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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푸르나의 아쉬운 마지막 밤을 보내고 빗소리 들으며 아침을 맞으니 오늘은 산을 떠나 도시 포카라로 들어서는 날이다. 아침을 들고 서성이다 비가 가늘어지자 과감히 지름길을 잡아 담푸스로 향했다. 담푸스 가는 지름길은 트레킹 코스를 벗어나 수목과 바위가 어우러진 소로들이었다. 간혹 방목중인 소들이 길을 막고 있었고, 논밭이 보이는 언덕위에서 길이 수풀 속으로 사라져 당혹스럽기도 했지만 큰 마을이 인접한 야산을 헤쳐 나가기엔 큰 어려움이 없었다. 담푸스는 차량이 들어올 수 있는 큰 마을이었다. 넓은 비포장길을 따라 형성된 건물은 롯지와 가게를 겸한 주택들이 많았고 수공예 기념품을 만들고 파는 공방도 여럿 보였다. 한 공방 앞을 지나자 젊은 남자가 직접 만들었다는 천 제품을 들어 보이며 한국어로 호객을 하기도 했다. 오스트렐리안 캠프를 떠난지 한 시간도 안되어 우리는 이미 도시로 접어든 느낌이었다. 담푸스를 지나 패디로 향하는 길은 논밭사이의 오솔길과 농가와 농가를 잇는 아름다운 돌길이 이어졌다. 길을 나설 때가지 뿌리던 비가 그치고 투명한 햇살과 따스한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분명 안나푸르나는 한겨울인데 고도를 낮추어 페디로 접어드니 한국의 봄날처럼 온화한 기운이 넘쳐났다.

오스트렐리안 캠프를 떠난지 두세시간이 지났을까, 페디에서 포카라 나야풀간 도로와 만나는 가파른 돌계단을 내려서자 파샹이 불러놓은 택시가 기다리고 있었다. 택시가 과속과 위험한 추월을 시작하자 이미 습관이 되어버린 요구를 했다. '나는 바쁘지 않으니 천천히 운전해 주세요.' 그래도 그 한마디에 택시는 속도를 줄였고 이내 네팔 최고의 현대적 도시인 포카라에 접어들었다. 포카라 떠난 지 몇일 되었다고 도시의 생동감이 반갑고 북적이는 사람의 발길에 흥이 일었다. 부산한 사람들의 움직임 속에 또 한 사람의 장례행렬이 이어지고, 몰려다니는 아이들의 분주한 동작들이 장례행렬과 함께 어우려졌다. 산은 산대로 아름다워 우리의 발길을 불렀지만 도시는 또 나름의 도시다운 인간미가 넘쳐났다.

 산행전 묵고 짐을 맡긴 '터치 네팔 호텔'에서 짐을 찾아 파샹의 소개로 미리 예약한 '베스트 탑 뷰 호텔'로 향했다. 베스트 탑 뷰 호텔 역시 레이크 사이드의 중심에 있었다. 중급 호텔로 조식 포함 하루 22불에 하루종일 뜨거운 물이 나오고 미네랄 워터가 제공된다고 했다. 밤이면 암흑 천지로 변하는 네팔에서 하루종일 따뜻한 물이 나오는 호텔은 나에게 대단한 호사임이 분명했다. 파샹의 친구가 성수기에 스텝으로 근무한다는 이유로 선택된 호텔이지만 비교적 만족스러웠다.

호텔에 짐을 풀고 레이크 사이드의 거리로 나서니 오후 2시가 지났다. 급한 빨레를 세탁소에 맡기고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식당을 찾아 두리번 거리다가 내일이면 헤어질 파샹을 위해 점심과 저녁 메뉴의 선택권을 주었다. 파샹에게 트레킹 동안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무어냐고 물었더니 피자라고 했다. 그래서 두어번 롯지에서 피자를 시켰지만 두번 다 맛이 형편없었다. 그래서 파샹에게 포카라 가면 마지막 만찬은 꼭 고급 피자로 하자고 제안했고 파샹은 좋아했다. 역시 파샹은 점심으로 '피자'를 선택했다. 레이크사이드의 한 피자가게에 들어갔다. 유럽풍의 고급스런 분위기에 피자와 햄버거 스파게티까지 하나같이 맛이 좋았다. 파샹도 만족스러워 했는데 특히나 평소에 마음껏 마실 기회가 거의 없는 콜라를 너무 좋아하는 것 같았다.

