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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4일 Nawal을 출발하여 뭉지와 Braga를 거쳐 Manang에 도착해서 하루 여정을 마치고, 2월 5일 쏘롱라 패스에 앞서 고산에 적응하고 체력을 비축하기 위해 마낭에서 하루를 더 쉬었다. 


갸루에서 나왈까지의 느낌 그대로 나왈에서 뭉지까지 길은 이어졌다. 산등성이는 메마른 돌투성이 흙이 드러나고 드문드문 식물이 자라고  있었다. 야크의 먹이가 되는 키작은 초목이 자라는 목초지는 될지언정 밭을 갈고 곡식을 심기에는 땅은 너무 경사지고 거칠었다.  멀리 마르샹디 계곡으로 홈대 비행장이 내려다 보이는 길을 따라 걷다가, 고개를 들어 마르샹디 계곡을 다라 서북쪽을 향하면 멀리 강가푸르나와 안나푸르나 3봉이 눈에 들어왔다. 이 아름다운 길의 기억을 기록에 남기기에는 나의 글은 너무나 짧고 사진으로 다 담기에는 또 놓치는 것이 너무 많은 하루였다.   




나왈을 출발해 2시간여를 걸어설까? 우리는 Low Pisang에서 Hongde를 거쳐 오는 길과 만나는 나왈에 도착했다. 나왈은 험준한 아난푸르나 산등성이에서는 보기 드물게 너른 초지로 이루어진 마을이었다. 역시 야크의 교잡종으로 보이는 소가 한가롭게 마른 풀을 뒤지고 있었고, 말은 초지 사이를 흐르는 개울에서 물을 마시고 있었다. 말이 물을 마시는 사이 마부도 쉬기 위해 말을 내렸고, 우리도 배낭을 벗고 쉬어가기로 마음 먹었다. 뭉지는 말도 마부도 트레커도 짐을 벗고 쉬어가기 좋은 동네였다. 너른 초지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는 소들을 바라다 보면서 우리 역시 인생의 짐을 내려놓고 시벅쥬스를 한잔 가득 마시며 한가로이 해바라기를 했다.


   


나왈에서 마르샹디 강을 만나 30여분을 더 걸으니 마낭 직전 마을인 Braga에 도착했다. 강쪽 길가에는 롯지촌이 형성되어 있었고 오른쪽 산자락아래는 사찰과 함께 민가들이 옹기종기 모여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동네 앞에 너른 초지 중간에는 불상이 세워져 있었고 주변에는 몇개의 벤치도 놓여져 있었다. 동네의 광장같은 역할을 하는 공유지 같았다. 우리가 마을에 들어설 무렵 수업을 마친 한무리의 꼬마들이 우리 앞을 지나갔다. 아이들을 보니 장난기가 발동했다. 우리에게  남아있는 2개의 축구공 중에 한개를 주고 싶었다. 아이들에게 축구를 하자며 불러 세워 잠시 잠깐이나마 같이 공을 찼다. 좀 더 놀고 싶었지만 브라가도 3,500m 고도의 고산 마을이다보니 금방 숨이 찼다.  




브라가를 지나 마르샹디강을 따라 30분도 걷지 않아 마낭이 올려다보이는 지점까지 도착했다. 마낭 도착전 마지막 휴식을 위해 차우타라(chautara)에서 배낭을 벗고 숨을 돌렸다. 본격적인 고산 트레킹을 시작하는 마을 마낭에서 보낼 이틀의 휴식에 가슴설레이며 마을을 들어선뒤 Tilicho Hotel을 찾아 짐을 풀었다.  모처럼 밀린 빨래를 하고, 마을을 돌아보고, 생필품을 사고 그러고도 시간이 남아 가이드 바수의 부추킴에 넘어가 뚱바를 파는 가게를 찾아 자리를 잡고 일행을 불렀다. 맛있는 애플파이로 기억될 Tilicho Hotel에서의 첫날이 저물었다.  




고도적응일로 꼭 하루 더 쉬어갈 것을 강권하는 안내서들에 따라 우리도 마낭에서 걸음을 멈췄다. 사실 마낭에서의 하루는 단지 쉬기 만을 위한 날은 아니다. 2박 3일을 지내도 다 둘러보지 못한 숱한 명소와 볼거리가 널려 있기 때문이다.  강가푸르나 호수와 빙하,  Milerepa's Cave와  Ice Lake 만해도 하루에 다 가 볼 수 없을 정도인데 나는 틸리초로 가는 길목에 있는 강사르 마을을 가보고 싶었다. 하지만 계획은 틀어지고 명소들은 다 건너 뛰고 가까이 마을 산책으로 하루를 보내기로했다.




게으른 아침을 보낸뒤 우리는 늦게 롯지를 나와 전날 스쳐 지나왔던 Braga로 향했다. 목적지 없이 보내는 하루를 브라가 곰파를 찾는 것으로 시작했다. 가파른 계단을 통해 올라간 곰파는 500년 이상된 사원이라고 했고 나름 세월의 멋을 간직하고 있었지만 사람의 손길을 받지 못하고 낡아가는 느낌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계절적인 이유로 일시적으로 비워져 있는 건지는 알수 없었지만 사람이 살지 않고 마을에 의해 관리되는 곰파치고는 너무나 방치된 느김이었다. 지금까지 들렀던 티벳불교 사원 거의 대부분이 중건중이거나 잘 관리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브라가 곰파는 그렇지 못했다.




브라가 곰파에서 내려와 마르샹디를 건너 강가푸르나와 마르샹디가 만나 형성된 널다란 초원을 걸었다. 늘 바람처럼 가벼워지고 자유롭고 싶다던 소망이 그 순간만은 이루어진것 같았다. 우리는 초원 여기저기에 흩어져 풀을 뜯는 말들 사이로 풀잎처럼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정처없이 걷고 또 걸었다. 일년 365일을 살면서 단 하루라도 가야할 곳도 없고, 기다리는 사람도 없고, 시간을 느낄 필요도 없는 진공같은 평화를 내 자신에게 선물하고 싶었는데 그 작은 소망이 마낭에서 마침내 이루어지고 있었다.



마르샹디는 강물은 많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맨발로 건널만치 적은 수량도 아니었다. 한참을 강을 거슬러 마낭 시가지가 끝나는 위치까지 가서야 다리를 만났다. 가파른 강둑을 올라 마을을 들어서니 마땅히 할일이 없이 마을을 배회하고 있던 바수와 나브라즈와 마주쳤다. 마지막 남은 축구공과 학용품을 전해줄만한 아이들을 만나지 못한 바수와 나브라즈는 우리를 마낭 곰파로 안내하며 마낭곰파에 딸린 마을 공동체 조직에서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 같을 것을 운영하고 있고 그곳에 기증하면 좋겠다는 제안 했다. 



