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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2일 좀솜에서 출발하여 Syang이라는 마을을 지나 마르파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차이로 숲길을 따라 투구체에 도착하여 하루를 마무리했다. 다음날 투구체를 출발하여 코켄탄티에서 점심을 먹고 칼로파니 지나 가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아침 일찍부터 좀솜공항에는 비행기가 도착하고 이어서 이륙을 준비했다.  공항과 붙어 있는 숙소다 보니 비행기 소음이 장난이 아니었다. 숙소 옥상에 나가 가까이서 프로펠라 비행기가 이착륙하는 장면을 구경했다. 포카라와 좀솜을 잇는 정기항공노선이지만 좁은 계곡을 오르내리는 항로가 위험하다보니 사고도 잦은 구간이다. 쏘롱라를 넘은 대부분의 트레커는 여기서 걸음을 멈추고 비행기로 포카라로 빠져버린다. 우리는 가능한한 포카라 가장 가까이 까지 고집스럽게  걸음을 계속하기로 했다. 다울라기리 쪽으로 올라 포카라로 향하는 비행기가 사라져 간 깔리깐다끼 강을 따라 우리도 길을 나섰다. 

 

 

 

좀솜을 벗어나자마자 홍수가 휩쓸고 지나간듯 거친 지형의 계곡 합류점을 건넜다. 그리고 바로 깔리깐다기를 벗어나 오른쪽 가파른 언덕길을 통해 Syang으로 향했다. Syang은 전날 들렀던 티니가온과는 다른 또 다른 멋이 있는 마을이었다. 골목은 정갈했고 마을은 훨씬 정돈된 느낌이 들었다. 사람이 떠나가는 마을이 아니라 머물고 살아가고 자자손손 이어갈 마을로 사람의 훈기가 느껴졌다. 양지바른 담벼락 아래 해바라기를 하고 마을의 느낌을 온 몸으로 받아들여 평온한 마음으로 마을을 걸었다. 마을을 벗어날 즈음 한 네팔리 아가씨가 학교앞에서 등교하던 아이들과 과자를 난주어 주면서 놀고 있었다. 우리의 가이드는 금방 그 아가씨랑 친해져 좀솜으로 올라간다는 사람을 왔던 길을 되돌아 우리와 합류하게했다. 이날 걸음을 멈춘 투쿠체까지 같이 걸었던 그 아가씨는 무슨 연유로 가던 길을 되돌아 우리와 합류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왜 다시 떠나갔는지 끝내 이해할 수 없었다.

 

Syang을 지나 마르파까지 가는 길은 초록이 완연했다. 해발 고도가 3000m이하로 내려 온 뒤로 늘어가던 초록빛이 네팔 사과의 최고 생산지인 마르파가 다가오자 더욱 진해졌다. 2월에도 아랑곳없이 마르파에는 봄이 오고 있었다. 멀리 설산을 등지고 깔리깐다끼 강을 안은 초록 밀밭과 살구꽃이 어우러진 과수원의 풍경이 평화로웠다. 네팔 사과 브랜디의 산지로 유명한 마르파가 다가오자 나의 가슴은 뛰기 시작했다. 마르파가 브랜디의 산지라서가 아니라 네팔 사과의 주산지라는 사실이 사과 농사를 짓는 한국 농부에게는 각별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마르파의 사과농사에 대한 기술적 경영적 정보는 하나도 중요한 것이 없겠지만 사과나무가 자라고 계절이 오면 꽃이 피고 잎이나고 열매가 달려 빨갛게 익어갈 네팔의 한 마을을 만났다는 그 사실이 나에게는 소중했다. 마르파는 좀솜에서 거리 멀지 않았다. 점심무렵 좀솜 베니간 도로를 벗어난 우리의 걸음은 마르파를 들어서기 시작했다.

