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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눈을 떴다. 저만치 멀어진 안나푸르나를 뒤돌아보며 [Modi Khola Guest House]를 나섰다. 밤새 2층 룸의 계단을 지켜주던 깔리는 길 떠나는 우리를 따라나서 한참을 배웅했다. 이미 만남과 이별이 습관이 되었을 깔리는 그래도 작별이 서운했는가 보다. 마을을 벗어나자 마자 얼마 안있어 이 마을의 이름을 바꾼 '뉴 브릿지'를 건넜다. 이 일대에서 처음으로 쇠줄을 걸쳐 만든 흔들다리였기에 아예 마을 이름까지 [뉴 브릿지]가 되었을터인데, 너무 빨리 만든 덕분에 이제는 낡아 대표적인 '올드' 브릿지가 되어 있었다. 한쪽 죄줄이 늘어져 다리가 모로 기울고 발판은 군데 군데 구멍이 나 있었다. 그래도 이름만은 '뉴 브릿지'로 오래도록 남아있을 다리를 건너 란드룩으로 방향을 잡아 하염없이 걷고 또 걸었다.

 

 

안나푸르나 산중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 길은 편했고 날씨마저 좋아 눈이 시리도록 흰 안나푸르나를 하염없이 뒤돌아보고 또 뒤돌아 보며 우리의 끝나가는 여정을 아쉬워했다. 상행 때는 쉬 다가오지 않던 산들이 하행 길엔 순식간에 덧없이 멀어져 갔다. 이제 가면 언제오나! 적금이라도 들어 5년뒤를 계획해 보지만 세상은 넓고, 인생은 짧으니 아마 이번이 이승에서 안나푸르나와의 마지막 인연이 될지도 알수 없는 노릇! 앞은 보지도 않고 뒤를 돌아보고 다시 고개를 떨구어 내가 딛고 있는 땅을 보고,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걸어온 길과 멀어져 가는 안나푸르나를 바라다보기를 반복했다. 분명 다음 목적지는 포카라고, 카트만두고 그리고 인천으로 이어져야하는데 나는 정처없이 걷는 방랑자가 되었다. 어느 순간 나의 걸음을 이끄는 것은 계획이나 일정이 아니라 오직 앞에 놓인 길이 되어버렸다. 저 길이 나를 어디로 인도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나는 기가 죽었고 조심스러워졌다. 수백, 수천년 동안 비탈진 안나푸르나 산자락을 일구어 씨를 뿌리고 낱알을 거두어 가족의 삶을 지켜온 네팔리의 피와 땀, 사랑과 미움, 그리움과 그윽한 삶의 희열이 베일 돌길을 따라 꼭 한 발짝씩만 내디뎠다. 우리 삶이 그러하듯 걸음에 어떤 비약도 없었다, 걸어온 만치 새 걸음의 토대가 되고, 그 토대에서 내딛는만치 내 삶의 현실이 되었다.

 

 

안나푸르나 눈이 녹아 흐르기 시작한 차가운 물이 모여 Modi Khola를 이루고, 그 강이 흘러 깍아 세운비탈진 산자락에 따데기같은 다락 논을 일구어 생명을 보전하고 마을을 일구며 살아온 네팔리의 삶터를 가로질렀다. 촘롱강 건너 상행길에 걸었던 사울리바자르에서 간드룩으로 이어지던 길이 오늘 하행길과 나란히 이어졌다. 고개마루마다 놓여진 길손을 위한 쉼터를 '쪼따로'라 불렀다. 쪼따로에 앉아 강건너 바라다 본 아득한 길들이 실날같이 가날프고 아름다웠다. 내가 언제 저 길을 걸었고, 저 끝없는 돌계단을 한칸 두칸 올라 저 아찔한 고개마루에 터잡은 간드룩을 거쳐 갔던가! 벌써 상행길의 기억은 가물거리기 시작하고 이미 나의 마음속에 하나의 추억으로 남아버렸다.

 

 

뉴브릿지를 떠나 Tolka를 지나면서 점심을 먹었다. 메뉴는 전통 구릉족 빵이라는데 빵은 지금까지 먹었던 티벳 빵과 구별이 되지 않았는데 딸려나온 국이 꼭 한국 된장국이었다. 된장만 안들어갔지 말린 시레기를 잘게 썰어 넣고 콩가루를 넣어 뻑뻑하니 끓인 국이었다. 전통 구릉족 빵을 주문하자 파샹은 조금 걱정스런 표정으로 되물었는데 아마 그런 시레기국을 우리가 잘 먹어낼지 걱정이 되었던 것 같았다. 구릉족 시레국을 맛있게 잘 먹는 우리를 보고 파샹은 신기해 했다. 롯지를 나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길을 역시 초행인 파샹과 같이 더듬어 나갔다. 톨카를 지나 포타나가 다가오자 길이 여러갈래로 갈라지고 엉키면서 우리는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어느 길이 우리를 포타나로 이끌지 파샹도 몰랐고 물을 수 있는 주민들도 보이지 않았다. 할 수없이 란드룩에서 만난 홍콩인 커플 트레커를 기다렸다. 아니 홍콩인 커플을 안내하는 포터와 가이드를 기다렸다. 그들의 안내로 잃어버린 길을 되찾아 다시 걷다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포타나 체크 포인드가 나왔다. 팀스카드에 Check-Out 도장을 받고 나니 나는 이제 더이상 트레커가 아니게 되었다. 그 순간부터 나는 단지 네팔 투어리스트의 한명일뿐!

 

 

오늘 하루 한국인 트레커를 한명도 만나질 못했다. '코리언시즌'이라 불리는 만치 겨울 비수기 2달동안 전체 트레커의 절반 이상이 한국인이라는 ABC에서 하루종일 한국인을 만나지 않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했다. 나야풀, 사우디바자르, 간드룩, 촘롱구간이나 따다파니, 따또파니, 푼힐, 촘롱구간과는 달리 촘롱에서 지누단다를 거쳐 란드룩, 톨카, 팜푸스, 페디로 이어지는 구간은 거의 한국인이 없는 것 같았다. 나야풀로 바로 하행하는 것보다 하루 반나절을 더 길게 잡아야 하는 코스를 선택해 산중에서 지친 몸을 이끌고 지체하기에는 한국인의 성정에 어우리지 않는 코스인지도 모르겠다. 포타나의 체크체크포스틀 빠지며 근무자에게 물으니 오늘은 한명의 한국인도 체크포스트를 지나지 않았다고 했다.

