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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훈갤러리에서 가져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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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훈갤러리기획]류준화개인전

 

 



관훈갤러리기획

대지의 꽃 - 류준화 개인전


보라, 이 소녀들을 : 류준화의 소녀 월드, 소녀 미학

김영옥(이화여대, 이미지 비평가)

1. 동굴 우화, 그 이후: 소녀의 탄생

나는 주로 대중 잡지나 광고 이미지들을 이용하여 내가 의도하는 이미지로 다시 만들어 내고 있다. 잡지나 광고 이미지에서 에로틱한 여성의 신체 일부를 새의 날개처럼 표현하기도 하고 물고기의 꼬리처럼 보이게도 하여 남성적 시선에 고정된 여성의 전형화된 이미지로부터 자유로운 여성의 독립적 욕망을 담아내고 있다. ... 하지만 쏟아지는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자유롭기란 어렵다. 나는 자유롭고자 하는 욕망조차 이미지 안에 머물러 있음을 동시에 ‘보여 주고자’ 한다.(강조: 필자)

여성의 욕망은 류준화의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화두 중의 하나다. 비교적 작업 초기에 해당되는 <그녀의 침묵>(2001)전에 부친 위의 말은 <Spring>(2011)전에 이르기까지 이후 이어지는 그녀의 작업 모두에 대한 일종의 각주처럼 읽힐 수 있다. 국가주의-가부장제-자본주의가 통치해온 여성의 실존에 빗금처럼 그어져 있는 (그래서 그 상징계가 기획한 그 ‘여자’의 주체성을 실패로 이끄는) 자유의 욕망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 트랜스포머처럼 자신의 신체 일부를 새의 날개로 물고기의 꼬리로 변형시켜 이 상징계를 벗어나 새로운 세상을 여는 여성들. ‘이미지로 호명되면서 삶을 얻지만 또 그 이미지를 벗어나고픈 독립적 욕망, 그 경계지점’에 서 있던 초기의 작업세계가 돌파구로 찾은 것이 바로 소녀-새의 존재태다.



속삭임 mixed media on canvas 162x130cm 2011



류준화의 작업들은 그 초기에서부터 현재의 소녀 시리즈들에 이르기까지 ‘보기’를 둘러싼 다양한 철학ㆍ미학적 성찰들을 함께 불러들인다. 대중잡지나 광고 이미지에 등장하는 성애화된, 남성적 시각 주체의 쾌락의 대상인 여성 이미지, 그 이미지를 모방하고 싶으면서도 그 이미지에서 자유롭고 싶은 여성‘들’의 욕망, 이미지를 생산함으로써 여성들의 ‘자유’를 표현하고자 하는 류준화 여성 작가의 예술가적 욕망, 그리고 그 결과로 나타난 다양한 소녀 이미지들. 류준화가 생산해 낸 이미지들을 ‘보고 있는’ 관람객은 말하자면 이 모든 이미지들의 관계와 그것들의 추동력이거나 매개물인 욕망을 함께 보고 있다. 그렇다면 관람객의 이 ‘보기’는 어떻게 수행되는가? 명백하게 소녀로 ‘보이는’ 류준화의 ‘그림들’은 남성적 시각쾌락의 대상에서 자유롭고 싶은 여성들의 욕망을 어떤 ‘본질적 관점’에서 표상하고 있는가? 아니면 이 표상은 (플라톤의 동굴우화에 따른다면 심지어 이중적일)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가? 플라톤의 동굴우화와 그를 잇는 서구 형이상학 전통을 비판적으로 거슬러 읽으면서 카자 실버만은 세계관객(world spectator)로서의 바라보기를 주창한다. 서구 형이상학은 감각적 현상 세계와 초감각적 관념 세계를, 즉 모습(appearance)과 존재를 이분법적으로 대립시키고 현상을 참 존재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낙인찍는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에 대항해 카자 실버만은 서로‘에게’ 나타남으로써 (즉, 보여짐으로써) ‘존재’하는 사물들의 세계를 강조한다. 우리가 삶을 꾸려나가는 ‘세상’은 바로 서로의 바라봄에 그 존재를 빚지고 있는 존재들의 실존적ㆍ현상학적 공간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라봄’이 세상 안에서 세상을 향해 발생한다는 것이다. 류준화의 소녀들은 다른 생명체들, 사물들을 ‘향해’ 자신의 존재성을 ‘드러내고/표현하고’ 있는 소녀들의 이미지를 ‘재현’하고 있다. 그리고 이 이미지 ‘재현’은 이미 현존하는 것들의 다시 드러냄으로서의 재-현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비로소 현존하게 하는 수행적 실천행위로서의 재현이다. 그렇게 해서 류준화는 ‘이미지로 호명됨으로써 존재하되, 동시에 그 호명을 벗어나 독립적으로 존재하는(존재하고자 욕망하는) 여성들’을 ‘보여’준다. 이것은 늘 초감각적 관념 세계를 남성적 영역으로, 감각적 현상의 세계를 여성적 영역으로 간주해온 기존의 젠더화된 사유방식을 염두에 둘 때 의미심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2. 류준화의 소녀는 누구인가? - 없거나 하나가 아닌 여성주체들

치렁치렁 자라고 흐르고 날아다니는 머리카락으로 (특히 여성과 관련된) 상형문자를 형상화함으로써 기존의 가부장적 상징계를 해체하고 새로운 기호계를 구성하는 문자도(文字圖)까지 포함해 류준화는 오랫동안 다양하게 소녀들의 형상화에 주력했다. (이번 전시에서 우리는 소녀 형상화가 드디어 어떤 ‘세계’ 즉 ‘소녀 우주’라 일컬을 수 있는 경지로까지 나아갔음을 확인한다.)



문자날개 mixed media on canvas 145.5x112cm 2012


소녀, 아니 ‘류준화의 소녀’는 누구인가? 그녀의 작업을 지켜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이런 질문을 했을 것이다. 도대체 소녀란 어떤 존재이며, 류준화의 소녀는 우리가 알고 있는 여타의 소녀들과 어떻게 다른가? - 이런 질문으로 관객들은 류준화의 소녀 그림에 다가갈 것이다.