사과의 산지로만 알고 있던 마르파는 한적한 농촌 마을이 아니라 트레커의 발길이 머무는 주요한 거점도시였다. 다울라기리 베이스캠프 코스로 들어가는 체크포스트가 있고 따라서 호텔과 레스토랑은 물론 트레킹관련 용품 가게까지 즐비했다. 도시가 번화한 만치 공동체 도서관과 교육 시설도 갖추어져있고 한때 일본인의 발길이 붐볐는지 '사꾸라' 라는 이름의 호텔도 있었다. 우리는 식사를 하고 마르파를 벗어나기전에 마르파를 조망할 수 있는 언덕위에 자리잡은 사원을 방문했다. 계단을 통해 사원에 이르자 많은 신도들이 마당에서 식사를 나누고 있었다. 식사중인 무리를 가로질러 지나가기가 불편했지만 마르파를 조망할 수있는 위치까지 올라가 전체가 한 덩어리로 붙어있는 듯 꽉짜인 마르파의 전경을 눈에 담았다.  

마르파에서 애플브랜디를 사고싶었지만 그 무게에 지레 겁이나 포기하고 다음 행선지인 차이로를 향했다. 차이로는 깔리깐다끼를 서쪽으로 넘어 티벳탄 캠프가 있는 숲속마을이었다. 이때부터 이날 오후는 투쿠체에 이르기까지 아름답고 편안한 숲길이 계속 이어졌다. 고개를 들어 멀리 설산을 보지않는다면 길은 한국의 야트막한 야산의 숲길과 진배없었다. 오후내내 길은 평탄했고 녹색의 숲은 짙고 싱그러웠다.

투쿠체에 들어설 무렵 오후가 깊어져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비시즌이다보니 몇몇 숙소는 아예 문을 닫았고 마땅한 숙소를 쉬 찾지 못했다. 가이드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는데 다행히 마을이 끝나갈 무렵 손님을 받는 숙소를 구할 수 있었다. 그렇지 못했다면 우리는 야간 트레킹을 두어시간 더해서 다음 숙소를 찾아야만 하는 어려운 상황에 처할뻔했다. 짐을 풀고나니 가이드 나브라즈는 이곳에서 애플 브랜디 공장을 운영중인 친구가 있다며 몇병 싸게 해줄테니 사기를 권했다. 우리는 사고싶지만 아직 걸어야할 길이 많은데 짐을 감당할 수가 없다고 답했다. 하지만 나브라즈는 자신들이 그정도는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다고 강권하는 바램에 한명당 두어병의 브랜디를 사게 되었다.

 

숙소의 옥상에는 다이닝룸으로  사용되는 유리온실같은 작은 공간이 있었다. 아직은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날씨인데 다이닝 룸은 따듯했다. 그 시간까지 손님이 우리밖에 없다보니 우리는 다이닝 룸을 우리만의 공간인양 점령했다. 늦게 칠레 트레커 한팀이 합류하기 전까지 우리는 다이닝 룸에서 커피와 담배를 나누며 해지는 다울라기리를  바라다보는 호사를 누렸다. 강길에서 숲길로, 좀솜에서 시작해 상과 마르파와 차이로를 지나 투쿠체까지 참 많이 걷고 행복했던 하루를 나브라즈가 사온 애플브랜디를 한잔 나누며 마무리했다. 룸에 들어와 침대에 누워서 처음으로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관계, 환경, 그리고 삶에 대해 더 사랑하게 될 것같은 예감에 사로잡혔다. 집이 그리워졌다.

2월 13일의 아침이 밝자 간단한 조식을 해결하고 짐을 싸는데 우리 가이드와 롯지 주인간에 싸늘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가이드는 식사도 거부하고 빨리 떠나기만을 바라는 눈치였다. 대충 파악한 바로는 어제 저녁 외부에서 사온 브랜디를 마신 것에 롯지 사우니가 기분나쁜 소리를 한것 같았다. 롯지도 브랜디를 파는데 왜 외부에서 사온 술을 마셨냐고 사우니가 따진것 같았다. 우리는 나름대로 양해를 구했다고 알고 있었는데 우리와 가이드, 가이드와 사우니, 그리고 우리와 사우니간의 삼각 소통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았다.

