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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 예정된 호텔이 문제가 생겼다며 가이드 라마는 우리를 다른 호텔로 안내했다.  마무리가 덜 된 신축건물로 HOTEL KARUNA 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뜻을 알아보니 불교 용어로 부처와 보살이 지녀야하는 4가지 마음가짐인 사무량심의 하나인 悲를 뜻한다고한다. 자비의 비를 의미하는 호텔의 이름이 생경했지만 뭐 여기는 흰두교와 함께 불교가  삶과 버무려진 네팔아닌가.


아침 일찍 라마는 도착하고 우리는 한국식 미역국이 일품인 인근 한국인 식당에서 고산증 예방 의식의 하나로 소고기가 넉넉한 미역국을 배터지게 먹고 마이크로 버스에 올랐다. 5년전과 달라진 포카라 시내는 아직 포장이 안되어 흙먼지가 시야를 가렸지만 전에 없던 대로가 도심을 가로질러 건설중이었다. 주유소를 들러고 차는 도심을 벗어나 금새 포카라-바글링 하이웨이로 접어들었다. 하이웨이라고는 하지만 한국 시골의 낡은 2차선도로보다 나을게 없었고,  차들은 신호위반이나 교통법규 위반과는 무관하게 질주했다. 세상의 틀이 잡히고 문명화된다는 것이 주는 많은 이점과 그로 인해 잃게 되는 또다른 많은 것의 무게를 잰다면 어느것이 더 무거운지 아직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최소한 네팔에서 보내는 시간동안은 네팔의 모든 것이 더 소중했다. 무질서는 자유로 다가왔고, 거리를 휩쓸고 지나가는 먼지와 구석구석 쌓인 쓰레기조차 나의 시간여행을 돕는 친근한 친구로 다가왔다. 선진-후진이 아니라 단지 차이가 있을 뿐 나름의 삶은 고유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설산이 보이는 뷰포인트에서 한번 차를 세운뒤 곧바로 Phedi를 지나 트레킹 출발점인 나야풀에 도착했다. 산을 들어서기 전 설레는 마음을 달래며 입구의 가게에서 차를 한잔나누며 모두들 신발끈을 다시 메고 배낭끈을 조였다. 비시즌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적지 않은 트레커들과 마을을 가로질러 빗물고인 길을 따라 우리는 걸음을 시작했다. 얼마걷지않아 길은 마을을 벗어나고, 강을 건너자마자 갈림길이 있는 비렌탄티에 도착했다. 오른쪽으로 가면 사울리바자르를 지나 촘롱까지 다다르게 되고, 왼쪽으로 가면 힐레를 거쳐 오늘의 숙박지인 울레리가 나오니 우리는 망설임없이 왼쪽방향으로 걸음을 틀었다. 5년전 걸었던 오른쪽 길을 다시 못가보게 되어 아쉬움이 남았지만 두길을 동시에 걸을 수 없으니 어찌하랴...


 

울레리로 가는 길은 차가 다닐 수 있도록 넓게 닦아진 비포장길로 시작했다. 잊을만하면 한번씩 짚차가 지나갔고, 그때마다 먼지가 일고 우리는 바람 방향에 운을 맡길 수 밖에 없었다. 1월이지만 아직 길은 더웠고, 숨이 막히는 먼지 마저 시야를 가리니 트레킹 첫날의 걸음부터 가볍지 못했다. 확 트인 전망도 아니고, 우리를 반기는 설산도 아직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아직 네팔의 산을 오르는 느낌이 들기에는 한국산과 너무나 닮은 길을 걸었다.

 

간혹 길가에는 현지인들이 도코라는 광주리지게를 메고와 밀감을 팔고 있었다. 가격에 비해 그 신선함과 향기는 지친 트레커에겐 너무나 큰 선물이었다. 시간이 지나니 울레리까지 하루 걸음은 지친 몸에 힘을 주던 밀감의 상큼한 향기가 가장 남는다. 

