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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잘 자지 못했다. 평소보다 제법 늦게까지 다이님룸에서 다른 트레커들과 노닥거리다 방에 들었지만 옆방에 든 호주트레커들이 늦게 까지 떠들어 되었다. 지금까지 묵은 롯지 대부분은 방과 방사이 벽체를 합판 한장으로 막아놓았는데 이곳 히말라야 롯지도 마찬가지였다. 또 벽쪽으로 침대가 붙어 있어, 마찬가지로 옆방의 침대가 합판 한장 넘어 붙어있다보니 밤이 깊어 조용해지면 옆방 손님의 숨소리까지 들릴 정도였다. 그런 방에 묵을수록 소음을 내지 않기 위해 신경을 써야하는데 옆방의 청년들은 전혀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여행 초반에 티망의 롯지 2층에서 묵을 때 밤에 잠시 화장실을 다녀온 적이 있었다. 그런데 다음날 1층에서 묵었던 네팔리들이 내가 밤새 쿵쿵 거리고 돌라다녀 자신들의 잠을 깨웠다며 항의성 농을 걸었다. 사실은 내가 아니고 옆방의 트레커가 배탈이났는지 밤새 들락날락 거린 거였다. 아뭏튼 롯지는 최소한의 재료로 만든 숙소기때문에 단열이나 방음 같은 거는 전혀 고려치 않고 지은 집이다. 그래서 늘 옆방에 젊잖은 손님이 들기를 기원해야하는데 어제는 재수가 없었다.


찌뿌등한 몸을 이끌고 밤새 눈이 내린 길을 나섰다. 여전히 눈발을 계속 휘날리고 안나푸르나 연봉들은 구름 속에 사라지고 없었다. 흰쿠동굴에 이르자 상행인 트레커들이 소복히 바위 아래 모여 있었고, 잠시 쉬는 사이 하행길 트레커들도 바위 밑으로 모여들었다. ABC(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상황이 궁금했는데 무사히 다녀오는 사람들은 만나니 조금은 안도가 되었다. 그들 대부분은 한국인이었다. 하행인 트레커들은 조금은 과장된 표정으로 자신들이 얼마나 힘들게 다녀왔는지 이야기했고, 그리고 기상으로 봐서 오늘 상행인 사람들이 베이스캠프에 도달할 수 있을 지 걱정이라며 겁을 주었다. 사실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고도가 4200m라는 사실도 조금은 부담스러웠고, 꼭 거기까지 가야할 이유도 없었기에 MBC(마차푸차레 베이스 캠프)에서 머물고 내일 아침 일찍 배낭을 두고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까지 다녀오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오늘의 기상과 다른 여건의 변화에 달려 있는 것이기에 그대까지 어떤 결정도 내리지 않았다.


흰쿠동굴을 떠난뒤 곧 바로 데우랄리에 도착했다. 눈발을 계속 굵어지고 그만치 시야는 점덤 좁아져 갔다. 뜨거운 블래티를 한잔하고 온수로 물통을 채웠다. 시누와를 지나면서부터 1리터 페트병에 담긴 공산품인 미네랄워터는 더이상 팔지 않았다. 지고 올라오기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다. 대신 '따토파니'라고 자연수를 끓여서 팔았다. 미네랄워터보다 값은 싼데 물맛은 별로고 간혹 모레같은 불순물도 보였다. 사실 네팔리들은 그 물을 끓이지도 않고 그냥 마시는데 아무런 탈이 없다. 하도 여행안내정보에서 자연수를 마시지 말라고 해서 계속 미네랄워터만 사서 마셨는데 좋은 선택인지는 잘 모르겠다.


히말라야에서 흰쿠동굴을 지나 데우랄리까지 꼭 2시간이 걸렸다. 쉬엄쉬엄 걷기도 했고 눈때문에 빨리 걸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데우랄리를 나와 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로 향했다. 밤새내리던 눈은 하루종일 끊이질 않았고 고도를 높일수록 점점 더 거세졌다. 데우랄리를 지나면서부터는 설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고 오직 맹목적인 걸음에 몰두하게 되었다. 마음속에 조금의 두려움도 싹트고, 특히나 데데우랄리지나 MBC가는 계곡에서는 나도 모르게 마음이 달아오르고 서둘기까지 했다. 파샹 이야기로는 삼년전 바로 이 계곡에서 눈사태로 십여명이상의 트레커와 포터가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사태가 일어난 코스는 약 15분 걸리는 계곡길이었는데 왼쪽 사면의 경사나 쌓인 눈을 봐서는 사태가 일어날 지역같지 않았다. 파샹에게 물어보니, 그 경사의 상단부에 눈이 쌓였다가 일시에 무너져 내리는 특수한 지형탓에 사고가 잦다고 했다.


데우랄리에서 MBC까지 다시 2시간이 걸려 오후 1시경 MBC에 도착 했다. ABC에서 이제 막 도착했다는 한국인 남성 한분은 거의 사력을 다해 내려오다 여러번 넘어지고 굴렀다면서 계속 하행을 할지 어쩔지 걱정이 태산같았다. 무리하지 않는게 좋을 듯 했지만 그렇다고 추운 롯지에 계속 머물수도 없는 상황이라 그분은 결국 계속 하행을 하기로 하고 롯지를 나섰고, 다음은 우리가 결정을 할 차례가 되었다. 계속 ABC까지 올라갈지 아니면 MBC에 머물다 내일 아침 ABC까지는 가벼운 차림으로 다녀와서 하산을 할지 아직 결정하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점심을 먹고 나니 더 이상 고민이 필요 없게 되었다. 호주청년, 한국청년 할 것 없이 모두 ABC까지 올라가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고 보니 우리 부부만 덩그러니 MBC에 남을 이유가 없어 보였다. 차라리 먼저 롯지를 나섰다. 우리 포터 파샹은 MBC에 올라온 예닙곱명의 네팔리 중에서 가장 젊었다. 꼭 그래야만하는 것은 아닌것 같았지만 다른 네팔리들이 파샹에게 제일 앞에서 길을 뚫고 나갈 것을 종용했다. 파샹이 맨앞에서 길을 찾고 우리 부부가 뒤따랐다.


