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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을 기다려온 네팔 여정 두달이 끝났다. 출국에 앞서 마지막 하루를 라트나 버스파크, 파탄, 그리고 카트만두 최고의 번화가 더바마그를 걷고 2월 26일 출국 당일 아침 일찍 다시 한번 더 스와얌부나트를 다녀왔다. 오후 늦게 출발한 비행기는 쿤밍과 상하이를 거쳐 2월 27일 저녁 늦게 인천에 도착했다.  

 

 

2월 25일 출국에 앞서 남은 마지막 하루를 어떻게 시작할까 고민하며 눈을 떴다. 즉흥적으로 카트만두 북쪽의 Shivpuri Nagarjun National Park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마지막 하루는 숲길을 걷고 싶었다. 무작정 라트나 버스파크로 향했다. 가는 길에 대학가를 지났고 각종 정치구호가 담벼락에 그려져있고 적기가 휘날리는 대학가는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네팔청년들의 역동성과 기개가 느껴졌다. 라트나 버스파티에 도착했지만 나가르준행 버스를 찾을 수 없었다.  몇번을 묻고 헤메다 꼭 나가르준을 가야할 이유도 없어 발을 돌려 택시를 잡아 타고 파탄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파탄 드바르광장으로 진입하지 않고 주로 외곽을 걸었다.  발길이 닿는데로 파탄의 골목길을 걷고 또 걸었다. 예식이 진행중인 힌두사원을 들러 향과 연기에 취해 넋을 놓고 앉아있다가 다시 주택가 골목길로 걸음을 옮겨 네팔리의 삶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몰려가는 아이들 틈에서 나는 등교하는 학생이 되었다가, 일없이 길가에 앉아 해바라기를 하는 여인들을 보면 나도 심심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진 한 사람의 방랑자가 되었다. 일터를 오고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도 평범한 네팔리 노동자가 되었다. 우리는 아무 생각없이 골목을 어슬렁거리는 사이 네팔리의 삶을 닮아갔다. 늘 목적의식을 가지고 빠릿빠릿 바쁘게 살아야 잘 사는 인생이라는 강박에 쫒겨온 인생 50년을 되돌아 보고 어떤 삶이 더 좋은 삶인지 더 가치있는 삶인지 곱씹었다. 앞으로 살아가면서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아무런 계획도 일도 만남도 없는 그런 공백을 내 일상에 주기적으로 배치하는 삶을 살아야지 다짐했다.

 

버스를 타고 라트나로 돌아와서 더바마그 거리로 향했다. 익숙한 브랜드의 가게들이 즐비한 카트만두의 가장 현대적 거리의 풍경은 한국의 도시와 다르지 않았다. 아내는 옷가게로 들어가고 나는 베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달콤한 아이스크림에 녹아들었다. 쇼핑백을 들고 나온 아내와 한국 도시의 어느 쇼핑가를 걷는듯 우리는 여행객스러워졌고 조금은 들뜬 걸음으로 나라야니티 왕궁박물관을 지나고 꿈의 정원을 스쳐 타멜거리를 찾았다. 네팔을 떠나기전 사라진 식욕을 찾고 기운을 되찾아 줄 마지막 성찬을 찾아 헤멘끝에 한 일식집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날 저녁 식사는 네팔 여정 최악의 음식으로 기억에 남았다.  허탈한 마음으로 숙소로 돌아가는 타멜거리에서 아쉬운 카트만두의 마지막 밤을 맞았다. 

  

 

남루한 여정이 저문다. 내 일생에서 가장 화려한 일탈이었을 두달의 네팔 체류가 마지막 밤을 남기고 있다. 가슴 뜨겁고 벅찬 순간들을 기억하지만 난 벌써 봄볕아래 새로운 여정의 단꿈에 빠져든다. 인생이 아름다운 것은 인간은 모두가 여행자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머물고 가지고 집착하지 않고 그저 인생은 잠시 스쳐가는 여정임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나는 혹독한 히말라야의 가난 속에서도 뭍 생명에게 손을 내밀고,  지진으로 무너진 벽돌더미위에서도 활짝 웃을 수 있는 네팔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이번 여정은 어떻게 정리되어야하나 잠시 발을 멈추지만 나의 여정은 내일 또다시 쿤밍으로 상하이로 인천으로 그리고 봉화로 이어질 것 임을 깨닫는다. 나는 여행 중에 히말라야를 들렀고 다시 여행이 한국으로 이어질 뿐이다. 주어진 시간을 정하는 것은 나의 몫이 아니지만 여행이 끝나는 그때까지 나는 나의 몸에 집중하고 내 몸과 마음이 가는데로 나를 맡기고 싶다.

