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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군 농민단체 협의회 초대로 정태인 선생의 강연

[한미FTA가 나의 삶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가]를 듣고 나니 정신이 아찔하다.

농민의 한 사람으로 무역확대를 위해 한국 농업 시장을 내어주는
한미 FTA에 대해 당연히 반대해 왔지만 
한미 FTA에 대해 그 이상의 이해 없이 심정적으로 정서적으로 반대해 왔다. 

그런데 막상 MB가 한미 FTA를  3월 15일 발효한다고 선언한 시점에서 늦게나마
새로운사회를 여는 연구원(새사연) 정태인 선생을 모시고
그 실체적 진실을 알기위한 귀한 강연회를 가지게 되었다.  

지난 3월 9일 봉화군 농민회 회원의 한 사람으로 동지들과
비나리 자활농장 아주머니들을 모시고
강연회가 열리기로 되어 있는 봉화군 청소년 수련관 입구에 들어서니
먼저 도착한 동지들이 행사준비에 한창이다.
안내 전단을 돌리고 플랭카드를 설치하고
경상북도만 거부하고 있는 친환경 무상급식과
한미FTA 폐기를 촉구하는 서명을 받고 있었다.

동지들과 반가히 인사를 나누고 둘러보니
강연회가 열리는 오후 2시가 다가오는데
강연을 들어러 온 사람이 채 스무명이 되지 않았다.
걱정이 태산같았는데 정태인 선생이 도착하고 강연히 시작하고 나니
다행히 약 150여명의 청중이 강당을 메우고 있었다.


이날 정태인선생의 강연 내용 중에 새롭게 인식한 딱 두가지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한미FTA의 전선은 한국과 미국이 아니라  한미자본과 한미민중사이에 그어져 있다.
정부는 한미 FTA가 국익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고 국내 산업간 상반된 이해관계가 일부 있을 수 있으나 전체 국부의 증가를 가져올 것이라 주장해 왔다. 이는 애국주의에 호소하는 보수권력의 낡아빠진 술수긴 하지만 아직도 가장 효과적으로 국민의 의식을 마비시키는 선전술이다. 당장 나부터 정부의 술수에 넘어가 농업이 입는 손해를 타산업이 얻는 이익에서 떼내어 메꾸어만 준다면 한미 FTA를 반대하지 않겠다고 생각해 왔었다. 참으로 순진한 생각이다. 자본은 국경도 없고 국적도 없는 탐욕 그자체에 불과한데 아직도 우리는 '민족자본'같은 순진한 생각에 빠져있지 않은지 스스로 점검해 봐야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한미FTA가 미국인 한국인을 위한 것이 아니고 한국과 미국의 자본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할 것이다.    


2. 한미FTA의 목적은 무역확대가 아니라 복지(공공영역)의 시장화다.
미국시장이 한국 수출량의 8.5%에 불과한데, 한미 FTA로 무역이 - 이 역시 불투명하지만 - 자신들의 주장대로 일정정도 증가한다고해도 별 대수롭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미 자본이 한미FTA에 목을 메는 것은 시장확대에 한계에 도달해 더이상의 출구가 없는 지금 그동안 공공영역으로 분리되어 잠식하지 못하고 있던 철도, 우편, 의료 등의 역역을 침탈하여 사회적 보호장치를 해체함으로서 사회에 대한 자본의 총체적 지배를 획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미국식 법제, 문명을 벗어던진 벌거벗은 미국식 자본주의를 한국까지 이식하려할 것이고, 이는 곧 삼성같은 한국 자본의 이해와도 일치하는 기도이다.     

 

 

사실 마을에서 주민들을 만날 때 한미FTA에 대해 간혹 이야기를 나누게 되는 경우가 있었지만 항상  이구동성으로 하시는 말씀이  "내야 이렇게 살다 죽으면 그뿐인데, 우리 아들 직장에서 쫒갸 나오지 않는게 더 중요하다. 농사 망해도 공장이 잘 돌아가는데 도움된다면 한미 FTA에 찬성해야 안되겠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나라가 잘살게 된다는데 농민 이익만 이기적으로 주장하면 되겠나?"는 것이었다. 대부분 대중은 '국익주의적' 사고에 빠져있고 또 공공역역의 시장화에 대해서는 인식을 하고 있지 못한게 사실인 것 같다. 향후 정권교체와 한미FTA 폐기로 나가기 위해서는  한미FTA 의 실체에 대한 대중적 이해를 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다.