점심을 먹고나니 거의 3시가 다 되어 다른 일정을 잡기에는 이미 늦은 시간이 되었다. 그렇다고 뚜렷하게 할 일도 없어 마냥 레이크 사이드를 싸돌아 다녔다. 하지만 레이크 사이드는 30분 길게 잡아 1시간이면 넉넉하게 돌아볼 수 있을 정도의 규모에 불과했다. 거리와 접한 2층 가페에서 레이크 사이드 거리의 아름다운 가게와 이곳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바라다보며 향기로운 커피를 마셨다. 거리는 한산했고 네팔리와 관광객의 표정은 여유로왔다. 우리는 세상과 삶의 아름다움을 음미하고, 안나푸르나에서 보낸 여정을 회상하며 포카라에서의 반나절을 향유했다. 다시 거리로 나와 같은 길을 서너바퀴나 돌다가 일몰을 맞는 페와 호수가에 머물렀다.  해지는 페와호수는 부풀은 의식을 잠재우고 들뜬 마음을 가라앉혔다. 호수만치 차분한 마음으로 나는 뜬금없이 고향 진해의 바닷가를 떠올렸다.  순간 갯내음이 입안에 번지고 고향에서 부모님과 살아가고 있는 동생을 생각했다.  그리고 지나간 모든 시간들이 다시 그리워졌다.

호텔에서 쉬고 있기로 한 파샹은 저녁시간에 한국음심점인 산마루 식당에서 만나기로 했다. 파샹이 오늘 저녁메뉴로 'Korean Food'을 원했기 때문이다. 산마루 식당에서 '불고기 백반'을 먹었고 다행히 파샹은 아주 맛있어 했다. 다시 베스크 뷰 호텔로 돌아와 파샹과 커피를 한잔 들며 그동안의 수고에 감사한 마음을 전하며 작별의 아쉬움을 달랬다. 포카라에서 카트만두로 귀환할 버스비와 얼마간의 팁을 주었지만 더 많이 주지 못하는 처지가 못내 아쉬웠다.

이번 여정이 즐거울 수 있었던 것은 단연 파샹을 만난 행운 때문이었다. 늘 즐거운 표정으로 씩씩하게 앞서 나가며 우리 부부의 모든 편의를 살펴주었던 파샹이 없었다면 이번 여행의 묘미는 반감되었을지도 모른다. 네팔의 정치적 상황과 네팔 청년의 고민을 나누며 네 딸이 살아갈 한국과 파샹이 살아갈 네팔의 현실을 비교하며 안타까움을 나눴고, 우리 모두의 행복한 미래상을 같이 그려보던 시간이 그리웠다. 마낭을 오르고 다시 내려오던 길에서 맞은 눈보라 속에서 파샹과 우리 부부는 트레커와 포터가 아니라 도반이자 가족이 되었다. 서로의 안전을 보살피며 서로의 즐거움을 북돋기 위해 애써던 시간들은 우리 부부가 살아가는 동안 내내 그리움으로 되살아 추억이 되었다.

집을 떠난지 처음으로 산마루식당의 전화를 빌려 딸 아이와 통화를 했다. 다행히 잘지내고 있다고 하고,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외할머니도 잘 신다는 소식을 받으니 조했던 시간들이 뒤로 밀려났다. 내 전화는 네팔에 입국하자마자 먹통이 되었다. 아내의 전화기가 있긴 했지만 와이파이 존은 없고, 3G망은 요금이 무섭고, 요금을 따로 내고 롯지에서 충전을 했지만, 산이 높아 아예 먹통이 된 전화 핑게로 집 나온지 22일 만에 딸한테 안부를 묻게 되었다. 롯지에서 요금을 내고 유선전화를 사용할 수도 있었지만 사실은 그냥 한국으로 전화하기가 싫었다. 혹시라도 아주 나쁜 소식이 있어 여정을 중단하고 돌아가게 되거나, 소소한 문제들이 있어 내가 여기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이 걱정만 떠안게 되는 그런 상황이 싫었다. 오로지 그냥 연락을 끓고 여정에 몰두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늘 딸아이에 대한 걱정은 목에 걸린 생선까시처럼 가쉬지 않았다. 여행내내 따라다니던 생선까시가 전화 한통화로 쏙 빠져 버렸다. 날듯이 마음이 가벼워졌다.

