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성벽력에 창문이 흔들리고, 장대비가 창을 때리는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는데 새벽에 눈을 뜨니 언제 그랬냐는듯 하늘은 시치미를 떼고 파란 얼굴로 우리를 맞이했다. 창 넘어 멀리 마차푸차레와 안나푸르나 남봉이 황금빛 아침 햇살을 받으며 신비한 자태를 드러냈다. 안나푸르나의 중심으로 떠나는 아침, 밤새 우리를 불안하게 했던 비가 씻긴듯이 지나가고 이렇게 청명한 하늘과 말숙한 산의 자태를 대하니 절로 힘이 났다.
하지만 상쾌한 아침은 호탤과의 마찰로 끝이 났다. 호텔 터치네팔에서 아침부터 온수 문제로 한바탕했다. 네팔에 들어온지 보름이 되었지만 아직까지 한번도 롯지나 레스토랑에서 클레임을 제기한 적이 없었다. 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왔기 때문에 어지간한 것은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네팔리의 친절에 마음 편안한 여정이었기 때문이기도했다. 그런데 아내는 이날만은 그냥 넘어가기가 힘들었는지 바로 호텔 카운트로 따지러 내려갔다. 전날 저녁 스텝이 룸차지 1000루피에 24시간 온수 샤워가 가능하다고 했던 것은 순전히 거짓말이었다. 다시 안나푸르나로 떠나기에 앞서 머리라도 감고 싶었던 아내는 결국 프론트에 내려가 항의를 하게 된 것이었다. 아내의 항의를 무시하다 재차 항의를 한 뒤에야, 스탭들이 가스통을 짊어지고 오르락 내리락 거린 끝에 다른 호실에 온수가 나오도록 설치했으니 샤워를 하라고 했다. 샤워는 포기하고 그냥 머리만 감고 식사시간을 기다렸다.
그런데 다시 아침 식사도 문제가 되었다. 전날 8시에 예약해 둔 음식을 시간이 다된 뒤에야 단체 손님이 많아서 조리가 불가능하다고 알려왔다. 짧은 영어에 따질 엄두도 나지 않고, 이렇게 좋은 아침에 더이상 투닥거리는 것도 싫어 그냥 간단한 음식으로 되는데로 달라고 했더니, 기름에 튀긴 빵과 커리 한종지를 내 놓았다. 주는 데로 먹고 룸에 올라와 짐을 싸고 카운트로 내려가 계산을 하니 마당에는 호텔에서 불러놓은 택시가 도착해 있었다.
택시비를 물으니 나야풀 가는 로컬버스 터미널까지 200루피라고 했다. 그러면서 택시기사는 아예 1시간 30분이 걸리는 나야풀까지 1,500루피에 바로 가자고 제안했다. 로컬버스는 일단 기다려야하고, 시간도 30분에서 1시간이 더 걸리고, 위험하고, 지저분하고, 좁아서 불편하단다. 다 맞는 말이었다. 파샹까지 나서서 그냥 택시로 가자고 종용했다. 터미날에서 배낭을 들고 내리고 ,버스를 기다렸다가 다시 버스 지붕에 배낭을 싣고 타고 내리고 하는 그 모든 것이 귀찮은 눈치였다. 3일간의 강행군에 지친 파샹을 위해 500루피 정도 돈을 더 쓰고 택시로 나야풀까지 가기로 마음먹었다. 단 조건을 달았다. "만약 당신이 천천히 안전하게 운전할 것을 약속한다면 이 택시로 나야풀까지 가고 그렇지 않다면 내리겠다." 당연히 기사분은 "OK!"를 외쳤고 네팔 온 뒤 처음으로 베스트 드라이버를 만났다.
위험한 추월이나 급발진, 급제동 없이 천천히 모는 택시를 타고 느긋하게 나야풀로 향했다. 멀리 안나푸르나 흰봉우리가 드러나는 위치에서는 "Take Photo!"를 외치며 택시를 길가에 세워주기까지 했다. 정말 처음으로 긴장감없이 차를 타고 포카라 에서 나야풀까지 산자락에 터를 잡고 살아가는 네팔리의 삶을 느껴 볼 수 있었다. 포카라 시내를 벗어나면서 S자 고갯길을 끝없이 오르고 그리고 끝없이 내려오니 나야풀이었다. 길은 분명히 'Highway"였는데 바닥은 페이고 일부는 아예 포장의 흔적조차 없는 구간이 허다했다. 아무데나 아무런 표지도 없이 공사를 벌여놓고 길을 막고 있는 곳도 몇군데 있었다. 뭐 그래도 네팔리들은 아무도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지 않았다, 여기는 네팔이니깐!!