 

 

포타나 체크포인트에서 길을 물어 '오스트렐리안 캠프'를 찾았다. 담푸스로 바로 빠기기에는 아직 트레킹에 미련이 남아있기도 했지만 떠나는 안나푸르나를 마지막으로 바라다 보기 위한 선택이었다. 중국인 커플의 가이드 말로는 '오스트렐리안 캠프'가 주 트레킹 코스에서 조금 떨어져 있긴 하지만 멋진 View Point면서 조용하게 지낼 수 있는 마을이라고 했다. 또 한가지, 톨카를 지날 때 만난 한 네팔리로부터 오스트레릴리안 캠프에 한국인이 살고 있고 롯지를 운영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이왕이면 그곳에서 지낼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오스트렐리안 캠프는 40여년전 오스트렐리안 무리가 캠프를 한데서 연유한 지명이라고 했다. 포타나에서 담푸스로 빠지기 전 오른쪽 언덕길을 15분정도 오르다 야트막하게 보이는 뒷산을 등지고 삼면이 트인 꽤 넓은 평지가 나오고 4~5개의 롯지가 자리잡고 있었다. 마을은 외졌고 아름답고 그리고 멋진 뷰포인트에 자리잡고 있었다. 파샹이 나서 지나는 네팔리에게 한국인이 운영하는 롯지를 물었다. 이 동네에는 20여년전에 들어와 살고 있는 한국인이 있긴 하지만 롯지를 운영하지는 않고 그냥 조용히 '마음 공부'를 하고 계신다고 했다. 마을 구경 삼아 동네 끝까지 갔다가 마지막 롯지면서 마을 이름을 가져온 '오스트렐리안 캠프'가 열렸던 자리에 터잡은 [오스트렐리안 캠프 게스트 하우스]에 방을 잡아 방해받지 않는 시야를 얻었다.

 

 

짐을 풀고 마당을 나서니 멀리 구름 위에 떠있는 사우스 안나푸르나, 히운출리, 마차푸차레 그리고 람중히말이 한눈에 눈에 들어왔다. 검은 대지위에 짙은 구름이 머물고, 구름이 엹어져 하얗게 번지는 사이로 안나푸르나의 자태가 들어났다. 흰구름과 흰 산이 만나니 구름이 산을 만들고 산이 구름으로 흩어졌다. 지상으로부터 하늘로 번져 올라가는 어둠이 희색으로 우뚝 솟은 안나푸르나를 더욱 두드러지게 해 오히러 현실감이 떨어졌다. 산이 산이 아니고 하늘에 떠 있는 '하늘 궁정'같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니 멀리 페와딸이 보이고 아득히 포카라 넘어 겹겹산들이 깊었다. 혹시 영산 다울라기리를 볼수 있을까 기대했지만 확인할 길이 없었고 다울라기리 방향으로 짙은 구름까지 끼어 다음을 기약했다.

 

 

 

 

다이님 룸에 들어서니 한명의 손님이 창가를 지키고 있었다. 네팔리와 똑같은 외모에 파샹이 말을 건넸지만 그는 알아듣지 못했고 알고 보니 일본인이라고 했다. 그는 들어서는 우리 일행에게 눈인사도 보내지 않고 담배를 피우고 차를 마시고, 식사를 마치고 또 담배를 피웠지만 시선은 늘 창밖으로 향해있었다. '나마스테. 곤니찌와.' 인사를 건네도 착한 얼굴로 눈인사만 주었을 뿐 그의 시선은 여전히 창밖으로 향했고 마음은 멀리 떠나있는 표정이었다. 그가 룸으로 돌아간뒤 사오지가 전하길 그는 일주일째 이 롯지에 머물고 있으면서 하루종인 창가에 앉아 먼산만 바라보고 있다고 했다. 그는 어떤 사연을 품고 안나푸르나의 산 언저리에 방을 얻어 일주일 내내 창밖만 바라다 보고 있는건지, 그리고 이 마을에 20년째 살고 있다는 한국인은 또 어떤 사연을 품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태산같은 짐을 지고 안나푸르나 돌계단을 아슬아슬하게 내 딛는 조랑말의 삶의 무게나, 5평 따데기 논을 일구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네팔리의 삶의 무게처럼 한사람 한 사람에게 주어진 몫의 삶은 다 그렇게 힘겹고 아픈 건지도 모르겠다. 고도는 낮아지는 만치 삶의 무게는 그만치 더 무겁게 다가왔다. 

 

 

비교적 싼 음식값에 풍성한 저녁을 주문했다.  롯지 주인 식구들이 먹기위해 조리했다는 메뉴에 없던 닭고기 조림 한접시에 락시까지 한잔 시켜놓고 안나푸르나에서 보내는 마지막 저녁을 보내며 나의 삶을, 그리고 세상을 살아가는 뭇 생명의 삶을 그 삶의 무게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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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일찍 눈을 뜨고 계속 침낭 속에서 미기적거렸다. 10여명이 다이님 룸에서 같이 잠을 자다보니 먼저 일어나 서성일 수가 없었다. 그래도 불편함보다 정겨움이 더 컸다. 뿔뿔히 자신의 방으로 흩어지지 않고 트레커랑 가이드와 포터랑, 롯지 식구들 까지 다이님룸에 소복히 모여서 같이 잠자리에 누우니 한 방에 4형제가 같이 지내던 어린 시절이 생각 났다. 창밖에 새벽 어스름이 비추기 시작하자 이불을 걷고 일어나 밖으로 나갈 준비를 했다. 일출 장면을 사진에 담겠다고 캠프에서 10여분 거리인 View Point까지 올라갔다.
6시 30분, 일출 장면을 찍기에는 이미 늦어버렸는지 날이 훤하다. 살을 애는 얼음 바람을 맞으며 한국인 트레커들과 같이 사진을 찍고, 청명한 하늘과 맞닿은 안나푸르나 연봉을 바라보는데 갑자기 산 정상이 황금빛으로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낮은 산은 어둠속에서 갑자기 산 전체가 드러나는데, 안나푸르나는 아침 어스름 속에 산 전체가 먼저 드러나고, 다시 햇살이 산 정상을 비추기 시작하면  황금빛으로 불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안나푸르나는 백설의 설산으로 돌아왔다. 절로 탄성을 지르며 열심히 카메라의 셔터를 눌렀다.


주위를 둘러보니 1980년에 태어나 2006년에 이곳에서 생을 마감한 한 남자의 위령탑이 깨어나는 안나푸르나를 바라다 보며 우뚝하니 서 있었다. 그는 이곳에 남아 아침 햇살 받으며 깨어나는 안나푸르나를 영원히 지켜볼 것이고, 우리는 오늘 하산하면 남은 삶동안 다시 이곳 안나푸르나를 오기는 힘들 것같았다. 산과 산을 지키는 낯선 한 영혼에게 아쉬운 작별인사를 남기고, 더 이상 추위를 참지 못해 도망치듯 숙소로 돌아왔다.


하산길도 파샹이 앞장을 서기로 했다. 다른 팀들보다 먼저 롯지를 나섰다. 어제 상행 중에는 눈과 구름속에 숨어 자태를 드러내지 않았던 마차푸차레 정상이 우리의 정면을 막아섰다. 아무것도 없는 설원의 끝에 위압적으로 서 있는 마차푸차레지만 어쩌면 그냥 계속 걸어 쉬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이 느껴졌다. ABC코스에 접어들면서, 아니 포카라에서 부터 너무 자주 봐서 이미 친숙해져 버린 탓일거다. 간드룩에서 다이님룸에서 만난 폴라드인 트레커는 다음 기회에 마차푸차레 정상을 등정해 보고싶다며 파샹에게 등정을 위한 허가 과정이나 최소 인원, 비용 등에 관해 물었던 적이 있었다. 이렇게 마주 보는 것 만으로도 좋지만 기회가 되고 여건이 된다면 나도 일생에 한번쯤은 저런 산에 오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나이는 쉰을 넘었고, 평생 높은 산은 한번도 타본 적이 없고, 시간도 비용도 내기 힘든 주제에 꿈도 야무지다며 스스로 핀잔을 주고는 걸음에 속력을 붙였다.



