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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1/02

아침 햇볕이 공항라운지를 비추기 시작하고 닫혔던 가게들이 하나둘 셔터를 올리는 때가 되어 서야 밤새 찾지 못했던 청사내 호텔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지난 밤새 경찰인지 경비인지 공항근무자들에게 물어보았지만 하나같이 대답은 No! 한마디였다. 난 공안이지 안내원이 아니라는 간고한 입장표명으로만 느껴졌다. 사실 공항은 엄중한 공간이기도하지만 많지 않은 여행경험 중에 이렇게 피부로 와 닿는 삼엄한 경비는 처음이었다. 몽둥이와 방패까지 든 군인들이 청사 내를 끝없이 순찰하고 청사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줄을 세우고 일정한 숫자가 되면 한꺼번에 입장을 시켰다. 이런 시스템은 공항 보안의 문제라기보다는 시민으로 하여금 국가 권력의 살아있음을 몸으로 느끼고 굴종케 하는 장치로 느껴졌다. 아마도 티벳 독립운동과 관련한 긴장 때문으로 이해되지만 티벳 사람은 좋아하지만 티벳 독립은 또 다른 문제로 느끼는 내같은 사람에게도 거부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카투만두 트리뷰반공항을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동방항공에 대한 수많은 악플들과는 달리 비행기는 쾌적했고 승무원은 친절했다. 우리가 탄 비행기는 4시간여 비행 끝에 멀리 눈덮인 히말라야가 보이는 카트만두 하늘에 다달았다. 하늘은 쾌청했고 석양에 물든 서쪽 하늘의 적란운이 멋있었다. 그런데 곧 착률 할 것 같은 비행기는 공항사정으로 착륙시간을 지체해야 했다. 오전내내 안개로 밀렸던 비행기들의 이착륙으로 내가 탄 비행기는 한 시간을 넘도록 땅을 딛지 못했다. 긴장과 울렁거림으로 힘든 시간을 견뎌내자 석양이 지는 초저녁 하늘을 이고서 비행기는 활주로에 닿았다. 세계에서 제일 위험하다는 루클라공항에 착륙한 것도 아닌데 승객들은 너나할 것 없이 환호하고 박수를 쳤다. 가슴 벅찼다. 5년을 기다린 네팔행인데 너무 쉽게 도착하면 안될 일이긴 했다.

 


청사로 들어서며 5년전 기억을 되살리며 공항과 주변을 훑어보았지만 지난 기억은 흐리고 지금 있는 모든 풍경은 늘 항상 그렇게 있어온 것들처럼 친숙했다. 입국 비자비를 심사원이 아니라 은행창구에서 내는 것으로 달라진 공항을 나왔다. 5년 전과 똑같이 달려드는 삐끼들을 비집고 예약된 픽업택시를 찾았다. 배낭을 억지로 빼앗아 택시에 싣어 주던 삐끼가 팁을 요구했지만 잔돈을 미리 준비하지 못해 그냥 무시했다. 없는 살림에 100달러지폐를 팁으로 줄 수는 없었다. 무시하라는 택시기사의 싸인을 받고, 또다른 하국 여성 여행자 한사람과 같이 픽업택시에 몸을 싣었다. 꽉 막힌 카트만두 시내를 가로지르며 5년전 기억을 더듬었다. 카투만두 거리의 소란과 무질서는 여전했지만 5년전에 비해 차량은 늘어났고 사람들은 더 붐볐다. 곽막힌 도로를 따라 정체는 이어졌고 예상시간을 함참 넘겨 예약해둔 카투만두 뷰티크 호텔에 도착했다.

 


하루 먼저 여정에 오른 일행과 반가운 조우를 하고나니 나의 네팔 오는 길은 집나온 지 무려 34일이 걸린 셈이었다. 같이 늙어가고 싶은 친구들과 네팔에서의 첫 식사를 했다. 비싼 한식이나 고급레스토랑이 아니라 호텔 인근의 누추한 네팔리 식당에서 하는 식사라 더 즐거웠다. 익숙한 친우들이지만 바로 이 순간 한층 각별한 인연으로 다가왔다. 나에게 7명의 동행은 인생의 아주 중요한 순간을 나눈 친구가 된 것이다. 나에게 네팔 여행은 그저 소비하는 여행상품이나 그저 그런 일상의 한 조각이 아니라 일생일대의 대 이벤트였기 때문이다. 식사를 마치고 가슴 울렁이는 타멜 거리의 가로질러 숙소로 돌아왔다. 우리는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고 곧 시작할 트레킹을 위한 짐을 꾸렸다. 나는 피곤한 몸을 침대에 뉘웠지만 내일부터 시작한 꿈같은 여정에 가슴 부풀어 네팔에서의 첫밤을 쉬 잠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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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2/30

일은 끝나지 않았고 우리를 싣고 갈 비스타리님은 도착했다. 네팔! 5년을 기다려 온 여정이다. 출구 막힌 일상의 도피처이자 스트레스의 배출구였던 네팔행의 꿈. 드디어 떠난다. 하지만 짐도 마음의 준비도 여정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도 끝내지 못했다. 사과 발송을 마지막으로 집을 나섰다. 명호면 소재지에 들러 라티와 짜장면 한 그릇으로 작별을 대신하고 수원으로 향했다.

수원에 도착해서 비스타리님의 아파트에 짐을 풀고, 시내로 나와 마트에 들러 일부 준비물을 구했다. 오랜 세월 멈춰있던 손목시계의 건전지를 갈고, 3000불 환전에 대한 현금을 송금하고 나니 마음이 조금 여유로워진다. 네팔전문 레스토랑을 찾아 곧 시작할 두 달 여정의 네팔 생활을 맛보는 리허설을 했다.