소녀는 일반적으로 아이와 여성의 사이 공간 (in-between), 문지방의 공간에 위치해 있는 존재다. 소녀가 불러일으키는 매혹과 두려움은 소녀의 이런 문지방적 성격에서 나온다. 소녀들은 급격한 사회 변동기에 아방가르드의 상징적 위치를 부여받는다. 한국사회에서 촛불집회 때 실제와 상징 양측에서 ‘촛불소녀’가 보여주었듯이 소녀성은 사이공간으로서 특히 급격한 사회변혁의 와중에서 성공과 희망, 실패와 불안의 투사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장소로 기능한다.

한국사회의 현실 공간 속에서 소녀들은 남아선호 사상으로 불이익을 당하는 전통적인 위치에서부터 테크놀로지와 팬픽, 야오이, 코스프레 등 대중문화의 선진적ㆍ유희적 소비를 통한 하위문화 주체로, 그리고 가출과 원조교제의 위험한/위협받는 성적 주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형성한다. 소녀는 또한 성적 폭력에 가장 빈번히 노출되는 사회적 약자로서 지식인 남성들의 감성적/감상적 자기 반성이 투영되는 타자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한국사회 소녀들이 이 모든 것을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 사회의 순수와 오염을 상징하는 이 기표로서의 소녀들은 현실에서 또한, 오형근의 ‘소녀 연기’ 사진들이 보여주고 있듯이, 무구와 유혹 사이에서 능수능란한 시이소 게임을 벌인다. 그렇다면 작가 자신에게 소녀는 누구인가?


대지의 꽃 mixed media on canvas 181x227cm 2012



나에게 소녀는 불안한 경계입니다. 뭔가 충돌하는 긴장된 지점이기도 하고 무엇도 확신할 수 없는 모호함이고 그러면서 알 수 없는 미래를 고집스럽게 확신하는 분열의 지점입니다. 그리고 소녀는 자신의 출구를 발견하게 되는 문이기도 합니다.

어찌 보면 첫 자기 이해의 순간, 그 지점이 소녀 아닌 소녀일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지 않을까 ... 생각한다. 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하는 그 경계지점에서 소녀와 소녀의 감성이라는 게 생긴다고 본다. ... 자기를 알게 되고, 또 ‘자기를 알아가고 싶어 하는’ 존재로 스스로를 지각하는 그 지점, 그게 바로 죽음의 경계를 넘어 이승으로 돌아오는 바리데기의 지점일 거라고 생각한다.

각각 2007년, 2012년에 행해진 이 설명들에서 소녀의 ‘경계적’ 존재성은 현상적 차원에서 점차 여성의 ‘자기 이해’에 대한 존재론적 원형 이미지로 움직인다. 정체성의 관점에서 볼 때 소녀는 이후에 전개될 삶의 모든 국면들을 품고 있는, 혹은 관통하고 있는 어떤 단단한 핵 같은 것이다. 여기서 나는 소수자 감수성이 뛰어난 소설을 쓰는 쓰시마 유코가 ‘남자’와 ‘소년’에 대해 한 말을 떠올린다. ‘남자는 부재한다. 남는 것은 남자 속에 계속 살아있는 소년이거나 아니면 사회적인 관념 그 자체일 뿐이다. 사회적인 관념으로 화하여 살고 있는 남자를 제대로 된 인간으로서 묘사하는 것은 헛수고라는 기분도 든다’고 그녀는 말한다. 소년이거나 사회적 관념 그 자체이거나, 둘 중의 하나로서만 존재할 수 있는 남자와 달리 여자는 소녀면서 여자로, 여자면서 소녀로 살 수 있다. 가부장적 언어체계 안에서 여성은 남성/성을 설명하기 위한 기호로 작동한다. 많은 여성주의 철학가들은 그래서 ‘여성에겐 성이 없다’고 말하거나(모니크 위티그), ‘여성주체는 없다. 만약 여성이 주체라면 주체는 하나가 아니다’라고 말한다(뤼스 이리가레). 모든 담론이 남성중심의 의미경제 체계 안에 갇혀 있다면 그 안에서 여성에게 부여된 그 어떤 주체적 위치성도 유효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남자는 소년이거나 사회적 관념 그 자체일 뿐이지만, 여자는 소녀이면서 수많은 여자들로, 즉 하나가 아닌 주체로 존재한다. 류준화의 소녀는 그래서 현실적 연령을 가늠하기 어려운 몸과 표정을 간직하고 있다.



꽃구름 mixed media on canvas 112x145.5cm 2012



그런데 이렇게 수많은 여자들로 존재하기까지, 그토록 슬프고 괴기어린 “초록날개”(2007)에서 “새”(2007)로 변신하기 시작해 그토록 단단하고 고요하게 생명을 창조하는 “물의 시간”(2009)에 이르기까지, 이번 전시가 보여주듯이 아예 거대한 꽃들의 대지가 되지 않고는 못 배기는 환희의 지경에 이르기까지, 류준화의 소녀들은 폭력과 희생, 분노를 숨기면서 드러내고 (드러내는 것조차 금지되었으므로), 드러내면서 숨겨왔다 (기존 재현 방식의 일의적ㆍ투사적 수용에 저항하기 위해). 그렇게 소녀를 소녀로 살지 못하게 하는, 즉 여성들을 ‘스스로 이해한 자기’로 살지 못하게 하는 폭력적 현실을 무대화했다.

본격적으로 여성/주의 그림을 그리기 전 대학시절에 작업한 그림들에서는 그 기괴함이 더 강하다. 구체적인 형상은 없는 추상화들인데도 그랬다. 내 안에 분노들이 많았던 것 같다. 사실 내 그림 속에는 엄마의 한들이 서려있었다. 그래서 오히려 추상적인 형상들 속에 내가 담고 싶은 그 분노의 내용들을 숨겼던 거다. 그 때도 역시 내 머리 속에는 늘 약자에 대한 생각이 있었고, 그 약자의 대변인으로서 항상 어린 아이를 담았던 것 같다 ... 추상적 형상 속에. 휠체어 탄 아이를 넘어뜨리는 어른같은.