 

2월 26일 드디어 네팔을 떠나야되는 날이 밝았다. 다행히 몸 상태는 조금 나아졌다. 아직 식욕도 없고 먹고난뒤 소화를 확신할 수 없어 배는 고프지만 아침을 건너뛰었다. 쿤밍가면 맛난 음식을 만날지 모르다는 기대로 대신했다. 익숙한 수어러꾸떼 골목을 나와 스와얌부나트로 향했다.  숙소 마야거르츄와 닿아있는 일종의 예능고등학교인 Star High School의 담벼락에도 인사를 전하고 그동안 거의 매일 지나치던 고깃간에 묶여있던 죽어간 염소들에게도 명복을 빌었다. 골목끝에 방치되어 있는 지난 지진으로 무너진 호텔 부지를 지키며 남아있는 한그루의 정원수에게도 안부를 남겼다. 

 

 

스와얌부나트로 가는 골목길을 걸으며 한발한발 기억을 되새기고 얼굴을 스치는 카트만두의 바람에게도 안부를 남겼다. 도착한 스와얌부나트는 이른 아침부터 참배객과 관광객의 발길이 붐비기 시작했고 사원앞 공터에는 각지각색의 야채를 진열한 노점상이 삶의 온기와 세상의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었다. 나는 탐욕스레 모든 것을 눈에 담았지만 곧 흐려지고 잊혀질 풍경임을 알기에 마음이 아렸다. 스와얌부나트의 진짜 주인인 원숭이들에게도 작별인사를 남겼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네팔리들이 즐겨찾는 스넥가게에서 점심을 해결했다. 배가 고파서라기보다는 공복을 채울 무언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허전한 기분을 네팔의 음식으로 달래고 숙소로 돌아가 두달을 지고 이고 다닌 짐을 챙겼다. 먹고 소비하고 준 그만치 새로운 것들로 채워진 배낭은 여전히 배가 불렀다. 택시로 도착한 트리뷰반공항은 나름 변해가고 있었다. 조금은 더 친절해졌고 대합실도 5년전에 비해 좋아져 있었다. 비행기는 예정시간 한시간을 넘겨 출발했다. 지난 두달 동안 나의 삶이 있었던 네팔의 산하가 구름속으로 사라졌다. 네팔의 산하가 그리고 맺었던 모든 인연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쿤밍에서 환승에 문제가 생겼다. 공항청사에서 어슬렁 거리다 체크인 시간을 넘겨버렸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헐레벌떡 달려갔더니 이미 마감한 게이트를 열고 우리를 입장 시켜줬다. 하지만 고마운 마음으로 올라 탄 비행기는 끝내 이륙하지 못했다. 거의 한시간을 비행기에 같혀 지체한 뒤에 기체고장이라며 대체기로 갈아탈 것을 요구했다. 결국 상해에서 인천가는 연결편의 출발시간을 넘겨버렸다. 그런데 웬걸! 상해에 도착해보니 우리를 싣고갈 인천행 비행기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게 아닌가! 역시 연착이나 결항이 잣다는 동방항공이지만 그만치 스케줄 조정이 유연한것 같았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승객들은 상해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안내 팻말을 든 항공사 직원을 따라 숨차게 뛰어가 인천행 비행기에 올랐고 예상시간보다 많이 늦긴했지만  무사히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카트만두에서 쿤밍으로, 쿤밍에서 상하이로, 상하이에서 인천으로 이어지는 30시간의 귀향길 끝에 두달동안 그리워하던 딸을 안았다.

  

 

이번 네팔 여정에서 나는 많은 네팔의 변화를 읽었다. 계곡에는 댐이 들어서고, 카트만두에는 수도를 설치하는 공사가 진행중이었다. 카트만두와 포카라에는 정전이 사라졌고 도시의 쓰레기는 눈에 띄이게 줄었다. 거리에는 손을 벌리던 거지 아이들도 만날 수 없었고 네팔리의 발걸음에는 자신감이 늘었다. 그리고 카트만두 낙후성의 상징이다시피한  바그마티강은 정화작업이 한창 진행중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번 여행을 통해 내 자신의 변화를 더 읽고 싶었다.  나이를 먹었고, 체력은 그만치 줄었음을 느꼈다. 그러나 마음 속에 평생을 키워온 '화'를 벗어던지고 자신과 세상에 보다 관대해지고, 이미 늦었기에 조바심도 버린 나를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나의 그런 모습은 쏘롱라에도 깔리간다키에서도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다음 여정의 계획을 가슴에 품는다. 그때는 지금의  딱 절반의 속도로, 꼭 네팔 어딘가에 있을 보고싶은 나를 찾아 걷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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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만에 돌아온 카트만두에서 일주일이라는 긴 휴식을 취하고 2월 26일 동방항공을 통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지나고 보니 카트만두에서 보낸 정확히 8일동안은 여행이라기보다는 비록 짧지만 '머물고 생활하기'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카트만두 도착후 마야거르츄는 우리의 숙소를 넘어 하나의 생활 거점이 되었다. 인근 가게에서 야채와 기타 식재료를 사서 조리를 해서 나누어 먹고, 심심해지면 수어러꾸떼 골목길을 통해 여행자의 거리인 타멜로 나와 하루종일 어슬렁 거렸다. 타멜은 여전했다. 비시즌이라서 덜 분빈다고는 했지만 전세계에서 몰려든 다양한 국적의 트레커들이 골목을 휩쓸고 다녔고 더 많은 네팔리들은 자신의 삶의 터전으로 몰려들어 늘 활기가 넘쳤다. 타멜의 끝에 붙어있는 대형 시장인 아산바자르는 온갖 물품과 이를 찾는 네팔리의 발길로 분주했다. 딱히 필요한 것도 없이 마냥 시장을 지나는 네팔리들에 묻혀 아산바자르를 지날 때는 나 역시 무슨 절실한 것을 찾아 시장을 헤메는듯 삶의 긴장감이 높아졌다. 