MBC부터는 눈발도 눈발이지만 안개인지 구름인지 사방천지에 아무 것도 볼 수가 없게 되엇다. 눈과 구름이 발밑과 머리 위, 그리고 사방에서 우리를 감쌌다. 사방팔방이 흰색이고 우리는 그속에 갇혀버렸다. 사방 10m의 공간에 갇혀 그밖의 상황을 알 수없는 채로 그냥 맹목적으로 걷고 또 걸었다. 길은 눈속에 숨고 산은 구름 속에 숨었다. 사람의 발길은 눈속에 묻혔고, 우리 뒤를 따라 올라오던 트레커들은 안개속에 숨었다가 간혹 흐르는 구름이 엹어지면 나타나기도 했지만 너무 멀리 떨어져 갔다. 나의시야는 1m앞의 발자욱에 묶이고 그 냥 발길을 이어갔다. 아무런 이유도 없다. 합리도 사리도 판단도 없이 그냥 걸었다. 구름속에 잠시 나타났던 ABC는 아무리 걸어도 가까워져 오는 것 같지가 않고 어느새 짙은 구름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렇게 3시간을 걸으니 멀리 ABC 안내간판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기쁨 마음에 달려가 아내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캠프로 올라갔다.


ABC에 도착하자 한치 앞을 볼 수 없게 내리던 눈이 먼추고 잠시 구름이 물러났다. 역시 우리는 운이 좋았다. 눈때문에 산을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도 없이 올라왔는데 석양을 받고 황금빛으로 피어나는 마차푸차레와 안나푸르나가 우리를 반겨줬다. ABC는 나같은 일반인이 안나푸르나봉에 접근할 수 있는 최고의 한계다. 5분정도 걸어서 View Point까지 가면 숙소 보다 해발이 조금 더 높아지겠지만 하여튼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에서 안나푸르나정상으로 진입해 들어가기 위해서는 엄격한 기준에 따라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한단다. 몇명의 셀파에 적지않은 입산료, 보험료 등을 부담해야되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생명을 담보하지 않으면 접근할 수 없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캠프에 도착하니 롯지 두군데가 문을 열고 있었다. 호주팀을 다른 롯지로 가고 우리 부부는 파샹의 권유로 캠프입구 오른쪽 롯지에 들어섰다. 이어서 한국인 여성 한 분이 들어오고, 해가 떨어질 무렵 한국 청년 커플까지 도착했다. 방은 배정되었지만 아예 방을 둘러보지도 않았고 저녁내내 다이닝 룸에서 지냈다. 4,200미터의 고도 때문에 모두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부풀었고, 또 고산증의 위험때문에 술도 한잔 나눌 수 없었지만 모두다 추운 방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눈꼽만치도 없어 보였다. 급기야는 네팔 여행을 떠나와 처음으로 다이닝 룸의 길다란 의자에서 롯지 식구와 한국인 트레커 그리고 네팔리 포터들 까지 모두 같이 자기로 했다. 외국에서 오랫동안 노동자 생활을 하셨다는 사오지는 이불까지 내놓으면 편의를 봐주셨다. 이렇게 내 생애 최고의 고지에서 얇지만 편안한 잠을, 꿈길 사나왔지만 마음 따뜻한 밤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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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피자를 먹고 830 마르샹디 만다라 호텔을 출발했다. 마을이 아침 추위에 얼어붙어 있는 시간, 멀리 산정은 눈부신 햇살로 깨어나고 있었다. 차메를 벗어나면서 아내와 그리고 다시 퍄상과 기념 사진을 찍고 눈 쌓인 침엽수 숲길로 접어 들었다. 눈다운 눈이 쌓여있는 지대로 접어드니 길을 걷는 느낌이 색다르다. 고개는 자꾸 아래로 향한다. 쌓인 눈을 보고, 눈 밟는 소리를 들으며 가파른 절벽을 아슬아슬하게 깍아 만든 조랑말 길을 걸었다. 다시 숲을 만나니 '설국' '닥터지바고'의 장면들이 뜬금없이 기억났다. 숲 속에서 만난 눈은 마당이나 길에서 만나던 눈과 기억을 되살리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힘이 달랐다. 그냥 이렇게 눈 덮인 숲 속을 하루 종일 헤매도 지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예정대로라면 점심을 브라탕에서 먹고 오후 일찍 처음으로 3,000m이상 고산지대 마을인 피상에 도착해야 했다. 하지만 여정이 예정대로 착착 진행되기만 한다면 여행의 묘미는 반감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점심을 먹기로 한 브라탕에는 영업을 하고 있는 롯지가 하나도 없었다. 아니 마을에는 한 명의 주민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이 폭설에 영업은 고사하고 자신이 먹을 양식을 조달 받는 것 조차 힘든 상황일 것이다. 겨울 한철 산을 내려와 배를 채우고 체온을 보전하는 것도 쉽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고스란히 겨울을 나기에는 더 힘들었을 것이다. 겨울 동안 집을 떠나 목숨을 부지하는 일은 그들에겐 선택의 여지 없는 생존 방식인지도 모르겠다. 겨울 비수기... 생존마저 쉽지 않은 주민들은 아이를 앞세우고 최소한의 살림만 챙겨 하산을 한다. 마을은 비고 혹 지나는 트레커만 마을에 인기척을 남긴다. 알 수 없는 일이다. 네팔리들이 떠난 자리에 왜 문명을 자랑하는 선진국(!)의 호사로운 트레커들이 발길을 디미는지...