마낭 곰파에 들어서니 7~8명의 사람들이 마주앉아 차를 돌리고 예불을 준비중이었다. 학용품이나 전달하고 부처님 앞에 공양이나 하고 나올 참이었다가 갑자기 곰파의 안내를 받아 경내에 착석하고 차까지 대접받았는데 곧바로 예정에 없던 예불에 참여까지 하게 되었다. 혹시 방문객을 위한 공연 개념의 예불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겠냐는 생각이 더 크게 들었다. 전통악기를 연주하며 불경을 외는 네팔리의 목소리에 우리 모두는 푹 빠져 들었다. 고단한 삶이 그대로 묻어나는 투박한 형식의 예불이 억지로 짜내는 화려한 성전의 경건함보다 더 절실하게 다가왔다. 제도화가 덜된 날것 그대로의 종교를 만난듯한 감동은 오래도록 남을 것 같았다. 이렇게 예불마저 참여하고 나니 쏘롱라를 향한 우리의 발걸음에 부처님의 가호가 함께할 것이라는 믿음이 나를 든든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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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1일 차메를 출발, 브라탕, 두쿠르포카리를 거쳐 어퍼피상에서 하루 밤을 머물고, 2월2일 가파른 오르막을 힘겹게 올라 갸루에서 점심을 먹고 나왈까지 걸어 하루를 마무리했다.



차메의 아침은 분주했다. 고산증으로 하산중인 캐나다 청년은 사우니를 통해 짚차를 알아보고 이른 아침 도망가듯 떠나갔다. 도로는 좁고 가파랐고 포장이나 가드레일은 물론 없었다. 사륜차가 아니면 다닐 수도 없는 열악한 조건인데 눈까지 얼어붙어 나같으면 도저히 그 길을 차를 타고 내려갈 자신이 없었다. 짚이 떠난뒤 사우니 이야기로도 작년에도 사람과 짐을 가득 실은 차가 수백미터 아래 마르샹디로 떨어져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등 역시나 사고가 빈발한다고 했다.  캐나다 청년은 떠나갔지만 탄촉부터 그 청년을 따라왔다는 검정개는 우리곁에 남아 있었다. 어제 저녁 롯지 복도에 잠을 자던 검정개는 롯지의 개가 아니고 그 청년을 따라 들어온 낯선 개라고했다. 낯선 개가 롯지 실내에 들어와 복도에서 잠을 자도록 버려두는 네팔리들의 동물에 대한 태도가 참 남달랐다.



길을 나서기전 롯지에서 일을 보던 13살 소녀 수니타에게 축구공과 아주 조금의 용돈을 쥐어주었다. 그 아이는 일찍 아버지를 여위고 엄마는 다른 롯지에서 일을 하고 자신도 역시 포탈라 롯지에서 심부름을 하면서 입을 들고 학교를 다니고 있다고 했다. 맑은 눈에 꿈많은 아이가 살아갈 세상이 꽃길은 아닐 지언정 제발 험하고 곡절많은 가시발길이 아니길 빌면서 롯지를 나섰다. 깔리(검정개)도 우리를 따라 길을 나섰다.

 


차메를 벗어나기위해 한바탕 법석을 떨어야했다. 우리를 따라 나선 깔리를 지나는 길목마다 지키고 있던 다른 개들이 그냥 두질 않았다. 집단으로 덤벼드는 개를 쫒고 우리 뒤로 숨어드는 깔리를 지키면서 겨우 마을을 벗어났다.  길을 걷기 시작하자 마자 탈레큐를 지났다. 우리는 숲속으로 들어갔다가 금방 나오고  조금 가파른 듯한 언덕길을 오르다가도 어느새 편안한 길을 걷고 있었다. 누구라도 지치지 않고 편안히 걷기에 딱 좋은 길이 이어졌다. 날씨 마저 최상의 날이었다. 공기는 건조하고, 하늘은 투명하도록 새파란 빛에 흰구름마저 어울렸다. 계곡을 갈라 파란 하늘이 열리고 그 너머로 설산이 얼굴을 내미는 아름다운 길은 아무리 걸어도 지칠 것 같지 않았다.   



 

차메를 떠난지 두세시간이나 지났을까 목이 마르고 잠시 쉬어 가고 싶을 때쯤 커다란 사과 과수원이 길따라 가꾸어져 있고 농장 시설이 있는 브다땅을 지났다. 오랜만에 신선한 과일향이 그리워 과수원에 딸려 있는 듯한  bhratang Tea House에서 배낭을 벗었다. 말라 비틀어진 조그마한 사과를 생각보다 훨씬 높은 가격에 사고, 예상보다 시원하고 향그러운 데다 가격까지 싼 사과쥬스를 한잔씩 나누었다.  사과농사를 짓는 입장에서 볼때 과수 상태는 볼 것도 없었지만 그 규모만은 놀랄만했다.  대규모의 농장이 소농의 삶의 터전을 흡수하는 방식이 아니라 지역 농민에게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가꾸어지기를 빌었다. 땀이 마르고 겉옷을 찾을 만치 몸이 식은 뒤 다시 걷기 시작했다.

 


 

입안에 가득 사과향을 머금고 브라탕을 출발하자마자 좁고 긴 계곡을 이루는 절벽을 깨서 만든 위태로운 길이 나왔다. 사람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 어떻게 이런 절벽을 깨서 길을 만들 생각을 했을까 신기하기만 했다. 반터널같은 길을 지나 가파른 숲길을 통과하자 갑자기 시야가 넓어지고  오른쪽으로 깍아세운듯한 암벽능선이 보이기 시작했다. 디쿠르포카리에 접근하자 이 암벽 능선은 우리의 시야를 압도하는데  '스와르가 드와르'(혹은 paungda Danda)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빙하의 침식이 만든 무려 1500m 높이의 바위 한개로 이루어진 절벽으로  여기 사는 티벳사람들은 자신이 죽으면 그 바위산을 넘어 고향 티벳으로 돌아간다고 믿는다고 했다.

 

 

Dhukure Pokhari를 지나면 이날 하루의 휴식이 기다리고 있는 Pisang이지만 피상은 마르샹디 계곡을 따라 형성된 Low Pisang과 마르상디 계곡을 벗어나 북쪽 산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Upper Pisang으로 나누어져 있고, 이번에는 Upper Pisang을 택해 길을 잡았다. Dhukure Pokhari를 왼편으로 끼고 돌아, 멋진 나무다리를 밟고 마르샹디를 건너 완만한 언덕길을 잡아 3km쯤 걸었다. 

 

 

Pisang 마을을 들어서자 가파른  골목길을 타고올라 마을의 제일 높은 위치에 자리잡은 롯지에 짐을 풀었다. 빨래를 들고 데크에 나가서니 시야가 너무나 시원했다.  마르샹디 계곡아래 Low Pisang을 내려다 보고, 고개를 들어 안나푸르나 2봉을 비롯한 산군들을 바라다 보다가, 다시 눈을 돌려 '스와르가 드와르'넘어 지나온 길을 더듬었다. 그리고 오른쪽을 눈을 돌리니 우리가 넘어야할 쏘롱라로 이어지는 가는 길들이 헌준한 산들 사이에 실가락 처럼 사라졌다. 

 

 

숙소를 나와 마을 꼭대기에 있는 불교 사원에서 남은 오후 시간을 보냈다. Gompa의 역사는 알수 없었지만 마을 사람들이 기부해서 만든 절이라고 했다. 사찰내 건물의 대부분은 새로 지어진 듯 했고 오래된 절이 갖는 멋은 없어 보였다. 그래도 우리는 본전에 들어가 모두 부처앞에 절을 올렸다. 우리의 가이드 바수와 나브라즈는 흰두교 신자지만 부처와 시바가 다르지 않다고 했다. 나는 무신론자지만 그 순간에는 여기 터잡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신을 존중하고 싶었다. 그리고 십몇년을 같이 살다 네팔로 떠나오기 직전 생을 마친 우리집 강아지 초롱이의 명복을 빌었다. 롯지로 돌아와 전망 좋은 다이닝 룸에서 해지는 안나푸르나의 멋에 취해 밤을 맞았다.