파샹과의 마지막 저녁을 먹고 호텔로 돌아왔다. 하루 22불자리 호텔이라고 그래도 무료로 카메라 밧데리 충전이 되고, 온수가 나오고, 아침식사가 나오고, 인터넷이 되었다. 로비에 놓인 1대의 컴퓨터에는 늘 사람들이 붐볐다. 호텔을 들고 나면서 계속 컴퓨터를 차지하기 위해 노렸지만 내 차례는 돌아오지 않았다. 스텝에게 물어보니 오후3시부터 초저녁 정전전까지 컴퓨터를 할수 있다고 했다. 3층 객실에서 로비까지 몇번을 들락거린 끝에 컴퓨터 앞에 앉을 수 있었다. 카메라 메모리를 백업하려 시도했지만 파일은 많고 속도는 느려터져 중간에 포기하고 말았다. 파일 복사중에 웹브라우즈를 열고 비나리마을 홈페이지와 네이버에 연결을 시도했다. 무려 23일만의 인터넷 접속이었다. 가슴이 한정없이 두근거리고 밀려났던 나의 삶들이 한꺼번에 죄여오는듯 갑자기 나의 삶의 무게가 중력을 얻었다. 고산 체질인가? 고산지대에서는 고산증을 전혀 느끼지 못하다가, 저지대로 오니 갑자기 나의 삶이 버겁게 다가온다. 멀리 보냈던 현실이 컴퓨터를 만지는 순간 나의 코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알수 없는 긴장이 나의 몸을 감싸고 여행후 처음으로 가벼운 복통이 일어났다. 신경증이다. 초조와 불안은 내 삶의 필수불가결한 현실인가보다. 마을 홈페이지는 첫화면에서 멈춰 자유게시판의 게시물 목록만 조금 보이다 만다. 재부팅을 하고나서 다행히 네이버에 접속이 되었다. 눈에 띄는 뉴스가 보였다. '곽노현 첫출근'... 순간 반가왔다. 하지만 이어 선정적인 중앙일보기사가 눈에 띄인다. '곽노현 사건 판결 판사 알고보니...'아마 또 자기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 판결을 내린 판사에 대한 사상검증 시비일 것이다. 뉴스를 클릭했지만 컴퓨터가 또 다운이다.

마을 홈페이지에 인사를 남기고, 나의 블로그와 페이스북을 들어가 보겠다던 기대는 포기하고 룸으로 돌아왔다. 온수로 샤워를 하고 양말을 빨고, 아내와 내일 새벽 파샹을 떠나 보낸 뒤의 우리 일정을 논의 했다. 이제 우리는 안나푸르나에서는 완전히 벗어났다. 우리에게는 네팔 최고의 현대도시 포카라와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라는 도시에서 보낼 수 있는 다섯밤과 여섯 낮이 남아있다. 어떻게 배분하고 무엇을 하며 보낼지 궁리를 하다가, 참체에서 만난 호주인이 권해서 염두에 두었던 반디푸르 여정을 포기하고 일단 내일 하루는 포카라의 박물관을 순례하고, 그 다음날 카트만두로 '투어리스트 버스'를 타고 가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파샹이 떠난뒤 영어도 네팔어도 안되는 우리 부부의 여정이 조금은 불안하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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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쉬기로 한 날이 밝았다. 보통은 안나푸르나 라운드 중 고도적응을 위해 마낭에서 하루를 쉰다고 한다. 우리는 고도적응이 아니라 쏘롱라로 올라갈 건지 말것인지 결정을 위한 대기상태로 마낭에서 하루를 보내게 됐다. 아침에 일어나 세수할 물을 구하려 방을 나서니 파샹이 잠깐 기다리란다. 파샹은 금방 김이 나는 따뜻한 물을 한주전자 구해서 가져왔다. 따뜻한 물이 얼마나 반갑고 고맙던지 물을 아껴 아내와 양치와 세수를 하고 다이닝룸에 올라갔다. 어제 하이캠프 등에서 하산했다던 청년들은 아침을 먹고 아쉬운듯 머뭇거리다 호텔을 떠나고 고스란히 상행중인 일행만 다이님룸에 남았다.  