올라올 때, 그렇게 힘든 길이었는데 내려갈 때는 너무 쉽다. 근 3시간을 걸어 올라갔던 MBC에서 ABC가던 길은 1시간만에 주파했다. 어제는 눈속에 길을 서둘러야했지만 오늘은 쾌청한 날씨에 하산길이니 길을 서둘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파샹은 저만치 앞서가고 나도 모르게 발길이 빨라졌다. 오전 중에 데우랄리를 스쳐 지났고 점심은 히말랴야에서 먹게 되었다. 상행 때의 꼭 2배 속도로 걸은 셈이었다. 히말라야를 출발해 도반과 밤부까지는 거의 쉬지 않고 내려왔다. 밤부가 가까워지자 쾌청했던 하늘에 짙은 구름이 몰려오고 한방울 두방울 진눈깨비가 내리더니 롯지에 도착하니 진눈깨비는 비로 변해있었다. 우산도 비옷도 없는 상황에서 비를 맞아가면서까지 하산할 만한 이유는 없었다.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며 밀크커피를 마시며 30분 정도를 쉬다보니 호주 청년트레커 두 커플은 비닐을 뒤집어 쓰고 상행길에 나섰고, 오래전에 한번 왔던 길을 다시 찾아왔다는 일본인 트케커도 비를 맞으며 상행길에 올랐다.


밤부에서 묵기에는 시간도 좀 남았고, 오늘 숙소 예정지로 잡았던 시누아도 머지않아 우리도 마음을 고쳐 먹고 비를 맞으며 하행길에 나섰다. 다행히 길을 나서자 비는 더 가늘어졌고, 시누와가 가까워지면서 아예 그쳐 버렸다. 시누와에서는 만날 사람이 있었다. 이번 여행을 강력이 권유한 후배다. 그는 다른 일정으로 네팔에 들어왔는데 오늘 쯤 서로 교행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다. 한국을 떠나기 전 미리 전해 받은 일정표는 잃어버렸고, 여행 시작일과 기간 정도만 기억하는 상태에서 파샹에게 물으니 시누와나 촘롱 정도에서 만나지 않을까 예상을 했다. 그러데 그 예상은 정확히 적중했다. 시누와에 들어서니 첫집 헛간에서 바삐 움직이며 조리 중인 사람들이 보였고, 단체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길가 쓰레기 장에는 한국어로 '당면'이 선명하게 쓰인 포장지가 나뒹굴고 있었다. 이 계절에 단체 손님이라면 당연히 한국인일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물어보니 혜초여행사라고 했다. 네팔리 사이에서도 '혜초여행사'는 아주 유명한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혜초 여행사의 단체손님이라니 거의 확실해 보였다.


시누와에 도착한 것이 오후 5시였는데 의외로 Upper Sinuwa는 붐볐다. 2개의 롯지가 영업중이었지만 한 집은 혜초여행사 그룹이 독차지를 하고 있었고, 나머지 한 집으로 여러 무리가 모여들었다. ABC를 같이 걸은 호주청년들, 한국 청년커플, 한국 여선생님, 그리고 상행하는 낯선 한국 청년들이 7~8명이 뒤늦게 들이닥쳤고, 외국인 트레커도 두어명 더 합류했다. 작은 다이닝룸이 곽찼다. 거기다가 나의 손님까지 합류하니 스토브를 켜지 않아도 좋은 만치 사람의 온기가 다이님룸에 가득했다. 3000m이하로 내려왔으니 제일먼저 담배 생각이 났다. 그리고 낯선 땅에서 만난 후배 내외와 함께, 그리고 ABC를 같이 오르고 내린 동행 트레커들과도 한잔 나누고 싶었다. 락시 한병과 후배가 가져온 유명한 "한라산소주"를 딱 한잔씩 나누었다. 많은 아쉬움이 남았지만 후배는 내일 ABC로 올라가야 될 형편이라 일찍 숙소로 갔다. 그리고 한국인 여선생님과 좀더 대화를 나누었고, 그 대화를 통해 그분이 직면한 삶의 문제와 관계가 나의 삶의 지향, 나의 삶의 방식을 되돌아 보게하는 적지않은 영감을 주었다. 그녀 덕분에 친환경 농업, 마을 공동체, 진보적 삶과 정치적 실천 등 평생의 화두가 안나푸르나에서 다시 되살아나게된 셈이었다.


전문산악인이 아닌 나같은 사람이 접근할 수 있는 한계점인 ABC를 딛고, 다시 하생길에 영인 아빠를 만나니 나의 이번 여정은 끝나가는 기분이다. 이제 이삼일이면 포카라에 들어갈 것이고. 이삼일 더 포카라에서 헤메다가, 또 카트만두 거리를 이삼일 더 걸으면 귀국해야한다. 귀국을 생각하기 시작하니 딸이 더 보고 싶어졌다. 전날 밤 아내도 꿈속에서 딸아이를 보았단다. 네팔에 도착하자마자 핸드폰이 고장이 나고, 달리 전화걸 수단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냥 한국과의 모든 연락을 끊고 지내고 싶었다. 익숙한 세상이랑 한달쯤 철저히 단절한다고 내 삶에 무슨 변화가 있겠냐는 객기 아닌 객기였다. 그래도 포카라에 가면 근 한달만에 사랑하는 딸에게 전화를 해야겠다. 우리 딸이 너무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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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잘 자지 못했다. 평소보다 제법 늦게까지 다이님룸에서 다른 트레커들과 노닥거리다 방에 들었지만 옆방에 든 호주트레커들이 늦게 까지 떠들어 되었다. 지금까지 묵은 롯지 대부분은 방과 방사이 벽체를 합판 한장으로 막아놓았는데 이곳 히말라야 롯지도 마찬가지였다. 또 벽쪽으로 침대가 붙어 있어, 마찬가지로 옆방의 침대가 합판 한장 넘어 붙어있다보니 밤이 깊어 조용해지면 옆방 손님의 숨소리까지 들릴 정도였다. 그런 방에 묵을수록 소음을 내지 않기 위해 신경을 써야하는데 옆방의 청년들은 전혀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여행 초반에 티망의 롯지 2층에서 묵을 때 밤에 잠시 화장실을 다녀온 적이 있었다. 그런데 다음날 1층에서 묵었던 네팔리들이 내가 밤새 쿵쿵 거리고 돌라다녀 자신들의 잠을 깨웠다며 항의성 농을 걸었다. 사실은 내가 아니고 옆방의 트레커가 배탈이났는지 밤새 들락날락 거린 거였다. 아뭏튼 롯지는 최소한의 재료로 만든 숙소기때문에 단열이나 방음 같은 거는 전혀 고려치 않고 지은 집이다. 그래서 늘 옆방에 젊잖은 손님이 들기를 기원해야하는데 어제는 재수가 없었다.


