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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4일 가사를 출발하여 먼지투성이 찻길을 따라 걸어 다나에서 점심을 먹고 따또파니에서 하루의 여정을 멈추었다. 2월 15일 드디어 걸음을 마무리하고 버스로 따또파니를 출발하여 Galeshwor에 도착해 숙소에 짐을 풀고 마을을 탐방하고 흰두사원을 참배했다.  

 

가사의 플로리다롯지를 나설 때까지 어제 저녁의 산불은 이어지고 있었다. 눈에 띄게 불길이 치솟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느린 걸음으로 위로위로 번져가고 있었다. 강의 동쪽에 형성된 오솔길을 통해 걸어가고 싶었지만 산불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강의 서쪽에 만들어진 찻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고도가 낮아지고 도시가 가까워질수록 찻길은 넓어지고 그만치 지나는 차의 수도 늘어갔다.  어떻게든 먼지를 피하기 위해 가능한한 찻길을 벗어나 산길을 선택해 걷곤했지만  어쩔 수 없이 다시 찻길로 내려와 먼지를 뒤집어 쓰야하는 구간이 늘어났다. 

 

가사를 벗어나 남쪽으로 향하는 길은 어느새 열대의 기운이 느껴졌다. 길가에 바나나나무가 늘어섰고, 수확이 끝나가는 오렌지과수원이 드문드문 이어졌다. 유채꽃은 막 노랑 꽃순을 터트렸고, 복숭아와 자두 끛은 만발했다. 부지런한 들꽃은 이미 지기 시작했고 배낭을 짊어진 등짝에는 땀이 흘렀다. 땀에 젖고 더위에 지쳐갈 무렵 Rupse Chhahara(아름다운 폭포)가 나왔다. 길 오른쪽으로 폭포가 올려다 보였지만 물이 줄어 볼폼은 없었다. 차라리 길 왼편 강쪽으로 "세계에서 제일 깊은 계곡"이라는 간판이 있었고 따라가 보니 계곡을 내려다보는 전망대가 있었다. 거기서 보는 깊게 패인 강줄기의 계곡이 더 멋있었다. 

 

Rupse Chhahara를 지나 Dana에서 차가 지나갈 때마다 온몸으로 음식을 가려야하는 먼지 투성이 길가 식당에서 달밧을 먹었다. 기후가 온화한 지역까지 내려온데다 주변에 푸성귀도 많이 키우고 있어 잔뜩 기대했는데 달밧에는 야채로 만든 떠꺼리 반찬이 빠져 있었다. 조금은 실망스러운 점심을 먹고 다시 먼지 날리는 무미건조한 길을 나섰다. 다행히 얼마가지 않아 강을 건너고 차와 먼지가 없는 마을길로 접어들었고 네팔리의 삶이 있는 아름다운 마을들을 지났다. 아이들이 한참 공놀이 중인 학교를 지나고 돌담에 붉은 꽃기린 꽃과 가시과 어울리는 아름다운 마을을 지났다.    

 

 

하루 여정을 마무리할 따토파니에 오후 3시반 즈음 도착했다. Old Kamala라는 롯지에 짐을 풀었다. 따토파니는 우리가 두발로 이어오던 여정을 멈추고 오랫동안 잊었던 차로 남은 여정을 이어갈 곳이었다. 트레킹 종료를 축하하는 백숙을 주문해놓고 간단한 세면도구를 챙기고 "따뜻한 물"을 의미하는 마을이름 그대로 따토파니를 향했다.  따토파니의 야외온천은 역시나 기대 이하였다.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구간에서 만났던 지누단다보다 접근성은 좋았으나 한적함이나 밀림속에 숨어있는 은밀함이 주는 신비함이 없었다개방적이고 번잡한 시골장터같은 개방성이 당혹스러울 정도였다비쩍마른 맨몸을 다중앞에 드러내야하는 곤혹스러움에 한참을 망설이다 옷을 벗었다

기대 이하의 수온에 물이끼와 오물이 둥둥 떠다니는 따토파니에 몸을 담구었다그래도 도시를 떠나온지 처음 잠겨보는 온수를 몸은 반긴다좀더 나아보이는 옆탕에는 거의 모든 사람이 집결해있어 차라리 호젖함을 선택해 덜 따뜻하고 지저분하지만 사람이 적은 탕을 선택했다네팔리 주민들도 상당히 많아보이고 트레킹 중에는 만나지 못했던 젊은 서양트레커도 10여명이 넘어보였다트레킹도중에 만났던 다 큰 서양아가씨가 팬티차림으로 아는 채를 하고 인사를 건넸다서양인들은 자신의 몸에대한 의식이 우리와는 참 다른 것 같았다. 저렇게 세상에 대해 당당하고 의연하게 자신의 몸을 드러낼 수 있는 태도가 참 부러웠다.