값진 강연을 접할 수 있게 해준 봉화군 농민회와 초대에 응해주신 정태인 선생님께 큰 절이라도 올리고 싶다. 참 힘들고 바쁘시겠지만 보다 많은 사람들이 정태인선생의 강연을 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정권을 교체하고 나서 공중파방송에서 정태인 선생을 다시 뵐수 있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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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밥상머리에서 '다단계에 빠진 대학생'  이야기가 나왔다. 한 언론사에 따르면 서울의 거여동, 마천동에 일대에 5,000명 이상의 대학생들이 다단계에 빠져 쪽방집단 합숙을 하고 있단다. 서울 전역으로 보면 약 1만명 정도의 대학생들이 다단계에 빠져있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서울시의  대학생 수를 약 100만명으로 상정한다면 학생 백명당 1명은 다단계에 빠져있는 셈이었다.

대학생 딸을 둔 부모의 입장에서 남의 일로만 느껴질 수 없기도 했지만, 다 떠나서 왜 우리 대학생들이 그렇게 다단계로 내몰리고 있을까 생각할수록 이해할 수 없었고 분통이 터졌다. 아내와 저녁 식사 시간 내내 왜 그럴까, 왜 대학생들이 다단계로 내몰리거나 스스로 몰려들까 묻고 또 물었다.

먼저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비대해진 물직적 욕망, 돈에 대한 집착이 다단계로 학생들의 발길을 이끄는 것으로 보인다. 학생들은 생활고든 소비벽이든 늘 돈이 궁하도록 생활패턴이 셋팅되어 있다. 이는 물론 대학생에 한정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또한 이는 학생 개개인의 생활습관이나 '정신상태'와 관련된 문제라기 보다는 물질지향적 사회시스템, 가치 체계 전반이 개인을 지배해서 생기는 현상으로 보인다. 여하튼 한국의 대학생들은 늘궁핍하다.

또한 한국사회의 대학생들은 심화되어가는 한국의 정글 자본주의, 극소수 재벌의 독식으로 치닫는 카지노 자본주의 속에서 아무런 개인적 대응력을 갖추지 못한채 절망하고 있다. 여기서 카지노 자본주의란 자본주의의 한 종류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한 속성을 말하는 것이다. 소위 '돈내고 돈먹는' 사회에서 그들의 미래는 사회적, 정책적 수단을 통해서 최소한 수준조차도 전혀 보장받고 있지 못하다. 대학생들 대부분은 졸업과 동시에 실업의 늪에 빠지거나 기대에 못미치는 불안정하고 자존감을 주지 못하는 일자리에 삶의 기탁해야할 형편이다. 그래서 그들은 늘 불안하다.

그리고 더욱 중요하게는 우리 사회의 성숙한 '개인 주체'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가족이나 지역 공동체가 무너진뒤 성숙한 개인주체성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개인들이 정체성을 찾는 과정에서 집단이라는 권위에 의존해 매몰되는 현상의 하나가 한국사회의 폭발적인 종교산업의 번창을 가져왔듯, 같은 이유에서 다단계의 폭발적 번창을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사실 대부분의 종교는 다단계 속성을 가지고, 모든 다단계 역시 일종의 종교적 성격을 가지는 것으로 보인다. 집단적 의존이라는 측면에서 그렇다. 사실 학생들이 대학생이 되기까지 언제 한번 입시로 부터 자유롭게 정체성 확립을 위한 정신적 모색의 기회를 가져보기나 했을까. 그래서 그들은 늘 외롭고 그래서 소속감을 원하는지 모르겠다.

