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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4월16일~

4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새벽비행기라 모두 창을 내리고 잠만 자는 바람에 내가 좋아하는 창밖 구경을 하지 못한 점이 많이 불편했다. 현지 시간 아침 8시 조금 넘어 하노이 노이바이공항에 착륙했다. 비행은 편안했고, 공항은 한산했다. 나의 첫 베트남여행은 트랩을 내려설 때 갑자기 들이닥친 습하고 뜨거운 공기로 다가왔다. 영상과 활자를 통해 베트남 전쟁으로만 접했고, 나의 농사일을 돕는 베트남 노동자를 통해 간접 체험했던 베트남 풍경을 바라다 보는 마음이 복잡했다. 마음은 혼란스러웟지만 베트남에 입국심사는 쉽게 끝났고 이내 대합실로 넘어와 유심을 갈고, 환전을 했다. 하노이행 버스를 타기 전에 공항내 식당을 찾아 첫 베트남 현지 쌀국수를 비싸게 체험했다.

하노이 시내로 가는 86번 버스는 찾기 쉬웠다. 비슷한 차림의 다양한 인종의 여행자들이 몰리니 그냥 무리지어 따라다니기만 해도 길을 잃을 일은 없었다. 버스는 편안했는데 차창 선팅 때문에 창밖 풍경을 보기에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래도 베트남의 첫인상을 얻기 위해 열심히 고개를 돌리고 몸을 틀어 전통과 현대가 만나고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하노이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어디 홍콩 영화의 뒷골목 배경 같은 호안끼엠 호수 인근에 버스가 들어서고 승객의 대부분이 몰려 내렸다. 구글맵을 켜고 골목을 걸으며 영화 속에서나 보던 베트남의 거리와 현실을 비교하며 좁고 복잡한 인도로 트렁크를 끌고 예약해 둔 호텔을 찾아 나섰다.

메이드빌프리미어 호텔을 찾았지만 체크인 시간이 많이 남아 짐을 맡기고 거리로 나섰다. 먼저 호안끼엠 호수를 한바퀴 돌기 시작했다. 외국인도 적지 않았지만 더 많은 현지인들의 무리가 거리를 쓸고 지나갔다. 여기저기 부스가 설치되고 작은 공연이나 체험 프로그램 등이 진행되고 있었고 상황을 살펴보니 프랑스와 무슨 교류의 날 같은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우선은 낯선 베트남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아이스크림을 사 물고 사방을 두리 거리며 베트남스러움을 한껏 느끼기 위해 호안끼엠 호수를 한 바퀴 돌았다. 호숫가의 응옥썬사당엔 인파로 넘쳐났다. 비집고 들어가 오래전 나라를 구할 칼을 전해줬다는 거북이의 전설을 읽고 유물을 보고 호텔로 돌아왔다.

한낮의 더위는 들뜬 여행객을 지치게 하기에 충분했고, 난생처음 호텔 옥상 풀장으로 달려가 수영을 했다. 오직 풀장을 위해 두 배의 비용으로 예약한 호텔이니만치 풀장을 건너뛸 수는 없었다. 규모는 작고 수질을 그럭저럭 이었지만 다행히 아무도 없는 풀장에서 신나게 놀았다.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충분히 즐겼을 때쯤 덩치 큰 서양인들이 몰려오자 풀장을 나와 다시 하노이 투어를 위해 거리로 나섰다. 호텔을 나오자 마자 길모퉁이 식당에서 쌀국수를 포함한 몇가지 정체불명의 음식을 시켜 점심을 해결하고 그랩을 불러 호치민 박물관으로 향했다.