먼저 탕에 들어간 가이드 바수는 온천에 붙은 가게에서 맥주부터 찾았다. 주문해 둔 닭백숙에 반주라도 한잔할 생각이었는데 가이드 바수의 술주정이 걱정되었다. 목욕을 마치고 돌아온 롯지에는 수학여행 왔는지 학생들이 롯지의 1층을 채우고 있었다. 시간이 일러 따토파니의 골목을 돌다가 롯지의 별관같은 다이닝 룸에서 저녁을 멋었다. 주문해 둔 백숙이 나왔지만 그저그랬다. 조금 먹다보니 동닭울 덜 삶아 안쪽은 아직 다 익지도 않았다. 닭은 다시 물린뒤 한참 야심한 시간에야 본격적으로 저녁을 먹기 시작했다찬이 없는 백숙을 먹기가 곤혹스러워 네팔 김치인  아짜르를 요구했다. 무짠지같은 '물러아짜르'가 나와서 그나마 덜 느끼하게 솥을 비웠다딱 한잔이 아쉬웠지만 알콜릭인 바수가 신경쓰여 아예 술없는 백숙잔치가 되어버렸다고객이 고용한 가이드 눈치를 봐야하는 상황이 기가찼다.

 

식사중에 다음 일정을 협의해서 나브라즈가 제안한 바글룽 쪽으로 마음을 굳히자 바수가 반발했다. 바수는 어떤 이유에선지 고라파니로 일정을 고집했다. 초기 일정으로 한달전 다녀온 고라파니를 나는 다시 갈 이유가 없었다. 바수는 자신의 의견이 통하지않자 얹짢아하는 기색으로 자신은 포카라로 들어가지 않고 바로 카트만두에 돌아가겠다고 선언했다. 바수의 고집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다은날 아침 술이 깨고나면 달라질 것을 기대하고 논의를 접었다.

 

좁은 계곡으로 따토파니의 아침이 깨어나자 갈리스와르행 로컬버스를 타고 출발했다. 바수가 고집하던 고라파니를 가기위해서는 따토파니를 벗어나자마자 좌측으로 길을 돌려 안나푸르나 보전지역으로 진입해야 했지만 우리는 고라파니를 대신해 바글룽을 선택했고, 걷기를 대신해 버스를 선택했다. 근 20여일만에 차를 타니 절로 신이 났다. 네팔은 걸기 위해서 왔고 나는 걷기를 너무나 좋아한다고 싣컷 자랑해왔는데 막상 차를 타니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입이 절로 벌어지고 버스의 진동에 따라 어깨가 들썩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험준한 계곡을 지나고 도저히 차가 지나갈 수 없을 것 같은 험한 길을 요동치며 지날 때는 얼굴에 웃음이 가쉬고 등에 식은 땀이 났다. 늘 이 길을 다니는 사람은 무감각해져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도저히 평정심을 유지할 수 없었다. 계곡옆으로 차가 바짝붙으면 온 힘을 다해 손잡이를 잡고 두발을 있는 힘껏 버팅겼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얼마가 길을 내려왔는지 어느 순간 마음이 편해지고 버스에 흐르던 네팔 음악이 귀에 들려오기 시작했다. 목적지인 갈리수와르가 가까워졌다. 

 

 

 

원래 짰던 계획에는 없던 갈리수와르에 도착했다. 비교적 큰 도시에 큰 규모의 흰두사원이 있고 하루정도 쉬어가기에 좋은 도시로 느껴졌다. 전날 저녁부터 기분이 상해있던 바수는 버스지붕에서 배낭을 내리다 배낭에 얼굴을 맞았다. 선글라스가 부서졌고 다행히 얼굴에 다친데는 없었다.  포카라까지 같이 가지않고 바로 카트만두로 돌아가겠다던 바수를 포카라에 가서 새로 선글라스를 사주겠다며 달랬다. 버스정류장에서 주택가를 지나 깔리깐다키와 다울라기리쪽에서 내려오는 한 지류와 만나는 절묘한 지점에 자리잡은 호텔리버사이드에 여장을 풀었다.  

  

Galeshwor에 이르자 불교문화권은 끝나고 흰두문화권에 접어 들었다는 것을 실감했다. 타르초와 룽다가 사라지고 사원은 화려한 색감을 자랑했다. 네팔의 불교는 한국의 불교와는 사원의 분위기에서 큰 차이가 났다. 아마도 흰두교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그럴 것이다. 그리고 물어보면 힌두교와 불교는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고 흰두교도가 불교사팔을 참배하거나 그 반대의 경우에 대한 거부감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래도 불교지역과 힌두교 지역은 확실히 분위기가 달랐다.  기후나 지형때문인지도 모르지만 힌두교가 지배적인 지역의 사람들이 확실히 동적이고 낙천적인것 같았다. 갈리슈와르가 그랬다. 