힐레에 이르자 드디어 차들은 더 이상 우리의 걸음을 쫒아올 수 없게 되어 먼지로 부터 해방되었다. 차와 먼지로부터 신경을 끊으니 풍광은 더 선명해지고 안나푸르나에 기대에 살아가는 네팔리들의 삶도 더 살갑게 다가왔다. 일행은 서로의 컨디션을 살피며 같이하는 여행의 위험을 피하고 그 멋을 더하는데 배려심을 아끼지 않았다.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눈을 마주칠 때마다 웃어주는 표정에 마음을 다 담고 있었다. 사실 나는 같이하는 여행보다는 단촐한 여행을 더 선호한다. 그런데 취향에 반한 이번 여행이 나의 일방적인 강권으로 성사되었다. 지상에서 맺은 인연중에 가장 소중한 사람들에게 나는 내가 사랑하는 안나푸르나의 풍경을 나누고 싶었다. 나역시 소중한 인연으로부터 주어진 강권에 못이겨 네팔과 인연을 맺고 사랑에 빠졌듯이 나의 친구들이 다 그렇게 네팔의 친구가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안나푸르나의 추억을 공유한 그들과 같이 늙어가며 추억담을 나누고 싶었다. 그래서 이번 여행은 애기를 다루듯 조심스럽게 진행되어야했고 혹시라도 상처가 나거나 관계에 금이가는 어떤 금도를 넘어서는 행동도 피해야만했다. 물론 그런 입장이 긴장을 주거나 부담으럽게 다가오지 않았고 즐거움을 더할 것이라 굳게 믿었다.

힐레에서 점심을 먹고 길가의 돌담에 몸을 뉘었다. 햇살, 바람, 그리고 흙의 향기까지 나의 몸에 스며드는 순간 깜빡 잠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을 것이다. 나는 의식을 옥죄던 모든 것들이 사라진 한순간의 희열을 느꼈다. 사실 해탈의 순간은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냥 모든 것을 놓아버리는 순간이기에 어쩌면 죽음을 닮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다시 울레리까지 걸으며 '여행'에 대해 생각했다. 집을 나서면 늘 자신에 부과되던 가능한 모든 규정들로부터 자유로워 진다. 그래서 여행은 모든 것들과 작별하는 연습이기도하고 죽음과 친해지는 시간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늘 여행을 꿈꾸는 것은 그렇게 대단한 동인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차라리 현재의 삶이 주는 속박을 벗어나기 위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자기 긍정이 확고한 사람은 여행이 불필요하다면 편협한 생각일까? 지금 여기에 만족한다면 왜 굳이 길을 찾아 나서겠는가. 그런데 나는 무엇에 목마른것일까...

 

모두들 지쳐갈 무렵 울레리에 도착했다. 산등성이에 아담하게 모여앉은 마을이 이뻤다. 비슷하게 도착해 잠자리를 찾는 트렉커들의 소란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멀리 노을빛이 먼 옛시간을 상기시키며 사라져갔다. 이내 초저녁의 고요가 아늑하게 마을을 감쌌다. 연꽃을 의미하는 KAMALA라는 이름의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풀고 슬슬 냉기를 느끼며 모여든 다이닝 룸에서 안나푸르나의 첫 밤을 맞았다. 식사를 마치고 흥과 취기에 들떤 다른 팀의 네팔리 가이드가 춤과 노래로 다이닝룸의 열기를 더했지만 이내 시들해졌다. 흥취보다는 고요를 찾는 일행은 각자의 방으로 흩어져 아쉬운 하루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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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성벽력에 창문이 흔들리고, 장대비가 창을 때리는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는데 새벽에 눈을 뜨니 언제 그랬냐는듯 하늘은 시치미를 떼고 파란 얼굴로 우리를 맞이했다. 창 넘어 멀리 마차푸차레와 안나푸르나 남봉이 황금빛 아침 햇살을 받으며 신비한 자태를 드러냈다. 안나푸르나의 중심으로 떠나는 아침, 밤새 우리를 불안하게 했던 비가 씻긴듯이 지나가고 이렇게 청명한 하늘과 말숙한 산의 자태를 대하니 절로 힘이 났다. 