 


브라탕에서 점심을 먹기로 한 계획은 깨어지고 다시 길을 걸었다. 파샹은 하산중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선 다음 마을인 디쿠르 포카리에 문은 연 롯지가 하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브라탕에 도착할 때는 고프지도 않던 배가 고파지기 시작하고, 괜히 조갑증이 들었지만 다행히 디쿠르 포카리까지 가는 길은 완만하고 그리 길지 않았다. 오후 1가 조금 넘어 디쿠르 포카리에 도착했다. 디쿠르 포카리에서 먹은 식사는 최악이었다. 식재료가 넉넉하지도 않았겠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는 트레커들에게 충분한 질의 음식을 서비스할 이유도 없었는가 보다. 달밧의 밥은 식은 밥을 다시 뎁힌 것이 분명해 보였고, 따라 나오는 찬들도 부실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배가 고팠다는 사실이지만 결국 다시 길을 떠나는 즈음에 포터들이 롯지 주인에게 항의하는 사단이 났다. 거기다가 메뉴에다가 스티커로 붙여 올린 가격을 적어놓은 것도 문제가 되었다고, 먼저 출발한 우리에게 뒤에 출발해 다시 만난 트렉커들이 알려주었다. 어차피 한번 스쳐 지나가는 길인데 우리는 실망할 것도 서운한 것도 없었지만 늘상 다녀야 되는 포터들에겐 롯지의 그런 처사가 참기 어려웠나 보다.



불불레서부터 차메까지는 다른 동행 없이 우리부부만 걸었는데, 오늘 처음 차메에서 만난 트레커들과 동행이 되었다. 특수학교 선생님이신 학국인 여성분, 인도에서 왔다는 한국 청년, 제주에서 왔다는 한국 여학생이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말벗이 되었고, 차메의 롯지에서 만난 호주인과 이번 여정에서 제일 처음으로 만났던 독인인들도 그룹이 되어 조금은 위험해져 가는 눈길을 같이 걸었다. 혹시라도 시야에서 멀어지면 잘 오고 있는지 뒤돌아보게 되고, 앞서가다 쉬고 있을 때 도착하기라도 하면 서로 반가운 얼굴로 맞아주는 관계만으로도 여정의 피로가 줄고 낯설고 깊은 숲이 주는 무서움도 잊을 수 있었다.


디쿠르 포카리를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오후 3 30, 목적지인 피상에 도착했다. 드디어 처음으로 3,000m 고지 마을에 도착한 것이다. 피상은 Upper Pisang Low Pisang으로 나누어져 있는 제법 큰 마을인데 동행 중 한 분만 Upper Pisang으로 올라가고 나머지 모두는 Low Pisang Tilicho Hotel에 짐을 풀었다. 듣기로는 오래 전부터 적기가 휘날리고 있었다는 겨울 피상은 인적마저 드물어 활기라곤 없었다. 멀리 Upper Pisang에서 내려다 보는 마을 풍광이 너무나 아름다웠다고, 일찍 짐을 푼 한국 청년은 Upper Pisang까지 산책을 다녀와서 전해주었다. 우리 부부는 추위에 쫒겨 가까운 마을 길만 잠깐 산책하고 돌아왔다. 내려다보는 마을 풍광이 아름답다고는 했지만 올려다보는 마을풍경 역시 너무나 아름다웠다. 지금도 이렇게 좋은데 풀이 돋고 아이들이 골목을 누비며 뛰어다니는 계절이 오면 얼마나 더 아름다울까 생각하니 언제 다시 한번 더 오고 싶은 욕심이 일었다.


바깥 추위를 듬뿍 안고 다이닝 룸으로 들어섰다. 롯지 주인은 다이닝 룸에 막 난로를 피우고 있었다. 차메서 부터 롯지에 난로를 피우기 시작했는데, 고도가 높아지는 그만치 추워지고 또 트레커의 밀도가 높아졌기 때문인 것 같았다. 다이닝 룸에서 저녁 식사를 기다리며 낯설진 않지만 아직은 서먹한 사람들과 하나의 난로를 사이에 두고 둘러 앉았다. 호주인 3, 독일인 3명 그리고 우리 부부를 포함한 한국인 5명이 둘러앉았다. 한국인 사이에는 벌써 서먹함이 사라진지 오래지만 거의 대화를 나누지 못한 외국인들은 그렇지 못했다.

호주인 3명은 부자 지간이라고 했다. 1995년에 왔던 트레킹의 기억을 아들에게 나눠주고 싶어 장성한 두 아들과 함께 다시 안나푸르나를 찾았단다. 독인인은 두 형제와 아우의 아내 사이인데, 형은 이번이 9번째 네팔 여행이라고 했다. 동생과 제수씨는 첫 안나푸르나 여행인데 형의 권유로 동행하게 되었단다.