 

 

두 강이 만나는 지역을 신성시하는 힌두의 전통에 따라 갈리슈와르도 꽤 중요한 힌두사찰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우리가 여장을 푼 롯지를 비롯해 갈리수와르 전체가 트래커보다는 순례자가 주로 찾는 곳이라는 인상이 들었다. 시가지를 둘러보고 힌두교 사찰인 Radha Krishna Mandir를 들렀다.  암반위에 지어진 사찰은 그 암반을 포함해 거대한 조각품같이 조형적이었다. 힌두교사찰에서는 우리도 힌두신자와 같이 시바신에게 참배를 하고, 헌금을 한뒤에 Tika라고 불리는 꽃을 이겨 만든듯한 붉은 반죽을 이마에 찍었다. Tika 는 행운을 가져 온다고 하니 남은 우리의 여정은 안전하고 즐거운 시간이 될 것이 틀림없었다. 

 

손님이라고 우리밖에 없는 식당에서 지금까지 산중에서 먹을 수 없었던 생선튀김을 비롯해 거한 저녁식사를 즐겼다.  내일이면 네팔 최고의 현대적 도시이자 휴양도시인 포카라에 들어갈 기대에 부풀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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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4일 Nawal을 출발하여 뭉지와 Braga를 거쳐 Manang에 도착해서 하루 여정을 마치고, 2월 5일 쏘롱라 패스에 앞서 고산에 적응하고 체력을 비축하기 위해 마낭에서 하루를 더 쉬었다. 


갸루에서 나왈까지의 느낌 그대로 나왈에서 뭉지까지 길은 이어졌다. 산등성이는 메마른 돌투성이 흙이 드러나고 드문드문 식물이 자라고  있었다. 야크의 먹이가 되는 키작은 초목이 자라는 목초지는 될지언정 밭을 갈고 곡식을 심기에는 땅은 너무 경사지고 거칠었다.  멀리 마르샹디 계곡으로 홈대 비행장이 내려다 보이는 길을 따라 걷다가, 고개를 들어 마르샹디 계곡을 다라 서북쪽을 향하면 멀리 강가푸르나와 안나푸르나 3봉이 눈에 들어왔다. 이 아름다운 길의 기억을 기록에 남기기에는 나의 글은 너무나 짧고 사진으로 다 담기에는 또 놓치는 것이 너무 많은 하루였다.   




나왈을 출발해 2시간여를 걸어설까? 우리는 Low Pisang에서 Hongde를 거쳐 오는 길과 만나는 나왈에 도착했다. 나왈은 험준한 아난푸르나 산등성이에서는 보기 드물게 너른 초지로 이루어진 마을이었다. 역시 야크의 교잡종으로 보이는 소가 한가롭게 마른 풀을 뒤지고 있었고, 말은 초지 사이를 흐르는 개울에서 물을 마시고 있었다. 말이 물을 마시는 사이 마부도 쉬기 위해 말을 내렸고, 우리도 배낭을 벗고 쉬어가기로 마음 먹었다. 뭉지는 말도 마부도 트레커도 짐을 벗고 쉬어가기 좋은 동네였다. 너른 초지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는 소들을 바라다 보면서 우리 역시 인생의 짐을 내려놓고 시벅쥬스를 한잔 가득 마시며 한가로이 해바라기를 했다.


   


나왈에서 마르샹디 강을 만나 30여분을 더 걸으니 마낭 직전 마을인 Braga에 도착했다. 강쪽 길가에는 롯지촌이 형성되어 있었고 오른쪽 산자락아래는 사찰과 함께 민가들이 옹기종기 모여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동네 앞에 너른 초지 중간에는 불상이 세워져 있었고 주변에는 몇개의 벤치도 놓여져 있었다. 동네의 광장같은 역할을 하는 공유지 같았다. 우리가 마을에 들어설 무렵 수업을 마친 한무리의 꼬마들이 우리 앞을 지나갔다. 아이들을 보니 장난기가 발동했다. 우리에게  남아있는 2개의 축구공 중에 한개를 주고 싶었다. 아이들에게 축구를 하자며 불러 세워 잠시 잠깐이나마 같이 공을 찼다. 좀 더 놀고 싶었지만 브라가도 3,500m 고도의 고산 마을이다보니 금방 숨이 찼다.  




