상의 문제는 또 그나름대로 해결해 나가기 위한 노력이 있어야 하고 우선은 그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제공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는 생각도 지울 수 없었다. 아이들뿐 아니라 아이를 안은 어른들까지 같이 손을 내밀 때는 솔직히 구걸이 아니라 그냥 낯선 사람의 신기한 먹거리를 맛보고 싶어하는 친근한 관심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자신의 삶의 터전을 즐기러 온 낯선 나라 사람들에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 않냐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또 내가 누리는 것을 그네들도 누리고 싶다는 권리를 주장하는 것으로도 다가왔다. 끝내 답을 내리지 못하고 우선은 가진 것을 그냥 나누기로 했다.


나디바자르를 지나 바훈단다까지는 편안한 시골길이 이어졌지만, 바훈단다의 '단다'가 언덕을 의미하듯 마지막 마을로 접어들기 위해서는 제법 가파른 언덕길을 한참 올라야했다. 파샹이 먼저 올라간 언덕길을 올라가는데 한무리의 사람들이 어떤 물체를 둘러싸고 웅성거리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무슨 일인지, 그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는 것이 혹시 파샹인가하는 터무니 없는 걱정도 들었다. 하지만 막상 가까이 다가갔을 때 사람들 사이로 큰 소가 한마리 누워 있었다. 바로옆 언덕에서 소가 굴러 심한 부상을 입고 일어서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소는 눈만 껌뻑이고 대나무로 만든 큰 들것을 가져온 사람들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어떻게 소를 들어 나를 수 있을까 의견을 나누는 것 같았다. 부상 당한 소의 안녕을 빌며 마지막 남은 언덕길을 올라 바훈단다로 들어섰다.








바훈단다에서 점심을 주문하고 습한 겉옷을 벗어 햇빛에 늘고, 멀리 걸어온 길을 되돌아봤다. 어떻게 걸어왔는지 지나온 길이 아득하다. 다시 갈 길을 올려다보니 멀리 안나푸르나는 흰 구름속에 자신의 자태를 감추고 있다. 한시간을 기다려 나온 점심은 양이 너무 작아 '누들수프'를 하나더 시켜 먹다보니 2시가 다 되었다. 식사를 마치고 한국의 당나무같이 켜켜이 세월을 지고 마을의 공터 중심에 서있는 아름들이 나무 그늘아래서 시원한 바람을 맞았다. 걸을 때 흐르던 땀은 온데간데 없고 금방 한기가 느껴지니 출발해야할 때가 되었나보다.






 

불불레 롯지가 너무 허름했고, 또 네팔에 들어온 뒤로 샤워를 해 본적이 없었는데 파샹이야기로는 게르무의 롯지에서 핫샤워가 가능하다고 했다. 다시 물으니 그 이후의 대부분 롯지에서는 핫샤워가 가능한데 추가 비용을 지불해야만 한단다. 자주는 아니지만 그래도 집을 나선지 일주일이 다 되가고, 특히나 카트만두 먼지속을 지나 온 만치 이날은 꼭 샤워를 하고 싶었다. 해가 떨어진 계곡에 저녁어스름이 퍼지기 시작하는 오후 4시 정도 게르무에 도착했다. 퍄샹은 강건너 폭포가 보이고 계곡 위 아래로 조망이 좋은 레인보우호텔이라는 깨끗한 롯지에 묵을 것을 권유했다. 하지만 애초의 일정에 비슷하게라도 맞추기 위해 한 마을 정도를 더 올라가기로 결정했고 다음 목적지인 상계로 향했다. 게르무에서 상계까지는 지척이었다. 문제는 상계의 롯지가 대부분 형편없이 낡았고, 파샹이야기로는 음식도 좋지않다고 했다. 상계 다음은 자가트라는 마을이지만 1시간 이상 걸리는 거리라 시간적으로 좀 힘든 조건이고, 다시 게르무로 돌아가자니 짐을 나르는 조랑말 무리와 함께 한참을 내려온 깍아지른 절벽을 따라 다시 오솔길을 올라가야만했다. 결국 대안으로 상계에서 30여분 거리에 있고 두세개의 롯지가 있는 슈리샤우르라는 마을까지 더 걷기로 했다.


상계에 머물 생각으로 달려왔다가 다시 더 걷기로 하니 여벌로 걷는 걸음은 더 힘들게 느껴졌다. 아내와 마찬가지로 나도 첫날 걸음 치고는 너무 많이 걷는다는 느낌이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슈리샤우르의 부메랑 롯지에 들어서니 단정한 외관이 마음에 들었다. 사우지(주인)를 만나 묵기로 하고, 2층 방을 구경하기 위해 올라가는 계단 끝에 덩치 큰 검정개 두마리가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순간 겁을 먹었지만, 문이 열려있던 한 방에서 개를 부르는듯한 사람 소리가 들렸고 개들은 그 방으로 쪼르륵 달려들어갔다. 개가 몰려 들어간 방에는 침대에 누워있던 백인 남자 트레커가 눈인사를 했다.




방에 짐을 풀고 내려와 쉬고 있는 사이 한무리의 서양인이 마당을 들어섰다. 하루 종일 길을 걸었지만 하루를 묵을 롯지 마당에서 첫 트레커를 만난 것이다. 마당에는 탁자가 하나밖에 없어 같이 앉아도 괜찮을지 물어왔고 혼쾌히 그들과 한 탁자에 앉게 되었다. 주고 받는 대화를 통해 그들이 독일인인 것을 알게 되었다. 의례적인 인사를 하고 나서 그들은 우리 부부의 국적을 물어왔다. 그리고 목적지 등을 묻는 한두마디의 어설픈 대화가 이어졌지만 나의 영어로는 더이상의 대화가 불가능했다. 난데없이 산 중에서 영어공부 열심히 하지 않을 걸 후회하게 되다니, 상당히 억울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촛불아래 저녁을 먹고, 파상과 한참을 그리고 롯지 주인과는 잠깐씩 영어와 한국어 그리고 몸과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집을 떠나온지 처음으로, 아니 인천공항 찜질방에서 샤워를 한지 처음으로 따뜻한 물로 샤워를 했다. 벌써 몇일 되었다고 김이 무럭무럭 나는 물을 보니 신기하기 이를데 없었다. 뜨거운 물에 손을 대니 기분마져 좋아졌다. 뜨거워졌다가 차가워졌다가 온도가 일정하지 않은 가스 온수기로 문고리가 제대로 붙어있지 않아 언제라도 누가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올지 모르는 화장실 공간에서 불안한 샤워지만 너무나 가뿐하고 상쾌한 기분에 젖어 침대에 누웠다. 쉬 잠이 들지 않아 일어나 창을 여니 깜깜한 계곡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오직 소리를 통해서만 강과 폭포가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밤이 깊어가면서 다시 빗방울이 들었다. 또 밤새 강물 소리와 폭포소리 그리고 빗소리에 흠뻑 젖어 눅눅한 아침을 맞을 것 같다는 걱정을 나누며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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