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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전 비나리 동제가 있었습니다.

작년에 이어 이번 동제에도 유사를 맡아 방금 귀가해서 

올해의 비나리마을 동제를 기록해 봅니다.

이렇게나마 기록을 남기고자 하는 이유는

비나리마을 동제가 언제까지 존속할까 걱정스럽기 때문입니다.

비나리마을 동제는 기록에 남아있지 않아

그 정확한 유래를 알수 없지만 주민들은 적어도

수백년동안 전해져 왔을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특히 비나리마을 동제는 아기장수 임장군의 전설과 결합되어

임장군을 동신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이를 미루어 봐도 비나리마을 동제의 역사는 실로 깊을 것이라 짐작이 됩니다.



하지만 근년에들어 동제를 치룰 사람이 부족해진데다.

종교적인 이유로 동제에 참가하지 않으시는 분도 생기고,

또한 동제가 주는 마을주민의 화합과 정체성강화 기제도 줄어들다보니 

마을 동제가 얼마가 존속할지 몇년앞을 내다볼 수 없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이는 상징적으로 당제에 들어가는 비용과 찬조금의 액수를 비교해봐도 확연합니다.

오래전에는 비용보다 찬조금이 더 많이 들어왔었지만,

10여년 전부터 비용과 찬조금이 비슷해지다가

최근에는 찬조금이 급격히 줄어들어 많지도 않은 동네기금이 줄어드는 형편입니다.

그러다보니 몇년전부터 동제를 없애자는 의견도 마을회의에서 나오기 시작했고,

형식을 간소하게 하거나, 뜻있는 몇몇분이서나마 명맥을 유지하자는 등의

논란이 오고가고 있습니다.

 

저는 몇년전부터 유사로 마을제에 참가한 뒤로 최근에는

계속해서 유사를 맡고 있습니다.

유사는 동제를 진행하는데 필요한 여러 잡무를 보는 역할로

장을 보고, 돼지를 잡고, 상을 차리고, 당나무 주변을 청소하

거의 대부분의 실무를 담당합니다.

그런제 당제는 제관과 당주가 주로 진행을 하다보니

유사는 그냥 시키는 데로 따라만 할뿐 제사의 형식이나 절차에 대해

무관심한게 사실입니다.


 
비나리 동제는 정원 초사흘날 당주를 뽑고 축관1,

제관3, 유사 5명을 정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이를 당주뽑기라고도 하고 '청과고미'라고도 하는데

청과고미가 어떤 어원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정해진 10명의 사람들은 정월 12일날 새벽 집대문에 금줄을 걸고,

새벽일찍 동네 다른 주민의 눈에 띄이지 않게 당제에 제물 장을 보러 갑니다.

그리고 당제가 있는 날 까지 내내 몸과 마을을 정갈히 합니다.

당제를 지내기 전까지 이웃과 다툼을 한다던지,

노름이나 과음을 한다던지 하면

부정이 끼어 마을에 재앙을 가져온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때 붉은 흙을 퍼와서 마을 입구에서부터

당나무를 지나 당주집까지 한삽씩 부어놓습니다.

잡귀를 막는 의미랍니다..



정월열사흘날 유사들이 모여 당나무 주변을 청소합니다.

정원 열날흘날 아침 일찍부터 유사들은 역할을 나눠 돼지를 사러가고,

제기와 여타 집기를 챙기고,

당나무 밑에 불을 지피고 솥을 걸어 돼지를 잡을 준비를 놓습니다.

이날 아침 일찍부터 마을 주민들은 가구별로  

당나무 아래서 제사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추위에 떨지 않도록 장작더미를 날라다 줍니다.

가구마다 지게로 한짐씩 날라오는데 기력이 없는 노인분은

조금만 가져와도 돼지만 , 어떤 분들은 한경운기 가득 싣어오시기도 합니다.

 

돼지를 사오고 나면 유사들이 모두 모여 돼지를 잡습니다.

돼지를 잡는 일은 동제의 가장 큰 일입니다.