휠체어 탄 아이를 넘어뜨리는 어른. 망설임 없이 작가의 입에서 나온, 그만큼 작가의 마음속 깊숙이 새겨져 있음에 틀림없는 (‘도가니’ 현상이 보여주듯 장애소녀에 대한 폭력은 사실 한국인 모두의 무/의식에 새겨져 있다.) 이 이미지는 인간사회에서 볼 수 있는 모든 폭력의 어떤 원형적 이미지 같은 것이다. 그녀의 전 작업과정은 말하자면 폭력의 원형적 희생 이미지 소녀에서 죽음과 삶 전부를 껴안는 여성적 생성의 원형적 이미지 소녀로 변화해온 셈이다. 그리고 이 변화의 과정은 제의적 아우라에 둘러싸여 있다.

첩첩산중 두메산골에 살던 어머니가 들려주던 이야기에는 늘 폭력에 희생당하는 여자들이 등장했다. 어머니들이 모여 앉아 나누던 이야기도, 실제 삶도 그랬다. 어머니 주변에, 내 주변에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야 했던 여자들이 많았다. ... 그때 어머니는 촛불 켜놓고 공양을 드리며 신들을 모셨다. 신들을 모시던 어머니의 행위는 내게 익숙했다.




검은 땅 mixed media on canvas 130x194cm 2012


작가가 들려주는 이 어머니의 이야기는 물론 그녀의 ‘사적인’ 어머니의 ‘사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전쟁을 겪고, 유교가부장제의 혹독한 조건 속에서 묵묵히 삶을 책임지던 당시 어머니들의 보편적 이야기다. 촛불을 켜고 정한 물을 떠놓고 기도를 드리는 것은 험난한 삶을 견디는 일상적 제의였다. 류준화의 소녀 그림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약간의 으스스한 유령적 느낌과 어떤 구원적 영성을 동시에 품고 있는 것은 이렇듯 한국사회 어머니‘들’의 제의적 행위성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내 유년기에 나의 어머니도 늘 신들을 모셨다.) 그녀에게 가장 강력한 영감을 준 어머니‘들’의 제의행위는 그녀의 작업에 등장하는 소녀들에게 이중적 존재성을 부여한다. 즉 여기서 소녀는 아버지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죽음의 장소를 다녀온 바리데기처럼 만신이면서 동시에 그 만신이 생명을 구원하는 소녀-여성들이다. 그녀의 소녀에게서는 제의를 관장하는 만신과 제의에 자신의 삶을 (혹은 그 삶의 구원을) 의탁하는 여성들이 함께 숨 쉬고 있다. 한을 씻어 내리기 위해 신들을 향해 밝힌 ‘어머니 만신들’의 촛불은 류준화의 그림에서 소녀를 비롯해 모든 존재들이 몸담고 있는 투명하고 성스러운 물로 계속 빛나고 있다.

이렇듯 류준화의 소녀 그림들은 예술이 한편에서는 아직 종교에서,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자연에서 분리되지 않았던 시기의 예술-자연-종교의 관계를 환기시킨다. 그러나 그녀의 이미지가 상상계로서의 설화적 세계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한은 “실현되지 않은 욕망들”이다. 류준화가 불러낸 이 소녀들은 실현되지 않은 바로 그 욕망들을 품고 귀환하는 여성들이다. “출항”(2009)이라는 그림을 보자. 배 위에 노를 잡고 있는 한 소녀가 있다. 뺨은 상기되어 있고 머리카락은 바람에 휘날린다. 당차고 늠름한 자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소녀는 떠나는 게 아니라 이제 막 도착하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이 그림에서 뿐 아니라 거의 모든 경우 류준화의 소녀들에게서 ‘출항’은 이렇듯 떠남과 귀환의 이중적 움직임으로 표현된다. 귀환으로서의 떠남, 떠남으로서의 귀환. 떠남과 귀환의 이 겹침은 의미심장하고 매우 실존/주의적이다. 이 겹침은 설화의 세계와 역사적 현장의 겹침이고, 원형적 이미지를 개별적 ‘사건’으로서의 이미지로 전환시키는 겹침이다. 지워지고 침묵된 욕망으로 피흘리던 소녀들이 차례로 불림을 받아 ‘지금 여기’ 역사의 자리로 돌아오고 있다.

 

3. 이주의 시대, 소녀-이방인의 환대

이동 중의 사람들 ... 슬프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고, 분노하기도 하고 용서하기도 하고 기억하고 싶기도 하고 지워버리고 싶기도 한 경계 위에 서있는 자의 감성을 표현하고 싶은 거였습니다.

소녀와 새에 관한 오래된 전설이 하나 있다. 할머니에게서 어머니에게로, 어머니에게서 딸에게로 전승되던 아주 슬프고 잔혹한, 그러나 전율과 매혹으로 빛나는. 한 소녀가 있었다.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을 구하러 먼 길을 떠나야 했다. 그 길은 너무 멀어서 소녀는 날개가 필요했고, 소녀를 등에 태우고 강과 들판 위를 나는 새는 굶주린 배를 채울 고기가 필요했다. 소녀는 새에게 자신의 팔과 다리를 떼어 주며 여행을 계속했다. 그리고 류준화의 “발 없는 새” 소녀 그림이 있다. 그 그림 속에서 소녀는 발 없는 새를 오른 팔로 안고 있다. 그녀의 허리께에 착 붙어있는 그 새는, 소녀의 옆구리에서 태어난 소녀의 욕망처럼 보이기도 한다. 발 없는 새와 날개 없는 소녀가 만나면 새는 발이 생기고 소녀는 날개가 생긴다. 소녀-새가 탄생한다.