 


피상에서 같이 올라온 트레커들은 우두커니 오늘 하루 무엇을 하고 지낼지 걱정스런 얼굴이었다. 방에서 지내자니 춥고 할 일도 마땅찮다. 마낭 시내를 돌아다니고 가게도 들러 시간을 보내자니 문을 연 가게도 인적도 드물었다. 서로들 뭘 하고 지낼건지 궁금해 하고, 가이드가 전해오는 주변 지역의 기상과 길 상황에 대한 소식들을 취합하며 오늘 하루 계획과 이후 여정을 결정하기 위해 조금은 초조한 기색이었다. 한가한 아침 나절을 다이닝룸에서 머무는 동안 비관적인 소식이 속속 도착했다. '쏘롱라는 현재까지 내린 눈만으로도 넘을 수가 없을 뿐아니라 날씨가 계속 안좋아 더 많은 눈이 내릴지도 모른다.' '위로 올라가는 것은 꿈도 꾸지마라', '마낭에서 한나절만에 다녀올 수 있는 코스인 아이스 레이크로 가는 길도 눈이 많이 쌓여 도저히 접근이 불가능하다'. 틸리초로 가는 길 역시도 눈에 묻혀 접근하기에는 너무나 위험하단다. 그나마 강사르까지는 접근이 가능할지 모르지만 확신할 수는 없는 상태라고 했다.


아름다운 강마을 강사르는 이번 여정에 꼭 가 보고 싶었던 곳이었기에 파샹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접근이 가능할지 모른다는 소식에 과감히 호텔을 나서기로 했다. 침실로 돌아와 간단한 비상식량을 챙기고 가장 가벼운 차림으로 길을 나섰다. 강사르 쪽으로 가다가 조금이라도 위험해 보이면 돌아올테니 파샹은 쉬고 싶으면 호텔에서 쉬어라고 권했다, 하지만 결국 파샹도 우리부부만 보내기가 걱정스러웠나보다. 혹시 위험할지도 모른다며 자신도 같이 가겠다고 따라나섰다. 다른 트레커들도 나름의 여정을 잡거나 아니면 상황파악 겸 산책겸 마을 주변을 둘러보겠다며 모두 호텔을 나서기 시작했다.


마낭의 거리는 눈더미에 묻혀있었다. 간혹 추위에 웅크린 주민들과 조우하곤 했지만 그래도 상당히 큰 산중도시인 마낭의 거리치고는 너무나 사람의 발길이 드물었다. 쏘롱라 쪽으로 방향을 잡고 마을을 관통하자 왼쪽으로 갈라지는 길이 틸리초 방향이라고 가리키고 있는 표지를 만났다. 막상 마낭시가지를 벗어나 틸리초쪽으로 방향을 잡고나니 파샹은 조금 걱정스런 얼굴로 눈속에 묻혀버린 길을 찾을 수 없어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결국 대여섯번 안나푸르나 라운드를 했지만 틸리초쪽은 한번도 가본 적이 없단다. 길을 모른다고 뒤 늦게 고백한 파샹은 자신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우리 부부보다 몇십미터 앞서서 둔턱에 올라 길을 살피기도 하면서 용감히 앞서나갔다. 파샹은 길을 찾지 못하고 눈밭을 헤메기 시작했다. 길을 물을 사람을 찾은 수도 없어 난감한 상황이 조금 이어졌지만 오래지않아 다행히 바람에 눈이 쓸려 지나간 길의 자락을 발견하게 되었고 본격적으로 강사르 쪽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왼편으로 마르샹디 강을 끼고 가파른 절벽을 따라 이어진 평탄한 길을 걸으며 눈과 산, 그리고 마르샹디 강이 이룬 환상적인 풍경에 빠져들었다. 마르샹디 강은 상류쪽 협곡에서 내려오는 두줄기의 강이 합쳐져 넓은 수역과 광활한 고수부지를 형성하고 있었다. 오른쪽 협곡은 쏘롱라쪽에서 내려오는 줄기고, 왼쪽의 협곡은 틸리초에서 발원하여 강사르를 지나쳐 오는 강이라고 했는데, 이들 두 줄기의 강이 합쳐지는 지점에서 강사르 쪽으로 건너가는 다리가 있었다.


 
다리를 향해 나아가는 중에 갑자기 시야에 가파른 절벽을 타고 올라 길을 가로질러 뛰어가는 야생염소의 무리가 들어왔다. 파샹은 이들 야생염소를 Tahr라고 한다며 너무 반가워했다.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하다가 일정 고도 이상에서 이들 야생염소를 만날 수 있지만 아주 드문 경우라도 했다. 어디선가 읽었는데 이들 야생염소를 만나면 행운이 온다는 속설이 있단다.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믿을 만치 귀한 야생염소를 이렇게 쉽게 그것도 바로 지척에서 무리로 만나다니 이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며 염소 무리를 따라 나섰다. 하지만 절벽을 타는 야생염소의 발걸음을 내가 따라갈 수는 없었다. 더 큰 문제는 강쪽으로부터 가파른 절벽을 타고 올라 길을 가로질러 산쪽 언덕으로 뛰어가는 야생염소을 뒤따르자니 그들이 굴리고 간 돌이 내 쪽으로 쏱아져 내려서 더이상 접근하기가 불가능했다. 파샹의 말로는 야생염소가 지나가면서 자연스레 구르는 돌도 있지만 사람이 따라오지 못하도록 염소가 의도적으로 돌을 굴리기 때문에 정말 위험하단다. 그래도 그들 야생염소의 모습을 그럭저럭 사진에 담아 뿌듯한 마음으로 행운을 현실화할 방도를 생각하며 길을 이어갔다. 나는 아내에게 귀국하자마자 로또를 사볼까며 농을 치며 로또가 당첨된 상황을 상상하는 재미에 신이났다.