살생을 꺼리는 분도 계시고, 그 즈음 혼례가 있거나 손주를 보거나

하는 길흉사가 있는 사람은 절대로 돼지를 잡으면 안된다고 합니다.

그런 이유로 아예 제사에 참가하지도 않는 분도 계십니다.

잡은 돼지는 각을 떼어 당나무밑에 나무를 걸치고

나무에 고기를 묶어 달아놓습니다.

 

점심때가 되면 당주가 준비한 밥을 지게에 지고 내려옵니다.

당주는 제사준비의 잡일은 보지 않지만 가장 신경을 많이 책임이 크십니다.

그러다보니 유사들 고생한다고 점심까지 준비해서 대접해야합니다.

유사들이 먹을 밥은 생선이나 육고기 반찬이 들어가면 절대로 안됩니다.

오직 나물같은 식물성으로만 이루어진 식단을 준비해야 한답니다.

 

오후가 되면 나무에 달아놓은 고기를 풀어 삶기 시작합니다.

고기를 삶기 전후해 장작을 지고 오신 주민이나 당나무 앞을 지나가는

주민들이 합류해 같이 일을 거들거나 술도 나누면서 덕담도 합니다.

이때 어떤 분들은 술과 음료나 먹을 거리를 준비해서 유사들을 대접하기도 합니다.

 

저녁이 되면 조를 나누어 유사들은 집으로 가서

저녁식사를 하고 목욕을 한후 다시 당나무 밑으로 모입니다.

그렇게 해서 10시정도면 본격적인 제사상 준비에 들어갑니다.

먼저 백설기를 앉힙니다.

간을 하지 않고 작은 떡찜기에 떡가루를 담고 나무불로만 떡을 찝니다.

그리고 곁에는 역시 작은 솥에다 흰밥을 합니다.

떡은 당주가 해야하고, 밥은 유사들이 합니다.

밥쌀은 9번을 씻어 앉혀야되고,

밥을 하는 중에는 절대 솥뚜껑을 열면 안된답니다.

그러다보니 불세기를 잘 조정해서 밥을 타지 않게 하는 일이 보통일이 아닙니다.

많은 정성을 들여서 떡과 밥을 하라고 만들어 놓은 형식들입니다.

 

오후 1130분정도가 되면 제관과 당주가 모이고

보격적으로 제사상을 차리기 시작합니다.

제사상에 올라가는 제물은 모두 당주가 준비를 합니다.

집에서 담은 막걸리와 당나무 아래에서 직접 지은 ,, 탕국,

그리고 여러가지 제물을 절차와 순서에 따라 상에 올립니다.

자정이 되면 당주 주관으로 제사를 올립니다.

모두 절을 하고 축관이 축을 하고 나면

당주가 마을을 대표해서 마을의 안녕을 비는 소지를 올립니다.

당주가 소지를 올리고 나면

이날 제사에 찬조를 하면서 소지를 부탁한들의 소지를 올립니다.

그리고 제관과 유사들도 나름대로 집안의 건강과 안녕,

올 한해 풍년농사를 비는 소지를 올립니다.

 

자정을 넘기고 12 30분이면 제사가 끝나고

제관과 당주는 대부분 집으로 돌아갑니다.

유사들만 제물을 거두고 모든 기자제나 장비를 거두어 마을 회관으로 갑니다.

마을 회관에는 두어분의 부녀회원이 기다리고 계신데 이분들과 함께

다음날 마을 주민에게 나누어줄 돼지고기를 자릅니다.

50가구에 돌아가도록

고기를 자르는 것도 보통일이 아닙니다.

 

이렇게 고기를 잘라 50등분으로 나누고 나면 모든 절차가 끝이 납니다.

유사들은 집으로 돌아가고 날이 밝으면

마을회관에 온 주민이 모여 마을 총회를 열고

술과 음식을 나무며 잔치를 벌립니다.