각자의 여행 동기는 다르겠지만 롯지의 난로가에 앉아 있는 서양인 트레커들에게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 책을 들었다는 것! 독인인 세분도 책을 읽고 있었지만 호주인 부자는 조금 색달랐다. 호주인 아버지는 톨스토이의 [안나카네리나]를 읽고 있었다. 두꺼운 책인데, 바로 그 책을 15여년 전 네팔 여행 때 들고 다니며 읽었다고 하셨다. 그 말씀을 확인이라도 하시듯 호주인 아버지는 책갈피에서 그때 받았던 영수증 하나를 찾아내어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받은 상장을 엄마에게 내보일 때보다도 더 뿌듯한 표정이었다. 그 표정 뒤에 지난 세월 동안 쌓았을, 인생의 애환을 얼마나 많이 감추고 있을까? 그의 아내는 어떤 사람이고 그리고 지금 어디에 있는지, 왜 동행하지 않았는지, 그리고 그 세월 동안 그는 어떤 일을 하면서 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또 어떤 삶을 살았을까? 그리고 그 세월을 되돌아 보는 그의 마음에는 어떤 서정이 물들고 있을까? 모든 게 궁금했지만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의 큰아들은 [Empire: How Britain Made the Modern World]를 읽고 있었다. 제목만 들어도 골치가 찌근거리는 책을 트레킹의 동반자로 선택한 그의 취향이 유별나 보였다. 여행 때는 평소에 읽히지 않던 두꺼운 책을 들고 떠나라는 누군가의 조언이 생각났다. 그땐 그냥 우스개 소리로만 여겼는데 진짜 그는 그런 신조를 받드는 사람을 만난 셈이었다. 그리고 아우는 카뮈의 [이방인]을 읽고 있었다. 그냥 보기에 좋았다.


난로가에 둘러앉아 모두 책을 읽고 있는 사이 이번 여정에 같이했다 티망에서 버린 [바가바드 기타]를 아쉬워 하며 나는 대책 없는 상념에 빠져들었다. 나의 상념은 종횡무진 흐트러지고, 의식의 시간조차 무너졌다. 모든 기억의 직선과 곡선이 자신의 고도를 잃고 엉켜버렸다. 오직 책과 연관된 기억의 타래만이 끝없이 이어졌다. 고등학교 시절 학교공부에 완전히 흥을 잃고 밤새 읽던 책들, 결국 학교생활을 접고 방구석에 처박혀 읽어대던 책들, 그리고 정말 책을 읽어야 했던 대학시절 나태한 생활 속에서 간간히 잡았던 책들이 기억나면서 그 책들을 통해 접한 세상의 이야기들, 그 책을 통해 만들어나갔던 내 인생의 꿈들, 삶의 의미들을 반추했다.


책을 좋아하던 소년 시절, 책이 열었던 새로운 세계에 매혹되었고 그리고 언젠가는 다시 어른의 눈으로 꼭 다시 읽겠다고 다짐했었다. 하지만 세월에 침식된 기억은 다시 읽고 싶었던 책들의 목록마저 깡그리 잊어 버렸다. 누구나 한번쯤 읽고 던져버렸을 [이방인]을 성인이 되어 다시 읽고 있는 사람과 마주앉아 나는 그 책을 읽던 소년의 눈에 세상을 다시 둘러본다. 이제는 책과 거리가 먼 삶을 살면서 세상에는 책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많다는 핑계를 얻었다. 하지만 책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라고 여기는 것들 조차 행하지 못하는 삶을 살면서 늘 그리움으로 남아있는 인식의 목마름은 회피할 수 없었다. 여행 중에 만난 사람들과 그들이 들고 있는 책을 보면서 나는 내 삶을 끌어가는 가치들을 되돌아보고 나의 사는 방식, 나의 세상에 대한 처신을 뒤돌아본다.



여행은 익숙한 것들과의 작별이란다, 물론 한시적이지만! 나는 이번 여행을 통해 '' 자신으로부터 가능한 멀리 벗어나 멀리 있는 를 바라다 보고 싶었다. 지금의 나를 이루는 시간 속에서 남은 상처, 편견, 편향, 나쁜 기억들 그 모든 것으로부터 여행기간 동안만이라도 나 자신을 놓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이 시간 자유로운가 스스로 묻는다. 낯선 길, 낯선 마을, 낯선 사람들 속에서, 나의 취향과 다른 음식을 먹고 익숙하지 않은 언어로 대화를 나누지만 잠시 잠깐 잊혀지는 익숙한 일상은 늘 나의 뇌리를 따라다닌다. 그나마 한정된 시간이 지나고 나면 나는 다시 나의 익술한 삶속으로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여행이 준 환희의 기억을 가진 나는 이전의 내가 아닐 지도 모르겠다. 집 떠나온지 9, 안나푸르나를 걷기 시작한지 6일이다. 이제 서서히 안나푸르나의 모든 것에 익숙해 지고 있다.


호사로운 여정이다. 포터 퍄상의 극진한 서비스와 걷고, 먹고, 놀고, 자는 하루의 일과가 길을 따라 이어진다. 벌써 6일째. 아직 이번 여행에 주어진 시간은 많다. 이제 쉰! 아직 네 인생에 주어진 시간도 많다. 이번 여행의 기회를 준 모든 사람, 모든 운명에 감사한다. 그리고 응당 세상을 향해 그 고마움을 표해야 할 것이지만, 우선은 나의 여정이 나의 아내, 나의 포터 그리고 숱하게 만난 트레커와 내가 거쳐 지나간 모든 마을, 모든 롯지의 사람들에게 좋은 느낌, 작은 기쁨, 한 세상을 더불어 살아가는 같은 생명으로서의 연대감, 연민 같은 것이 남았으면 좋겠다. 관광객이 쓸고 지나간 자리에 나뒹구는 맥주 캔, 과자봉지, 담배꽁초, 그리고 무시당했다는 불쾌감, 욕망의 자극, 부러움이나 열등감, 시기심... 그런 나쁜 흔적을 남기지 않았기를 네팔리의 신, 티벳탄의 신들께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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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5시 물과 안개가 잔뜩 묻은 조랑말 방울 소리에 잠이 깼다. 방울소리는 같은 지상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아니라 멀리 하늘에서 내려오거나 아니면 땅속 깊이에서 솟아나는 소리같다. 중국영화의 귀신이라도 나오는 장면에서 배경음으로 사용하면 적격일 그런 소리다. 가만히 누워 한참을 가까워 졌다 멀어져 가는 방울 소리를 들으며 몽환속으로 빠져든다. 나에게 안나푸르나를 소리로 기억하라면 아마도 저 조랑말이 달고 다니는 방울소리가 될 것 같다. 조랑말 방울소리는 안나푸르나의 거친 자연과 네팔리의 고단한 삶, 그리고 어설픈 트레커의 설레임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아침을 먹기위해 들어선 다이닝룸에서 피상에서 리턴한다는 혼자 여행을 하는 독일인을 만났다. 그는 눈과 추위를 대비한 옷과 장비를 전혀 준비해 오지 않아 도저히 더 오을 자신이 없었다고 했다. 우리는 네팔라면이라는 Nuddle Soup을 먹으며, 리턴하는 독일인이 조그만 카메라에 담아 온 피상의 눈풍경을 구경했다. 그는 우리의 행운을 빌며 길을 떠났고, 우리는 짐을 챙겨 그가 내려온 길을 되짚어 올라가기 위해 롯지를 나섰다.