날개 mixed media on canvas 72x91cm 2012


이 그림을 두고 작가는 인터뷰에서, 계속 날기만 해야 하는, 발이 없어 쉴 수 없는 새를 한 소녀가 쉬게 해 주는 것처럼 자신의 그림들이 이동 중에 있는 사람들이 쉴 수 있는 장소가 되길 바란다고 말한 적이 있다. 지금 전 지구적 차원에서의 불균등 발전 때문에, 더 나은 삶에 대한 꿈을 좇아 수많은 사람들이 이동 중이다. 근대 이래로 이주는 일국의 차원에서, 지구적 차원에서 언제나 있어왔다. 그러나 기술, 통신, 초국적 자본, 미디어 등이 촉발하는 당대의 이주는 더 이상 비서구에서 서구로의 일방향이 아니라, 아시아 내에서, 혹은 비서구와 서구 간의 쌍방향으로 진행되면서 특히 이방인과의 삶에 익숙하지 않았던 한국사회에 큰 변화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류준화의 “발 없는 새”는 모든 이동하는 이들, 이방인들의 알레고리로 읽힌다. 여기서 “하나가 아닌 주체들”로서의 소녀는 성별을 벗어나 아무 곳에도 정착할 수 없는, 그래서 역설적으로 모든 곳에 정착할 수 있는 이방인들의 정체성으로 확장된다. 사람마다 소녀-새를 바라보고 교감하는 방식이 다르겠지만 시대적 상황이 우리로 하여금 ‘발 없는 새’의 비행을 이방인과 환대의 관점에서 이해하도록 촉구한다. 인류학적 관찰이 증명하듯이, 그리고 데리다가 역설하듯이 모든 이방인은 환대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 손님을 맞는 사람들은 이방인들의 이 환대권에 응답해야 할 책무를 지닌다. 이 응답은 손님과 적의 바로 그 경계에서 이루어진다.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이방인을 손님으로 인정하고 환대하는 것, 이것은 개인과 국가의 차원 모두에서 당대가 요구하는 가장 급진적인 정치학의 하나가 될 것이다.


4. 끝나지 않은 에필로그: 봄의 제전, 소녀 월드

우주인의 관점으로 이 지구를 봤을 때 나는 물이 제일 신비롭다고 생각한다. 물처럼 신기한 게 없는 거다. 생긴 모양도 너무 특이하고. 잡혀지긴 하는데 잡히지 않고 경계가 없고 그러면서 투명하고 ... 마실 수도 있고. 또 그 안에 모든 영양분이 다 들어있고 ...

너무나 성스러운, 너무나 흔한, 누구에게나 흘러드는, 누구에게나 세례를 베푸는 물. 이 물의 감흥이 나를 키웠다.

류준화는 지금 어느 때보다도 물의 성스러움에 감염되어 있다. 이 감염의 결과는 ‘덩어리’로 등장하는 소녀들이다. 이전에도 여러 소녀들이 물속을 유영하거나 여행하는 그림들이 있었지만, 지금 거침없이,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솟아나고 있는 이 소녀들처럼 이렇게 무리지어 나타난 적은 없다. “대지의 꽃”, “봄의 소리”, “달의 정원”, “검은 땅” 등등 - 그렇다. 광대하게 펼쳐지는 “봄의 제전”이다. 이 작업들은 물의 성스러움과 생성의 황홀에 전율한다. 여전히 소녀들의 몸에서는 크고 작은 날개가 솟고, 꽃들은 피흘리며 만개한다. 소녀는 어머니와 딸로 증식하고 개와 사슴이 소녀의 곁을 지킨다. 소녀들은 오체투지를 하고 기도를 올리며 애도에 잠긴다. 사막을 횡단하는 중인가? 소녀의 곁에 선인장들도 무성하다. 그리고 엉키고 설킨 덩어리로 나타나는 소녀들. 이 소녀들은 더 이상 예전의 설화적ㆍ알레고리적 소녀-여성의 모습을 띠고 있지 않다. 머리카락이나 표정에 있어 현실세계의 구체적인 개별 얼굴들을 하고 있다. 이 변화는 봉화에 내려와 살면서 류준화가 경험한 ‘자연세계’의 우주적 생성과 무관하지 않다.

자연에는 끊임없는 반복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같은 자리에 똑같은 풀이 나고 ... 그러나 그러면서 조금씩 자기의 씨앗을 번식시킨다. 자연을 계속 접하다보면 여자의 몸과 닮았다는 생각을 갖게 되더라. 아이를 잉태하고 출산하는 여자의 시간이 자연의 시간과 마찬가지라는 거다. 신비롭고 영적이다. 우주적이다. 꽃망울이 알아서 터지면서 씨앗을 흩뿌리는 것부터 시작해서 그 긴 겨울동안 또 다른 생명을 키우기 위해서 시간을 축적하는...

류준화는 화가다. 화가는 색과 형태의 스케일에 민감하다. 광대한 스케일에 대한 욕망은 예술가적 추동력과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모든 스펙타클이 드 기보르가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지적한 이데올로기적 문제점들로 귀결되는 건 아니다. 문화정치, 문화전쟁의 시대에 주류 이데올로기가 자본주의 문화산업과 결탁해 무차별하게 확대시키는 스펙타클한 문화생산품들, 행사들에 대항해 반문화적(counter-culture) 행동으로 기획되는 스펙타클도 있다.

저렇게 소녀들이 군상으로 나오면 그 소녀들이 품는 기들이 있을 거라 생각한 거다. 소녀들의 그 기들이 자연이 내뿜고 있는 생명의 기운들을 보여줄 거라 생각한 거다.

이처럼 화가 류준화는 문화산업이 만들어내는 ‘소녀 시대’와는 다른 소녀 세계를 꿈꾸고 있다. 이 소녀 세계가 펼쳐 보이는 봄의 축제는 ‘봄의 제전’이 거대하고 풍요로운 봄의 생성을 위해 어떻게 소녀들을 희생제물로 바쳤는지 잘 기억하고 있다. 꽃의 한가운데를 파먹는 새들의 모습이나, 늘 피 흘리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꽃들, 발 없는 새 - 이 모든 형상들을 품고 있는 제전이고 황홀이다. 여기서 소녀들과 사물들은 서로에게 ‘나타남’으로써 ‘존재’하는 세계 내적 존재인 세계 관객‘들’로서 세계 관객‘들’인 우리에게 나타나고 있다. 우주적 경이를 품었으되 초월이나 관념으로서가 아니라 현실의 생명들로서.
(중략)


'보라, 이 소녀들을: 류준화의 소녀 월드, 소녀 미학 중에서..