결국 한국의 대학생들은 궁핍한 주머니, 미래에 대한 불안, 그리고 외로움 이라는 세가지 이유에서 다단계에 빠져 있는 것 같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뉴스를 검색했다. 기사를 읽다가 발견한 것이지만 부정적 내용의 기사에는 꼭 '다단계' 앞에 '불법' 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런 기사는 불법 다단계와 합법다단계가 구별되어야 하고 합법 다단계는 당연히 보호 받아야할 것으로 상정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한참을 검색해 봤지만 과문한 탓으로 불법다단계와 합법다단계을 나누는 본질적인 차이는 무엇인지 확인하지 못했다. 자본금의 규모, 합숙의 강요 유무, 반품의 가능 유무 등등 지엽적이고 기술적인 차이를 나열한 자료들을 볼 수 있었지만 다단계의 가치 창출(?) 시스템의 본질적 차이로 불법과 비불법을 나누고 있는 내용을 확인하지 못했다. 고용창출 등 다단계의 순기능을 주장하는 기사도 보이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공감할 수가 없었다.

이런저런 자료를 찾아보니 한국사회에서 약 360만 명 정도가 다단계 종사자란다. 전국의 총 취업자수를
2300만명이라고 본다면 360만이라는 숫자의 크기가 어느정도인지 짐작이 간다.  360만 다단계 종사자가 취업자통계에 포함되었는지 알수 없고, 또한 소위 합법다단계 종사자 수만 집계 한건지도 모를 일이지만 어떤 경우든 충격이 줄어드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단계가 지배하는 한국 대학 사회의 모습은 카지노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현 한국사회의 한 단면이다. 가슴은 분통으로 터지지만 해결을 위한 처방은 단순하다. 지금보다 학비는 훨씬 싸져야 한다. 반값등록금은 그래서 나온 주장이다. 생존경쟁은 완화되어야하고, 이는 복지의 강화만이 유일한 방책이다. 사회적 안정망과 재교육 시스템이 갖춰지고, 사회적 가치가 공정하게 분배된다면 '대학가 다단계 기승' 같은 문제는 그야말로 봄눈녹듯 사라질 것이다. 물론 자살공화국의 오명도 더불어 사라지고 말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숙제를 우리손으로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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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든 보수든 고노무현 대통령을 철저히 무시하고 저주했고,
그가 죽어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된 지금까지 그를 격하하고 능욕하는데
침을 튀기는 자들이 있다. 
사실 조중동이나 그 추종자는 말할 것도 없지만
여전히 진보세력 중 일부는 한미FTA와 이라크파병, 대연정제안 등의 사례를 들며
삼성과 노무현의 유착, 정치적 무이념, 나아가 진보를 가장한 보수의 간첩 운운 하며
그를 능욕하기에 망설임이 없다.
충분히 근거있는 입장들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겠지만
세상에는 참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하니깐
그르거니 하고 일단 이들은 도외시 하자.
이들에 대한 판단은 또 다른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참 많은 사람들이 고 노무현대통령을
진정으로 좋아한다는 사실이다.
그 사실에 기대어서나마 나는 이 암담한 현실에서
새로운 사회, '사람사는 세상'을 만들어 가는 과제가
현재진행형이라는 역사적 징조를 보고싶기 때문이다.
[사람사는 세상]은 보편적 인권이 존중되고,
최소한의 인간적 자존을 지킬 수 있게 하는 복지제도가 완비된
상식적이고, 기본적인 정의가 통하는 그런 세상이다.
고 노무현대통령에 대한 대중의 사랑은
인간 개개인의 삶이 보호되고 존중되며,
보다 덜 경쟁적인 사회적 풍토에서 공부하고 일하고,