 

 

하루에 600m를 높여 고도 3300m인 Upper Pisang에서 아주 가벼운 고산증이 왔다. 조금의 불면과 가슴두근거림 정도라서 걱정스러울 정도는 아니었지만 아직 갈 길이 머니 내 몸 상태의 변화에 대해 세심한 관찰이 필요해 보였다.  피상을 벗어나 수평에 가까운 길은 마르샹디의 흐름과 같이 하면서 한시간 쯤 걸은 뒤 출렁다리를 건너자 마자 길은 갑자기 가파른 상승길로 바뀌었다. 단 한번의 내리막이나 평지도 없이 가파른 오르막길은 끝없이 이어졌다. 거의 심리적 육체적 한계치에 도달할 즈음 작은 Tea House가 나왔고 우리는 갸루 입구에 도착을 했다.

 

 

우리는 잠시 차를 나누며 숨을 고른뒤 애매한 점심시간때문에 고민하다가 좀 더 걷기로 하고 출발 했다. 하지만 마을을 관통하는 골목길을 벗어나자 마자 우리는 발길을 돌려 되돌아왔다. 다음 마을까지 거리도 멀고 혹시 문을 연 식당이 없을 수도 있다는 가이드의 조언을 받아들여  엿다. 사람의 온기가 식어 한산하고 쓸쓸한 마을로 돌아왔지만 문을 연 식당을 찾을 수 없었다. 여행안내서에는 이곳 주민들이 주로 야크를 키우고 곡물을 재배하면서 오래 전에 획득한 무역영업권을가지고 여전히 무역업에 종사한다는 설명을 읽었지만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마을 입구에 들어섰을 때 우리를 붙잡던 식당으로 돌아가니 놓친 손님을 다시 받게된 사우니가 반갑게 우리를 맞았다.

 

 

뚝바를 시키고 사우니가 밀가루 반죽을 미는 동안 나브라즈는 사우니를 통해들은 마을 사정을 전했다. 갸루에는 7명의 아이가 있는데 그중 3명이 카트만두 유학중이고 이 마을도 점점 사람이 줄어 마을이 비어가고 있다고 했다. 네팔 역시 저개발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도시화를 할 수밖에 없다고 보면 산간에 형성된 갸루같은 외진 마을이 사라져가는 현상도 피해갈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사람도 나고 죽듯 마을 역시도 생겨나고 소멸하는 순환과정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당연한데도 이 마을에 사람이 줄고 있고 머지않아 마을 자체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아팠다.

 

 

갸루에서 나왈까지도 메마른 산자락을 따라 길이 이어졌다. 계절 탓도 있겠지만 주변의 숲은 빈약했고, 자갈 투성이 흙은 푸석거렸고, 키작은 식물들은 거친땅에 뿌리를 내리고 겨우 연명하는듯 애초로웠다. 그래도 어퍼피상 트렉을 선택하고 가파른 오르막을 올라 갸루를 지나고 다시 수평의 길을 따라 나왈까지 가는 길은 탁월한 조망을 우리에게 선물했다. 갸루를 향해 한번도 쉬지 않고 600m의 고도를 올리 때는 후회가 컸지만, 막상 갸루 이후 수평의 길을 걸으며 안나푸르나 2봉, 피상 피크, 그리고 안나푸르나 4봉을 손에 닿은듯 가까이서 마주하면서는 우리의 선택이 자랑스러웠다.  갸루를 출발한지 2시간이 안되어 멀리 나왈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왈 역시도 주변의 산과 언덕, 밭과 초지를 닮아 눈에 드러나지 않는 흙빛 마을이었다. 마을이 갸루 보다는 크고, 마을을 이루는 터전 역시 넓어 보였지만 사람의 발길이 드문 것은 전혀 차이가 없었다. 마을은 비어있는듯 조용하고 오고가는 사람의 흔적이 드물었다. 하루종일 주민을 만난 것은 손에 꼽을 만치 적었고 트레커는 단 한명도 만나지 못했다. 순전히 계절탓만은 아닌 것 같았다. 우리를 따르던 깔리도 어느 순간 사라졌다. 기회가 되면 고기를 듬뿍 넣은 볶은밥이라도 한그릇 시켜줄려고 마음 먹고 있었는데 우리의 행동이 너무 굼떴다. 더이상 기다리지 못한 깔리는 다른 인심좋은 트레커를 따라 자신의 길을 간것이 틀림없었다. 나왈의 밤은 깊고 편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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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눈을 뜨니 여전히 창밖은 흐리고 가는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미련없이 하산하기로 마음먹고 잠을 청했지만 막상 아침을 맞았는데도 상황이 변화된게 없어 조금은 실망스러웠다. 다이님 룸에 모인 트레커들 역시 어제 올라온 한국인 남성 한분만 빼고 모두 하산을 결정한 상태다. 티벳탄 브레드를 먹고 룸으로 돌아와 하산을 위해 배낭을 꾸렸다. 예티호텔을 나서니 차메에서 동행했지만 다른 숙소에서 지내게 된 한국인 여성분은 기상이 좋아질 때까지 하루이틀 더 기다려 보겠다며 남으시겠다고 했다. 그 말을 듣자 다시 순간적으로 멈짓거렸다. 하지만 마낭에서 이삼일 지체하다 결국 쏘롱라를 넘지 못하고 하산을 하게 되면 안나푸르나 라운드뿐 아니라 ABC(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 코스조차 시도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어 다시 자라는 미련의 싹을 잘랐다. 서로의 행운을 빌며, 그리고 큰 아쉬움과 또 하나의 삶의 과제를 안고 뒤돌아섰다. 언제가 될지 기약할 수 없지만 살아생전에 꼭 한번 다시 쏘롱라를 찾아야만할 것같은 과업을 받은듯 발걸음이 무거웠다. 
 


마낭을 벗어나자마자 잔뜩 찌푸린 하늘이 재법 굵은 눈을 뿌리기 시작했다. 거친 바람이 계곡을 타고 불어내리고 하늘에서는 함박눈이 시야를 가릴 만치 거칠게 쏱아졌다. 지상에 닿은 눈조차 다시 바람을 타고 대지를 쓸고 지나가며 따갑게 얼굴을 때렸다. 눈발이 세어지는 만치 마음이 급해지고 발걸음이 빨라졌다. 앞서간 트레커들 덕분에 다행히 길은 눈위에 드러나 있었다. 눈을 피해 고개를 수그리고 길의 흔적만 쫒아 말없는 행군이 이어졌다. 브라카에서 잠깐 티하우스를 들러 몸을 녹였다. 티하우스의 젊은 부부와 어린 아이의 차림에 가난이 묻어났지만 애틋한 삶의 온기가 사랑스러웠다. 두잔의 히말라야 커피를 주문하고, 다시 파샹이 마시는 밀크차를 두잔 더 주문해서 모두 5잔의 차를 마시고도 90루피밖에 받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 몇잔의 차를 팔아 어린 자식과 더불어 겨울을 나는 그들의 가난하지만 불행하지 않은 삶이 애틋했다.