하지만 상쾌한 아침은 호탤과의 마찰로 끝이 났다. 호텔 터치네팔에서 아침부터 온수 문제로 한바탕했다. 네팔에 들어온지 보름이 되었지만 아직까지 한번도 롯지나 레스토랑에서 클레임을 제기한 적이 없었다. 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왔기 때문에 어지간한 것은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네팔리의 친절에 마음 편안한 여정이었기 때문이기도했다. 그런데 아내는 이날만은 그냥 넘어가기가 힘들었는지 바로 호텔 카운트로 따지러 내려갔다. 전날 저녁 스텝이 룸차지 1000루피에 24시간 온수 샤워가 가능하다고 했던 것은 순전히 거짓말이었다. 다시 안나푸르나로 떠나기에 앞서 머리라도 감고 싶었던 아내는 결국 프론트에 내려가 항의를 하게 된 것이었다. 아내의 항의를 무시하다 재차 항의를 한 뒤에야, 스탭들이 가스통을 짊어지고 오르락 내리락 거린 끝에 다른 호실에 온수가 나오도록 설치했으니 샤워를 하라고 했다. 샤워는 포기하고 그냥 머리만 감고 식사시간을 기다렸다.


그런데 다시 아침 식사도 문제가 되었다. 전날 8시에 예약해 둔 음식을 시간이 다된 뒤에야 단체 손님이 많아서 조리가 불가능하다고 알려왔다. 짧은 영어에 따질 엄두도 나지 않고, 이렇게 좋은 아침에 더이상 투닥거리는 것도 싫어 그냥 간단한 음식으로 되는데로 달라고 했더니, 기름에 튀긴 빵과 커리 한종지를 내 놓았다. 주는 데로 먹고 룸에 올라와 짐을 싸고 카운트로 내려가 계산을 하니 마당에는 호텔에서 불러놓은 택시가 도착해 있었다.


택시비를 물으니 나야풀 가는 로컬버스 터미널까지 200루피라고 했다. 그러면서 택시기사는 아예 1시간 30분이 걸리는 나야풀까지 1,500루피에 바로 가자고 제안했다. 로컬버스는 일단 기다려야하고, 시간도 30분에서 1시간이 더 걸리고, 위험하고, 지저분하고, 좁아서 불편하단다. 다 맞는 말이었다. 파샹까지 나서서 그냥 택시로 가자고 종용했다. 터미날에서 배낭을 들고 내리고 ,버스를 기다렸다가 다시 버스 지붕에 배낭을 싣고 타고 내리고 하는 그 모든 것이 귀찮은 눈치였다. 3일간의 강행군에 지친 파샹을 위해 500루피 정도 돈을 더 쓰고 택시로 나야풀까지 가기로 마음먹었다. 단 조건을 달았다. "만약 당신이 천천히 안전하게 운전할 것을 약속한다면 이 택시로 나야풀까지 가고 그렇지 않다면 내리겠다." 당연히 기사분은 "OK!"를 외쳤고 네팔 온 뒤 처음으로 베스트 드라이버를 만났다.



위험한 추월이나 급발진, 급제동 없이 천천히 모는 택시를 타고 느긋하게 나야풀로 향했다. 멀리 안나푸르나 흰봉우리가 드러나는 위치에서는 "Take Photo!"를 외치며 택시를 길가에 세워주기까지 했다. 정말 처음으로 긴장감없이 차를 타고 포카라 에서 나야풀까지 산자락에 터를 잡고 살아가는 네팔리의 삶을 느껴 볼 수 있었다. 포카라 시내를 벗어나면서 S자 고갯길을 끝없이 오르고 그리고 끝없이 내려오니 나야풀이었다. 길은 분명히 'Highway"였는데 바닥은 페이고 일부는 아예 포장의 흔적조차 없는 구간이 허다했다. 아무데나 아무런 표지도 없이 공사를 벌여놓고 길을 막고 있는 곳도 몇군데 있었다. 뭐 그래도 네팔리들은 아무도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지 않았다, 여기는 네팔이니깐!!


나야풀에 도착하자마자 블랙티를 한잔씩 마시고 걷기 시작했다. 나야풀의 체크 포스크에 등록을 하고, 곧이어 침룽으로 향하면서 한번 더 체크포스트에서 체크를 한뒤 사울리바자르로 향했다. 안나푸르나로 들어가는 입구인 나야풀은 한국의 여느 국립공원 입구처럼 상가들이 즐비하고 사람의 발길이 붐볐다. 하지만 안나푸르나를 향해 10분 20분 올라갈수록 상점도 민가도 드물어지고, 침룽을 지나고 사우디바자르가 가까워지면서는 트레커들의 발길도 줄어들었다. 상행 트레커는 만나기가 어려웠고 간혹 하행 트레커를 싣은 택시가 우리를 스쳐 내려가기도 했지만 우리가 만만 하행 트레커 거의 대부분은 한국인이었다. 파샹이야기로는 안나푸르나 겨울은 트레커의 발길이 줄어 비수기라고 하지만 오히러 한국인 트레커가 집중적으로 몰려 "Korean Season"이라 부른다고 했다.