투쿠체를 출발해 얼마지나지 않아 라르중이라는 마을에서 식당에 들러 간식을 먹으며 휴식을 취했다. 숙소의 사우니와 틀어진 가이드가 아침을 굶고 출발한 덕에  우리까지 든든한 참을 먹고 다시 길을 이어갔다. 라르중을 지나 점심을 해결한 코켄탄티까지 이어지는 길은 어제의 느낌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우리는 강을 따라 평탄한 초록 숲길을 걸었고 걸음이 이어질수록 나무는 높고 초록빛깔은 더 짙어졌다.  숲길을 벗어나면 하상으로 내려와 사막같은 강바닥을 자갈을 밝고 걷고 다시 길을 만나면 초록 숲으로 걸음을 이어갔다. 깔리깐다끼의 오후 바람이 워낙 유명해 오전동안 걷고 오후에는 걸음을 멈추라는 가이드북의 안내에 잔뜩 긴장했는데 우리 일정 동안에는 그렇게 험한 바람을 만나지 않았다. 우리는 오전에도 걷고 오후에도 깔리깐다끼를 따라 마냥 걸었다.

까그베니를 지난 뒤로 깔리깐다끼강을 도대체 몇번을 건넜는지 모른다. 강의 왼편길을 걷다가 다시 강을 건너 오른편 길을 걷고, 그리고 언덕을 만나면 강으로 내려섰다가 다시 강둑을 올라 또 강을 건넜다. 코켄탄티을 만나기 위해서 찻길을 벗어나 다시 강의 동쪽으로 건넜다. 코켄탄티 마을은 몇 가구되지 않는 소박한 마을이었다. 그나마 강쪽으로 붙어있는 집들은 수해로 무너져 내려 지난 홍수의 흔적을 안고 있었다. 강과 마을이 너무 붙어있고 강과 길이 거의 수평에 가까운 마을이다 보니 또 언제 수해를 당할 지 위태로워 보였다. 우리는 조그만 롯지에서 점심을 주문하고 덜마른 빨래를 배낭에서 꺼내 햇볕에 늘었다. 차를 마시며 지도를 보고 다음 일정을 검토하며 점심을 기다리는 시간이 충만했다. 걸어서 좋고, 걷다가 쉬어서 좋고, 쉬다가 다시 걷는 것 또한 좋으니 어쩌면 걷기는 인간의 가장 완벽한 행위인지도 모르겠다.

 

 

고도를 낮추고 길이 산에서 멀어지는 만치 사람의 발길과 마을의 훈기는 늘었다. 코켄탄틴을 지나면서부터 마을도 마을과 마을을 잇는 길도 분위기가 달라졌다. 찻길과 트레킹코스를 교차하며 우리의 길을 찾아나가면서 만나는 사람들의 활기가 달랐다. 산에서 만나 사람들은 아직 겨울에 갖혀 추위에 웅크리고 봄을 잊고 있었다면 고도가 낮아지고 벌써 봄이 느껴지는 지대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얼굴에 화색이 돌고 걸음걸이도 씩씩해졌다. 초록색이 들판에서 시작해 산으로 번져감에 따라, 봄은 우리 마음에서 시작해 몸에서 완성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코켄탄티를 출발해 오후의 휴식을 깔로파니에서 커피를 마시며 보냈다. 커피를 마신 깔로파니 게스트하우스는 규모도 있고 시설도 고급스러웠는데 우리 가이드는 하루 일정을 거기서 멈출 것을 제안했다. 좋은 숙소에서 지내고싶은 마음이 없지는 않았지만 걸음을 멈추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일정상 너무 일찍 걸음을 멈추면 다음날 일정이 늘어나 고생할 수밖에 없어서 제안을 받아들일수 없엇다. 아쉬워하는 가이드와 함께  예정된 숙소가 있는 가사까지 다시 걸었다. 