티하우스의 따뜻한 부뚜막을 떠나기가 아쉬웠지만 목적지 차메까지 어두워지기 전에 도착하려면 서둘려야했다. 티하우스를 나와 뭉지와 홈데, 피상까지 단숨에 내달랐다. 올라올 때 묵었던 피상의 틸리초호텔에서 점심을 먹고, 체력을 장담할 수 없어 다른 트레커들보다 먼저 일어나 출발했다. 한시간 정도 걷다가 쉬기를 반복하다보니 늦게 출발한 한국인 학생들이 우리를 추월했다. 거침없이 내리는 눈은 배낭이며 어깨며 머리며 할 것없이 수북히 쌓였다가 무너져 내렸다. 그런데 목덜미에 쌓인 눈이 속을 썪였다. 배낭과 등사이에 흘러든 눈이 체온으로 녹아 옷안으로 흘러들어왔다. 축축해진 등이 당장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몸에 열이 나도록 걷고 있을 때는 별게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혹시라도 중간에 걸음을 멈추게 된다면 급격히 체온을 떨어트릴 수 있기 때문에 계속 신경이 쓰였다.


눈발은 옅어졌다 다시 강해지기를 반복했지만 하루종일 멈추지 않았다. 퍄상은 틈 날때마다 확짝 웃으며 "Goog Decision! We are Lucky!"를 외쳤다. 마낭에 머물렸다간 어쩌면 올라가지도 내려오지도 못한채 몇일동안 갇혀버릴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대단한 폭설이었다. 평생 한번도 보지 못한 거친 눈보라 속을 하루종일 걸었다. 그나마 오후부터는 마음도 조금 풀리고 자신감도 붙으면서 폭설이 내리는 안나푸르나 진풍경에 빠져들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안나푸르나의 설경을 두눈에 가득 담고 아내와 눈만 마주치면 "우와 죽인다!"를 백번도 더 외친것 같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걷는듯 신비롭고 장엄한 풍경 속에 한 생명으로 들어와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고맙게 느껴졌다.


폭설 속에도 마낭을 향해 올라오는 트레커들을 만날 수 있었다. 한두명씩 올라가는 트레커들도 서너 팀 만났지만 한번은 7~8명 되는 한팀의 한국인 트레커들과도 만났다. 올라가는 분들은 위의 상황을 물었고 우리는 그분들의 행운을 빌었다. 한번은 네팔 트레킹을 몇 번 하셨다는 비슷한 연배의 한국인 남자를 만났다. 그분은 나의 배낭이 무거워 보인다며 포터에게 왜 더 많은 짐을 지우지 않냐며 물어왔다. 그분이 보시기에 내가 너무 지쳐보이거나 약해보였는지 모르겠다. 아뭏튼 그분의 나에 대한 선의에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고 헤어졌다. 나는 파샹을 쳐다보고 눈웃음을 보냈고, 파샹은 무슨 영문인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어쩌면 고산지대에 살면서 어려서부터 무거운 짐을 져 나르던 네팔리들이 우리같은 약골에 비해 두세배의 짐을 져 나를는게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파샹이 고용된 포터라기 보다는 라운드 내내 그냥 동행길의 친구로 남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지금까지 그는 충분히 좋은 그 역할 다 하고 있었다.


피상을 떠나 어떻게 걸었는지도 모르게 디카리포카리와 브라탕 탈레규를 거쳐 차메에 도착했다. 아직 어둠이 내리기 전인 5시 반에 하루의 강행군이 끝났다. 이틀 걸려 올라갔던 거리를 하루만에 내려온 것이다. 올라갈 때 묵었던 마낭주의 수도 차메의 같은 숙소인 마르상디 만다라호텔에 지을 풀었다. 벌써 도착한 트레커와 네팔리들이 다이님룸에 가득했다. 타오르는 장작난로를 둘러싸고 서너명의 호주청년들, 1명의 일본인 산악인과 너댓명의 가이드와 셀파들, 그리고 한국인 학생과 포터가 다이닝룸을 채우고 있었다.


일본인 산악인은 오늘 지나온 마을 피상을 내려다보는 해발 6090m의 피상피크를 등정하고 막 내려왔다고 했다. 그는 많이 지쳐보였고 거의 주변에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은채 거친 숨을 쉬며 자신의 육체적 변화에 의식을 집중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전문산악인으로 많은 산들을 등정했고, 이번에는 혼자서 세명의 셀파와 같이 피상피크를 올랐단다. 알고보니 피상피크는 피상에 있던 한국인 위령비에 새겨진 고인들이 등정하다 사고를 당한 바로 그 산이었다. 그의 나이는 60살이라고 했다. 그 연세에 만만하지 않은 정상을 등정하고 왔으니 그의 지친 모습과 주변에 의식을 빼앗기지 않고 자신에 집중해 있던 모습이 이해가 되었다. 같이 했던 셀파들은 모두 큰일을 막 치룬 사람 특유의 의기양양함과 조금은 들떤 모습이었다.


7시가 넘어 사면이 어둠에 둘러쌓여 깜깜하게된 뒤에야 마낭에서 비슷하게 출발했던 3명의 독일 트레커가 도착했다. 같이 피상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우리 보다 늦게 출발한 그들이 보이지 않아 걱정이 되었지만 윗마을 어딘가에 숙소를 잡아거니 생각하고 잊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어둠이 덮친 위험한 길을 마다않고 차메까지 강행군을 한 셈이었다. 눈을 뒤집어 쓰고 추위에 지친 그들을 위해 글거리는 난로가에 모여 앉아 얼굴이 발갇게 익은 우리는 모두 일어나 환호를 질러주고 박수를 쳤다. 3000m이상의 고도에서 그것도 한치앞이 안보이는 폭설을 뚫고 하루에 800m의 고도를 줄이며 28km를 걷는 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독일인 트레커 중 형인 사람은 이번이 9번째 네팔 트레킹이라고 했다. 마지막 까지 마낭에서 쏘롱라로 올라갈 것인지 아니면 돌아 내려갈 것인지 갈등할 때 그의 판단은 나에게도 중요했다. 그는 혼자라면 쏘롱라 패스를 강행할 생각이었지만 첫 트레킹에 고산증때문에 두통에 시달리는 동생과 재수씨와 같이 강행하기에는 자신이 없어 하산을 결정한다고 했다. 우리에겐 포터 파샹의 판단이 더 중요했지만 트레킹 베테랑인 그의 판단도 무시할 수 없었다.


저녁을 먹으며 오늘 수고한 파샹을 위해 네팔 막걸리인 '창'을 시켰다. '창'은 곡물로 빗은 술인데 메뉴에는 'Local Beer'라고 나와 있었다. 맥주라고는 하지만 우리나라 막걸리와 술의 색이나 맛이 비슷했다. 아내와 나도 한잔씩 마셨는데 이날은 힘든 여정때문이기도 했지만 상행 때의 긴장감이 사라져서인지 거의 모든 트레커들이 '창'과 '락시'를 주문했다. 파샹은 전문산악인이 꿈이다보니 체력을 관리하기 위해 담배도 피우지 않고 술은 좋아하지만 딱 한잔 이상 마시지 않는다고 했다. 술값 때문인지 아니면 술을 절제하기 위해선지 모르지만 파샹은 늘 그 한잔을 한모금 한모금 맛을 음미하면서 아끼며 마셨다.