사울리바자르에서 점심으로 달밧을 먹고 한가로이 햇살을 받으며 한참을 쉬다가 다시 걷기를 시작했다. 길따라 조각밭에는 유채꽃이 이쁘고 나락을 베어낸 빈논 한켠에 자라고 있는 감자며 양배추며 마을 양파의 파릇한 잎이 싱그러웠다. 한국의 늦은 가을이나 이른 봄처럼 공기는 차지만 햇빛을 따사로운 길을 걸었다. 산길이 아니라 들길을 걷는 편안함이 좋았다. 안나푸르나에서 흘러내리는 모디강(Modi Khola) 을 거슬러 좀더 올라가니 산등성이를 따라 간드룩으로 가는 길과 모디강을 따라 시와이(Siwai)쪽으로 갈라지는 갈림길이 나왔는데 파샹을 지름길을 안다며 오른쪽 갈림길인 시와이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길이 복잡하지 않아 어떻게든 간드룩 가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보였는데, 어느 순간 파샹은 헤메기 시작했다. 만나는 네팔리마다 몇번을 길을 물은 파샹은 자신감이 없는 표정으로 간드룩을 포기하고 임레, 쿠미, 지누단다를 거쳐 촘롬으로 바로 갈 것을 제안했다. 간드룩과는 점점 거리가 벌어져 간드룩을 갈려면 가파른 돌계단길을 두 시간이상 계속 걸어야만 된다는 것이었다.


간드룩은 이번 여행을 떠나오기 전에 사전 조사를 통해 알게된 마을이었는데 가파른 계단 논 끝에 형성된 척박한 삶의 조건을 가진 마을이지만 아름답고 풍성한 그런 꿈의 마을같은 느낌으로 느껴져 꼭 가보고 싶었던 마을이었다. 파샹은 가능하면 덜 걷고 편안한 길을 선택하려 했지만 이 지점에서 처음으로 내가 고집을 피웠다. '나는 농사꾼이고 역시 산골에 산다. 그래서 네팔여행중에 간드룩이라는 마을에 하루 지내면서 내가 사는 마을과 꼭 비교해 보고 싶었다. 나에게 간드룩은 이상적인 꿈의 마을로 느껴진다. 그래서 좀 힘들더라도 간드룩을 가고싶다.' 고.


시와이로 가는 길은 'Old Road'라고 불렀는데, 새길이 나면서 지금은 트레커의 발길이 많이 준 논두렁길이었다. 목이 말랐지만 티하우스를 쉬 만날 수 없을 정도로 쇠락한 한가롭고 호젓한 길이었다. 특히나 모디강 계곡을 건너 나란히 형성된 란드룩을 마주보면서 걸을 수 있어 너무 좋았다. 파샹이야기로는 나야풀이 안나푸르나 여정의 출발지가 되기 전까지는 페디를 시작으로 란드룩을 거쳐 안나푸르나 산군속으로 트레커들이 들어갔다고 했다. 그런데 파샹은 내가 내려오는 길에 란드룩을 가자고 하니깐 란드룩은 숙소도 별로고 음식도 좋지 않다고 하면서 난색을 표했고, 또 오후에 유일하게 만난 한국인 트레커도 자신은 란드룩을 통해 올라갔는데 지금 내려오는 이 길이 더 좋다며 란드룩을 권하질 않았다. 그래도 나는 상행길에는 간드룩을 가고, 하행길은 꼭 란드룩으로 가야지하고 마음 먹었다.


마실 물이 떨어져 목이 마를 때 즈음, 시아와를 지나며 티하우스를 만났다. 애타게 찾던 티하우스를 만나 반가웠지만 우리를 더 애타게 기다렸을 한 소년을 만났다. 어디에 찔렸는지 부딪쳤는지 알수 없지만 한쪽 발이 퉁퉁 부은 소년이 티하우스 앞에서 우리와 마주치자 애처로운 얼굴로 다가와 자신의 발을 가리키며 말을 걸었다. "Have you medicine?" 말을 하지 않아도 상황이 이해되는 그런 국면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가진 것은 몇개의 대일벤드와 후시딘 그리고 아스피린이 거의 전부였다. 발은 곪는지 퉁퉁부어 있었지만 의학적 지식도 없고 약품도 없으니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그냥 후시딘을 발라주고 대일밴드 여분과 통증을 줄이는데 도움이 될지 몰라 아스피린을 주었지만 별로 도움이 될것 같지 않았다.


