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에 봄을 알리는 징후가 우후준순처럼 솟아나는 날, 비나리마을의 새 주민이 된 와우네, 산이네, 그리고 저희 부부가 함께 운곡천을 걸었습니다. 삼동 가는 국도 다리 밑에 자리한 명호정미소 앞에서 먼저 온 가족이 행여나 늦게 도착할 도반을 기다렸습니다. 출발예정시간인 오전 10시를 조금 넘겨 같이하기로 했지만 오지 않는 분들께 확인 전화를 하고 운곡천변 길을 따라 걸음을 시작했습니다..
국도가 지나는 콘크리트 다리 밑을 벗어나자마자 곧바로 운곡천은 원시의 모습 그대로 우리를 반깁니다. 두어 사람이 같이 걸을 수 있을 폭의 흙길과 큰물이 나도 다 받아줄 것 같은 펑퍼짐한 물길이 나란히 기대어 흐릅니다. 장난스런 물길이 만들었을 모래밭에 갈대가 자라고, 길과 산이 만나는 언덕 바위에 뿌리를 내리고 지난 세월 갖가지 물굽이를 지켜봤을 굽은 소나무 두어 그루가 길을 따라 흐르는 물길을 들여다봅니다. 강바닥에 누워있는 형형색색의 해맑은 자갈들이 아침햇살에 뒤척이고, 밤새 숨죽였을 강물이 소리 내어 흐르기 시작합니다. 물길을 산을 피해 강을 열었지만 무거운 몸을 피하지 못한 바위는 오랜 세월 물길에 씻겨 새 얼굴을 얻었습니다. 무심코 지나는 발길을 동행의 외치는 소리에 멈췄습니다." 스크림이다!" 물살은 세월과 공동 작업으로 뭉크의 스크림을 창조했습니다. 아니면 뭉크가 '스크림'을 그리기 전에 언제 이 바위 곁을 지나갔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세상에 어떤 예술도 자연 앞에 초라합니다.
운곡천을 걷기 시작하자마자 나는 그 매력에 빠져들고 어느 순간 운곡천에 기대어 살아가는 이름 모를 물새의 눈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합니다. 너는 왜 이 길을 걷는지 물새가 묻습니다. 문명의 이기를 쫒아 세상의 온갖 편리를 다 누리고 그것도 부족해 또 원시의 자연마저 누리려드는 인간의 욕심은 끝간 데가 없습니다. 원시적 생태 그대로 놓아두기에 뭐가 그리 아까운지 꼭 사람의 손길을 보태 [생태공원]이라 이름지어야하고, 더 끔찍하게는 도시와 멀리 떨어져 있다는 이유하나로 청정한 산하를 인간 욕망의 배설물인 갖가지 폐기물의 매립장으로 이용합니다. 한 때 강을 따라 사람이 살았고, 지금은 그 흔적만 길로 남아 드물게 찾는 사람을 반기고 있지만 이 아름다운 운곡천에 언제 개발의 삽질이 시작될까 두렵습니다. 물살이 강을 열고 강을 따라 사람이 들어오면서 길이 생기고, 그리고 그 길을 따라 문명의 편리가 부르는 도시로 사람들은 떠나갔지만 언제 다시 사람들은 포클레인을 앞세우고 이곳 운곡천을 점령해 들어올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얼마 전 있었던 운곡천 산업폐기물 처리장 설치 시도를 명호면 지역주민들이 함께 저지할 수 있었지만, 자본의 힘은 강하고, 그 생명을 끈질겨 언제 다시 개발의 기치아래 물밀듯 운곡천을 점령해 들어올 지 알 수 없습니다.
길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처음 마주친 민가가 명호양어장입니다. 출입을 삼가라는 팻말을 남겨놓고 외출중인 주인에게 전화를 걸고, 주인 없는 집 마당을 가로 질러 운곡천 길을 이어갑니다. 주인없는 집 마당 한편의 물웅덩이에는 맑은 하늘이 가득 담기고, 온갖 모양의 구름들이 장난스런 표정으로 다녀갑니다. 이렇게 새로운 사람들의 터전도 만나게 되지만 운곡천을 따라 걷다보면 강을 따라 사람들이 살았던 옛 흔적들을 마주치게 됩니다.