 

16/12/31

수원집을 나와 아침부터 줄은 선다는 유명식당에서 해장국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영종도에 있는 처형댁에 들러 장모님을 뵙고 불편한 30분의 체류 뒤에 공항으로 향했다. 첫 일정을 같이할 5명의 일행이 하나 둘 모이자 네팔에서 기부할 약품을 여러 배낭으로 나누고 불안한 수화물 발송을 마치고 나니 오후 2시가 지났다. 내일 다시 카트만두서 재회하겠지만 상해와 쿤밍을 경유하는 낯선 길에 부디 아무 착오가 없기를 약속하며 5명의 도반은 출국장으로 사라졌다.

우리에겐 다음날 아침 8시까지 여유가 주어졌다. 어제부터 가이드겸 기사를 자청한 비스타리님도 작별을 하고, 공항철도를 타고 1시간만에 광화문에 도착했다. 봉화군농민회 회원을 싣은 버스는 아직 톨게이트를 통과중이라니 딸을 만나 식사를 했다. 딸이 주는 내복 선물을 챙기고 광장을 나가 농민회 동지들을 만나 박근혜 퇴진!”을 힘껏 외치다 다시 공항으로 향했다.

스파온에어의 잠은 깊지 못했다. 어수선한 와중에 억지로 잠을 청하며 여행이 내 삶의 또 하나의 장식물이 아니기를 기원했다. 그리고 혹시라도 2달간의 이번 네팔여정이 나의 삶에 생기를 불어넣는 어떤 계기라도 가져다주지 않을까하는 막연한 기대에 가슴 부풀었다.


17/1/1

아침 5, 굳이 깨지 않아도 일어날 수 있었다. 잠을 잔 것이 아니라 그냥 밤새 누워있었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빵과 커피로 간단히 아침을 해결하고 840분 비행기는 인천에서 발을 뗐다. 비행은 늘 불편했다. 고소공포일까 밀폐공포일까 아니면 단순한 조갑증일까? 둘러보니 아이들은 마냥 즐거워하지만 중노년들은 다 똥씹은 표정이다. 나이가 들면 겁도 늘고 걱정도 느는가보다. 걱정이나 공포는 인간의 합리성의 증거일까 비합리성의 산물일까? 객관적으로 안정성이 높다는 사실과 무관하게 그냥 몸이 하늘에 떠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불안한 것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1시간 50분을 비행 후 푸동공항에 도착하니 현지시각 945분이다. 소통이 불가능한 공무원과 입국비자로 실랑이를 벌였다. 알고 보니 출국 바우처를 요구한 거였다. 내 인생의 첫 중국 방문이니 뭐 그 정도는 감수 할만 했다. 쿤밍행 비행기를 타기에는 10여 시간이 남았지만 공항 밖 상해는 너무 멀어보였다. 청사 바깥을 걸어서 나가 보았지만 짧은 시간 상해를 맛보기에는 사전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못했다. 공항내 까페와 레스토랑을 돌며 먹고 또 먹고 시간을 죽이다 간혹 비스타리님한테 받은 lonely planet NEPAL을 읽었다. 그래도 시간은 흘러 오후 9시에 쿤밍행 동방항공에 탑승했다.

 

두세시간 비행뒤 쿤밍에 도착했다. 처음 여행을 계획할 때 운남성에서 보름 정도를 보내는 일정을 생각했었다. 두 달을 온전히 네팔여정에 집중하기로 결정하면서 쿤밍공항은 그냥 스쳐지나가는 곳이 되어버렸다. 상해 푸동공항은 아직 중국이 아니었다. 푸동공항은 여는 국제공항과 크게 다르지 않는 느낌이었다. 다양한 인종과 화려한 명품 매장들 그리고 사람들의 바쁜 발길조차 인천공항의 판박이였다.

하지만 쿤밍은 달랐다. 쿤밍에 들어와 비로소 폐부 깊숙이 중국의 냄새가 느껴졌다.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휩쓸고 지나갔지만 그들은 다 중국인이었다. 특히나 무리지어 다니는 티벳탄 때문에 쿤밍은 더욱더 중국답게 다가왔다. 떼에 쩔은 옷차림과 배낭에 색동실로 장식한 머리카락은 기름에 떡져 뽀얀 먼지가 덮고 있었지만 표정은 당당했고 친근했다. 왜 티벳탄들은 하나같이 어린 시절 기억속의 이웃 아저씨 같이 편안하게 느껴질까 궁금했다. 그들은 차림으로 보아 노숙인과 다름없었지만 보무도 당당하게 현대식 공항청사를 휘저었다. 참 멋있다는 느낌을 가지고 그들 무리의 뒤를 쫏아 청사 지하의 대합실로 향했다. 그들은 따라 가는 것만으로 왠지 든든했다.

여기저기 무리를 지어 아예 이부자리를 펴고 누운 사람들로 넓은 공간이 만원이라 우리 부부가 몸을 누일 적당한 자리를 찾지 못했다. 공항밖 숙소로 향하기에는 시간적 여유도 불확실했고 사실 치안도 알 수 없어 공항내 있다는 호텔을 찾을 수 없었다. 어렵게 찾은 잠자리 대안으로 발마사지 가게를 발견했다. 겨우 와이프만 발마사지 가게에 몸을 누이고 나는 구석진 복도에 담요를 깔았다. 결국 이번에 실현할 계획이 아니었던 찌질한 나의 버킷리스트중 하나인 공항노숙을 실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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