 

 

가사에 도착해 "플로리다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풀었다. 미지근한 물이 나오다 찬물로 바뀌어 버린 수도꼭지에 몸을 맡기고 나니 온기가 절실했다. 다행히 우리에 이어서 두어팀의 트레커도 들어섰고 같은 숙소에 지내게 된 손님이 늘어나니 다이닝룸에 숯불 난로가 들어오고 온기가 흘렀다. 너무 붐비지도 않고 쓸쓸하지도 않을 정도의 손님이 함께 하는 숙소가 딱 좋았다. 

 

 

 

롯지와 가까운 안나푸르나 산자락에 산불이 났다. 불길이 커졌다 작아졌다 살아 움직이고 흰 연기가 쉼없이  피어났지만 산불을 꺼기위한 어떤 움직임도 보이질 않았다. 네팔리들은 아무도 산불을 의식하지 않는듯 태연했는데, 산불이 번져봤자, 눈이 쌓여 있는 고도에서 멈출 수 밖에 없고 우거진 숲이 없어 크게 신경쓸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건지 아니면 험준한 산악지대에 산불을 끌 소방헬기도 없고 인력으로 끈다는 것도 불가능하니 그냥 방치하기 때문인지는 알수 없었다. 불 타는 산 아래 마을의 숙소에서 조금은 불안한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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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0일 묵니나트를 출발해 자르곳을 지나 Upper Mustang으로 들어가는 마을 까크베니에서 머문 뒤, 11일 깔리깐다기를 따라 좀솜까지 걸었다.  



 

구원의 땅 묵디나트에서 문득 두고온 집을 생각했다. 따뜻한 물이 나오고, 드끈뜨끈한 방바닥에  깨끗한 이불 그리고 맛있는 밥이 있는 집이 왜 갑자기 생각났는지 알수 없다. 여정이 40여일을 넘기면서 나도 모르게 거친 네팔 생활에 조금은 지쳤는가보다. 고산증의 위험도, 고산의 추위도, 힘든 강행군도 다 지나갔고 오직 따뜻한 햇살 속을 걷는 일만 남게되자 간사한 몸이 더 편하고 싶어진게 틀림없다. 그래도 여행을 마치고 귀국하고 나면 이 곳 네팔이 엄청 그리울 것이 분명한데 나이가 들수록 잊고 버려야 하는데 그리운 것이 늘어나서 큰 일이다. 



밤새 기온이 떨어졌는지 샤워실 물이 얼어 나오지 않아 고양이 세수를 하고 길을 나섰다. 전날 한국서 일하신다는 네팔리의 가족들도 묵다나트 사원을 참배하고 자신의 길을 가기 위해 숙소를 나섰다. 가벼운 작별인사를 나누었지만 그분의 차가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밤새 떨어진 기온 탓인지 시동이 걸리지 않는 네팔리의 짚차를 같이 밀어 겨우 시동이 걸리는 것을 확인하고 서로의 안녕을 빌며 작별했다. 라니포와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신비한 마을  자르곳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자르곳은 깔리깐다끼 계곡을 향해 돌출된 언덕 위에 형성된 마을로 멀리서 보면 위태롭기까지 했다.  



자르곳의 좁은 골목길을 따라 사원을 찾았다. 굳이 우리가 보기 원하는 걸 말하지 않아도 가이드 바수는 항상 앞장서 곰파를 향했다. 뭐 딱히 보여줄게 없기도 하겠지만 이곳 네팔리의 삶을 지탱하는 근본이 종교다보니 사원은 그들의 삶의 중심이 틀림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개별 사원의 특성을 이해하기에는 식견이 없으나 마을의 규모나 생활 형편을 사원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작고 가난한 마을의 사원과 크고 경제적으로 넉넉한 마을의 사원은 같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자르곳 역시 별다르지 않았지만 사원은 깨끗했고 마을의료나 교육관련 시민조직의 사무실도 사원과 붙어있어 나름 마을 공동체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어 보였다. 사나워 보이는 개의 환대를 받으며 사원을 나와 네팔리의 체취를 쫏아 골목을 누빈뒤 다시 가던 길을 따라 까그베니로 향했다. 