블랙티를 마시고 미네랄워터를 한병사서 다시 길을 나섰다. 이내 임레라는 곳을 지나게 되고 그곳에서부터 왼쪽 가파른 다락논 언덕을 치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논두렁사이로 게속 이어지는 가파른 길은 모두 돌담과 돌바닥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밤새 내리던 열대성 소나기가 쓸고 지나간 돌길은 말끔히 씻겨져 있었고 그 길을 먼지라고는 한톨도 없는 투명한 공기를 들이쉬며 걷다보니 가파른 길이 주는 고통도 잊을 정도로 좋았다. 돌담에 앉아 잠시 쉬다보며 옷길을 파고드는 찬바람에 몸을 움츠렸지만 걷고 있는 동안에는 땀이 이마에 맺힐 만치 따뜻한 하루가 계속되었다. 몇일뒤면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의 설원에서 시린 손을 비비며 따뜻한 날들을 그리워할까 믿어지지가 않았다.



파샹은 오늘 자신이 실수하는 바람에 간드룩 가는 길을 잘못들어 여정이 힘들고 늘어졌다면 미안해 했다. 그러면서 한 농가에 들어가 사탕수수대를 샀는지 3자루 들고 와 하나씩 주면서 목이 마를 때 정말 좋다며 어떻게 껍질을 까서 씹어서 단물을 빨아 먹을 수 있는지를 보여 주었다.  Old Road로 선택하는 바람에 두어시간을 더 걷고, 가파른 오르막에 숨막혔지만 나는 트레커가 거의 없는 아름다운 돌담길, 언덕길을 한도 끝도 없이 걸을 수 있었서 좋아다며 파샹을 격려했다. 올라가도 올라가도 줄어들지 않던 길이 멀리 높은 산에 해거름이 드리울 때쯤 거의 간드룩에 도달한 것 같았다.



마지막 언덕길을 오르며 길가에 홀로 남겨진 병들고 야윈 조랑말 한마리와 마주쳤다. 파샹 이야기로는 그 조랑말은 평생을 힘든 짐을 나르다 이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홀로 남아 있는 것이라고 했다. 늙고 병든 조랑말이 더이상 짐을 나를 수 없을 만치 쇠약해지면 주인은 조랑말에 달려있던 모든 인공적인 장신구나 안장, 연장 등을 풀어주고 홀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한적한 풀밭에 풀어 놓는다고 했다. 그리고 몇일 뒤 조랑말이 숨을 거두면 불교식으로 장례를 치뤄주고 흰천으로 몸을 감아 매장을 해준다는 것이었다. 평생 인간을 도와 고생한 조랑말을 위해 장례나마 예를 갖쳐 정성껏 치뤄주는 네팔리들의 숭고한 삶의 자세가 너무나 아름답게 느껴졌다.


쓸슬이 죽음을 맞는 조랑말을 뒤로하고 언덕을 오르자 이내 간드룩 입구가 나타났다. 도착한 간드룩은 내가 꿈꾸던 그런 곳은 아니었지만 나름의 삶을 꿋꿋하게 영위하는 아름다움 사람들이 사는 그런 마을같았다. Mudi Hotel에 여정을 풀고, 하산중인 폴란드인 트레커와 짧은 영어로 대화를 나누고, 한국인 청년 2명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풀란드인 트레커는 한국을 잘 알고 있었고 한국인 친구도 있다고 하면서 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에서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까지 보통은 두어시간이면 여유있게 주파가 가능하지만 지금은 폭설로 어림이 없다고 했다. 자신은 장장 4시간 넘어 걸려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고 했다. 거기다가 어제 비가 고스란히 안나푸르나에는 눈으로 내렸을 걸 생각하니 혹시 라운드에 이어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마저 포기해야되는 상황이 될까 걱정스러웠다.


달빛 받은 안나푸르나, 마차푸차레, 히운출리가 창으로 가득 비치는 방에서 길고 추운 간드룩의 밤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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