찌뿌등한 몸을 이끌고 밤새 눈이 내린 길을 나섰다. 여전히 눈발을 계속 휘날리고 안나푸르나 연봉들은 구름 속에 사라지고 없었다. 흰쿠동굴에 이르자 상행인 트레커들이 소복히 바위 아래 모여 있었고, 잠시 쉬는 사이 하행길 트레커들도 바위 밑으로 모여들었다. ABC(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상황이 궁금했는데 무사히 다녀오는 사람들은 만나니 조금은 안도가 되었다. 그들 대부분은 한국인이었다. 하행인 트레커들은 조금은 과장된 표정으로 자신들이 얼마나 힘들게 다녀왔는지 이야기했고, 그리고 기상으로 봐서 오늘 상행인 사람들이 베이스캠프에 도달할 수 있을 지 걱정이라며 겁을 주었다. 사실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고도가 4200m라는 사실도 조금은 부담스러웠고, 꼭 거기까지 가야할 이유도 없었기에 MBC(마차푸차레 베이스 캠프)에서 머물고 내일 아침 일찍 배낭을 두고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까지 다녀오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오늘의 기상과 다른 여건의 변화에 달려 있는 것이기에 그대까지 어떤 결정도 내리지 않았다.


흰쿠동굴을 떠난뒤 곧 바로 데우랄리에 도착했다. 눈발을 계속 굵어지고 그만치 시야는 점덤 좁아져 갔다. 뜨거운 블래티를 한잔하고 온수로 물통을 채웠다. 시누와를 지나면서부터 1리터 페트병에 담긴 공산품인 미네랄워터는 더이상 팔지 않았다. 지고 올라오기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다. 대신 '따토파니'라고 자연수를 끓여서 팔았다. 미네랄워터보다 값은 싼데 물맛은 별로고 간혹 모레같은 불순물도 보였다. 사실 네팔리들은 그 물을 끓이지도 않고 그냥 마시는데 아무런 탈이 없다. 하도 여행안내정보에서 자연수를 마시지 말라고 해서 계속 미네랄워터만 사서 마셨는데 좋은 선택인지는 잘 모르겠다.


히말라야에서 흰쿠동굴을 지나 데우랄리까지 꼭 2시간이 걸렸다. 쉬엄쉬엄 걷기도 했고 눈때문에 빨리 걸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데우랄리를 나와 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로 향했다. 밤새내리던 눈은 하루종일 끊이질 않았고 고도를 높일수록 점점 더 거세졌다. 데우랄리를 지나면서부터는 설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고 오직 맹목적인 걸음에 몰두하게 되었다. 마음속에 조금의 두려움도 싹트고, 특히나 데데우랄리지나 MBC가는 계곡에서는 나도 모르게 마음이 달아오르고 서둘기까지 했다. 파샹 이야기로는 삼년전 바로 이 계곡에서 눈사태로 십여명이상의 트레커와 포터가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사태가 일어난 코스는 약 15분 걸리는 계곡길이었는데 왼쪽 사면의 경사나 쌓인 눈을 봐서는 사태가 일어날 지역같지 않았다. 파샹에게 물어보니, 그 경사의 상단부에 눈이 쌓였다가 일시에 무너져 내리는 특수한 지형탓에 사고가 잦다고 했다.


데우랄리에서 MBC까지 다시 2시간이 걸려 오후 1시경 MBC에 도착 했다. ABC에서 이제 막 도착했다는 한국인 남성 한분은 거의 사력을 다해 내려오다 여러번 넘어지고 굴렀다면서 계속 하행을 할지 어쩔지 걱정이 태산같았다. 무리하지 않는게 좋을 듯 했지만 그렇다고 추운 롯지에 계속 머물수도 없는 상황이라 그분은 결국 계속 하행을 하기로 하고 롯지를 나섰고, 다음은 우리가 결정을 할 차례가 되었다. 계속 ABC까지 올라갈지 아니면 MBC에 머물다 내일 아침 ABC까지는 가벼운 차림으로 다녀와서 하산을 할지 아직 결정하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점심을 먹고 나니 더 이상 고민이 필요 없게 되었다. 호주청년, 한국청년 할 것 없이 모두 ABC까지 올라가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고 보니 우리 부부만 덩그러니 MBC에 남을 이유가 없어 보였다. 차라리 먼저 롯지를 나섰다. 우리 포터 파샹은 MBC에 올라온 예닙곱명의 네팔리 중에서 가장 젊었다. 꼭 그래야만하는 것은 아닌것 같았지만 다른 네팔리들이 파샹에게 제일 앞에서 길을 뚫고 나갈 것을 종용했다. 파샹이 맨앞에서 길을 찾고 우리 부부가 뒤따랐다.


MBC부터는 눈발도 눈발이지만 안개인지 구름인지 사방천지에 아무 것도 볼 수가 없게 되엇다. 눈과 구름이 발밑과 머리 위, 그리고 사방에서 우리를 감쌌다. 사방팔방이 흰색이고 우리는 그속에 갇혀버렸다. 사방 10m의 공간에 갇혀 그밖의 상황을 알 수없는 채로 그냥 맹목적으로 걷고 또 걸었다. 길은 눈속에 숨고 산은 구름 속에 숨었다. 사람의 발길은 눈속에 묻혔고, 우리 뒤를 따라 올라오던 트레커들은 안개속에 숨었다가 간혹 흐르는 구름이 엹어지면 나타나기도 했지만 너무 멀리 떨어져 갔다. 나의시야는 1m앞의 발자욱에 묶이고 그 냥 발길을 이어갔다. 아무런 이유도 없다. 합리도 사리도 판단도 없이 그냥 걸었다. 구름속에 잠시 나타났던 ABC는 아무리 걸어도 가까워져 오는 것 같지가 않고 어느새 짙은 구름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렇게 3시간을 걸으니 멀리 ABC 안내간판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기쁨 마음에 달려가 아내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캠프로 올라갔다.