장 소 : 관훈갤러리 1, 2F

일 시 : 2012. 11. 14 - 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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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2일, 정신없는 하루를 시작했다.

11월14일 여릴 예정인 아내의 개인전에  앞서  헥사곤이라는 출판사를 통해

한국 현대미술선의 한권으로 작품집을 내게 되었다.

그 책에 들어갈 예정이지만 촬영이 안된 작품 몇점을 차에 싣고

서초동 포토리스트로 향했다.

이런 저런 일정 때문에 아침 9시에 약속을 잡아 놓고 5시 반에 집을 나섰다.

원주를 지나갈 때나 되어 아침 안개가 가쉬고

쾌청한 하늘이 하루의 즐거운 여정을 예정케 했지만 갈길은 멀고 할일도 많았다.

난생 처음으로 시속 170km까지 밟아가며 도착한 서울은 진입단계에서 정체가 시작되었다.

그래도 서둔 덕분인지 포토리스트에 도착후

아침 식사까지 하고나서야 사장님이 출근을 하고 촬영에 들어갔다.

 

촬영시간은 예정대로 끝나고 다시 을지로에 있는 헥사곤으로 향했다.

큰 사무실에 일인 출판사업자들이 곽들어찬 말로만 듣던 그런 사무실 분위기는 열기에 가득했지만 왠지 좀 서글픈  느낌이다.

내가 만약 을지로 인쇄골목을 떠나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 이런 사무실에서 일인 출판 편집일을 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도서출판 헥사곤 대표님과 아내 류준화의 재미없고 긴 협의가 진행되는 동안 나는 차에서 잠시 눈을 붙였다. 그리고 협의를 끝낸 아내를 싣고 한전아트센타에서 시작한 [Woman + Body 전] 2차 전시가 열리는 전남 광주의 광주 문화재단 미디어큐브로 향했다. 막임없이 달리느 고속도로를 스쳐 낯익지만 다른 느낌의 산천을 두눈 가득담다보니 어느새 광주다.

혁명의 도시 광주는 근 10년 만이다. 10여년 전쯤 장성군의 한 산꼴짜기 마을의 작은 미술관 개관식에 초대 받아 갔던 길이었을 것이다. 오는 길에 광주를 들러 광주민중항쟁중에 산화하신 민주 영령을 기리기 위해 어린 딸아이와 참배를 했던 기억이 새롭다.

 

광주 비엔날레가 열리고 있는 광주는 여전히 낯선 도시지만

아직 거리거리마다 민중의 함성이 남아 있는 듯 

가슴을 들떠게 했다.

오픈 시간에 임박해 광주문화재단 미디어큐브에 도착했다.

한전아트센타전 때 처음 뵈었던 큐레이트 탁혜성님을 다시 뵙고 이내

낯익은 한국 여성 문화계의 인사이지 아내의 동료들과 조우했다.

박영숙 선생님, 윤석남선생님, 정정엽 선생님이 반가이 맞아 주셨고,

늘 이런 자리에 함께하시는 시인 김혜순선생님도 같이 하고 계셨다.

 

오픈은 늘 설레이면서 또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이날 오픈은

조금 정도가 심했다. 계속되는 인사말이 이어지고

작가들은 조금씩 지쳐가는 듯했다.

그사이 나는 전시장을 살피며

한국 여성미술의 정점과 조우하는 호사를 누렸다.

미국작가와 한국작가가 '여성'과 '몸'을 테마로 모인 전시를 호기롭게 기획한

큐레이트 탁혜성씨의 노력이 덧보이는 전시였지만

주제의식이 뚜렷하지 않다는 나의 주제 넘는 지적에

아내는 그래도 한국 미술풍토에서

이렇게라도 페미니즘미술이 한자리에 모일수 있게 된 것 만으로도

충분히 의미있다고 받아쳤다.

 

아뭏튼 좋은 작가와 좋은 작품을 만나고

또 광주 변두리의 한 한옥마을에서

먼길을 달려온 작가분들과 따뜻한 저녁시간과 밤을 함께하고

얇은 잠을 자고 아침을 같이 나누고서야 봉화로 향했다.

일박이일의 긴여행을 마무리하고 돌아오는 길 내내

미술과 작가의 삶에 대해, 한국사회에서 여성의 삶에 대해,

그리고 아내 류준화의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며

깊어가는 가을 산천을 만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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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ING

류준화展 / RYUJUNHWA / 柳俊華 / painting 2011_0603 ▶ 2011_0625 / 일요일 휴관

류준화_봄의제전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콘테, 석회_181.8×227.3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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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1_0608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일요일 휴관

갤러리 비원Gallery b'ONE서울 종로구 화동 127-3번지Tel. +82.2.732.1273www.gallerybeone.kr

태양을 머금고 대지와 접신한 소녀의 판타지● 류준화 내러티브의 핵심은 여성과 생명이다. 그는 소녀와 물 이미지로 여성의 몸과 생명의 근원을 이야기한다. 소녀의 이미지는 몽환의 세계를 떠도는 아바타이자 현실의 억압을 비켜서기 위한 환상이다. 여성성을 대변하는 아바타로서의 소녀 이미지는 류준화 내러티브를 풀어나가는 가장 중요한 장치이다. 그는 자신의 회화 속에 소녀를 등장시킴으로써 여하한 풍경이나 상황 속에 놓인 캐릭터로 하여금 나지막한 목소리로 생명의 메시지를 말하게 하다. 물은 매우 근원적인 물질형식이다. 그러나 물은 그 자체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다. 물은 다른 존재를 통해 그 존재를 드러내곤 한다. 류준화의 물 그림이 꼭 그렇다. 물 속에 있거나 물 위에 떠 있는 다른 존재들로 인해 생명의 근원인 물의 실재가 드러난다. 요컨대 소녀와 물은 여성과 생명, 나아가 인간과 자연을 향한 류준화 이야기의 뿌리이다.