딸은 추웠다. 계곡 안에 위치한 딸은 해가 늦게 뜨고 일찍지고, 또 계곡을 따라 정상의 얼음바람이 쓸고 내려왔다. 으슬으슬 추운 게 아니라 본격적으로 추위가 느껴진다. 길을 걸으니 손과 귀가 시리다.

 

 

딸을 떠나 도착한 첫마을인 카르테 골목에 한국어 간판이 보인다. '맛있는 김치 있어요.' 그리고 길가 롯지 마당에서 모여있던 네팔리들이 말을 건넨다. 'Are you korean?' 나의 답이 떨어지자 마자 남한인지 북한인지를 다시 묻는다. 나중에 알았지만 네팔사람들에게 한국은 남과 북 공히 관심의 대상인가보다. 한 때는 북한과 관계가 좋았고, 다시 남한과 사이가 좋아졌지만 네팔은 집권당이 공산당인 나라다보니 남북 양쪽에 다 연이 닿아있다. 하지만 더 많은 네팔리들이 남한의 노동자로 인연을 맺고, 또 훨씬 많은 남한 사람들이 네팔을 왕래하다보니 네팔에서 지금은 남한이 더 인지도가 높은 것 같았다. 활짝 웃는 얼굴로 그는 나를 향해 엄지 손가락을 세워보이며 말한다. 'North korea is bad. South korea is good!' 하지만 내가 남한 사람이라서 기분이 좋을리가 없다. 우리의 분단현실이 그냥 씁쓸할 뿐이다.


다라파니를 지나면서 체크 포스트를 들르고, 바가르찹에서 점심을 먹었다, 우리는 토마토 스파게티를 먹었고, 파상은 달밧을 먹었다. 오늘 따라 달밧을 먹는 파상의 얼굴이 어둡다. 롯지를 떠나며 물으니 달밧의 밥이 식은 밥이었단다. 사오지에게 항의를 했고, 다시는 그 롯지에 들러지 않을 것이란다. 롯지나 레스토랑에 포터 한명이 트레커 두명을 데리고 오면 기본적으로 포터의 숙식은 무료로 제공되고 있는데 대부분의 경우 포터의 음식은 우리 트레커의 것보다 훨씬 좋았다. 우리는 보통 달밧을 먹고, 파샹은 야크고기나 계란 프라이가 덤으로 얹혀져있는 달밧을 먹었다. 보통 포터는 한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지 않고 주방 한구석에서 롯지 식구들이랑 같이 식사를 하는 것 같았는데 우리는 딸에서 부터 우리가 밥을 사지 않더라도 같은 테이블에서 먹기를 종용했다. 그러다보니 늘 파샹이 무얼 먹는지 알 수 밖에 없었는데 오늘 점심을 먹은 레스토랑은 파샹에게 큰 실례를 범한 셈이었다.



힘든 하루다. 길을 따라 끝없이 올라와 다시 올려다보면 안나푸르나의 남은 높이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간혹 마주치는 트레커들은 하나같이 쏘롱라 패스를 포기하고 되돌아가는 중이란다. 쏘롱라를 향해 가고 있는 사람은 우리 부부와 파샹, 슈리샤우르스의 부메랑롯지에서 같이 지낸 독인인 3명, 그리고 3명의 호주인이 전부다. 들리는 말로는 소롱패티와 마낭 등 쏘롱라를 가는 길목 마을에는 서른명 가량의 트레커들이 쏘롱라 패스를 시도하기 위해 대기 중이라고 했다. 그중 일부는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다시 올라갔던 길을 되돌아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쏘롱라 패스가 불가능하다면 다시 불불레로 리턴해서 버스로 포카라를 거쳐 베니, 따또파니 그리고 좀솜까지 이틀에 거쳐 버스여행을 해야한다. 끔찍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오직 일기가 좋아져 쏘롱라를 건널 수 있기를 빌 뿐이다.