진실과 정의가, 그리고 옳은 사람이 존중받는
[사람사는 세상]을 예견케하는 사회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섰던 정치적 포지션을 문제삼으며
진보의 적으로 간주하기도 하고,
바로 그 이유로 그를 위대한 정치적 지도자로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또다른 많은 사람들은 그의 재임기간동아 실행한 치적때문이 아니라 
그의 사람됨의 매력에 끌려 그를 사랑하고 존경한다.
궁극적으로 정치인으로 살았던 한 인간에 대한 판단은
그의 정치적 실천과 사람됨을 통일적으로 바라다 보는게 옳다고 보지만
사실 유독 노무현대통령에 대해서만은 정서적 판단이 앞선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싶지 않다.
단지 그의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깊이에서 치미는 울컥함이 있다.
그것은 그가 비겁한 정치검찰의 공작의 희생양이되어서가 아니라
그의 재임기간 내내, 아니 그가 대통령에 출마하고 당선되던 그 순간에 조차
나는,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그를 통해, 
굴종의 삶을 강요했던 부정의한 역사에 대한 한국민중의 승리의 감격을 나누었고
그리고 끈질긴 지배세력의 비열함과 파렴치함에 치를 떨고 맞서야했기 때문이다. 
권모술수와 음모가 항상 승리하는 세상,
돈과 권력이 정의를 짓누르고, 거짓과 위선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인간 노무현의 반역의 삶은 그 모든 것들에 대한 궁극적 승리를 바라는
민중의 염원을 현실에 구현했기 때문이고
그 지난한 도정에 같이 서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철저한 독선과 비열한 음모, 부정의와 거짓이 판치는
MB정권의 치하에서 3번째 5월을 맞았다.  
5월은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노무현 대통령을 
자기 삶의 모범으로 받아들이고, 그의 가르침을 따르고,
그의 다하지 못한 정치적 역정을 계속하기로 다짐하고 실천하는 달이다.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면서도 미워할 수 없는 진솔함,
특정 정책적 결정에 대해 철저히 반대하면서조차
그 진정성에 끌려 납득할 수밖에 없었던 대통령 노무현이
뼈에 사무치게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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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진보를 생각한다]의 필자 김창호는 노무현 대통령의 지근거리에서 그의 정치 철학을 같이 하고자 했다. 그는 참여정부의 일원으로 국정홍보처장을 지낸 사람이다. 필자는 참여정부의 성공과 좌절, 성과와 한계에 대해 두루 책임이 있는 사람으로서 우리사회의 근본 프레임을 바꾸는 진보와 민주주의를 위한 교과서를 꼭 쓰고 싶다는 꿈을 종결짓지 못하고 떠난 노무현 대통령의 유지를 잇길 희망했다. 그리고 , 이 책 [ 다시 진보를 생각한다]를 저술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퇴임후 자신의 삶을 스스로 내려놓기 직전까지 "진보의 시대를 대비한 미래 담론을 준비하여 선투자 후복지, 성장 중심의 50년간 이어 온 보수주의의 틀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싶다는 희망으로 진보의 미래’를 집필하는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그는 대통령 후보시절 스스로 이야기했듯 진리를 내세워서 권력에 저항했던 한 사람으로 끝내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미완에 그친 그의 작업은 [진보의 미래]로 출간되었지만,  필자 김창호는 그 작업의 연장선에 이 책 [다시 진보를 생각한다]를 놓기를 원한다.
 