다이닝룸의 온기가 아쉬워 쉬 방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한참을 파샹과 우리가 오늘 얼마나 좋은 결정을 했는지, 우리는 얼마나 운이 좋은 사람인지 되뇌이며 건배를 했다. 힘든 여정을 잘 견뎌낸 아내와 자칭 'Strong Man'인 나 그리고 우리 부부의 길동무가 되어준 파샹은 서로를 치켜세우고 격려하며 또 건배를 했다. 그리고 파샹이 궁금해하는 한국에 대해, 내가 궁금해 하는 네팔에 대해 이갸기를 나누었다. 파샹은 자신은 부자를, 권력자를 혐오하는 마오주의자라고 고백했다. 나 역시 나의 정치적 입장과 한국의 정치상황, 네팔의 정치상황에 대해 짧은 언어와 식견으로 혼동스런 대화를 주고 받으며 밤이 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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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쉬기로 한 날이 밝았다. 보통은 안나푸르나 라운드 중 고도적응을 위해 마낭에서 하루를 쉰다고 한다. 우리는 고도적응이 아니라 쏘롱라로 올라갈 건지 말것인지 결정을 위한 대기상태로 마낭에서 하루를 보내게 됐다. 아침에 일어나 세수할 물을 구하려 방을 나서니 파샹이 잠깐 기다리란다. 파샹은 금방 김이 나는 따뜻한 물을 한주전자 구해서 가져왔다. 따뜻한 물이 얼마나 반갑고 고맙던지 물을 아껴 아내와 양치와 세수를 하고 다이닝룸에 올라갔다. 어제 하이캠프 등에서 하산했다던 청년들은 아침을 먹고 아쉬운듯 머뭇거리다 호텔을 떠나고 고스란히 상행중인 일행만 다이님룸에 남았다.  

 


피상에서 같이 올라온 트레커들은 우두커니 오늘 하루 무엇을 하고 지낼지 걱정스런 얼굴이었다. 방에서 지내자니 춥고 할 일도 마땅찮다. 마낭 시내를 돌아다니고 가게도 들러 시간을 보내자니 문을 연 가게도 인적도 드물었다. 서로들 뭘 하고 지낼건지 궁금해 하고, 가이드가 전해오는 주변 지역의 기상과 길 상황에 대한 소식들을 취합하며 오늘 하루 계획과 이후 여정을 결정하기 위해 조금은 초조한 기색이었다. 한가한 아침 나절을 다이닝룸에서 머무는 동안 비관적인 소식이 속속 도착했다. '쏘롱라는 현재까지 내린 눈만으로도 넘을 수가 없을 뿐아니라 날씨가 계속 안좋아 더 많은 눈이 내릴지도 모른다.' '위로 올라가는 것은 꿈도 꾸지마라', '마낭에서 한나절만에 다녀올 수 있는 코스인 아이스 레이크로 가는 길도 눈이 많이 쌓여 도저히 접근이 불가능하다'. 틸리초로 가는 길 역시도 눈에 묻혀 접근하기에는 너무나 위험하단다. 그나마 강사르까지는 접근이 가능할지 모르지만 확신할 수는 없는 상태라고 했다.


아름다운 강마을 강사르는 이번 여정에 꼭 가 보고 싶었던 곳이었기에 파샹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접근이 가능할지 모른다는 소식에 과감히 호텔을 나서기로 했다. 침실로 돌아와 간단한 비상식량을 챙기고 가장 가벼운 차림으로 길을 나섰다. 강사르 쪽으로 가다가 조금이라도 위험해 보이면 돌아올테니 파샹은 쉬고 싶으면 호텔에서 쉬어라고 권했다, 하지만 결국 파샹도 우리부부만 보내기가 걱정스러웠나보다. 혹시 위험할지도 모른다며 자신도 같이 가겠다고 따라나섰다. 다른 트레커들도 나름의 여정을 잡거나 아니면 상황파악 겸 산책겸 마을 주변을 둘러보겠다며 모두 호텔을 나서기 시작했다.


마낭의 거리는 눈더미에 묻혀있었다. 간혹 추위에 웅크린 주민들과 조우하곤 했지만 그래도 상당히 큰 산중도시인 마낭의 거리치고는 너무나 사람의 발길이 드물었다. 쏘롱라 쪽으로 방향을 잡고 마을을 관통하자 왼쪽으로 갈라지는 길이 틸리초 방향이라고 가리키고 있는 표지를 만났다. 막상 마낭시가지를 벗어나 틸리초쪽으로 방향을 잡고나니 파샹은 조금 걱정스런 얼굴로 눈속에 묻혀버린 길을 찾을 수 없어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결국 대여섯번 안나푸르나 라운드를 했지만 틸리초쪽은 한번도 가본 적이 없단다. 길을 모른다고 뒤 늦게 고백한 파샹은 자신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우리 부부보다 몇십미터 앞서서 둔턱에 올라 길을 살피기도 하면서 용감히 앞서나갔다. 파샹은 길을 찾지 못하고 눈밭을 헤메기 시작했다. 길을 물을 사람을 찾은 수도 없어 난감한 상황이 조금 이어졌지만 오래지않아 다행히 바람에 눈이 쓸려 지나간 길의 자락을 발견하게 되었고 본격적으로 강사르 쪽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왼편으로 마르샹디 강을 끼고 가파른 절벽을 따라 이어진 평탄한 길을 걸으며 눈과 산, 그리고 마르샹디 강이 이룬 환상적인 풍경에 빠져들었다. 마르샹디 강은 상류쪽 협곡에서 내려오는 두줄기의 강이 합쳐져 넓은 수역과 광활한 고수부지를 형성하고 있었다. 오른쪽 협곡은 쏘롱라쪽에서 내려오는 줄기고, 왼쪽의 협곡은 틸리초에서 발원하여 강사르를 지나쳐 오는 강이라고 했는데, 이들 두 줄기의 강이 합쳐지는 지점에서 강사르 쪽으로 건너가는 다리가 있었다.


 
다리를 향해 나아가는 중에 갑자기 시야에 가파른 절벽을 타고 올라 길을 가로질러 뛰어가는 야생염소의 무리가 들어왔다. 파샹은 이들 야생염소를 Tahr라고 한다며 너무 반가워했다.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하다가 일정 고도 이상에서 이들 야생염소를 만날 수 있지만 아주 드문 경우라도 했다. 어디선가 읽었는데 이들 야생염소를 만나면 행운이 온다는 속설이 있단다.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믿을 만치 귀한 야생염소를 이렇게 쉽게 그것도 바로 지척에서 무리로 만나다니 이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며 염소 무리를 따라 나섰다. 하지만 절벽을 타는 야생염소의 발걸음을 내가 따라갈 수는 없었다. 더 큰 문제는 강쪽으로부터 가파른 절벽을 타고 올라 길을 가로질러 산쪽 언덕으로 뛰어가는 야생염소을 뒤따르자니 그들이 굴리고 간 돌이 내 쪽으로 쏱아져 내려서 더이상 접근하기가 불가능했다. 파샹의 말로는 야생염소가 지나가면서 자연스레 구르는 돌도 있지만 사람이 따라오지 못하도록 염소가 의도적으로 돌을 굴리기 때문에 정말 위험하단다. 그래도 그들 야생염소의 모습을 그럭저럭 사진에 담아 뿌듯한 마음으로 행운을 현실화할 방도를 생각하며 길을 이어갔다. 나는 아내에게 귀국하자마자 로또를 사볼까며 농을 치며 로또가 당첨된 상황을 상상하는 재미에 신이났다.