ABC에 도착하자 한치 앞을 볼 수 없게 내리던 눈이 먼추고 잠시 구름이 물러났다. 역시 우리는 운이 좋았다. 눈때문에 산을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도 없이 올라왔는데 석양을 받고 황금빛으로 피어나는 마차푸차레와 안나푸르나가 우리를 반겨줬다. ABC는 나같은 일반인이 안나푸르나봉에 접근할 수 있는 최고의 한계다. 5분정도 걸어서 View Point까지 가면 숙소 보다 해발이 조금 더 높아지겠지만 하여튼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에서 안나푸르나정상으로 진입해 들어가기 위해서는 엄격한 기준에 따라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한단다. 몇명의 셀파에 적지않은 입산료, 보험료 등을 부담해야되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생명을 담보하지 않으면 접근할 수 없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캠프에 도착하니 롯지 두군데가 문을 열고 있었다. 호주팀을 다른 롯지로 가고 우리 부부는 파샹의 권유로 캠프입구 오른쪽 롯지에 들어섰다. 이어서 한국인 여성 한 분이 들어오고, 해가 떨어질 무렵 한국 청년 커플까지 도착했다. 방은 배정되었지만 아예 방을 둘러보지도 않았고 저녁내내 다이닝 룸에서 지냈다. 4,200미터의 고도 때문에 모두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부풀었고, 또 고산증의 위험때문에 술도 한잔 나눌 수 없었지만 모두다 추운 방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눈꼽만치도 없어 보였다. 급기야는 네팔 여행을 떠나와 처음으로 다이닝 룸의 길다란 의자에서 롯지 식구와 한국인 트레커 그리고 네팔리 포터들 까지 모두 같이 자기로 했다. 외국에서 오랫동안 노동자 생활을 하셨다는 사오지는 이불까지 내놓으면 편의를 봐주셨다. 이렇게 내 생애 최고의 고지에서 얇지만 편안한 잠을, 꿈길 사나왔지만 마음 따뜻한 밤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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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롱을 벗어나기위해 Chhomrong Khola(촘롬천)까지 2,400여개의 돌계단을 걸어 해발 600m 정도를 내려갔다. 한 숨을 돌리고 다시 가파른 오르막 길을 힘겹게 걸어 고도 800m 정도를 올리니 Upper Sinuwa다. 촘롱과 시누와 사이의 계단길은 알려진 데로 가히 '죽음의 계단'이라고 말할만 했다. 길이 오르락 내리락하면서 피곤한 근육도 풀리 숨도 돌리고 해야하는데 오르막이든 내리막이든 한 방향으로만 계속 이어지면 그땐 걷는 맛이 죽을 맛이 된다. 오늘이 그랬다. Siwal에서 간드룩 가는 길이 그랬고 오늘 촘롱에서 시누와가는 길이 그랬다. 그보다는 덜했지만 Bamboo를 향해 이어지던 내리막 돌계단도 만만하지가 않았다. 내리막길이 하행길에는 다시 오르막으로 변해 있을 것이다.


아내는 파샹이 말한 계단의 수가 맞는지 세어본다며 촘롱천까지 내려가는 길에 아무 말이 없었다. 계단 수를 세어보는 아내를 방해하기 위해 말을 걸어도 단답형 대답만 하고 이내 계단 세기에 몰두했다. 결국 끝까지 계단을 세어 본 아내는 계단이 넓어 서너발씩 걸은 칸을 고려한다면 대충 맞는 것 같다고 했다.


시누와에서 물을 마시고 잠시 쉬었다. 포카라 호텔에서 20루피하던 1리터짜리 미네랄워터가 간드룩부터는 120루피 이상 했다. 파샹은 비싼 물을 얻어 먹는게 부담스러웠는지 내외국인 이중가격제를 이용해 자신이 물을 살테니 저녁 때 돈을 계산해 달라고 했다. 나는 'Good idea!'라고 답했고, 이후 반값에 물을 먹을 수 있었지만 이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도반에서부터는 롯지 주인이 네팔리가 미네랄워터를 사서 먹을 리가 없다는 이유로 파샹에게 물을 팔지 않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역시 장사하는 사람은 눈치가 빨랐다. 그러고 보니 롯지에서 네팔리에게 미네랄워터를 반값인 7~80루피에 팔아서는 전혀 이문이 없는 것 같았다.


안나푸르나 베이스켐프에 다가갈수록 당연히 고도가 높아진다. 오늘 묵게 된 히말라야 마을은 해발 2900m. 그런데 고도가 높아지는 꼭 그만치 물가도 따라 올랐다. 방값, 물값, 음식값 모두 비싸다. 시누아까지는 조랑말이 들어온다고 했다. 거기서부터는 식자재며 생활용품을 모두 사람이 직접 지고 날라야한다. 조랑말과 사람이 직접 날라온 식재료로 만든 음식을 싸니 비싸니 말하는 것도 우습고 당연히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들여야할 것이다. 내일 도착할 MBC(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나 ABC(안나푸르나베이스캠프)는 여기 히말라야 보다도 훨씬 더 비쌀 것이란다. 당연할 일이다.


오늘 점심을 먹은 밤부에서 파샹도 달밧을 250루피나 주었단다. 투어리스트에세 350루피를 받으니 포터에게는 단지 100루피만 깍아준 셈이었다. 라운드 코스에서는 투어리스트 2명을 대동한 네팔리에게 방값과 음식값을 전혀 받지 않았다. 숙식이 공짜일뿐아니라 특별히 덤으로 다른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하는 것 같았다. 최소한 파샹의 달밧에는 우리가 먹는 달밧에는 없는 야크 고기나 계란후라이가 거의 항상 올라가 있었다. 우리 트레커는 왜 '플레인 달밧'이고, 너 파샹은 '스페셜 달밧'이냐며 놀리기라도 하면 파샹은 자기 접시에 올라와있는 야크고기를 아내와 나에게 한조각씩 나누어 주기도 했다. 그런데 ABC코스에 접어 들면서 파샹도 돈을 내고 밥을 사 먹어야 했고, 처음 사울리바자르에서 100루피를 내던 달밧을 이곳 히말랴야에서는 250루피나 내게 되었다. 계속 밥값을 대신 내어줄까 고민하기도 했지만, 이미 숙식비를 포함한 하루 12불이라는 포터비를 지불한 상태고, 또 여정이 끝나면 일정한 팁도 주어야 하기 때문에 그냥 두기로 했다.


ABC코스에 접어들어 오늘 처음으로 다이님 룸에 스토브를 켰다. 스토브는 유료였고, 1인당 100루피씩 이었다. 호주와 영국인팀, 한국인 팀을 합하니 스무명가량되었는데 트레커들에게만 받는건지 네팔리들에게도 받는 건지 알수 없지만 여하튼 100루피씩 받아가지고 비싼 석유값이 충당이 될지 궁금했다. 안그래도 비싼 석유를 말통에 담아 당나귀 등에 지워 시누와까지 나르고, 다시 그 말통을 사람이 짊어지고 이곳까지 날라왔을 걸 생각하니 1인당 100루피가 싸게 느껴졌다. 스토브는 저녁 식사 전에 불을 붙여 식사후 두어시간 켜 주었다. 저녁을 먹고나서 곤한 몸이지만 추운 방으로 돌아가기 싫은 트레커들은 그 시간동안 인사도 하고 여행정보도 나누고 수다도 떨었다. 영어가 능통해서 영국과 호주에서 온 청년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세계평화에 대해, 영국의 이라크 침공의 부당성에 대해, 신자유주의의 미래에 대해 청년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니 공부 열심히 하지 않은 게 뒤늦게 후회되었다. 다음 여행을 위해 영어공부를 열심히 해야지 하고 또 헛된 다짐을 했다.