류준화_식물소녀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콘테, 석회_91×72.7cm
류준화_봄의소리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콘테, 석회_91×72.7cm

류준화 스타일은 은근하면서도 단호하고, 얇고 투명하면서도 두께가 있다. 그의 도상 하나하나에는 매우 정교하게 다듬어낸 형태와 색채의 단아함이 배어 있다. 그는 붓질은 물론이고 흘리기와 긁기 등 다양한 방식으로 번짐과 뭉침, 번들거림과 겹침 등 특유의 색감과 질감을 만들어낸다. 그의 회화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다양한 변주의 과정을 거쳐 왔는데, 특히 근작에 이르러 독창성과 고유성의 정점을 이룬 것으로 보인다. 고유의 캐릭터를 구축해서 몇 년간의 변주 과정을 거치면서도 자기복제의 위험성과 거리를 둘 수 있는 것은 류준화 스타일이 구축해온 단단한 회화성 때문이다. 그의 그림 속 낱개 이미지들은 비교적 심플한 형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복잡한 색감과 질감을 드러낸다. 하나하나의 형상 속에는 매우 꼼꼼하고 섬세한 손길이 묻어 있다. 여러 차례 색을 올려 단아하고 깊은 화면을 만들어내는 그의 진지한 노동은 스타일의 독창성을 만들어 내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류준화_빛을모으다_캔버스에 아크릭채색, 콘테, 석회_72.7×91cm

근작을 통해서 류준화는 소녀와 물을 중심으로 이야기 틀을 만들어 기존의 흐름에 또 하나의 요소를 더했다. 이번 전시에서 그의 소녀는 물과 더불어 대지를 만난다. 씨앗을 품어주고 길러내는 대지 또한 생명의 근원이다. 그것은 물질로서의 흙이 아니라 개념으로서의 땅이다. 마치 물이 강이나 바다로서 현현하는 것처럼 대지나 산맥의 모습으로 나타난 흙을 존재는 생명의 서사를 생성하는 또 하나의 모티프이다. 존재의 근원으로서의 물과 흙은 매우 빈번하게 은유적 수사로 등장하곤 한다. 류준화는 물과 흙, 강과 대지를 통해서 여성성과 생명의 서사를 더욱 공고히 한다. 그는 산맥과 머리카락, 피와 꽃 등을 중의적 수사로 얽어놓았다. 흩날리는 소녀의 머리카락이 산맥이 되어 흐른다. 선홍빛으로 번져나간 피가 붉은 꽃으로 활짝 핀다. 그는 이처럼 중의적 수사를 채택함으로써 인간과 자연의 생명성에 관해 보다 풍부한 이야기를 펼친다.

류준화_대지의꽃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콘테, 석회_91×116.7cm
류준화_낮과밤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콘테, 석회_145×145cm

대지에 엎드려 잠든 소녀에게 붉은 피는 꽃이 되어 몸을 타고 흐른다. 새를 안고 있는 소녀의 어깨에 붉은 꽃 한 송이가 함께 있다. 꽃을 입은 소녀는 새를 들고 있다. 천상과 지상의 메신저인 새를 든 소녀는 세상의 모든 생명에게 빛을 주는 '태양신에게 제물로 바쳐지는 소녀'이다. 대지를 안고 잠든 몽환적인 소녀의 얼굴에는 어머니 대지와 만나는 순간의 고결함이 담겨있다. 창백한 소녀의 얼굴은 검은 머리카락과 교차하고 소녀와 대지를 꿰뚫는 눈부신 태양이 생명을 이야기한다.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초현실적인 화면 구성은 류준화의 그림을 판타지의 일환으로 읽게 하는 주요 장치이다. 인간과 대자연의 존재를 얽어놓은 그의 화면에는 가시적인 세계 너머의 세계를 보여주는 환상기제가 작동하고 있다. 태양을 머금고 대지와 접신한 소녀의 판타지. 이것이 우리의 삶을 한 꺼풀 더 깊고 두텁게 읽어내는 류준화 내러티브의 현재이다. ■ 김준기

Vol.20110607g | 류준화展 / RYUJUNHWA / 柳俊華 / pain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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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치명적이다'! 
'왜?'
'여자니깐!'
여자는 '아름다워서, 위험해서, 위대해서' 치명적이다.
누구에게?
다름아닌 남성권력에게!!
 
남성이 지배자로 군림하는 시대가 시작되자 모든 권력은 남성성과 합체한다.
교회와 군주, 왕실과 문중은 남성권력의 화신이다.
여자는 신성한 권력에 대해 도전할 수 있는 유일한 위험세력이다.
모든 여자는 남성을 유혹해 권력의 비밀을 탐지해내는 데릴라거나
경국지색의 양귀비거나 요녀 장희빈이다. 
지배자인 남성권력에게 여성과 남성이 우열이 아닌 상호 의존적 관계임을 주장하고,
동등한 대우를 요구하는 선지적 여성은 바로 '마녀'였다.
그리고 간혹 남성권력에 균열을 주는 전위적 여성이 출몰했지만
가차없이 색출되었고 무자비하게 처단당했다.
'왜? '
'여자니깐!!'

그렇게 남성권력은 탕녀와 마녀, 요조 숙녀와 열녀를 만들었고
나혜석을 처단하고 신사임당을 옹립했다.