첨으로 눈길로 접어들었다. 오늘의 목적지 피망이 가까워지면서 열대우림같은 수풀에 눈이 쌓혀있는 기묘한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눈을 밟기 시작하자 이제 본격적으로 겨울 안나푸르나에 접어든 느낌이 든다. 피망을 30여분 남겨둔 길에서 티벳탄 차림의 가족 무리를 여럿 만났다. 파샹이야기로는 그 중 한 가족은 틸리초 캠프에서 눈에 길이 막혀 트레커의 발길이 끊기면서 겨울을 나기 위해 저지대로 내려가는 중이란다. 오늘 만난 대부분의 네팔리들은 다 겨울을 견디기 위해 하산중인 것같았다. 마지막으로 만난 네팔리가족은 예닙곱살 되는 소녀와 그 부모다. 부모는 남루한 옷차림에 등짐을 하나씩 지고 있었고 , 아이는 떼국 떨어지는 무심한 표정의 얼굴로 눈덮인 길을 양말도 신지 않은 발로 조리만 신고 걷고 있었다. 우리와 마주친 소녀는 손을 내밀며 "Sweet! Pen!"을 읊조렸다. 순간 나는 괜한 혼란에 빠졌고 우물쩍 거리는 사이 소녀는 손을 거두고, 서운한거 하나없다는 듯 무심한 표정으로 부모를 따라 멀어져 갔다. 그 아이의 시린 눈망울이 오랫동안 나의 가슴에 남아있을 것 같다.



5시 30분이 지나 어둑어둑해질 무렵 티망에 도착했다. 티망은 사방이 눈덮인 산으로 둘러 쌓여있었다. 본격적으로 안나푸르나 안으로 들어서는 느낌과 함께 왠지 춥고 조금은 무섭기도 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너무 늦게 도착한 마을은 늘 그런 느낌이었다. 차라리 아침 일찍 출발하고, 오후에는 넉넉하게 도착해 햇살을 받고 동네를 한바퀴라도 돌게되면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티망은 해발 2200m다. 하루 일일정도 힘들었고 또 해발 2,000m에 도달한 기념으로 '락시'라는 로컬와인을 한잔씩 나누었다. 야생 과일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정종맛이 났다. 달밧과 락시 그리고 네팔 담배 한개비로 길었던 하루의 여정을 마무리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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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핏 잠이 들고 새벽일찍 눈을 뜨 2012년의 첫날을 맞았다. 오늘부터 라운드가 시작점인 불불레로 로컬버스를 타고 떠난다. 먼지와 진동 소음과 밀폐공포와도 싸워야할 것이다. 7시간에서 길게는 9시간이 걸린다는 여정. 기대되고 또 걱정되기도 한다. 카트만두는 해발 1300m 정도지만 먼지와 매연때문인지 고도때문인지 가벼운 제체기와 콧물이 나고 호흡이 조금은 불편하다. 이제 시작인가?


7시가 조금 넘어 오늘 길을 떠나는 트레커들과 함께할 가이드와 포터분들이 자이언트 민박을 들이닥쳤다. 모두 너댓명. 그중 한명이 우리 부부와 안나푸르나 라운드를 같이할 포터다. 먼저 다른 코스로 떠나는 트레커들과 식탁에 앉았고, 네팔리 분들은 따로 상을 차렸다. 식사를 하고 나서 이구대장님께서 그 중 가장 젊어 보이는 한 사람을 소개해 준다. Pashang Kagi Sherpa. 


일단 건실한 인상에 젊어서 마음에 들었다. 인사를 나누고 나이를 물으니 스무살이란다. 내 딸 보다 두살어린 학생이다. 카트만두의 한 대학에서 생물학을 공부중인데 방학중에 아르바이트로 포터일을 한단다. 인사를 마치고 먼길 갈 짐을 쌌다. 포카라행 비행기를 타야하는 트레커들이 먼저 숙소를 떠나기 시작했고, 한팀 두팀 배웅을 하다보니 마지막으로 우리 부부만 남았다.
이틀 밤을 자고 많은 시간을 같이 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벌써 정이들기 시작한 이구대장님, 그리고 [네팔 히말라야 트레킹 길라잡이]의 저자이시고,  내가 아는 한 한국에서 가장 네팔을 잘 알고 사랑하시는 분이신 '백두산'님과 인증샸을 찍고, 앞으로 스무날 넘게 한길을 가야할 파샹, 그리고 자이언트민박에서 주방일을 맡고 있는 상냥하고 이쁜 아가씨 찬드라와도 출발에 앞선 인증샷을 찍었다.


8시15분에 집을 나섰다. 그 순간 자이언트 민박의 울타리를 완전히 벗어나 낯선 나라로 접어드는 기분이 들었다. 일차 목적지인 베시사하르행 버스를 타기 위해 겅거부 버스파크로 향했다. 숙소에서 걸어서 10여분 거리밖에 되지 않았지만 도착한 버스파크는 내가 상상했던 버스터미날이 아니었다. 매표소라고는 구멍가게보다도 작았고, 버스의 종류나 출발 시간, 목적지 도착예정 시간 등 없으면 안될 것 같은 정보는 하나도 없었다. 버스터미날임을 알려주는 표식은 단지 도로를 따라 이런저런 종류의 차량들이 여러대 서있다는 것이 전부였다. 사실 정보에 대한 강박이 현대병인지 모르겠지만 그 모든 당연한 것들의 부재에도 버스는 나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황량한 겅거부 버스터미날을 떠나기 까지 또 여러명의 거지들과 곤혹스런 조우를 하고, 우리의 대형 배낭 두개는 봉고 지붕으로 올려졌다. 출발 직전에 앞타이어 하나를 똑같이 닳아 더 나아 보이지도 않은 다른 타이로로 교체한 버스는 9시가 다 되어 출발했다. 버스비는 외국인 트레커와 네팔인사이에 이중가격제가 행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파샹으로부터 들었고 3명분 1,145루피를 지불했다. '가난한 나라에 그렇게라도 해야지 먹고살지.'라는 생각을 잠시잠깐하고 있는데, 버스는 시내의 복잡한 도로를 따라 수많은 오토바이들과 뒤엉켜 질주하기 시작했다. 예상했던 일이지만 손에 땀을 쥐게하는 공포의 질주를 하루 온종일 감수해야된다는 사실에 곤혹스러웠지만 그 역시 한국인의 '신경증'에 지나지 않을터... 마음을 다잡았다.