이제 내일이면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 도달할것이다. 이제 긴 여행은 거의 종반으로 접어들었다. 12월 29일 집을 나와 1월 26일 귀가 예정이니 이제 일정이 열흘쯤 남은 셈이다. 나는 그동안 무엇을 얻었을까?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오는 곳이 아니라 비우러 오는 곳이 네팔이라는데... 나는 그동안 무엇을 버렸는지 모르겠다. 텅빈 머리, 고갈된 열정, 잃어버린 꿈.... 아직모르겠다. 동생에게 떠밀려 시작한 이번 여정의 의미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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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로 떠나오기전 인터넷을 뒤지며 트레킹 일정을 준비하면서 알게된 간드룩은 막연하기도 하고 자의적이기도 하지만 이상적인 꿈의 산촌마을처럼 그려졌다. 그래서 꼭 일정에 넣고 싶었고 그리고 하루쯤 머물며 아름다운 안나푸르나 산촌마을의 삶을 느껴보고 싶었다. 눈을 떠자마자 찬바람을 마다하지 않고 창을 열고 마차푸차레가 여명속에서 신비한 자태를 드러내는 모습을 한동안 지켜본 뒤 하루를 시작했다. 우리부부는 일정을 정하지 않은 채 식전부터 마을길을 나섰다. 새벽부터 들리던 예불소리를 쫒아 언덕의 경사를 따라 촘촘히 들어선 건물 사이를 이어지는 좁다란 돌길을 따라 걸었다. 간드룩이 비록 큰 마을이지만 얼마 걷지 않아 조그만 사원에 도착했다. 한분의 여승이 예불을 보고있는 조그만 사원은 보잘것 없었지만 간드룩의 주민에게는 유일한 마음의 안식처안 곳 같았다. 몇몇 네팔리는 잠시잠깐 들러 예불을 드리고 돌아갔고, 나는 마당을 서성이며 마을의 풍경을 사진에 담는 사이 아무런 종교도 갖지 않아 그래서 아무 종교나 다 받아들일 수 있는  아내는 법당안으로 들어가 한국의 절에서 하듯 티벳의 부처에게 절을 올렸다. 

 
부처의 신통력보다는 소박한 사원의 살림살이가 더 마음을 움직였을게 분명하지만 아내는 지갑을 가지고 온 나에게 작은 돈을 받아 불전함에 넣고 돌아나왔다. 아내가 딸의 행복을 빌었는지, 세상의 평화를 빌었는지 아니면 우리부부의 안전한 여정을 빌었는지 모르지만 사원은 나서는 발걸음이 좀더 편안하게 느껴졌다. 사원을 나와 발길 닿는데로 걷가보니 막다른 골목에 다다라 돌아나오기도 하고, 주인 떠난 집 마당을 가로질러 낮은 돌담을 뛰어넘어 막힌 길을 뚫기도 하면서 걷다보니 [구릉 민속박물관]이라는 안내 간판을 달고 있는 소박한 롯지와 마주쳤다. 입장료를 내고, 롯지의 주인 아주머니같은 분이 지켜선 민속박물관을 아내 혼자 둘러보는 사이 나는 건물들 사이로 아침 햇살을 받으며 하얀 봉우리를 드러낸 안나푸르나만 눈이 빠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다시 골목을 누비다 돌아온 숙소에서 하루의 일정을 결정했다. 하루를 더 머물며 온종일 둘러볼 만치 간드룩은 그렇게 규모있는 마을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냥 쉬기에는 너무 추웠고, 편안하고 다뜻한 공간을 찾는 것을 불가능해 보였다. 아침을 먹고 나서 폴란드인 트레커는 하산길을 떠나고 우리는 배낭을 챙겨 다시 상행길에 올랐고 한국 청년들과 동행하게 되었다.


어제 간드룩에 거의 도달해서부터 눈이 흩뿌려진 길로 접어들었고, 간드룩을 지나자 음지에는 제법 길이 미끄러울만치 눈이 쌓여있곤 했다. 햇살이 좋은 양지에서 눈의 흔적이 사라졌다가 다시 산모퉁이를 돌아 음지로 돌아서면 이내 눈길이 나타났다. 촘롱으로 가기 위해서는 Mudi Khola(무디 강)의 한 지류인 Kimlung Khola를 건너기 위해 가파른 북쪽 사면의 내리막길을 한참을 내려가야했는데 거기서는 눈이 발목까지 빠지고 처음으로 아이젠을 사용해야 했다. 킴룽강에 거의 내려 서서는 다시 눈이 사라지고 강을 건너 남향의 킴룽마을에 들어서니 따사로운 햇살이 한국의 이른 봄을 느끼게 했다. 킴룽은 조그마하고 한적한 마을로 네댓가구의 집이 있었지만 인기척이 드물었다. 선택의 여지 없이 들어선 롯지에서 점심을 먹고 타우룽을 거쳐 촘롱을 향해 길고 가파른 오르막을 오후 내내 걸었다. 잠시 잠깐 혼자서 앞서가다 랜드슬라이드가 생겨 끊긴 구길로 접어들어, 파샹을 걱정시키고 되돌아나와야 했던 것말고는 순탄한 하루 였다. 가파른 길 탓에 지치고 힘든 순간도 있었지만 고개를 들면 안나푸르나 흰봉우리가 우리를 격려하고, 뒤돌아보면 언제 이만치나 왔는지 실감이 나지 않을 마치 까마득히 먼 지나온 길을 보면서 위로받을 수 있었다.


오후 5시 30분이 지나
해발 2,170m이 촘롱에 도착했다. 아침에 서둘렀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조금 무리하면 시누아까지 갈 수 있는 일정이었지만 파샹은 시누아는 음식도 숙소도 전망도 다 좋지 않다며 촘롱에 머물 것을 제안했다. 파샹의 제안에 따라 촘롱에 머물기로 결정을 했고, 한국인 청년들은 그들의 가이드 단골 롯지로 가고 우리는 파샹의 단골집이라는 Fishtail 게스트하우스에 들어섰다. Fishtail 게스트하우스의 건물은 낡고 지저분했다. 하지만 방문앞의 테크에서 바라다 보는 안나푸르나 연봉과 마차푸차레는 너무나 비현실적인 풍경으로 시야를 압도했다. 파샹이 음식과 숙소 그리고 전망을 내세워 촘롱에 머물자고 제안했지만 앞의 두가지는 인정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마지막 전망 하나만은 파샹의 안목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숙소의 2층 룸에서 나와 데크에 앉아 정면에서 안나푸르나를 바라다 보면 현실과 비현실 사이의 경계가 애매해져 오히려 큰 달력 그림을 눈앞에 펼쳐놓은 것 같았다.


안나푸르나를 향한 코스가 촘롱부터는 외길이다보니 많은 한국인 트레커들이 들러는지 마을 입구부터 한국어 간판이 보였다. 김치가 있고 닭백숙이 된다는 간판을 걸고 있는 롯지가 드러 있었고 우리가 묵게된 Fishtail 게스트하우스에서도 한국음식이 가능했다. 음식가리지 않고 꼭 현지식을 먹기를 고집하는 나도 갑자기 '김치'라고 쓰인 간판을 보자마자 입안에 군침이 도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먹고싶어서기도 했지만 도대채 네팔에서 담은 한국 김치는 어떤 맛일지, 정말 제대로 김치를 담기나 한건지 궁금해서라도 김치를 꼭 먹어보고 싶었다. 닭백숙은 돈도 양도 부담스러워 저녁메뉴로 참치 김치찌개를 시키고 다이닝룸에 앉아 더욱 가까워진 안나푸르나를 바라다 보고 있으니 이내 음식이 나왔다. 냄비가 아니라 사발에 각각 2인분을 담고 밥 두그릇이 나왔다. 한국처럼 밑반찬이 있는 것도 아니고 덩그러니 김치찌개 한 사발에 밥 한공기가 전부였다. 참치캔은 거의 냄새만 날 만치 넣은것 같았지만 그래도 김치 특유의 시큼한 향이 코를 자극했다. 망설임없이 밥공기를 들어 김치찌게에 들이부어 눈깜짝할 새 먹어 치웠다. 금새 그릇을 비우고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손님이 우리 둘뿐이고 특별 메뉴인 김치찌게를 덤으로 더 얻어먹을 수는 없는 조건. 깨끗이 단념하고 김치찌개의 여운이 입안에 감도는 행복한 느낌을 만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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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성벽력에 창문이 흔들리고, 장대비가 창을 때리는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는데 새벽에 눈을 뜨니 언제 그랬냐는듯 하늘은 시치미를 떼고 파란 얼굴로 우리를 맞이했다. 창 넘어 멀리 마차푸차레와 안나푸르나 남봉이 황금빛 아침 햇살을 받으며 신비한 자태를 드러냈다. 안나푸르나의 중심으로 떠나는 아침, 밤새 우리를 불안하게 했던 비가 씻긴듯이 지나가고 이렇게 청명한 하늘과 말숙한 산의 자태를 대하니 절로 힘이 났다. 