나야풀에 도착하자마자 블랙티를 한잔씩 마시고 걷기 시작했다. 나야풀의 체크 포스크에 등록을 하고, 곧이어 침룽으로 향하면서 한번 더 체크포스트에서 체크를 한뒤 사울리바자르로 향했다. 안나푸르나로 들어가는 입구인 나야풀은 한국의 여느 국립공원 입구처럼 상가들이 즐비하고 사람의 발길이 붐볐다. 하지만 안나푸르나를 향해 10분 20분 올라갈수록 상점도 민가도 드물어지고, 침룽을 지나고 사우디바자르가 가까워지면서는 트레커들의 발길도 줄어들었다. 상행 트레커는 만나기가 어려웠고 간혹 하행 트레커를 싣은 택시가 우리를 스쳐 내려가기도 했지만 우리가 만만 하행 트레커 거의 대부분은 한국인이었다. 파샹이야기로는 안나푸르나 겨울은 트레커의 발길이 줄어 비수기라고 하지만 오히러 한국인 트레커가 집중적으로 몰려 "Korean Season"이라 부른다고 했다.
사울리바자르에서 점심으로 달밧을 먹고 한가로이 햇살을 받으며 한참을 쉬다가 다시 걷기를 시작했다. 길따라 조각밭에는 유채꽃이 이쁘고 나락을 베어낸 빈논 한켠에 자라고 있는 감자며 양배추며 마을 양파의 파릇한 잎이 싱그러웠다. 한국의 늦은 가을이나 이른 봄처럼 공기는 차지만 햇빛을 따사로운 길을 걸었다. 산길이 아니라 들길을 걷는 편안함이 좋았다. 안나푸르나에서 흘러내리는 모디강(Modi Khola) 을 거슬러 좀더 올라가니 산등성이를 따라 간드룩으로 가는 길과 모디강을 따라 시와이(Siwai)쪽으로 갈라지는 갈림길이 나왔는데 파샹을 지름길을 안다며 오른쪽 갈림길인 시와이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길이 복잡하지 않아 어떻게든 간드룩 가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보였는데, 어느 순간 파샹은 헤메기 시작했다. 만나는 네팔리마다 몇번을 길을 물은 파샹은 자신감이 없는 표정으로 간드룩을 포기하고 임레, 쿠미, 지누단다를 거쳐 촘롬으로 바로 갈 것을 제안했다. 간드룩과는 점점 거리가 벌어져 간드룩을 갈려면 가파른 돌계단길을 두 시간이상 계속 걸어야만 된다는 것이었다.
간드룩은 이번 여행을 떠나오기 전에 사전 조사를 통해 알게된 마을이었는데 가파른 계단 논 끝에 형성된 척박한 삶의 조건을 가진 마을이지만 아름답고 풍성한 그런 꿈의 마을같은 느낌으로 느껴져 꼭 가보고 싶었던 마을이었다. 파샹은 가능하면 덜 걷고 편안한 길을 선택하려 했지만 이 지점에서 처음으로 내가 고집을 피웠다. '나는 농사꾼이고 역시 산골에 산다. 그래서 네팔여행중에 간드룩이라는 마을에 하루 지내면서 내가 사는 마을과 꼭 비교해 보고 싶었다. 나에게 간드룩은 이상적인 꿈의 마을로 느껴진다. 그래서 좀 힘들더라도 간드룩을 가고싶다.' 고.
시와이로 가는 길은 'Old Road'라고 불렀는데, 새길이 나면서 지금은 트레커의 발길이 많이 준 논두렁길이었다. 목이 말랐지만 티하우스를 쉬 만날 수 없을 정도로 쇠락한 한가롭고 호젓한 길이었다. 특히나 모디강 계곡을 건너 나란히 형성된 란드룩을 마주보면서 걸을 수 있어 너무 좋았다. 파샹이야기로는 나야풀이 안나푸르나 여정의 출발지가 되기 전까지는 페디를 시작으로 란드룩을 거쳐 안나푸르나 산군속으로 트레커들이 들어갔다고 했다. 그런데 파샹은 내가 내려오는 길에 란드룩을 가자고 하니깐 란드룩은 숙소도 별로고 음식도 좋지 않다고 하면서 난색을 표했고, 또 오후에 유일하게 만난 한국인 트레커도 자신은 란드룩을 통해 올라갔는데 지금 내려오는 이 길이 더 좋다며 란드룩을 권하질 않았다. 그래도 나는 상행길에는 간드룩을 가고, 하행길은 꼭 란드룩으로 가야지하고 마음 먹었다.