박물관을 둘러보고 호치민 묘소로 향했지만 오픈 시간이 지나 다시 걸음을 옮겨 레닌동상이 있는 거리로 향했다. 길 중간에 한국인에게 더 유명하다는, “베트콩에서 이름 따 왔다는 밀리터리컨셉 인테리어의 콩까페에 들러 코코넛 커피를 마시고 베트남 현대사와 호치민의 삶을 생각했다. 역사에서 한 번도 부패한 지배세력을 신진세력이, 구시대를 신시대가 완벽히 제압하고 승리하는 경험을 갖지 못한 대한민국과 그 경험을 가진 베트남의 차이는 무엇일까? 많이 부러운 게 사실이지만 또 한편 그 승리에 도취되어 나아가지 못하고 머물러있는 듯한 베트남의 현실은 또 다른 아쉬움으로 느껴졌다. 승리한 혁명이 부패한 관료의 손아귀로 귀착되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혁명의 역사를 공유한 민족의 자존과 자긍의 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코코넛 커피로 몸을 식힌 뒤 다시 거리로 나서 레닌 동상에 들러 참배하고, 포토존으로 유명한 철도건널목을 지나 따히엔 맥주거리까지 걸으며 하노이의 밤을 맞았다. 하노이는 밤에 살아났다. 한낮의 더위가 가쉬자 마자 맥주거리로 알려진 호안끼엠 호수 인근의 따히엔 거리는 낮은 탁자와 앉은뱅이 의자로 길이 채워졌다. 2차로의 중간만 오토바이가 지나갈 정도만 남기고 길 양쪽의 거리는 업종에 관계없이 모두 빽빽이 좌판으로 채워졌다. 골목 여기저기서는 다양한 공연이 이어졌고, 풍선장사나 기타 기념품을 파는 상님들까지 모여들어 그야말로 거리는 축제의 장이 펼쳐졌다. 한번씩 경찰이 나서 통로확보를 지시했지만 경찰이 지나가자마자 이내 거리는 다시 의자와 탁자로 메꿔졌다. 우리가 묵는 호텔이 그야말로 맥주거리의 중심이다 보니 같이 들뜬 기분에 거리로 나서 좌판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닭발요리와 이런저런 안주거리를 시켜놓고 타이거 맥주를 마시며 거리를 휩쓰는 맥주거리의 열기에 휩쓸려 들어갔다. 하노이의 첫 밤은 그렇게 뜨거웠다.

2023년4월 17

아침부터 침대머리에서 오늘 하루 투어 코스를 점검했다. 가보고 싶은 곳은 많고 동선이나 그곳에 대한 정보는 미리 준비된 것이 없었다. ‘베트남 여성박물관호아 로 감옥 박물관그리고 국립미술관을 대충의 목적지로 잡고 구글맵에 의지한 채 거리로 나섰다. 먼저 택시를 불러 하노이역을 들러 짐을 맡기고 밤에 떠날 사파행 기차표를 예매한 뒤 발길 닫는 데로 걷기 시작했다. 동서남북에 대한 인식 없이 마냥 걷다보니 다시 호안끼엠 인근의 항쫑 화원을 지나 성요셉성당에 이르렀다. 자료를 찾아보니 프랑스 식민제국 시절 하노이를 제압한 프랑스는 본국의 노트르담 성당을 본 따 성요셉성당을 지었고 이후 프랑스 식민군을 물리친 베트민에 의해 장악되고 성당의 기능을 잃었다가 1990년 이후 베트남의 개방과 더불어 교회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고 했다. 제국주의 침략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식민지 민중의 종교적 열망의 상징물이 된 성요셉 성당이 지금은 이방인 관광객이 찾는 관광명소가 되는 삶과 역사의 섭리가 오묘했다.