하지만 상쾌한 아침은 호탤과의 마찰로 끝이 났다. 호텔 터치네팔에서 아침부터 온수 문제로 한바탕했다. 네팔에 들어온지 보름이 되었지만 아직까지 한번도 롯지나 레스토랑에서 클레임을 제기한 적이 없었다. 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왔기 때문에 어지간한 것은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네팔리의 친절에 마음 편안한 여정이었기 때문이기도했다. 그런데 아내는 이날만은 그냥 넘어가기가 힘들었는지 바로 호텔 카운트로 따지러 내려갔다. 전날 저녁 스텝이 룸차지 1000루피에 24시간 온수 샤워가 가능하다고 했던 것은 순전히 거짓말이었다. 다시 안나푸르나로 떠나기에 앞서 머리라도 감고 싶었던 아내는 결국 프론트에 내려가 항의를 하게 된 것이었다. 아내의 항의를 무시하다 재차 항의를 한 뒤에야, 스탭들이 가스통을 짊어지고 오르락 내리락 거린 끝에 다른 호실에 온수가 나오도록 설치했으니 샤워를 하라고 했다. 샤워는 포기하고 그냥 머리만 감고 식사시간을 기다렸다.


그런데 다시 아침 식사도 문제가 되었다. 전날 8시에 예약해 둔 음식을 시간이 다된 뒤에야 단체 손님이 많아서 조리가 불가능하다고 알려왔다. 짧은 영어에 따질 엄두도 나지 않고, 이렇게 좋은 아침에 더이상 투닥거리는 것도 싫어 그냥 간단한 음식으로 되는데로 달라고 했더니, 기름에 튀긴 빵과 커리 한종지를 내 놓았다. 주는 데로 먹고 룸에 올라와 짐을 싸고 카운트로 내려가 계산을 하니 마당에는 호텔에서 불러놓은 택시가 도착해 있었다.


택시비를 물으니 나야풀 가는 로컬버스 터미널까지 200루피라고 했다. 그러면서 택시기사는 아예 1시간 30분이 걸리는 나야풀까지 1,500루피에 바로 가자고 제안했다. 로컬버스는 일단 기다려야하고, 시간도 30분에서 1시간이 더 걸리고, 위험하고, 지저분하고, 좁아서 불편하단다. 다 맞는 말이었다. 파샹까지 나서서 그냥 택시로 가자고 종용했다. 터미날에서 배낭을 들고 내리고 ,버스를 기다렸다가 다시 버스 지붕에 배낭을 싣고 타고 내리고 하는 그 모든 것이 귀찮은 눈치였다. 3일간의 강행군에 지친 파샹을 위해 500루피 정도 돈을 더 쓰고 택시로 나야풀까지 가기로 마음먹었다. 단 조건을 달았다. "만약 당신이 천천히 안전하게 운전할 것을 약속한다면 이 택시로 나야풀까지 가고 그렇지 않다면 내리겠다." 당연히 기사분은 "OK!"를 외쳤고 네팔 온 뒤 처음으로 베스트 드라이버를 만났다.



위험한 추월이나 급발진, 급제동 없이 천천히 모는 택시를 타고 느긋하게 나야풀로 향했다. 멀리 안나푸르나 흰봉우리가 드러나는 위치에서는 "Take Photo!"를 외치며 택시를 길가에 세워주기까지 했다. 정말 처음으로 긴장감없이 차를 타고 포카라 에서 나야풀까지 산자락에 터를 잡고 살아가는 네팔리의 삶을 느껴 볼 수 있었다. 포카라 시내를 벗어나면서 S자 고갯길을 끝없이 오르고 그리고 끝없이 내려오니 나야풀이었다. 길은 분명히 'Highway"였는데 바닥은 페이고 일부는 아예 포장의 흔적조차 없는 구간이 허다했다. 아무데나 아무런 표지도 없이 공사를 벌여놓고 길을 막고 있는 곳도 몇군데 있었다. 뭐 그래도 네팔리들은 아무도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지 않았다, 여기는 네팔이니깐!!


나야풀에 도착하자마자 블랙티를 한잔씩 마시고 걷기 시작했다. 나야풀의 체크 포스크에 등록을 하고, 곧이어 침룽으로 향하면서 한번 더 체크포스트에서 체크를 한뒤 사울리바자르로 향했다. 안나푸르나로 들어가는 입구인 나야풀은 한국의 여느 국립공원 입구처럼 상가들이 즐비하고 사람의 발길이 붐볐다. 하지만 안나푸르나를 향해 10분 20분 올라갈수록 상점도 민가도 드물어지고, 침룽을 지나고 사우디바자르가 가까워지면서는 트레커들의 발길도 줄어들었다. 상행 트레커는 만나기가 어려웠고 간혹 하행 트레커를 싣은 택시가 우리를 스쳐 내려가기도 했지만 우리가 만만 하행 트레커 거의 대부분은 한국인이었다. 파샹이야기로는 안나푸르나 겨울은 트레커의 발길이 줄어 비수기라고 하지만 오히러 한국인 트레커가 집중적으로 몰려 "Korean Season"이라 부른다고 했다.



사울리바자르에서 점심으로 달밧을 먹고 한가로이 햇살을 받으며 한참을 쉬다가 다시 걷기를 시작했다. 길따라 조각밭에는 유채꽃이 이쁘고 나락을 베어낸 빈논 한켠에 자라고 있는 감자며 양배추며 마을 양파의 파릇한 잎이 싱그러웠다. 한국의 늦은 가을이나 이른 봄처럼 공기는 차지만 햇빛을 따사로운 길을 걸었다. 산길이 아니라 들길을 걷는 편안함이 좋았다. 안나푸르나에서 흘러내리는 모디강(Modi Khola) 을 거슬러 좀더 올라가니 산등성이를 따라 간드룩으로 가는 길과 모디강을 따라 시와이(Siwai)쪽으로 갈라지는 갈림길이 나왔는데 파샹을 지름길을 안다며 오른쪽 갈림길인 시와이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길이 복잡하지 않아 어떻게든 간드룩 가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보였는데, 어느 순간 파샹은 헤메기 시작했다. 만나는 네팔리마다 몇번을 길을 물은 파샹은 자신감이 없는 표정으로 간드룩을 포기하고 임레, 쿠미, 지누단다를 거쳐 촘롬으로 바로 갈 것을 제안했다. 간드룩과는 점점 거리가 벌어져 간드룩을 갈려면 가파른 돌계단길을 두 시간이상 계속 걸어야만 된다는 것이었다.