마르샹디강을 건너 좁고 가파른데다가 눈이 무릎까지 빠지는 길을 올랐다. 오른쪽은 강바닥까지 떨어지는 수십미터의 수직 낭떠러지다. 그냥 돌아가기에는 아쉬움이 너무 크고 계속 전진하자니 감수해야할 위험이 너무 컸다. 마음속에 공포가 자라기 시작할 때쯤 갑자기 파샹이 절벽쪽으로 넘어져 수십미터 낭떠러지를 미끄러내려가려는 것이 아닌가. 나는 순간적으로 슬라이딩을 하여 파샹이 메고 있는 배낭의 끈을 움켜쥐고 당겨 올렸고, 파샹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눈을 털며 일어섰다. 나는 너무 놀라 가슴이 뛰고 이마에 땀이 솟았다. 그런데 파샹은 얼굴 가득 웃음을 띠는 것이 아닌가? 파샹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장난이었다고 했다. 나는 화를 누르고 다시는 그런 장난을 하지마라고, 장난이 장난으로 끝나지 않고 사고로 이어진다고 재차 주장을 했고 파샹은 조금 머슥한 표정을 지었다. 진정을 한뒤 언덕길을 마저 올라 멀리 강사르 마을이 보이는 지점까지 도달했다.


강사르 마을은 시야에 들어오는데 마을로 가는 길은 강을 건너기 전의 길과는 달리 쌓인 눈의 깊이와 길의 여건이 또 달랐다. 이런 식으로 계속 전진하기에는 위험이 너무 크게 느껴졌다. 결국 강사르마을과 마르샹디 강, 그리고 산과 강의 조화가 만들어 낸 풍경에 한참을 빠져있다가 더이상의 전진을 포기하기로 하고 뒤돌아섰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마낭 거의 다 와서야 강사르를 찾아 길을 나선 한국인 트레커들을 만났다. 길 상황을 전하고 모두 같이 호텔로 돌아왔다.

다이닝룸에 난로를 피우자, 강가푸르나 딸까지 다녀왔다며 독일인 트레커들이 들어섰다. 강가푸르나까지는 그렇게 힘들이지 않고 접근이 가능했단다. 조금있으니 오늘 피상에서 올라왔다는 한국인 남성 트레커 한분이 들어섰다. 그분은 가이드나 포터도 없이 포카라서 부터 트레킹을 시작하셨다는데 베시사하르에 이르기 전에는 마을을 찾기 전에 날이 저물어 노숙까지 하며 강행군을 하셨다고 했다. 한국에서 물리 선생님을 하신다는 그분은 보통 배짱이 아니신 분 같았다. 그분이 한국에서 준비해 오신 누룽지 차를 얻어 마시며 오랜만에 구수한 한국 밥의 맛과 향을 기억해 보았다.

늦은 오후 네팔리들이 마을회관 같은데서 영화상영이 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우리부부는 난로가를 떠나기 싫어 그냥 다이닝룸에 머물렀고 트레커들은 주변 나들이를 갔다가 속속 도착했다. 눈에 갇혀 내일의 여정을 결정할 수 없는 트레커들과 네팔리들이 모여 담소를 나누며 마낭에서의 이틀째 밤을 맞았다. 그리고 그 순간까지 접한 정보와 이날 강사르 쪽으로 접근해왔던 경험을 아울러 최종적으로 하산을 결정했다. 독일인팀도 동생과 제수가 고산증을 보이며 두통에 시달리는 상황때문에 하산을 결정했다. 오늘 도착한 한명의 한국인 트레커만 남기고 같은 호텔에 묵은 모든 트레커가 하산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방으로 돌아와 또 내리기 시작한 눈발을 유리창 너머로 확인하며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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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보통 추위가 아니었나보다. 일어나 물병을 찾아 컵에 물을 부으니 물이 나오질 않는다. 물병을 때리자 얼음가루가 컵안으로 쏱아진다. 방에 난방이 따로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티망에서부터 눈길로 접어들었지만 확실히 3,000m가 넘는 고지인 피상은 추위가 확연히 다른 것 같다. 이렇게 본격적으로 추워지면 4천, 5천 고지로 올라가서는 얼마나 더 추워질지 걱정이다. 어제 만난 하산 트렉커들은 견디기 힘들만치 추웠다고들 호들갑을 떨었다. 마낭이 영하 20도 정도라고 했다. 내가 사는 곳도 겨울아침이면 영하20도정도씩 자주 내려가니깐 못견딜 정도는 아니겠구나 안도가 되었다.
 


아침으로 삶은 감자와 애플팬케익을 먹고 8시 45분 Tilicho Hotel을 나섰다. 어제 추위에 쫒기며 대충 둘러봤던 마을을 다시 한번도 찬찬히 들여다 보았다. 마을을 벗어나자 마자 작은 강을 건너고 오른쪽으로는 Upper Pisang쪽으로 가는 길이고 왼편으로 마낭쪽으로 갈라지는 지점에 탑이 하나 있다. 무슨 탑인지 멀리서 사진을 찍고 가까이 다가가 보니 생각지도 않은 곳에 한국인 위령탑이 아닌가. 찬찬히 읽어 보니 1989년 9월 나와 동갑내기 산악인이 이곳에서 생을 마감한 것이다. 그때라면 내가 대학을 막 졸업하고 취업과 학문, 그리고 또 다른 인생길을 놓고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잠시 헤메다가 다시 대학원을 준비하던 시기가 아니던가? 그 시퍼런 청춘에 그분들은 이곳 낯선땅 안나푸르나의 눈속에 잠이 드신 것이다. 대학원 진학이라고는 하지만 마땅히 하고 싶은 것도 없고, 살고싶은 삶은 살 용기는 부족하여 단지 결정을 유보하기 위한 고육지책에 불과했던 것이 사실인데, 그 분들은 이곳 피상의 설산을 오르며 자신의 삶의 가능성을 찾고 대자연의 신비 앞에서 주어진 자신의 삶을 축복하며 마지막 생명의 에너지를 불사른 것이 아닌가?


그시절 그 나이 때는 보통사람이 외국여행을 한다는 것은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이었지만, 만약 내가 기회가 주어져 이곳 안나푸르나를 밟았다면 나의 삶의 또 다른 가능성을 확인할 수도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때 내게 주어진 우주는 좁았고, 눈은 어두웠고, 심장은 약해빠졌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망설임 속에서 나이만 먹어 온 나의 긴 삶과 청춘을 불살라 그렇게 낯선 설산에서 생을 마감한 그 분들의 짧은 삶이 대비되면서 앞으로 살아갈 내 인생의 무게가 묵직하게 느껴졌다. 두 분의 명복을 빌며 걸음을 재촉했다.



한시간이나 걸었을까? 멀리 비행장이 있다는 홈데가 보이는 언덕엘 올라섰다. 나로다라 언덕이란다. 전망대가 있고 홈데와 홈데 넘어 안나푸르나 연봉들이 한눈에 들어오는 멋진 조망이다. 배낭을 벗고 한참을 쉬며 고도가 높아감에 따라 억지로 줄이고 있던 담배를 한대 피웠다. 삶의 곡절이 많은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살아가다가 이렇게 한번씩이라도 전망이 확 터이는 그런 경험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는 얼토당토 안한 생각이 일었다. 하지만 내 삶의 전망이야 그 자리에 그냥 만들어져 있는 풍경이 아니고 스스로 만들어나가야하는 걸, 내가 게을러서, 그리고 소심한 탓에 지금 답답한 삶을 살고 있는걸 누구탓을 하겠는가? 다시 배낭을 짊어지고 내리막길로 들어섰다.