마실 물이 떨어져 목이 마를 때 즈음, 시아와를 지나며 티하우스를 만났다. 애타게 찾던 티하우스를 만나 반가웠지만 우리를 더 애타게 기다렸을 한 소년을 만났다. 어디에 찔렸는지 부딪쳤는지 알수 없지만 한쪽 발이 퉁퉁 부은 소년이 티하우스 앞에서 우리와 마주치자 애처로운 얼굴로 다가와 자신의 발을 가리키며 말을 걸었다. "Have you medicine?" 말을 하지 않아도 상황이 이해되는 그런 국면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가진 것은 몇개의 대일벤드와 후시딘 그리고 아스피린이 거의 전부였다. 발은 곪는지 퉁퉁부어 있었지만 의학적 지식도 없고 약품도 없으니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그냥 후시딘을 발라주고 대일밴드 여분과 통증을 줄이는데 도움이 될지 몰라 아스피린을 주었지만 별로 도움이 될것 같지 않았다.
블랙티를 마시고 미네랄워터를 한병사서 다시 길을 나섰다. 이내 임레라는 곳을 지나게 되고 그곳에서부터 왼쪽 가파른 다락논 언덕을 치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논두렁사이로 게속 이어지는 가파른 길은 모두 돌담과 돌바닥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밤새 내리던 열대성 소나기가 쓸고 지나간 돌길은 말끔히 씻겨져 있었고 그 길을 먼지라고는 한톨도 없는 투명한 공기를 들이쉬며 걷다보니 가파른 길이 주는 고통도 잊을 정도로 좋았다. 돌담에 앉아 잠시 쉬다보며 옷길을 파고드는 찬바람에 몸을 움츠렸지만 걷고 있는 동안에는 땀이 이마에 맺힐 만치 따뜻한 하루가 계속되었다. 몇일뒤면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의 설원에서 시린 손을 비비며 따뜻한 날들을 그리워할까 믿어지지가 않았다.
파샹은 오늘 자신이 실수하는 바람에 간드룩 가는 길을 잘못들어 여정이 힘들고 늘어졌다면 미안해 했다. 그러면서 한 농가에 들어가 사탕수수대를 샀는지 3자루 들고 와 하나씩 주면서 목이 마를 때 정말 좋다며 어떻게 껍질을 까서 씹어서 단물을 빨아 먹을 수 있는지를 보여 주었다. Old Road로 선택하는 바람에 두어시간을 더 걷고, 가파른 오르막에 숨막혔지만 나는 트레커가 거의 없는 아름다운 돌담길, 언덕길을 한도 끝도 없이 걸을 수 있었서 좋아다며 파샹을 격려했다. 올라가도 올라가도 줄어들지 않던 길이 멀리 높은 산에 해거름이 드리울 때쯤 거의 간드룩에 도달한 것 같았다.
마지막 언덕길을 오르며 길가에 홀로 남겨진 병들고 야윈 조랑말 한마리와 마주쳤다. 파샹 이야기로는 그 조랑말은 평생을 힘든 짐을 나르다 이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홀로 남아 있는 것이라고 했다. 늙고 병든 조랑말이 더이상 짐을 나를 수 없을 만치 쇠약해지면 주인은 조랑말에 달려있던 모든 인공적인 장신구나 안장, 연장 등을 풀어주고 홀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한적한 풀밭에 풀어 놓는다고 했다. 그리고 몇일 뒤 조랑말이 숨을 거두면 불교식으로 장례를 치뤄주고 흰천으로 몸을 감아 매장을 해준다는 것이었다. 평생 인간을 도와 고생한 조랑말을 위해 장례나마 예를 갖쳐 정성껏 치뤄주는 네팔리들의 숭고한 삶의 자세가 너무나 아름답게 느껴졌다.
쓸슬이 죽음을 맞는 조랑말을 뒤로하고 언덕을 오르자 이내 간드룩 입구가 나타났다. 도착한 간드룩은 내가 꿈꾸던 그런 곳은 아니었지만 나름의 삶을 꿋꿋하게 영위하는 아름다움 사람들이 사는 그런 마을같았다. Mudi Hotel에 여정을 풀고, 하산중인 폴란드인 트레커와 짧은 영어로 대화를 나누고, 한국인 청년 2명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풀란드인 트레커는 한국을 잘 알고 있었고 한국인 친구도 있다고 하면서 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에서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까지 보통은 두어시간이면 여유있게 주파가 가능하지만 지금은 폭설로 어림이 없다고 했다. 자신은 장장 4시간 넘어 걸려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고 했다. 거기다가 어제 비가 고스란히 안나푸르나에는 눈으로 내렸을 걸 생각하니 혹시 라운드에 이어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마저 포기해야되는 상황이 될까 걱정스러웠다.
달빛 받은 안나푸르나, 마차푸차레, 히운출리가 창으로 가득 비치는 방에서 길고 추운 간드룩의 밤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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