마르샹디강을 건너 좁고 가파른데다가 눈이 무릎까지 빠지는 길을 올랐다. 오른쪽은 강바닥까지 떨어지는 수십미터의 수직 낭떠러지다. 그냥 돌아가기에는 아쉬움이 너무 크고 계속 전진하자니 감수해야할 위험이 너무 컸다. 마음속에 공포가 자라기 시작할 때쯤 갑자기 파샹이 절벽쪽으로 넘어져 수십미터 낭떠러지를 미끄러내려가려는 것이 아닌가. 나는 순간적으로 슬라이딩을 하여 파샹이 메고 있는 배낭의 끈을 움켜쥐고 당겨 올렸고, 파샹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눈을 털며 일어섰다. 나는 너무 놀라 가슴이 뛰고 이마에 땀이 솟았다. 그런데 파샹은 얼굴 가득 웃음을 띠는 것이 아닌가? 파샹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장난이었다고 했다. 나는 화를 누르고 다시는 그런 장난을 하지마라고, 장난이 장난으로 끝나지 않고 사고로 이어진다고 재차 주장을 했고 파샹은 조금 머슥한 표정을 지었다. 진정을 한뒤 언덕길을 마저 올라 멀리 강사르 마을이 보이는 지점까지 도달했다.


강사르 마을은 시야에 들어오는데 마을로 가는 길은 강을 건너기 전의 길과는 달리 쌓인 눈의 깊이와 길의 여건이 또 달랐다. 이런 식으로 계속 전진하기에는 위험이 너무 크게 느껴졌다. 결국 강사르마을과 마르샹디 강, 그리고 산과 강의 조화가 만들어 낸 풍경에 한참을 빠져있다가 더이상의 전진을 포기하기로 하고 뒤돌아섰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마낭 거의 다 와서야 강사르를 찾아 길을 나선 한국인 트레커들을 만났다. 길 상황을 전하고 모두 같이 호텔로 돌아왔다.

다이닝룸에 난로를 피우자, 강가푸르나 딸까지 다녀왔다며 독일인 트레커들이 들어섰다. 강가푸르나까지는 그렇게 힘들이지 않고 접근이 가능했단다. 조금있으니 오늘 피상에서 올라왔다는 한국인 남성 트레커 한분이 들어섰다. 그분은 가이드나 포터도 없이 포카라서 부터 트레킹을 시작하셨다는데 베시사하르에 이르기 전에는 마을을 찾기 전에 날이 저물어 노숙까지 하며 강행군을 하셨다고 했다. 한국에서 물리 선생님을 하신다는 그분은 보통 배짱이 아니신 분 같았다. 그분이 한국에서 준비해 오신 누룽지 차를 얻어 마시며 오랜만에 구수한 한국 밥의 맛과 향을 기억해 보았다.

늦은 오후 네팔리들이 마을회관 같은데서 영화상영이 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우리부부는 난로가를 떠나기 싫어 그냥 다이닝룸에 머물렀고 트레커들은 주변 나들이를 갔다가 속속 도착했다. 눈에 갇혀 내일의 여정을 결정할 수 없는 트레커들과 네팔리들이 모여 담소를 나누며 마낭에서의 이틀째 밤을 맞았다. 그리고 그 순간까지 접한 정보와 이날 강사르 쪽으로 접근해왔던 경험을 아울러 최종적으로 하산을 결정했다. 독일인팀도 동생과 제수가 고산증을 보이며 두통에 시달리는 상황때문에 하산을 결정했다. 오늘 도착한 한명의 한국인 트레커만 남기고 같은 호텔에 묵은 모든 트레커가 하산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방으로 돌아와 또 내리기 시작한 눈발을 유리창 너머로 확인하며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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