브라가를 지나 마르샹디강을 따라 30분도 걷지 않아 마낭이 올려다보이는 지점까지 도착했다. 마낭 도착전 마지막 휴식을 위해 차우타라(chautara)에서 배낭을 벗고 숨을 돌렸다. 본격적인 고산 트레킹을 시작하는 마을 마낭에서 보낼 이틀의 휴식에 가슴설레이며 마을을 들어선뒤 Tilicho Hotel을 찾아 짐을 풀었다.  모처럼 밀린 빨래를 하고, 마을을 돌아보고, 생필품을 사고 그러고도 시간이 남아 가이드 바수의 부추킴에 넘어가 뚱바를 파는 가게를 찾아 자리를 잡고 일행을 불렀다. 맛있는 애플파이로 기억될 Tilicho Hotel에서의 첫날이 저물었다.  




고도적응일로 꼭 하루 더 쉬어갈 것을 강권하는 안내서들에 따라 우리도 마낭에서 걸음을 멈췄다. 사실 마낭에서의 하루는 단지 쉬기 만을 위한 날은 아니다. 2박 3일을 지내도 다 둘러보지 못한 숱한 명소와 볼거리가 널려 있기 때문이다.  강가푸르나 호수와 빙하,  Milerepa's Cave와  Ice Lake 만해도 하루에 다 가 볼 수 없을 정도인데 나는 틸리초로 가는 길목에 있는 강사르 마을을 가보고 싶었다. 하지만 계획은 틀어지고 명소들은 다 건너 뛰고 가까이 마을 산책으로 하루를 보내기로했다.




게으른 아침을 보낸뒤 우리는 늦게 롯지를 나와 전날 스쳐 지나왔던 Braga로 향했다. 목적지 없이 보내는 하루를 브라가 곰파를 찾는 것으로 시작했다. 가파른 계단을 통해 올라간 곰파는 500년 이상된 사원이라고 했고 나름 세월의 멋을 간직하고 있었지만 사람의 손길을 받지 못하고 낡아가는 느낌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계절적인 이유로 일시적으로 비워져 있는 건지는 알수 없었지만 사람이 살지 않고 마을에 의해 관리되는 곰파치고는 너무나 방치된 느김이었다. 지금까지 들렀던 티벳불교 사원 거의 대부분이 중건중이거나 잘 관리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브라가 곰파는 그렇지 못했다.




브라가 곰파에서 내려와 마르샹디를 건너 강가푸르나와 마르샹디가 만나 형성된 널다란 초원을 걸었다. 늘 바람처럼 가벼워지고 자유롭고 싶다던 소망이 그 순간만은 이루어진것 같았다. 우리는 초원 여기저기에 흩어져 풀을 뜯는 말들 사이로 풀잎처럼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정처없이 걷고 또 걸었다. 일년 365일을 살면서 단 하루라도 가야할 곳도 없고, 기다리는 사람도 없고, 시간을 느낄 필요도 없는 진공같은 평화를 내 자신에게 선물하고 싶었는데 그 작은 소망이 마낭에서 마침내 이루어지고 있었다.



마르샹디는 강물은 많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맨발로 건널만치 적은 수량도 아니었다. 한참을 강을 거슬러 마낭 시가지가 끝나는 위치까지 가서야 다리를 만났다. 가파른 강둑을 올라 마을을 들어서니 마땅히 할일이 없이 마을을 배회하고 있던 바수와 나브라즈와 마주쳤다. 마지막 남은 축구공과 학용품을 전해줄만한 아이들을 만나지 못한 바수와 나브라즈는 우리를 마낭 곰파로 안내하며 마낭곰파에 딸린 마을 공동체 조직에서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 같을 것을 운영하고 있고 그곳에 기증하면 좋겠다는 제안 했다. 



마낭 곰파에 들어서니 7~8명의 사람들이 마주앉아 차를 돌리고 예불을 준비중이었다. 학용품이나 전달하고 부처님 앞에 공양이나 하고 나올 참이었다가 갑자기 곰파의 안내를 받아 경내에 착석하고 차까지 대접받았는데 곧바로 예정에 없던 예불에 참여까지 하게 되었다. 혹시 방문객을 위한 공연 개념의 예불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겠냐는 생각이 더 크게 들었다. 전통악기를 연주하며 불경을 외는 네팔리의 목소리에 우리 모두는 푹 빠져 들었다. 고단한 삶이 그대로 묻어나는 투박한 형식의 예불이 억지로 짜내는 화려한 성전의 경건함보다 더 절실하게 다가왔다. 제도화가 덜된 날것 그대로의 종교를 만난듯한 감동은 오래도록 남을 것 같았다. 이렇게 예불마저 참여하고 나니 쏘롱라를 향한 우리의 발걸음에 부처님의 가호가 함께할 것이라는 믿음이 나를 든든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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