이 책에서 김창호는 보수의 사회에서 진보정치를 실현하고자 고군분투했지만 끝내 '정통 진보'로 부터도 버림받은 참여정부의 핵심인사의 한사람으로서 현실 정치의 파란만장한 경험을 토대로 다시 진보란 무엇인지, 어떻게 지속가능한 진보를 확보할 수 있을지 고뇌한다.
먼저 그는 변화하는 한국사회에서 진보정치는 어떻게 지속 가능한가를 묻는다.

'정통진보' 세력은 자본지배에 대한 직접적이고 근본적인 극복 대안을 추구하는가가 '진보정치'를 판가름하는 기준이라고 보고, 참여정부가 자본에 대해, 삼성에 대해 저항하지 못하고 굴복했다고 비난한다. 이제 대해 필자는 보수의 시대에 현실적 진보세력이 할 수 있는 자본 지배에 대한 저항은 직접적 반자본 투쟁이 아니라 자본지배의 실체를 가리는 언론특권과 지역주의의 청산이 현실적 실천의 방안이었다고 주장한다. 이를 통해 진보정치의 가능성을 확충하고, 진보 어젠다를 보편하고 그 지평을 넓혀나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물론 그것이 필자가 제시하는 진보정치의 다는 아니다. 그는 정치체제의 민주화에서 사회경제체제, 다시 생활세계로 이어지는 민주화 과정을 통해 확보된 민주적 가치와 자원을 재구조화하여 풍부한 정치적 자원으로 활용하지 않으면 진보정치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할 수 없다고 본다. 즉, 다양화한 균열쟁점들인 문화, 예술, 환경, 젠더 등  생활세계에서 진보의 지평을 넓혀야 한다는 것이다. 낯설지 않은 담론이다. 하지만 자신이 당선되거나 집권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소주파지만 개혁적 보수, 혹은 중도좌파의 낙선과 실권에 영향을 주기에는 충분한  '정통진보'의 근본주의는 현실 정치 지형에서 결과적으로 극우 보수, 반공 보수세력의 집권에 기여하며 중도좌파와 동반 몰락의 길을 걸었다. 이 지점에서 필자는 끝없는 '정통 진보'에 대한 애착과 함께 깊은 아쉬움을 가지고 다시 묻는다. 현실정치속에서 실현가능하고, 지속가능한 진보정치는 어떻게 가능한가라고! 이 물음에는  진보정치의 지속 가능성과 이를 가능하게 하는 진보정치의 연대가능성에 대한 필자의 피끓는 갈구를 담겨 있다.

필자의 지속가능한 진보정치에 대한 모색은  대의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의 위기에 대한 진단, 그리고 한국의 제 사회세력 정치세력의 공공성의 상실에 대한 진단으로 나아간다. 그는 '연대의 틀을 만들지 못했다'는 점에서 의제설정자로서 참여정부의 통한의 실패를 자인하기도 하지만, 시민세력의 미성숙, 대의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의 위기, 권력화된 보수언론, 사회 제세력의 사익화, 그에따른 공공성의 위기라는 현실적인 사회적 토대에서 나름 진보정치를 실현하고자 노력했고,  최소한 진보정치의 가능한 토대를 넓혀나가고자 노력했다는 사실을 토로한다. 
 
진보정치 실현을 위한 참여정부의 노력이 좌절된 지점에는 한국 보수의 강고한 벽이 존재한다. 필자는 오늘날 한국의 보수가 합리성과 정당성의 결핍에도 불구하고 왜 아직까지 강력한 힘으로 존재할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그것은 바로  사회의 저변을 장악한 강고한 조직기반이라는 월등한 물질적 힘을 보수가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허물기 위한 처방은 의외로 단순하다. 지역정치의 부활, 다양한 층위의 깨어있는 시민의 공동체, 그리고 문화적 층위에서의 근본적인 변화다. 물론 그들 저변의 변화가 정치권력의 획득을 목표로하는 진보정치와 어떻게 유기적으로 결합할 것인가는 중요함을 강조한다.

마지막으로 필자의 애끓는 토로는 참여정부에 대한 '신자유주의'라는 주홍글씨로 이어진다. 그는 '신자유주의'가 우리사회에서 이미 악마의 주술이 되었다고 한다. 원래 '신자유주의'는 사회과학적 개념이었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의성과 추상성이 강화되어 문화적, 이데올리기적 함의를 갖는 도덕적 용어로 변질했다고 본다. 따라서 그는 '신자유주의 정부'라는 좌파의 비판에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사실 지난 정치상황을 되돌아 보면 신자유주의라는 한 마디로 친자본 보수 우익과, 중도좌파 참여정부의 구별을 무의미한 것으로 돌려 궁극적으로 보수 우익의 지배를 돕는 우를 범한 점은 부인하긴 어렵다. 필자는 민주, 참여정부 10년의 '신자유주의'는 선택된 것이 아니라 강요된 것으로 본다 그리고  자본지배를 근본적으로 대체한 대안이나 가능성이 없는 역사국면에서 시장의 진보성을 인정하고, 복지정책을 그사회적 처방으로 제시한다.    