인류는 자신의 어머니가 여성이고, 자신의 딸이 또한 여성임을 자각하는데 수천년의 세월을 필요로했다. 여자가 여류작가가 되고 다시 여성작가가 되는데도 만만치 않은 세월이 필요했다.  문명의 진보는 여성과 남성의 상호의존성과 동등성은 증명했고, 그리고 드디어 여성이 작가가 되고, 작가가 여성이 되는 시대가 도래했지만 마녀사냥꾼은 자본의 숲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위대한 마녀사냥꾼은  여성의 상품화라는 신 병기로 무장한채 숲을 나왔고 순식간에 지구를 정복했다. 이제 자본화된 남성권력은 실효성을 잃은 마녀를 대신해 비쥬얼 섹시스타를 앞세우며 지구의 절반인 여성에게 우상숭배를 강요한다. 이렇게 자본의 시대에 여자는 '상품'으로 거듭났다. 섹시한 상품이길 거부하는 여성은 이제 찌질이거나, 루즈다. 성형과 다이어트는 여성이 인간이 되기위한 최소한의 조건이 되었다.
섹시스타는 외친다.
'섹시 천국! 불신 지옥!' 

지배권력에 대한 반역의 음모는 권력의 바같에 웅크린 바로 그 찌질이와 루즈들 사이에서 피어나기 마련이다. 새로운 혁명은 남성권력의 바같에서 앙칼진 목소리로 일어난다. 여성은 남성지배사회를 전복하려는 반란의 주모자들이다. 그 반란녀들이 예술이란 무기를 들고 일어났다.  그녀들은 지배권력의 바닥을 보았고 예술이란 무기를 벼려 지배자 남성의 등에 칼이 아니라 꽃을 꽂는다. 예술이라는 신병기는 꽃잎처럼 부드러워 적을 상처내지 않은채 굴복시키고, 거위털보다 부드러워 뭇생명이 깃든다.  차가운 금속성 칼날을 삭히는 촉촉함과 생명의 온기를 가져 인프루앤자보다도 빠른 전염성을 가진 그녀들의 무기는 위험하다 못해 치명적이다 .그래서 여성예술가는 모두 전위이고 혁명가다.



그런 시대, 그런 세상에서 필자 제미란은 한국의 대표적 여성예술가를 찾아나섰다. 그리고 그녀들과 포옹하고, 대화하고, 차와 밥을 나누며 그녀들의 예술세계를 헤집고, 느끼고, 참여한다. 그리고 그 흔적은 온전히 한권의 책안에 담아냈다.
한국 현대 미술을 대표하는 14명의 여성 작가를 담고있는 [나는 치명적이다-경계를 넘는 여성들, 그리고 그녀들의 예술]은 여성적 삶이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영위되고 예술로 승화되는가를 보여주는 여성작가론이자 동시에 여성예술론이다. 여자인 나는 어떻게 작가로 살아가는가, 그리고 동시에 여성작가인 나는 어떻게 자신의 정체성을 작업속에 온전히 녹여넣고 나만의 내밀한 세계를 창조하는가를 탐색해 나가는 필자 제미란은 사실 또 다른 작가이기도 하다.

필자가 14명의 여성예술가의 아뜨리에를 찾아 나선 것은 단지 그들 작가를 만나 담소를 나누고, 그들의 예술세계를 향유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그녀는 그리움이 된 그림을 찾아 자신의 예술세계를 모색하고 구축하기 위한 순례의 길목에서 단지 14명의 여성예술가를 우연히 마주친 것인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값싼 기획출판물과는 달리 [치명적이다]는 필자 제미란이 자신의 삶을 관통하는 예술적 탐색과정, 그리고 그녀들과의 맞남으로 응축된 자신의 삶의 기록을  통해 독자적인 예술적 고뇌에 이르고 있다. 그래서  [치명적이다]는 결국 미술가 제미란의 예술론이기도 하다.

제미란이 만난 14명의 여성작가는 사실 제각각이다. 그들을 한권의 책으로 묶는 끈은 여성성뿐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여성성을 예술로 구현해낸 작가가 있는가하면 여성주의적 자각을 작업으로 승화시킨 작가도 있다. 그것을 여성적 미술과 여성주의 미술로 나누어도 좋을지 모르겠다. 나아가 그녀들은 회화와 설치, 행위예술과 공예를 아우른다.

필자의 입담과 필력을 따라가다보면 나는 어느새 14명의 그녀들을 아우르는 여성미술의 고갱이를 대면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나는 책을 덮으면서도 그들 14명의 여성작가가 가진 공통분모에 이르지 못했다. 그것은 한국의 여성미술의 지평이 그만치 넓어지고 깊어졌기 때문인지 모른다.  여성미술이 미술의 한 파트가 아니라 미술전체를 아우르는 현대미술의 트렌드라고 보아도 부족함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필자가 초두에 던지 '공명(共鳴)'이라는 화두앞에 다시하번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다. 공명은 동일한 삶의 기반, 경험의 공유를 넘어 존재기반의 본질적인 동질성에 기반하는지 모르겠다. 한국적 현실에서 여성으로, 여성 예술가로 살아가는 14명의 작가가 일으키는 공명의 사이클 어디쯤에 필자 제미란은 자신의 자리를 확보하고 있지만, 그 끄트머리 어디쯤 미미한 구석에 독자인 나의 자리역시 가지고 싶다.
김원숙, 김은주, 김주연, 함연주, 유미옥, 윤석남, 윤희수, 류준화...... 제미란, 그리고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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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위의 미술관>을 썼던 제미란님이 새 책을 내었네요.
국내외 14명의 대표적 여성작가를 만나 대화하면서,
그들의 예술세계를 깊이 들여다보고,
그 과정에서 얻은 필자와의 개인적 교감까지
한권의 책으로 고스란히 담아내었네요.
김원숙, 윤석남, 함연주, 윤희수 등을 포함해
저의 아내 류준화도 14명의 작가중 한명으로 포함되었는데,
표지 그림이 지난 2009년 11월 가나아트에서 가진 개인적에 출품했던 
아내의 작품 [물의 몸]이라서 더 자랑스럽네요.

책이 도착하는데로 열심히 읽고 한편의 초라한 서평이라도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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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위의 미술관]
제미란
이프, 2007년 10월 

필자 제미란은 어느날 보따리를 쌌는가보다. 그리고 길을 나서 사무치게 그리워했던 그림과 작가를 만나고, 눈물 콧물 훌쩍거리며 밤새 수다를 떨고 회포를 풀었단다. 그 여정이 가진 의미를 좀 번듯하게 정리하자면 필자에게 그림을 보러 떠나는 일은 ‘순례’의 여정이자 여행자를 위한  "치유"의 과정이었고, 그리고 그 여정을 이 책에 담았단다.