까그베니 가는 길은 묵디나트까지의 길과 확연히 달랐다. 베시사하르부터 묵디나트까지는 산행이었다면 묵디나트 이후 까그베니까지는 황량한 평원을 걷는 사막횡단 같은 느낌이 들었다. 길은 메마르고 척박한 황무지 능선이 이어지고 가파르게 깍힌 게곡과 파스텔톤이 번지는 신비한 색감의 능선들이 무스탕 특유의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그래도 금방 조성되었거나 조성중인 찻길을 따라 드물지만 여행객을 위한 찻집이나 롯지가 자리잡고 있었다.  물론 Upper Mustang이나  Dolpo와 같은 극한 오지의 느낌은 확실히 덜했다. 

   

 

묵디나트에서 까그베니까지의 길은 멀지 않았다. 서두르지 않고 걸어 늦지 않은 점심시간에  도착했다. 그래도 중간에 가게앞에 베틀을 두고 야크나 산양 털로 만들었다는 수제 숄과 머플러를 전시한 가게에서 구경도 하고, 가게와 붙어있는 찻집에서 차를 마시는 등 여유롭게 쉬기도 했다. 길은 편했고, 간혹 지나가는 차가 먼지를 일으켰지만 다행히 많지 않았다. 전봇대를 세우고 전선을 까는 기사들을 만나 물어보니 길을 따라 인터넷을 설치하고 있다고 했다. 지구상 몇안되는 오지의 대명사격인 무스탕에 인터넷이 들어오고 있다니 좀 씁쓸하기도 했지만 현지 주민의 삶을 생각한다면 환영할 수밖에 없었다. 



까그베니의 멋은 마을에 들어서기전 언덕위에서 내려다볼 때 확연히 다가왔다. 깔리깐다기와 묵디나트에서 흘러오는 강이 만나 이루어진 조금은 옹색한 계곡아래 형성된 퇴적지에 자리잡은 마을은 주변 황무지 산이나 능선과는 달리 초록색을 띠고 있었다. 거대한 무채색의 산과 구릉과 강 사이에 한 조각의 연두빛 마을이 자리잡고 있는 풍경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까그베니 덕분에 연두빛이 이렇게 도드라진 색상인지 난생 처음 알게 되었다.    



편한 걸음 끝에 도착한 까그베니의 롯지 [Hotel Nilgiri View]에 짐을 푸니 넉넉히 마을을 둘러볼 수 있는 오후 시간이 남겨져 있었다. 가이드가 인도한 롯지는 멋진 조망을 가지고 있었고 시설은 운치있고 편안했다. 점심을 먹고 마을 산책을 나섰다. 먼저 마을을 가로질러 Kag Chode Thupten Samphel Ling Monastery를 찾았다. 안내서를 보니 나름 역사가 깊고 규모있는 사원으로 교육사업 등을 하고 있으며 사원의 유지를 위해 후원도 받고 있었다. 흙과 나무로 거칠게 만든 탑은 본전으로 보였고 그 옆에는 신축 건물이 지어져 있었는데 본전을 마주보는 현대식 2층 건물에는 많은 티벳탄들이 공동생활을 하는 것 처럼 보였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티벳탄으로 보이는 신도들이 양지바른 마당 가에 모여 앉아 찬송을 하고 있었다. 운좋게 예불 시간에 우리가 도착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어쩌면 예배 시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하루 온종일 예배 중인지도 몰랐다. 늘 기도와 찬송으로 삶을 채우는 티벳탄들이 일은 언제하는지 궁금했다. 나는 네팔 여정중에 그들이 일을 하는 경우보다 기도하는 경우를 더 많이 본것 같았다. 그들에게 현세는 단지 스쳐지나가는 한 과정에 불과할테니 열심히 일하고 무엇가를 이루기 위해 분투할 장이 아닐 것이 분명했다. 집착할 아무런 이유도 없는 그들의 삶이 부러웠다. 