사실 [다시진보를 생각한다]의 독자로서 이책이 던지는 문제제기에 세세한 부분까지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큰 문제의식에서 공감하고 공유해야햐할 지점이 많다고 본다. 특히 진보의 지평을 넓히기 위한 연대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리고 현실정치속에서 구현 가능한 진보적 의제를 생산하기 위한 다양한 연구와 집필이, 그리고 진보개혁세력내 꼬리표붙이기나 사적 증오에 기반한 비난에서 벗어나 생산적 토론과 지적 작업으로 이어지길 빈다. 

학자에서 기자로, 기자에서 참여정부의 국정홍보처장을 거쳐 다시 정치가로 변신을 도모하고 있는 김창호의 성공적인 정치역정이 자신이 제시한 한국 진보정치의 지속가능성을 보여주는 역정일 수 있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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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세대를 위한 민주주의 교과서라는 부제를 단 [진보의 미래]는 미완의 저술이다. 하지만  '미완'이란 수식어는 나태의 결과나 능력의 부재, 혹은 자연적 한계에 의한 것이 아니다. 이는 [진보의 미래]에 담고자 했던 바로 그 진보의 진전을 두려워하는 자들에 의해 강제된 수식어다세상에 어디 완결된 삶이 있고, 완결된 역사가 있을 수 있겠는가? 많은 독자는 이 책이 미완으로 끝난 것만을 아쉬워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미완을 강제한 무자비한 권력의 독기가 여전히 서슬퍼른 세상에서처음 가슴으로 받아들였던 진정한 대통령, 사랑하고 존경하는 지도자의 부재를 아쉬워하고 가슴 아파하는 것이다.  

필자 노무현의 손에서 미완으로 남은 책을 전해 받는 순간 나의 가슴은 뜨거워지고 숨을 가빠졌으며 코 끝에는 희미한 피 냄새와 짙은 국화꽃 향기가 느껴졌다. 인류의 긴 역사 속에서 어디 진보의 진전이 저절로 주어진 적이 있었던가. 진보는 투쟁의 산물이며, 소수지배에 대한 다수 인민의 승리의 전리품이었다. 이 진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어떻게 '진보의 미래'를 말하고 도모할 수 있겠는가? 지난 봄, 필자 노무현은 우리 곁은 떠나갔고 우리 손에는 그가 죽음으로 지키고자 했던 '진보의 미래'가 고스란히 과제로 남아있다. 따라서 이 책을 통해 필자의 고뇌의 궤적을 따라가는 여정은 필자가 제시하는 역사적 과제의 엄중함과 그 실천의 지난함을 마주하는 엄숙한 시간일 수밖에 없다.



필자는 불가능한 꿈을 가슴에 품은 이상주의자로, 그리고 그 꿈을 현실 정치판에 뛰어들어 실현하려 했던 철저한 리얼리스트로 살았다. 이 책은 그 이상주의자의 현실 속 투쟁의 발자취이자 고뇌의 옹근 결과물이다행간에서 읽는 피와 눈물의 흔적은 그와 같은 투쟁의 여정이 고스란히 책 속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필자 노무현이 이상주의자인 이유는 이 책을 집어 들고 몇 장 넘기지 않아 금방 드러난다. 성장주의, 개발만능주의, 물질주의가 뼛속까지 지배하는 한국사회에서 그는 '역사가 돈의 편이 아니라 사람의 편'이고 또한 '역사의 진운이 함께 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감히 세상을 '더불어 사는 복지 공동체'로 바꾸려는 '불가능한 꿈'을 가슴에 품었다. 그 이상이 필자의 삶을 정치적 실천으로 이끌었고, 정치가의 한 명으로 일국의 대통령이라는 직위에 까지 오르는 정치적 역정을 걷게 했다. 그 역정은 개인의 영달이 아니라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와 궤를 같이 했다. 그의 입신은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과 같이 했고, 그의 좌절은 한국 민주주의의 좌절에 다름 아니었다그것은 그가 정치적 실천의 역정에서 '불가능한 꿈'을 구체적 현실 속에 구현하기 위해 철저한 '리얼리스트'로 고뇌하고 분투한 결과이다그의 두뇌는 명석했고, 그의 가슴은 뜨거웠기에 그의 정치적 선택은 치밀하지만 차갑지 않고, 철저히 현실적이었지만 살가운 온기가 느껴졌다.