가파른 내리막길에, 길 왼편은 천길 낭떠러지고, 노면의 아스팔트 포장은 거의 다파헤쳐져 있고, 가드레일도 제대로 설치되지 않은 길이지만 버스는 고속도로 달리듯 질주를 계속했다. 클락션 하나로 다른 차량들과 모든 신호를 주고 받으며 가파른 커버길에 구애받지 않고 거의 대부분의 차량을 추월했다. 한국에서 질주하는 택시를 위해 다른 차들이 양보해 주는게 일종의 불문률이듯, 네팔에서 봉고버스는 미친듯이 질주했고 다른 차량들은 거의 대부분 역시 클략선으로 신호를 주고 받으며 길을 양보했다. 베시사하르까지 가면서 길가에 쳐박힌 두어대의 차를 볼 수 있었지만 다행히 큰 인명 피해는 아닌것 같아 보였다. 이런 길에서 이런 차로 그렇게 운전하고도 사고가 이렇게 많지 않은 것이 오히려 신기했다. 아니, 내가 느끼는 공포는 그와 같은 생활이 일상인 사람들에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몰랐다. 사고의 공포, 죽음의 공포가 망상으로 까지 확대된 사람과 죽음과 삶이 너무 가까이 있고 서로가 낯설지 않은 세상과의 조우... 이 역시 네팔이라는 나라에 와서 겪게되는 또 하나의 색다른 경험인지도 모르겠다.


어느새 나의 시선은 멀리 산자락의 계단식 논으로 향했다. 가파른 산을 깍아 계단식으로 논을 만들어 농사를 지어 자식을 먹이고 가르키며 살아가는 네팔리들의 삶이 다가왔다. 여행객인 내가 어떻게 그들의 삶을 속속들이 알수 있겠냐마는 계단논의 경사를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고단한 삶과 숨가쁜 일상이 가슴저미게 느껴져 왔다. 역시 농사를 지어 밥먹고 살아보려고 헉헉되는 삶을 사는 같은 처지지만 네팔 농부들의 삶을 한국 농부의 삶과 비교하는 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했다. 버스를 타고 스쳐지나가며 네팔농촌의 삶을 들여다보며 감상에 젖는 불경을 피하기 위해 그냥 창밖 풍경을 무심히 관조하기 위해 애썼다.



두어시간을 달린 버스가 아무런 시설도 없는 길가 공터에 차를 세웠다. 승객들은 우르르 몰려나가 듬성듬성 시들어 있는 수풀 사이에 적당한 거리를 두고 남녀 가릴 것 없이 볼일을 보기 시작했다. 다시 버스가 지그재그 커브길을 달리기 시작하자 승객들은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플라스틱!"
한국에서 '비닐 봉지'라 부르는 것을 이곳에서 '플라스틱 봉지'라고 하는가 보다. 한 뭉치의 '플라스틱 봉지'가 뒷자리로 넘어가면서 필요한 사람들이 한장씩 뜯어 챙겼다. 구토가 끝난 승객은 창문을 열고 봉지를 길가로 던져버렸다. 우리 앞자리에 않은 어린아이가 구토를 하기 시작했고 순간 아이의 얼굴이며 옷이 토사물로 범벅이 되었다. 배낭에서 물휴지를 꺼내 건네자 아이 엄마는 미소로 답례를 했다. 염치없이 물휴지 몇장으로 누군가에게 작은 도움이 되는 기쁨을 느꼈다. 모두가 지쳐갈 무렵 버스는 휴계소 같은 곳에 도착했다. 다시 화장실에 줄을 서고, 마당 건너편 식당에서 음식을 사 먹기 시작했다. 파샹은 식사를 하러 가 버렸고 우리는 어떻게 음식을 사서 먹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름도 모르고, 맛도 모르는 여러 음식을 남들처럼 접시에 조금씩 퍼 담고, 스파게티같은 것도 한 주걱 받아 네팔의 첫 '노상'음식을 아내와 나누어 먹었다. 알고보니 각자 음식을 담아 음식의 종류와 양에 따라 값을 치루고 먹어야 했는데 우린 그걸 모르고 다먹고 나서 빈접시를 들고 카운트로 갔다. 곤혹스러워하는 직원에게 우리가 먹은 음식의 종류와 양을 바디랭귀지로 전하고 '90'루피라는 너무나 저렴한 음식값을 지불했다. 우리는 휴계소 마당가에서 팔고 있던 토마토를 100루피 주고 한 봉지 샀고, 파샹은 별도로 오렌지를 3개 구입했다.



토마토와 오렌지를 먹으며 바깥풍경을 보고있으니 오전의 여정에 비해 휠씬 편안하고 시간도 빨리 흘러 오후 2시 30분 즈음 버스는 베시사하르에 도착했다. 베시사하르는 '람중'주의 수도로 나름 꽤 큰 시가지를 형성하고 있었고 중심을 가로 지르는 길도 넓고 상가들도 많았다. 버스를 내리자 다시 불불레행 버스를 타러 15여분을 걸었다. 불불레행 버스는 베시사하르의 도심에서 벗어난 언덕 아래 공터에 있었는데 드디어 배낭을 지고 걷기 시작하는 기분이 들었다. 아내는 배낭을 지고 10분도 걷기 전에 숨이 차고 가슴이 쿵광거린다며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안나푸르나에 발을 들여놓기도 전에 가슴이 죄여오는 것 같다니 정작 고산지대로 접어들면 어떡할 지 걱정이 들었지만 시간이 약이거니 여길 수 아밖에 없었다.