 

숙소룸의 전등이 어두워 책을 보기가 힘들어 19일은 보조랜턴을 사러 타멜의 몇몇 등산용품점을 들락거린뒤 마음에는 들지만 비싸서 망설여지는 앙징맞은 블랙 다이아몬드 LED등을 2800루피에 구입했다. 그리고 오고가는 길에 몇몇 골동품가게에 들러 작은 기념품 몇개를 구입했다. 일행 D는 싱잉벨이라는 울림소리가 신비로운 청동그릇을 여러 가게에서 여러개를 구입했다. 값도 값이지만 무게가 부담스러워 나는 싱잉벨대신에 주로 나무 목각을 구입했다. 토템인듯 귀신같은 토속적인 인형들은 인상적이지만 집에 가져가기엔 어울리지 않아 보여 주로 동물형상의 목각을 구입했다. 한 골동품 가게에서 작은 말모양의 청동상을 보고 마음에 들어 딸에게 선물해 줄까 망설였는데 결국 크기나 형태에 비해 비싼 5-6만원하는 청동상을 구입하지 못했다. 한참 국내에서 최순실이 자신의 딸에게 삼성이라는 거대 기업을 동원해 말을 뇌물로 받아 챙겨주는 알뜰한 모정이 뉴스로  흘러나오는 때에 나는 5-6만원하는 말 조각 청동상 하나 딸에게 사주기가 부담스러웠다. 

 

하루를 어떻게 보낸지 모르게 카트만두에도 밤이 왔다. 벌써 여러번 들렀고 이날도 같은 거리를 몇번을 왔다갔다했는지 모를 정도로 하루종일 타멜거리를 헤멘셈인데 그래도 복잡한 타멜의 골목을 다 파악할 수 없었다. 아산바자르와 왕궁 그리고 더바르광장 같은 대표적인 장소로 이동하는 동선 정도를 겨우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타멜의 대표적인 한식당인 '한국사랑'에서 부대찌게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한국사랑에는 짐작과는 달리 한국여행객보다 훨씬 많은 네팔리 손님이 진을 치고 있었다. 한국에서 일했던 노동자들이 추억의 한국음식을 찾았을 수도 있고, 아니면 한국을 동경하는  젊은 친구들이 몰려온건지도 몰랐다.

 

 

2월 20일의 아침은 일찍 맞았다. 식전에 숙소를 나와 스와얌부를 향해 걸었다. 막 깨어나기 시작한 주택가골목을 이른 출근을 하는 네팔리와 나란히 걸었다. M은 전날도 이른 아침에 스와얌부나트를 다녀왔는데 이날도 같이 동행했다. 숙소가 있는 수어러꾸데에서 스와얌부너트까지는  30~4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스와얌부나트는 원숭이가 많이 살아 Monkeys Temple이라고도 불리는 네팔의 가장 중요한 불교사원중의 하나로 유구한 역사와 전설이 이어져오고 있는 여행자들의 필수적인 방문처다. 불교사원이라고는 하지만 힌두신앙을 나타내는 다양한 장식과 시설이 공존하며 사원을 뒤덮은 향과 촛불, 끝없이 이어지는 신도들의 참례행렬, 그리고 카트만두 시내 전체가 내려다 보이는 환상적인 조망이 카트만두 방문객이면 꼭 찾아야 할 곳으로 여겨졌다. 우리 역시 다른 곳은 한번 방문으로 끝냈지만 스와얌부나트는 이날을 포함해 여러번 찾았다.