길은 눈속에 파묻히고 온데 간데 사라졌지만, 눈 속에 숨은 길을 찾아 네팔리들이 내놓은 발자국을 따라 끝없이 걷었다. 눈은 점점 깊어졌다. 잠시 쉴 때는 아름다운 설경에 감탄하면서도, 길을 걷기 시작하면 이내 풍경은 다 잊어버리고 오직 시야는 앞사람의 발자국만 쫒아 기계적인 걸음에 내몰였다. 풍경에 빠져들기엔 발길이 너무 바쁘기 때문이다.


오후 1시나 되어서야 홈데에 도착했다. Maya 식당이라는 곳에 들어서니 미리 도착한 분들이 반갑게 인사를 해온다. 우선 음식을 시켜놓았는데 뒤쳐진 제주 여학생이 감감 무소식이다. 눈구덩이에 혹시라도 길을 잃으면 보통 일이 아니다. 모두다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15분 정도 늦게 도착한다. 추위에 쫒겨 너나할 것 없이 모두 롯지의 부엌에 몰려든다. 좁은 부엌이 조리에 불편할 만치 사람들이 들어서자 가이드 한분이 남자들은 다이닝룸으로 나가달란다. 와이프와 학국인 여선생님은 부엌에 남아 롯지 주인의 아이들과 놀아준다. 역시 특수학교 선생님 이셨어 그런지 말이 통하지 않는 네팔 아이들 조차 소통하고 공감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나중에 식사가 끝나가자 아이들이 다가와 'pen'을 요구했다. 아내가 가방에서 한개를 꺼내 주자, 자기 언니 것도 하나 더 달라고 한다. 어쩔 수 없이 또 하나를 주고 나니 우리가 쓸 게 없을까봐 걱정스럽다.


체크포스트에 들러 체크를 하고 홈데 비행장의 상황을 살폈다. 혹시라도 쏘롱라 패스가 불가능해질 경우 비행기로라도 이동해야하는 상황이 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자갈밭 활주로에 소형비행기를 별로 타고 싶지 않았지만 상황이 악화되면 그역시 어쩔 수 없는 선택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래에 비행기가 오지도 않았고 가지도 않았단다. 역시 활주로는 두터운 눈이 그대로 쌓여있어 혹시라도 지금 비행기가 온다고해도 활주로에 눈을 치우는데만 몇일은 족히 걸릴 것같다. 소형 비행장에 짧은 활주로지만 장비라고는 하나도 없이 오직 육체노동으로 눈을 치워야하기 때문이다. 되돌아 하산 하게 될 경우 홈데에서 비행기를 이용하는 대안은 가능성이 없어 보였다.


뭉지와 브라카는 어떻게 지났는지 기억도 없다. 미리 카투만두에서 듣고서 기대했던 '베이커리'를 만날 수 있었지만 모조리 휴업중이었다. 오래 실망하고 할 것도 없이 군침만 삼키고는 그냥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 오직 눈만보고 하루를 보낸 것 같다. 예상보다 눈이 깊어 시간이 지체되어 날이 저물기 전에 마낭에 도착하려면 여유가 없었다. 홈데를 떠난 뒤로는 빨리 마낭에 도착하는 목적말고는 아무생각없이 발을 내디뎠던것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덕위에 자리한 마낭을 들어설 때는 산그늘이 짙어 저녁 어스름으로 변해가는 시간이었다. 하루의 트레킹을 마치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지만 그나마 어둠이 길을 삼키기 전에 도착한 것에 안도했다. 마낭을 둘러보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고, 또 사람의 활기가 사라진 마을을 구경할 흥도 나지 않았다.


지난 몇일 알고보면 파샹이 늘상 이용하고 안면이 있는 롯지에서 묵게 되었지만 파샹은 꼭 마지막 나의 의사를 물었다. 내가 롯지의 선택권을 줬음에도 불구하고 꼭 롯지를 선택하기 전에 나의 의사를 물었는데 사실 '이러러저러해서 이 롯지가 좋고 저 롯지는 좋지 않다. 어떤 롯지를 선택하겟는가?'는 식으로 물어오니 솔직히 물어보나 마나다. 나의 'OK! This is good!' 한 마디는 단지 파샹을 존중하는 제스추어불과했다. 특별히 고집할 이유가 없는한 가이드나 포터가 선택하는 롯지에 대부분 머무는가보다. 우리도 그랬고, 다른 팀들도 다 그랬는데, 오직 한명만 다른 롯지로 향했다. 그분의 포터가 원하는 단골롯지로 향한것 같다, 우리는 'Yeti Hotel'을 들어섰다.


마당은 통행이 가능할 정도의 공간만 남기고 모조리 누구덩이다. 사람이 사는지, 영업은 하는지 온기라곤 없고 인기척도 없다. 파샹이 윗층으로 올라갔다 오더니 룸번호를 알려주며 키를 준다. 키를 들고 가까스레 찾은 방에 짐을 부리고, 이틀밤을 지낼 곳이라서 빨래를 맡기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역시 세탁소는 많았지만 문을 연곳은 하나도 없었다. 지나가는 네팔리 말로는 주인이 카트만두로 겨울을 나러 갔단다 . '그래, 이 와중에 왠 빨래는... ' 쉽게 포기하고 롯지로 돌아와 양말이라도 빨 요랑이었지만 화장실은 물도 나오지 않는다.


맨 위층인 4층에 있는 다이닝룸으로 향했다. 겉에서 보기엔 영업을 하는지 마는지 의아했었는데 그동안 트렉커들이 몰려왔나보다. 호주 등에서 왔다는 20세전후의 예닐곱명의 젊은이들로 다이닝룸이 왁작지걸 소란스럽다. 같은 일행이 아니었지만 모두들 쏘롱패디나 하이캠프 등에서 이삼일씩 날이 좋아지기를 기다리다가 결국 쏘롱라를 넘어가는 것을 포기하고 되돌아 내려왔단다. 어디 미개척지를 정복이라도 하고 온양 의기양양한 젊은이들의 열기로 다이닝 룸이 후끈거렸다. 구석에 세워져 있는 기타를 들고 노래까지 부르며 차가운 안나푸르나의 밤을 뜨겁게 달구었다.


인적이 드문 산중 마을에서 사람을 만나는 것 만치 반가운 일이 없지만 올라가기위해 마낭에 도착한 사람들에게 등정을 포기하고 하산중인 사람들과의 만남은 썩반갑지 않을 수 밖에 없었다. 계속 올라 갈 것인가 되돌아 내려갈 것인가 하는 어려운 결정의 순간이 다가온 셈이다. 파샹은 계속 비관적인 전망을 내어놓으며 설사 쏘롱라를 통과한다고 해도 묵디나트, 까그베니까지 완전히 빙판이라서 위험하기 이를데 없단다. 솔직히 같이한 몇일사이 파샹은 항상 짧은 하루의 목표치, 그리고 느린 일정을 제안했다. 가이드가 편안한 일정을 원하는 것은 당연지사고 혹시라도 위험이 따르는 시도는 피하고자하는 당연한 일일것이다. 하지만 파샹의 판단을 전적으로 따르다보면 트렉킹이 그야말로 관광투어가 되어버릴 것이 붐명했다. 판단을 마낭에서 지내는 이틀동안 천천히 상황파악을 더 하고 내리자고 미루었지만 사실 나 역시 비관적인 생각이 들었다.