버스파크의 매표소는 곧게 잠겨 있었고 직원은 온데간데 없었다. 가게에서 음료수를 한잔씩 나누고 30분쯤 기다리고 있는데 직원같은 사람이 나타났다. 오늘 버스는 마지막 1대가 남았다며 공터에 세워져 있던 폐차 직전의 버스를 가리켰다. 퍄상은 곤혹스러워하며 그래도 타겠나 아니면 내일 떠나겠냐를 물어왔지만 라운드 첫날부터 일정이 어그러지는 것도 싫고해서 그냥 타기로 했다. 몇몇 승객이 더 타고 나서 버스는 출발을 하려고 했지만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한참을 부르렁거리다 조수가 내리고 기어를 후진으로 넣고 다시 스타트를 거는 순간 조수는 바퀴를 받쳐놓은 돌을 빼내자 기사는 다시 기어를 전진으로 바꾸며 버스는 언덕길을 구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번의 시도 끝에 드디어 시동이 걸렸다.
'젠장! 이걸 타고 그 위험한 길을 가야만하나!' 나도 모르게 혼자 구시렁거리는 사이 버스는 우리의 포터 퍄상을 남겨둔채 호기롭게 언덕길을 치고 올라갔다. 퍄상은 손을 흔들며 웃음짓고 있고, 버스는 마냥 달리고 순간적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 지 몰랐지만 파샹의 표정을 보니 심각한 상황은 아닌듯했다. 버스는 베시사하르 시내를 돌았고 조수는 연신 '불불레'를 외쳤다. 이내 버스는 승객으로 가득차고 지붕까지 사람들을 태우기 시작해서야 다시 출발했던 버스파크로 돌아가 파샹과 나머지 승객을 싣었다. 버스는 그제사 불불레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오전에 탄 버스는 9인승정도 되는 소형버스에 지붕까지 포함해 24명까지 타는 것을 확인하고 이후 더 이상 세지 않았는데, 오후의 로컬 버스에는 조금 덩치가 크다고 40명 이상의 승객을 싣었다. 가다가 서고 사람을 싣고 또 가다가 사람을 싣고 나중에 더 이상의 공간이 나오지 않자 남자 승객을 종용해서 지붕으로 보내고 조수 역시도 지붕으로 올라갔다. 지붕으로 올라간 조수는 버스가 달리는 중에도 창문을 통해 버스안으로 들어오기도 하고 다시 창문을 통해 지붕으로 올라가는 곡예를 부리면서 요금을 받기도 했다. 목적지 거의 다와서는 한무리의 어린 학생들이 버스에 오르고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달리는 버스가 노면이 고르지 못한 곳에서 속도를 줄이면 뛰어내리기도 하고 다시 버스 꽁무니를 잡고 지붕으로 올라가기도 했다. 처음에는 이런 아이들의 행태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 들여지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꼭 그런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어떤 마을 앞을 지나자 외모가 비교적 단정해 보이는 남자가 버스를 세웠고, 버스를 세우자 마자 아이들이 지붕에서 뛰어내려 도망을 가기 시작했다. 그 분을 버스 지붕까지 올라가 숨어 있는 아이들을 확인하고, 다시 버스를 내려 버스 기사와 조수를 향해 삿대질을 하고 심하게 꾸짓는 것으로 보였다.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버스를 발길질까지 하고서야 그분은 돌아섰고 대꾸도 한마디 못하고 눈치만 보던 버스 기사는 다시 버스를 몰기 시작했다. 당당해 보이고 씩씩해 보이던 버스 기사가 대꾸도 못하고 당하는 걸 보니 많이 잘못했거나 아니면 항의 하던 그 분이 경찰이나 공무원 아니면 지역의 무슨 실력자일까 상상해 보았지만 내가 알 도리는 없었다.


베시사하르를 출발한 버스는 2시간 만에 불불레에 도착했다. 드디어 트레킹 출발점인 불불레에 도착한 것이다. 퍄샹의 안내로 '투어리스트 체크 포스트'에 들러 '팀스카드'에 확인 도장을 받고 저녁 어스름이 내리기 시작한 마르상디 강을 건너 롯지들이 촘촘이 들어선 골목으로 들어섰다. 퍄샹은 롯지를 선택할 것을 요청했지만 선택권을 퍄샹에게 일임했다.
"너가 숙소를 더 잘 알것아닌가. 너의 선택에 따르겠다." 퍄샹은 밝은 얼굴로 "호텔 마낭"이란 롯지로 들어섰다.


오늘 모든 것이 처음이었듯 말로만 듣던 '달밧'도 처음 마주했다. 도착하자마자 롯지 한켠에서 어린 아이가 냄비에 콩을 삶기 시작했고 그것이 바로 콩국인 '달'이었고, 밥을 '밧'이라고 한다고 하니 달밧은 '콩국과 밥' 인 셈이다. 예상대로 달밧은 내 입맛에 아무런 거부감이 없었고 커리와 나물까지도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식사를 하고 나자 긴장이 풀리고 몸도 고단해져 왔다. 판자로 얼기설기 엮은 이층 숙소로 올라가 잠을 청했다. 하지만 밤이 깊어갈수록 계곡을 따라 불어내리는 바람소리와 마르상디 강물소리가 커졌고 급기야는 양철지붕을 때리는 빗물까지 듣기 시작했다. 두달 동안 비 한방울 내리지 않아 먼지가 너무 많다던 카트만두를 떠나오자 마자 비가 내리기 시작하니, 트레킹을 떠나온 입장에서 반가워할 수도 안할 수도 없었다. 판자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찬바람과 강물소리, 그리고 양철지붕을 때리는 빗줄기에 거의 잠들지 못했다. 라운드 첫날밤 숙면을 취한다면 오히려 그것이 이상한 일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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