이어서 찾은 여성박물관은 큰 기대 없이 일정에 넣었지만 의외로 다양한 콘텐츠로 많은 울림을 남겼다. 입구에서 조금의 비용을 지불하고 한국어 설명이 나오는 헤드폰을 빌려 각 섹트마다 돌며 상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어 이해에 큰 도움이 되었다. 박물관은 일상적인 베트남 여성의 삶과 혁명기 여성 혁명가의 역할을 비롯해 다양한 소수민족의 혼례와 일상 노동에 대한 컨텐츠까지 적어도 반나절은 할애해 둘러보아야 할 만치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가난한 집안의 딸로 태어나 학교교육을 받지 못하고 어린 나이에 일터로 내몰려 혹독한 노동을 통해 가족의 생계를 보조하는 여성의 삶‘14살에 프랑스군에 체포되어 결국 사형선고를 받고 18살이 되자 처형당한 어린 민족해방투사의 삶까지 베트남에서 존재했던 그리고 현재도 존재하는 여성의 다양한 삶을 담고 있는 베트남 여성박물관은 오래도록 하노이 여행의 기억 속에 남아있을 것 같았다.

여성박물관을 나와 다음 행선지로 호아 로 감옥 박물관을 잡고 거리를 걷다가 마침 점심 나절이다 보니 거리의 여기저기에 앉은뱅이 의자를 놓고 앉아 쌀국수를 먹는 풍경을 마주하게 되었고 우리 역시 그 무리에 휩쓸려 베트남인이 되고 싶은 이방인마냥 스며들어 즐거운 마음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이어서 찾은 호아 로 감옥은 의외로 외국인 관람객이 넘쳐났고, 프랑스 식민지 시절 최고의 문명국을 자처하던 서양인에 의해 자행된 야만과 학살의 현장은 찬 기운이 가득했다. 원래 호아로는 한자로 火爐로 식민지 이전 시대에는 숯을 굽고 도자기를 굽던 곳이라고 했다. 이곳은 프랑스에 대항해 베트남의 독립을 도모하던 베트남인들을 가두고 고문하고 그리고 처형하던 장소로 베트남인에게는 독립항쟁의 상징적 성지였다. 나중에 프랑스를 물리친 뒤에는 다시 미국의 침략에 맞서 생포한 미군 조종사들을 수용하는 곳으로 이용되어 미군들에겐 하노이 힐턴호텔로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관람객 모두 긴 침묵을 이어가며 묵묵히 안내된 동선을 따라 감옥을 탐방했는데 이어폰을 통해 흘러나오는 설명에 시간가는 줄 모를 만치 몰입하 모습이었다. 문득 가해국이었던 프랑스와 미국의 국민들은 호아루 감옥을 둘러보며 어떤 생각을 할까 궁금해졌다. 이어폰을 통해 독립운동가들의 개별적 사연을 들을 때면 하나의 역사적 드라마인양 장엄하고 비장했다. 두어시간이나 흘렀을까? 독립투사의 사형을 집행하던 마지막 장소에서 그분들의 명복을 빌며 향을 올린 뒤 거리로 나섰다.

이어서 인근의 국립미술관과 하노이 문묘를 관람했다. 미술관은 불상 등 몇몇 불교 문화재와 20세기 이후 현대화 중심으로 꾸려져 있었고 관람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인근의 문묘 역시 많은 관람객이 있었지만 그냥 한번 훝어보고 지나칠 정도의 명소로 느껴졌다. 더위에 지친 몸을 이끌고 하노이역 인근으로 돌아와 스타벅스에서 더위를 식히다 약속된 지인을 만나 고급진 후에 전통요리를 전문으로 한다는 식당에서 화려한 저녁을 먹었다. 반세오의 맛을 기억하고 다시 하노이역으로 돌아와 사파행 야간열차를 기다리며 역내를 살피고 오고가는 인간 군상을 구경했다. 10시 출발 예정인 기차에 30분 전부터 승객을 들이기 시작했고 우리가 탈 기차는 임시 증설된 기차인지 제일 마지막 칸으로 다른 기차에 비해 훨씬 세월의 흔적이 진했다. 10시에 정확히 출발한 기차는 손에 닿을 듯한 건물사이를 비집고 속도를 내기 시작했고, 나는 흐린 창으로 보는 바깥 풍경을 놓치지 않기 위해 졸린 눈을 부릅떴지만 어느새 기차의 진동 속에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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