지금은 사람의 온기가 가시고, 세월의 풍화를 견디지 못해 쓰러져 가는 폐가가 낯선 사람들을 반깁니다. 잡초가 무성한 마당 한구석에 아직도 남아있는 살림살이의 흔적들이 기울어 가는 저 집 기둥이 반듯이 지붕을 이고, 그 아래 오순도순 살아가는 사람들의 온기가 가득한 지난 한때의 살가운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저 지붕아래 아기 울음소리 가득하고, 어머니가 끓이는 된장국 냄새가 석양지는 하늘로 피어오르는 시간, 멀리 온종일 밭을 갈다 돌아오는 아버지의 헛기침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농토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운곡천이 지나는 이 좁은 골에 그분들은 어떻게 가족을 먹이고 살아갔을까 궁금했는데, 천에서 머지않은 곳에 금광의 흔적이 나타났습니다. 몇몇 폐가가 작은 동네를 이루다 시피 흩어져 있고 산같이 막아선 자갈 더미는 모두 한 때 이곳이 금을 쫒아 들어온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한 시절, 한 가족의 삶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을 항아리들이 폐가의 한 켠에 나뒹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떠나가고 빈 항아리만 나뒹구는 폐가의 마당에도 봄 햇살을 가득합니다. 그 언젠가 많은 사람들에게 가족을 위한 밥을, 소수의 사람에게 부를 가져다주었을 금광의 흔적이 이렇게 완연한 게 신기하기만 합니다. 몇 년 전 폐광의 침출수로 운곡천이 중금속오염으로 몸살을 앓자 많은 예산을 들여 침출수 방지 처리를 했다고 합니다. 아직 폐광의 흔적을 지우기에는 세월의 경륜이 부족한지 폐광 근처에는 곳곳에 그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돌을 갈고 금을 모았을 무쇠덩어리 기계가 다 삭아 자취를 감출 만치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맑은 생명수가 흐르는 운곡천을 상상해 봅니다.
강길을 걷기 시작한지 두어 시간 만에 사미정 계곡근처까지 당도를 했습니다. 사미정 계곡 첫 집이 보이는 바위위에서 아침 일찍 서둘러 싸온 김밥으로 점심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강과 산이 너무 가까이 만나 길이 끓어진 곳에서 어렵고 위험한 곳을 피해 겨우 강을 건넜습니다. 여차하면 아직은 차가운 강물에 풍덩 빠져 버릴 수도 있는 아슬아슬한 강 건너기는 이날 하루 걷기의 최고 이벤트였습니다. 다시 강은 길을 되찾고 우리의 걸음은 빨라졌습니다. 잠시 강길을 벗어나 아스팔트 포장을 따라 언덕을 오르고 길이 갈라지는 곳에서 멀지않은 '나무피리요술피리'농원엘 들렀습니다. 불시에 들이닥친 우리는 주인장이신 조성용 김연희 부부를 만나 맛난 차를 얻어 마시고 지역문화인의 삶에 대해, 그리고 이들 부부의 '음악정원 만들기'계획에 대해 듣고 즐거운 담소를 나누었습니다. 머지않아 '음악정원'의 풀을 뜯을 염소 한 마리가 사람들의 발길이 붐빌 그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기념사진을 찍고, '나무피리 요술피리' 음악정원을 떠나 다하지 못한 운곡천 걷기를 마무리했습니다.
사미정을 지나 사미정계곡 입구에서 국도변버스정류장에 도착해보니 오후 4시 40여분, 농사일에 바쁜 어르신께 차 시간을 여쭈어 보니 5시 15분경 버스가 오긴 하는데 우리가 돌아가야 할 명호로 가는 차인지는 알 수 없답니다. 오늘 하루 지난 시간을 음미하며 담소를 나누며 서서히 땀이 식고 한기를 느끼기 시작할 무렵 버스가 도착했지만 목적지와는 반대방향인 춘양으로 돌아나가는 차랍니다. 결국 농사일에 바쁜 이웃 청년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청했습니다. 하지만 전화를 끊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버스가 또 한대 오고 다행히 명호를 간다기에 무조건 올라탔습니다. 버스에 오르자마자 다시 전화를 했지만 부지런한 이웃 청년은 벌써 차를 몰고 사미정 계곡입구 근처까지 오고 있었습니다. 이래저래 운곡천 강길 걷기로 보낸 하루는 삶의 애틋함과 자연의 숭고함을 나누고 이웃의 정마저 담뿍 느낄 수 있었던 즐겁고 행복한 하루였습니다. 산을 비켜 강이 생기고 세월을 겪으며 강줄기를 넓혀왔을 운곡천을 따라 봄바람 맞으며 정겨운 분들과 같이 걸을 행복한 봄날의 하루는 오랜 동안 저의 기억에 남아 그리움으로 익어갈 것입니다.
봉화군 명호면 청량산 등반 후 청량산이나 명호면 소재지 인근에 있는 민박집에서 1박 후 명호면 도천리 삼동다리 밑에서 운곡천 걷기 시작, 운곡천을 따라 3~4시간 약 15km를 걸으면 사미정에 도착, 명호에 승용차를 두고 걷기에 나선 경우 35번 국도를 따라 약 4시간 15km에 이르는 삼동 고갯길을 지나 출발지로 돌아온다.
가벼운 걷기로 마무리하실 분은 사미정 계곡 입구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나 택시를 타거나, 숙박지의 차량 지원을 받아 명호로 돌아온다.
차를 이용하지 않고 걷기에 나선 분은 명호에서 사미정까지 걸은 뒤, 다시 춘양까지 2시간 약 10km를 걸어가 춘양면 소재지를 둘러보고 만산고택이나 민박집에서 1박을 하고 다음 날태백으로 이어지는 외씨버선길 걷기에 나서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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