골목이라기 보다는 집과 집사이의 틈을 비집고 지나간다고해야 더 정확할 것같은 미로를 지나 Upper Mustang이 시작하는 지점에 도착했다. 깔리깐다키의 강폭은 광활하다고 표현해도 좋을 만했지만 건기다 보니 수량은 많지않았고 강을 따라 걷기에는 적격이었다. 우리는 모두 강으로 내려가 강바람을 맞으며 모래를 만지고 강물에 손을 적시며 강이 시작되었을 알수 없는 신비한 세계의 느낌을 더듬었다. 자갈을 던져 물수제비를 뜨고, 자갈을 뒤져 암모나이트 화석을 주우며 멀리 무스탕 깊숙히 자리잡고 있는 Lo Mantang까지 걸어가고싶은 마음을 가라앉혔다. 깔리깐다끼를 통해 Upper Mustang의 맛만 보고 마을로 돌아왔다. 



롯지는 비수기라서 손님이 우리밖에 없었지만 시설이나 진열해 놓은 상품 등을 보니 꽤 부유한 롯지로 느껴졌다. 제일 아랫층이 식당과 주방이 있고 2층에는 객실과 주인의 살림집이 있었고 우리가 지낸 3층은 객실과 다이닝 룸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층과 층을 잇는 계단이나 룸을 이어주는 복도가 오래된 일본이난 중국의 목조 건물같이 고색찬연하고 오밀조밀한 운치가 있었다. 그래서인지 하루밤 잠과 세끼 식사를 해결하기 위해 1층 식당과 3층 다이닝 룸을 잇는 계단을 수십번 오르락 내리락 거렸지만 불편하거나 힘들지 않았다.   

[Hotel Nilgiri View]는 교양있고 단정한 차림의 아가씨가 우리를 안내하고 식사 주문을 받았는데 그 당당함에 미루어 주인집 딸이 분명해 보였다. 나중에 나타난 꽤째째한 옷차림에 힐긋힐긋 우리를 살피며 부엌을 하는 식모아이 우리 때문에 이웃에서 급히 불려 온 낮은 계급의 딸로 보였다. 좁은 공간에서 롯지 주인딸과 식모아이를 대하니 단정함과 남루함, 도도함과 비굴함을 나누는 계급성의 현실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렸다. 정전으로 촛불을 켜는 바람에 더 운치있는 저녁 식사를 하고 하루를 마무리했다. 침실로 돌아오니 깔끔한 이부자리에 깔리깐다키 강바람에 날려온 한주먹의 모레가 먼저 내려 앉아 있었다.

 

 

아침 일찍 강건너 수직 절벽 아래에는 동네 꼬마들이 다 모여 있었다. 아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아슬아슬하게 절벽을 타고 올라 무슨 이유에선지 돌을 굴렸다. 그 충격으로 엄청난 토사가 큰 소리를 내면서 강으로 굴러 떨어졌다. 우리 가이드도 아이들이 왜 그러는지 알지 못했고 우리도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런데 우리 숙소 앞을 지나던 중년 여성 한분이 아이들을 향해 고함을 지르고 화를 내는 것으로 보아 아마 아이들이 위험을 즐기는 것같이 느껴졌다. 저러다가 한 순간 아이들의 목숨을 잃을 만지 위험한 장난을 하는데도 그 여성말고 온동네 사람들이 그냥 무관심해 보이는 것은 늘 목숨을 위협하는 위험이 산적해 있는 삶의 조건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무스탕의 마을 까그베니를 뒤로하고 한없는 아쉬움을 남기고 돌아서며 나는 빌었다. 내 살아 생전에 까그베니를 넘어 무스탕과 돌포를 주유할 수 있는 한달 여정의 기회가 꼭 주어지기를! 좀솜으로 가는 길은 단순했다. 왼편으로 닐기리봉과 틸리초크를 스쳐지나며 멀리 다울라기리 산군을 향해 깔리깐다끼는 흘렀고 우리의 걸음도 따라 흘렀다. 간혹 길과 강의 경계가 흐려지는 곳에서는 강으로 내려섰다가 다시 물을 만나면 강둑으로 나오는 과정을 반복했다. 강을 따라 걷는 길은 평탄했고 편안했다. 고도의 변화가 없는 수평을 길을 물처럼 흘러갔다.