 

 

사원은 다행히 지난 2015년 지진의 피해가 크지 않았다. 무너진 부속건물을 비롯해 피해의 흔적은 아직 여기저기 늘려있었지만 스와얌부나트의 상징적 건물인 스튜파는 의젓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제3의 눈으로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리는 참배객들과 함께 똑같은 경건한 마음으로 세상의 평화와 모든 고통받는 존재의 평온을 빌며 덤으로 우리 자신의 삶이 좀더 알차고 아름다울 수 있기를 기도했다.  사원의 입구 오른편에는 신도들이 모여 전통 악기를 연주하며 예불을 드리고 있었다. 예불소리가 너무나 절실하게 마음에 녹아들어 우리는 걸음을 멈첬다.  한참을 예불을 들은뒤 발길을 돌려 스와얌부나트를 내려오는 우리의 발걸음은 올라갈 때와는 달라있었다. 

사원아래 식당가에서 네팔 전통 빵들로 아침을 해결했다. 참배온 네팔리 할머니들과 같은 빵들을 주문했는데 모양도 재미있고 값도 쌌지만 맛은 없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싱잉벨을 직접 만드는 가게에 들러 일행 D는 싱잉벨을 구입하고, 우리는 숙소 거의 다와서 이전에 박타푸르 왕만 먹었다는 요플레인 주주더히를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주주더히는 토기그릇에 담겨져 아침 일찍 몇몇 대리점같은 가게에만 배달이 되어오기 때문에 이른 아침 시간 외에는 살 수가 없었다.  다 먹고 남은 토기만 남다보니 주주더히를 담았던 토기가 마야거르츄 마당 한컷에 켜켜히 쌓여갔다.

안나푸르나 라운드를 같이 했던 가이드 바수가 숙소를 찾아왔다. 한번 이야기가 있었던 자신의 고향집에 우리를 초대하고 싶어했다. 카드만두 북쪽에 있는 나가르준 어딘가가 자신의 고향집이고 그곳에서 부모님이 물고기를 기르고 있는데 같이 농장도 체험하고 물고기도 잡아 먹고 놀자고 제안했다. 딱히 다른 일정이 없어 같이할까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다른 일행들이 반기질 않았고 특히 바수의 술버릇때문에 마음 편히 따라갈 수 없는 눈치라서 포기했다. 바수는 상당히 서운해 하는 것 같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대신에 수어러꾸떼 골목길 구멍가게에서 장을 보고 숙소에서 조리를 해서 끼니를 해결한뒤 밤이 되자 네팔 전통주인 뚱빠로 유명한 스몰스타를 찾아 한잔하는 것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2월 21일도 마찬가지로 정해진 일정이나 목적지가 없는 하루였다. 이날 오후에 출국한다며 네팔의 특산물인 야크치즈를 사러가는 분들과 함께 숙소를 나섰다. 숙소에서 10여분 걸어서 정부가 운영한다는 유제품 공장인  DDC Dairy Ltd.  로 향했다. 공장에 도착은 했지만 의사소통의 부족으로 공장 사무실로 들어가 치즈를 요구하자 담당이 외출중이라며 한참을 기다리게 했는데 마침내 담당은 돌아왔지만 치즈 판매는 공장내의 다른 매장에서 하고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우리는 제법 많은 양의 야크치즈를 사서 숙소로 돌아온 뒤 다시 일행과 함께 숙소를 나서 두바르 광장을 향했다. 타멜을 지나면서 헝겊으로 만든 작은 브로치같은 값싸고 실용적인 선물을 사고 딸을 위한 인형도 같이 구입했다. 그리고 타멜의 길고 복잡한 골목을 통해 두바르 광장에 도착했다. 두바르광장으로 진입하지 않고 멀리서 보아도 지진의 피해가 심각해 보였다. 지진으로 심각하게 무너지고 파손된 두바르광장이지만 입장료는 1000루피 그대로였다. 4명의 일행이 4만원 가량의 돈을 내고 들어가기에는 아까운 구석도 있고, 굳이 두바르 광장을 봐야할 이유도 없어 걸음을 돌렸다.

두바르광장을 비켜선 우리의 걸음은 정처없이 이어졌다. 타멜을 중심으로 한  관광객의 거리를 벗어나 네팔리들의 삶의 터전인 카트만두의 구석구석을 뒤지기 시작했다. 가는 곳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어머니의 아이들 부르는 소리가 있고, 단 한번도 끊어지지 않고 종교적 상징물이 늘려있고 한 블록을 벗어나기 전에 꼭 규모를 갖춘 힌두사원을 만났다.  보여주기위한 박제화된 공간이 아니라 날것 그대로의 네팔리의 삶을 더 가까이서 보고 느끼는 발길을 이어가다보니 어느새 우리는 스와얌부나트를 가기 위해 건너야했던 바그마티강의 지류인 비슈누마티강에 이르렀다. 강을 따라 발길을 북쪽으로 돌려 우리의 출발지를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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