간드룩은 이번 여행을 떠나오기 전에 사전 조사를 통해 알게된 마을이었는데 가파른 계단 논 끝에 형성된 척박한 삶의 조건을 가진 마을이지만 아름답고 풍성한 그런 꿈의 마을같은 느낌으로 느껴져 꼭 가보고 싶었던 마을이었다. 파샹은 가능하면 덜 걷고 편안한 길을 선택하려 했지만 이 지점에서 처음으로 내가 고집을 피웠다. '나는 농사꾼이고 역시 산골에 산다. 그래서 네팔여행중에 간드룩이라는 마을에 하루 지내면서 내가 사는 마을과 꼭 비교해 보고 싶었다. 나에게 간드룩은 이상적인 꿈의 마을로 느껴진다. 그래서 좀 힘들더라도 간드룩을 가고싶다.' 고.


시와이로 가는 길은 'Old Road'라고 불렀는데, 새길이 나면서 지금은 트레커의 발길이 많이 준 논두렁길이었다. 목이 말랐지만 티하우스를 쉬 만날 수 없을 정도로 쇠락한 한가롭고 호젓한 길이었다. 특히나 모디강 계곡을 건너 나란히 형성된 란드룩을 마주보면서 걸을 수 있어 너무 좋았다. 파샹이야기로는 나야풀이 안나푸르나 여정의 출발지가 되기 전까지는 페디를 시작으로 란드룩을 거쳐 안나푸르나 산군속으로 트레커들이 들어갔다고 했다. 그런데 파샹은 내가 내려오는 길에 란드룩을 가자고 하니깐 란드룩은 숙소도 별로고 음식도 좋지 않다고 하면서 난색을 표했고, 또 오후에 유일하게 만난 한국인 트레커도 자신은 란드룩을 통해 올라갔는데 지금 내려오는 이 길이 더 좋다며 란드룩을 권하질 않았다. 그래도 나는 상행길에는 간드룩을 가고, 하행길은 꼭 란드룩으로 가야지하고 마음 먹었다.


마실 물이 떨어져 목이 마를 때 즈음, 시아와를 지나며 티하우스를 만났다. 애타게 찾던 티하우스를 만나 반가웠지만 우리를 더 애타게 기다렸을 한 소년을 만났다. 어디에 찔렸는지 부딪쳤는지 알수 없지만 한쪽 발이 퉁퉁 부은 소년이 티하우스 앞에서 우리와 마주치자 애처로운 얼굴로 다가와 자신의 발을 가리키며 말을 걸었다. "Have you medicine?" 말을 하지 않아도 상황이 이해되는 그런 국면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가진 것은 몇개의 대일벤드와 후시딘 그리고 아스피린이 거의 전부였다. 발은 곪는지 퉁퉁부어 있었지만 의학적 지식도 없고 약품도 없으니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그냥 후시딘을 발라주고 대일밴드 여분과 통증을 줄이는데 도움이 될지 몰라 아스피린을 주었지만 별로 도움이 될것 같지 않았다.


블랙티를 마시고 미네랄워터를 한병사서 다시 길을 나섰다. 이내 임레라는 곳을 지나게 되고 그곳에서부터 왼쪽 가파른 다락논 언덕을 치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논두렁사이로 게속 이어지는 가파른 길은 모두 돌담과 돌바닥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밤새 내리던 열대성 소나기가 쓸고 지나간 돌길은 말끔히 씻겨져 있었고 그 길을 먼지라고는 한톨도 없는 투명한 공기를 들이쉬며 걷다보니 가파른 길이 주는 고통도 잊을 정도로 좋았다. 돌담에 앉아 잠시 쉬다보며 옷길을 파고드는 찬바람에 몸을 움츠렸지만 걷고 있는 동안에는 땀이 이마에 맺힐 만치 따뜻한 하루가 계속되었다. 몇일뒤면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의 설원에서 시린 손을 비비며 따뜻한 날들을 그리워할까 믿어지지가 않았다.



파샹은 오늘 자신이 실수하는 바람에 간드룩 가는 길을 잘못들어 여정이 힘들고 늘어졌다면 미안해 했다. 그러면서 한 농가에 들어가 사탕수수대를 샀는지 3자루 들고 와 하나씩 주면서 목이 마를 때 정말 좋다며 어떻게 껍질을 까서 씹어서 단물을 빨아 먹을 수 있는지를 보여 주었다.  Old Road로 선택하는 바람에 두어시간을 더 걷고, 가파른 오르막에 숨막혔지만 나는 트레커가 거의 없는 아름다운 돌담길, 언덕길을 한도 끝도 없이 걸을 수 있었서 좋아다며 파샹을 격려했다. 올라가도 올라가도 줄어들지 않던 길이 멀리 높은 산에 해거름이 드리울 때쯤 거의 간드룩에 도달한 것 같았다.



마지막 언덕길을 오르며 길가에 홀로 남겨진 병들고 야윈 조랑말 한마리와 마주쳤다. 파샹 이야기로는 그 조랑말은 평생을 힘든 짐을 나르다 이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홀로 남아 있는 것이라고 했다. 늙고 병든 조랑말이 더이상 짐을 나를 수 없을 만치 쇠약해지면 주인은 조랑말에 달려있던 모든 인공적인 장신구나 안장, 연장 등을 풀어주고 홀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한적한 풀밭에 풀어 놓는다고 했다. 그리고 몇일 뒤 조랑말이 숨을 거두면 불교식으로 장례를 치뤄주고 흰천으로 몸을 감아 매장을 해준다는 것이었다. 평생 인간을 도와 고생한 조랑말을 위해 장례나마 예를 갖쳐 정성껏 치뤄주는 네팔리들의 숭고한 삶의 자세가 너무나 아름답게 느껴졌다.


쓸슬이 죽음을 맞는 조랑말을 뒤로하고 언덕을 오르자 이내 간드룩 입구가 나타났다. 도착한 간드룩은 내가 꿈꾸던 그런 곳은 아니었지만 나름의 삶을 꿋꿋하게 영위하는 아름다움 사람들이 사는 그런 마을같았다. Mudi Hotel에 여정을 풀고, 하산중인 폴란드인 트레커와 짧은 영어로 대화를 나누고, 한국인 청년 2명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풀란드인 트레커는 한국을 잘 알고 있었고 한국인 친구도 있다고 하면서 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에서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까지 보통은 두어시간이면 여유있게 주파가 가능하지만 지금은 폭설로 어림이 없다고 했다. 자신은 장장 4시간 넘어 걸려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고 했다. 거기다가 어제 비가 고스란히 안나푸르나에는 눈으로 내렸을 걸 생각하니 혹시 라운드에 이어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마저 포기해야되는 상황이 될까 걱정스러웠다.


달빛 받은 안나푸르나, 마차푸차레, 히운출리가 창으로 가득 비치는 방에서 길고 추운 간드룩의 밤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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