 

 

까그베니를 출발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Ekle Bhattee 라는 강변마을을 만났다. 두세개의 롯지와 레스토랑이 있는 작은 마을인데 강과 마을의 경계가 불확실 해 꼭 우기에는 물에 잠길듯한 위치에 자리잡고 있었다. 마을입구의 조용한 첫 집에서 차를 마시고 쉬었다가 출발하자마자 근처 롯지앞에 모여있는 한무리의 트레커들을 만났다. 대부분의 트레커들이 소롱라를 넘어 묵디나트를 지나 좀솜쪽으로 하산하는데 반해 이들은 좀솜에서 출발해서 묵디나트 쪽으로 상행중이었다. 덕분에 오랜만에 트레커를 조우한 셈이다.

 

 

 

Ekle Bhattee 를 출발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점심무렵  좀솜까지 도착했다. 좀솜은 마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컸다. 포카라서 오는 정기 비행기를 맞는 비행장 까지 있는 곳이다보니 많은 롯지와 여행관련 업체들, 그리고 지역 군대까지 주둔하고 있는 이 근처의 중심도시로 느껴졌다. 시가지를 쭉 가로질러 거리가 거의 끝나는 지점에서 숙소를 잡았다.

 

 

 

이른 도착으로 오후는 티니가온이라는 가까운 마을 까지 작은 트레킹을 떠났다. 그냥 호텔에서 쉬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일행 M의 유혹에 굴복했다. 가이드에게는 자유를 선물했지만 굳이 우리를 따라 나섰다. 강을 동쪽으로 건너 30여분 정도 산길을 오르니 좀솜 시가지가 내려다 보이는 티니가온에 도착했다. 농사철도 아니고 여행 성수기도 아닌 계절 탓인지 아니면 마을은 늘 이런 모습인지 알 수 없었지만 티니가온 역시 인기척이 드물 정도로 한산었다. 영업중인 식당을 겨우 찾아 차를 마시고 마을을 관통해 다시 되돌아 내려오는 골목길에서 만난 장난꾸러기 아이들이 무척이나 반가웠다.  아이들이  줄고 학교가 사라지는 한국의 농촌에서 사는 나의 과민반응이겠지만 늘 마을을 만나면 걱정이 앞선다. 이 마을은 대대손손 사람의 삶이 이어지기를 빌며 숙소로 돌아왔다. 

 

 

 

트레커 조차 만나기 힘든 여정 끝에 모처럼 좀솜에서 사람들을 만났다. 두 한국 청년을 비롯해 국적이 다른 몇몇 트레커와 여행중이라는 네팔리 두 대학생까지 여정은 다르지만 같이 좀솜에 있고 그것도 한 호텔에 머물게 되었다는 것 만으로도 친근감이 느껴졌다. 우리의 가이드는 네팔 아가씨와 담소를 나누느라 정신이 없었고, 우리는 탁자 밑에 넣어주는 숯불의 온기에 녹아들었다. 반가운 마음과는 달리 여정과 관련한 몇마디 말밖에 주고받지 못했지만  네팔의 거친 자연과 삶을 찾아 온 한국 청년 학생들을 보면 왜 그리 대견스러운지 모르겠다. 내가 그 나이 때는 네팔이라는 나라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조금은 억울하긴 했지만 그래도 지금 이 순간 그들 청년과 내 삶을 나누고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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