 

올 한해 비나리주민 모두 건강하시고,

집안 두루 편안하시고 행복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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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음력으로 섣달(12월) 25일로 비나리마을 초롱계가 있는 날입니다.
초롱계는 비나리마을의 전통으로 전기가 없던 시절,
큰일을 치루는 이웃에 초롱불로 부조를 하던 전통으로부터 전래되었습니다.
이웃에 상이나, 혼례가 있으면  집집이 한손에는 두부나 떡을 해 들고, 
또 한손에는 초롱불을 들고 큰일을 치루는 집으로 향했답니다. 
그렇게 이웃을 도와 가며 가난한 산골마을에서 나마
마음 넉넉하게 살아올 수 있게 했던 아름답고 지혜로운 전통이었습니다.  
이웃의 도움으로 큰일을 치룬 주인은 그뒤 자신의 사정에 맞춰
적당한 금액의 돈을 초롱계 기금으로 내어 놓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모인 돈은 마을의 공동기금으로 운영되었습니다.
 

새마을운동으로 전통 공동체 문화가 쑥대밭이 되기전인
1970년대 초까지 이어져오던 초롱계는 그뒤 마을의 쇠락까지 겹쳐
그 흔적만이 남아 동네 상여계와 합쳐져 유지되고 있습니다.
동네에 전기가 들어오고나서 초롱을 부조하던 전통은 사라지고,
초롱계의 형태는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
동네에 상이 났을 때 상주가 상여꾼에게 주는 노잣돈을 모아
여러가지 마을행사 비용이나 마을 공용 비품을 조달하는데 사용하고,
그러고도 남는 기금은 마을 주민중 돈이 필요한 사람들이
일정한 이자를 물고 1년단위로 빌려주는 '계'가 '초롱계'로 바뀌었습니다.
   

오늘 초롱계 날은 그렇게 빌려간 돈을 이자와 함께 모아서,
지난 일년간 동네일로 쓴 금액을 제하고
나머지를 다시 필요한 주민에게 빌려주고,
그 모든 내용을 기록하고 서명하는 것으로 회의를 마치고,
술과 음식을 나누며 주민 모두가 하루를 즐기는 그런 날입니다. 

비나리마을 초롱계 기금은 이제 몇백만원 남지 않았습니다.
10수년 전만해도 동네에 상이나면  이웃 주민이 상여꾼으로 돕고,
상주가 내어놓은 노잣돈은 초롱계 기금으로 모았습니다.
하지만 마을에 인구가 줄고, 특히 상여를 맬 청장년이 줄어들면서 
초롱계 기금으로 모으던 노잣돈을 상여꾼의 일당으로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보니 해가 갈수록 기금이 줄어들어
앞으로 몇년이나 더 초롱계가 이어질지 걱정입니다.


초롱계의 형식은 세월따라 바뀌었지만 이웃의 대사에
초롱을 부조하는 아름다운 전통은
'비나리 초롱축제'로 새롭게 태어날 예정입니다.
몇년전 비나리산골미술관 개관식에 맞춰 초롱을 부조하는 초롱행렬을
개관식 참가객과 주민이 함께 재현한 적이 있습니다.
세월따라 알게 모르게 침체되고 생기를 잃은 마을이
수많은 초롱행렬로 아름답게 되살아나는
 벅찬 감동을 느낄 수 있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하지만 초롱행렬의 재현은 연년이 이어지지 못하고
예산의 벽에 부딪혀 중단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끊어진 초롱축제가 곧 비나리마을을 중심으로한 청량산 인근마을과 더불어,
주민과의 연대와 소통에서, 마을과 마을의 연대와 소통을 이루는
축제의 장으로 다시 부활하게 됩니다. 
늦어도 내년가을이면 재현될 비나리초롱축제를  
올 한해 내내 조사하고 궁리하여 멋들어진  마을 축제로 준비해나갈 것입니다.
그래서 소멸되어가든 마을이 비나리초롱축제를 매개로 활력과 신명이 넘치는,
사람사는 마을로 거듭날 수 있도록 만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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