이 책은 그의 정치적 역정의 전과정의 발자취를 담고 있지만 특히 정치적 실천의 절정에 섰던 지난 5년간의 대통령직 수행의 과정에서 절감했을 우리 사회의 역사적 한계와 그 한계를 돌파하고자 했던 개혁 정치가의 좌절을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의 뒷받침 없이 보수시대에 진보정치를 펼쳤던 외로운 검투사의 좌절감이 행간에 묻어있음을 마주하지 않을 수 없다.

재임 5년의 과제를 연구와 저술을 통해 마저 하고자 했던 그의 의지마저 꺾인 자리에 남겨진 이 책이 담고 있는 고뇌의 깊이와 넓이는 우리 사회의 실종된 거대담론의 부활을 촉구한다. 필자가 정치의 장에서 수행하고자 했던 역할의 한계는 바로 국민의 사고를 지배하는 근본 프레임의 한계라는 엄연한 진실에 직면했다. 그래서 이 책은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근본 프레임에 대한 회의 없이, 국가 권력이 아직도 국민에 대한 지배수단의 성격을 가지고 국민의 행복한 삶을 증진하는데 기여하는 시민의 자발적 의사 결집체로 나아가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근본적 문제제기 없이 천박한 정치공학과 미시 정책적 차원의 담론에 매몰된 정치 현실을 질타한다.  

필자는 사람이 성장과 개발의 목적이 아니라 도구가 되는 경제만능주의의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국민의 생각을 바꿔야 하지만, 국민의 생각을 실제적으로 지배하는 것은 거대 미디어이고, 그와 같은 미디어를 지배하는 것은 돈인 세상에서 그 지배권력의 무한 반복하는 연결 고리를 끊을 힘은 어디에서 올 수 있을까 고민한다. 인터넷이란 신병기가 있지만 완벽하지 못하고, 결국 다시 책이라는 지적 무기에 주목할 수밖에 없었던 필자의 선택은 어쩌면 무기력한 자의 불가피한 결정으로 오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필자가 주목한 것은 단기적 정치동학이 아니라 기나긴 역사적 안목에서 인간의 이성적, 문화적 발전의 토대 위에 인간의 사회적 존재조건을 변화시켜나가는 인간 지성의 힘이다그와 같은 인간지성의 힘을 통해 보다 인간의 사회적 존재조건을 개선시켜나가고자 했던 그의 고민의 지점은 명확했다.

90%의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이사회를 지배하고 사회적 산출물을 독점하는 10%밖에 되지 않는 지배계급의 이익에 표를 던지는가?

왜 진보세력은 중도 개혁세력의 성공을 통해 진보의 지평을 넓혀나가지 않고 극우 보수세력과 함께 중도개혁세력을 협공함으로써 중도개혁세력과 동반 몰락의 길을 선택하는가?

왜 사람들은 성장을 통해 복지가 달성된다는 트리클 다운 이론을 맹신하는가? 왜 사람들은 삼성이라는 재벌의 이익이 자신의 주머니 사정과 직접적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왜 사람들은 자신이 복지정책의 수혜 대상임에도 불구하고 복지의 증대가 우리 사회의 경제적 발전을 가로막고 사회의 활력을 떨어뜨린다고 주장을 받아들이는가?


학벌주의, 지역주의 , 그리고 재벌과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언론권력, 교육마피아와 검찰마피아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그 근본적 변혁을 가능케 하는 힘으로 어디에서 나오는가?

그는 극우보수세력의 집단 광기가 자신의 목을 죄어 오는 마지막 순간까지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로서의 인간 이성의 힘에 대한 신뢰를 기반으로 위의 과제를 천착했다. 그리고 정치적 성공이 아니라 정치 자체를 바꾸고자 했던 그는 그 미완의 과제를 남기고 부엉이 바위에서 몸을 던졌다.

책을 덮으며, 필자 노무현을 질시하고 저주하고 끝내 살해한 자들에 대한 피끓는 분노로 몸서리치고 ,다시 올 수 없는 길을 떠나며 무거운 역사적 짐을 살아남은 자에게 남기고 간 그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으로 가슴 저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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