그런데 그림을 찾아 떠나는 여정은 사실 평범할 수 있다. “길에서 쓴 그림일기”인가하는 책도 그렇고 뭐 ‘길’과 ‘화가’, 혹은 ‘길’과 ‘문학’을 짝 짓는 일은 ‘결혼중매업’만치 ‘통속적’이다. 자칫 제목만으로는 통속이라는 늪에 빠질듯 위태롭던 이 책이, 독자인 나에게 이필하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여성미술 순례’라는 소제목이다.


좀 어거지로 느껴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필자가 그토록 그리워했던 그림과 작가가 다름 아닌 “여성”이란 사실은 이 시대, 우리에게 뭔가 특별한 데가 있다. ‘계급’이라는 화두가 잠복하면서 ‘여성’과 ‘환경‘이 시대정신을 담는 화두로 급속히 대체되던 시대를 청년으로 살았고, 그 열정으로 나머지 삶을 꾸려나가고 있는 세대가 바로 필자 그리고 독자인 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뭇 싱겁게 끝나 버릴 수 있었던 ‘이산가족 상봉’이, 필자와 필자가 만난 작가와의 사이에 ‘여성’이라는 공통성에 기반 한 정서적 공감대 혹은 세계관이 있어 이토록 애절하고 신파적인 감동을 줄 수 있게 한 것이 아닐까 감히 짐작해 본다. 하지만 도대체 그 “여성”의 삶이라는 공통성이 뭐길래, 도대체 그 “여성성”이 갖는 세계관의 차이가 뭐길래 사상적 동지를 만난듯 필자와 작가는 그토록 애절할 수 있었을까?


참 많은 여성 작가의 구구절절한 삶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필자가 명시적으로 “여성”을 이야기하는 것을 별로 보질 못했다. 오히려 필자는 작가와 그림을 마주한 개인적 소회와 ‘사적인 대화’를 통해 그 ‘여성성’을 구현해 내고 있는 듯했고, 그것을 읽어 내는 것은 순전히 독자의 몫으로 남겨놓은 듯했다. 그래서 더 ‘여성’적 글쓰기에 성공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또 하나, 독자는 호기심 하나로 필자의 생채기를 들여다 본다. 방관자의 특권일 것이다. 나는 필자의 ‘언어장애’를 시대적 상황과 개인의 충돌에서 빗어진 ‘개인’의 좌절로 읽었다. 필자는 한 특수한 시기의 삶이 가졌던 규정성에 의해 침묵이 강요되었던 자신의 정신적 고통 혹은 상처를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치유과정의 설득력이, 치유를 필요로 했던 상처의 ‘우연성’에 의해 손상받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왜일까? 동일한 시대 동일한 상황에서 비슷한 ‘증상’으로 고통 받닸던 기억이 있는 독자로서 필자에게 말을 걸고 싶다.


그토록 절실했던가? 스스로의 삶의 진정성에 그만치 충실했던가? 시대를 탓할 만치 우리는 당당한가? 아직은 잘 모르겠다. 뭐 시간이 흐른다고 알아질 문제도 아닐 것이다. 길에서 만나 작가들의 크기에 비해 필자의 고뇌는 너무 작은 것이 아닐까? 아니 그러한 나의 생각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 아닐까? 세상에 위대한 삶은 따로 있을지언정, 크기가 작은 삶, 가치가 작은 삶이 따로 있진 않을 것인데, 개인에게 사적인 고뇌는 세상의 전부일 수 있는 것 아닌가.


이렇듯 이 책은 나같은 나태한 독자에게도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그래서 귀찮을 수 있었다. 하지만 게으른 독자를 책 속에 빠져들게 하는 마력은 엉뚱하다. 책속에서 미술, 특히나 여성미술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독자인 내가 잘 잡히지 않는 갈피를 찾아 헤메다 문득 자신의 지난 시절 기억과 내면의 알리바이를 추적하고 있는 스스로를 섬짖 느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을 덮으며 중얼거렸다. “한번 더 읽어 봐야겠다.“



필자가 길에서 만난 니키 드 생팔, 키키 스미스, 루이 브루주아 등과 그들의 대표작들은 겨우 한두번 인쇄매체나 전자매체에서 마주한 것이 고작인 무식한 독자인 내가 필자 나름의 작가론이나 작품론이라 할 수 있는 해석과 의미부여에 대해 구구절절 토를 달거나 평가할 자질도 이유도 없다. 그냥 새 세상을 알아가는, 미지의 세계를 향해 낯선 대양을 항해하는 초보 항해사의 어설픈 설레임과 괜한 호기 아마 그것이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가졌던 지적, 정서적 반응의 전부였을 것이다. 하지만 ‘미술’ 바깥 세상을 살아가는 나는 팔자에 없던 낸시 스페로와 낸 골딩과의 교분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을 친절한 필자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이책을 통해 적어도 나의 무미건조한 삶에 삶이란 얼마나 구구절절한지, 그리고 치열하고 진실해야 하는 건지, 그리고 남성과 다른 여성의 삶은 떠 얼마나 다르게 절실한 것인지 새삼 느낄 수 있었는데 이는 다름아니라 미술 역시 세상을 이해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자기 표현의 한 양식이기 때문일 것이다.


책은 끝났지만, 아마 필자의 여정은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독자인 나는 책을 덮었지만, 그 여정의 동반자로서 여전히 길 중에 서 있다. 그리고 긴 여정을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계속할 할 것 같다. 그리고 필자와 필자가 만나 작가와 긴 인생의 도반이고 싶다. 

나는 이책이 많이 팔리면 좋겠다. 필자 제미란의 글맛을 두루 나누어서 좋고, 여성과 여성 작가에 대한 세상의 이해가 넓어져서 좋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미란은, 모든 독자가 만나서 와인 한잔 사 달라고 졸라 긴 이야기를 같이 나누고 싶은 그런 필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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