한고비를 넘기고 다음 일정을 확정한 청년들은 홀가분함때문인지 계속 들떠 있었고 시끄럽기까지 했다. 상행인 트레커들은 나이도 나이였지만 몸도 그만치 피곤한 상태인데다가 또 아직 쏘롱라 패스를 포기할 것인지 시도할 것인지 결정을 못한 상태의 긴장감 때문인지 난로가에 둘러앉아 묵묵히 불만 쬐고 있었다. 날이 저물고 상행인 일행은 모두 비슷한 시간에 저녁을 주문했는데 그때 먼저 주문한 청년들이 음식이 나왔다. 돌접시 위에서 계속 지글거리며 맛난 향과 김이 무럭무럭 나는 그 음식이 이곳에서 먹을 수 있는 최고급 음식인 야크스테이크라고 했다. 이 말을 듣는 거의 동시에 모두 '주문 취소'를 외치고는 주문을 다시 하겠다고 나섰다. 800루피면 비싼편에 드는 다른 음식값의 두배가 넘는 가격이지만 강행군을 한 이날 하루는 그래도 다들 그 정도의 저녁 식사비가 아깝지 않은 눈치였다. 안나푸르나 라운드를 떠나와 이날 최고의 음식으로 고단한 육신을 위로하고 따뜻한 다이님룸에서 밤이 깊어지기를 기다리다가 침실로 돌아왔다.


침실 화장실은 물도 나오지 않고, 방안에는 화장실 냄새가 가득했다. 창밖은 눈발이 다시 굵어지고 바람역시 거세져 약한 외창을 부서져라 흔들어댔지만 곤한 몸은 아랑곳하지 않고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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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 마신 락시 한잔이 다 얼굴로 갔나보다. 일어나자 마자 얼굴을 만져보니 내 것이 아닌듯 퉁퉁 불어있다. 한잔의 술이 이렇게 대단한 걸까? 아니면 일종의 고산증일까. 티망의 고도는 고작 2,270m인데 벌써 고산증이 올리는 없다. 순전히 술한잔 때문인 것 같다. 아직 고산이라고 하기엔 멀었지만 어제는 그래도 가파른 길때문인지 걷는데 힘이 부치기 시작했다. 그래서 출발전에 최대한 짐을 줄여보려고 이것저것 뒤척여보지만 마땅히 버릴 것이 없다. 다 욕심때문이겠지만 그래도 여정의 초입부터 너무 많이 버렸다가 나중에 필요한 사태가 오면 어쩌나 걱정이 든다.  몇종류의 상비약중 오래된 것은 버리고 쓸만한 잡동사니는 롯지에 남기기로 한다. 그래봤자 무게로 몇백그램이상 되지 않는다. 다시 짐을 뒤척여보니 마지막 짐은 역시 책이다.


[바가바드 기타]!  책표지 안쪽에 1985년에 구입한 걸로 기록되어 있다. 인도철학사 수업 때문에 구입한 책인데 작고 가볍다. 그래서 이번 여정에 동행하게 되었는데 벌써 짐으로 느껴진다. 네팔이 흰두교국가고 인도 문화권이라는 생각에 들고 온 책인데 영 정이 들지 않는다. 저녁 때마다 몇번 펼치기는 했지만 읽히지가 않았다. 읽은지 26년이나 지난 책을 그것도 까마득히 잊고 살던 인도의 경전을 읽는다는 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했다. 우파니샤드, 절대 지혜, 아르주나와 크리쉬나, 브라만과 아트만, 우주, 궁극적 존재... 눈에 들어오는 단어마다 다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같이 낯설고 생뚱맞다. 안나푸르나가 있고. 그 언저리에 살아가는 삶들이 있고, 그 산속을 걸으며 그들의 삶과 나의 삶을 생각하는 지금 브라만이나 우주, 궁극의 지혜는 너무 멀고 무겁다. 내 발을 딛는 땅의 구체성, 내 발바닥 감촉의 직접성에 빠져든 내가 지금 바가바드기타를 읽는다는 것은 허영이고 기만으로 느껴졌다, 지금 읽히지 않는다고 해서 나중에 다시 읽을 것 같지도 않다. 방을 나서면서 과감하게 탁자에 남겨놓는다. 아마 불쏘시개로 사라지겠지. 아니면 혹시 다음 한국인 트레커가 이 책의 주인이 되고 다시 읽힌다면 더할 나위없이 좋으련만... 지금 나에게 [바그바드기타]는 단지 짐일 뿐이다.


오믈렛과 티베탄 브레드로 아침을 해결하고 티망의 마나슬루 호텔을 나선다. 이내 아침 산그늘 추위에 얼어붙은 티망을 벗어나 밝을 햇살 속에 드러난 따뜻한 마을길과 산길을 걷는다. 이름 모를 마을을 지나고, 소와 개들을 만나고, 그리고 어제처럼 하산중인 사람들을 만난다. 지나는 작은 마을들은 비어있고, 길을 오가는 소와 개는  춥고 외로워 보인다. 겨울철만 비워둔 집인지 마당이 단정하게 정리된 집은 그나마 정감이 느껴진다. 한쪽 벽이 허물어가고, 마당에 아무렇게나 자란 풀이 말라가는 집은 흉물스럽다 못해 처연하기조차 하다. 너른 마을을 지나도 사람 구경하기가 쉽지 않다. 여전히 사람사는 세상이지만 티망을 지나서부터는 점점 안나푸르나로 빨려 들어가는듯 흰산이 가까워진다. 사진기의 앵글 가득 흰산이 잡히고, 목덜미를 지나는 바람에 냉기가 감돈다.       


'니 하오마!' 한 무리의 하산중인 트레커들과 조우했다. 할머니와 함께 한 가족으로 이루어진 팀같다. 그 할머니는 나를 중국인으로 보았지만 나는 그들의 발음을 듣고 그들이 일본인임을 알아 본다. '곤니찌와!' 나의 인사에 그들은 국적을 물어온다. 그분들이 다시 인사를 정정한다. '안녕하세요.' 그리고 이어서 내려 오는 한무리의 사람들과 엉킨다. 중국인 팀은 피상에서 철수 중이란다. 국적을 묻지 않았던 한 팀은 하이캠프에서 이틀을 대기하다가 결국 포기 하고 내려온단다. 서로 행운을 빌며 손을 흔들고 돌아서지만 또 얼마가지 않아 하산중인 트레커와 마주친다. '쏘롱라를 지나 오시는 길이세요?' 뻔히 알면서 자꾸 묻는다. 혼자 하산중인 어떤 백인 청년은 기다렸다는 듯 마구마구 위의 상황을 쏟아낸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쏘롱라 패스를 포기하고 내려가는 중이고, 위의 상황이 너무 좋지않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다 하산중이지만 그래도 반대편에서 쏘롱라를 넘어 온 사람들을  만나고 우리도 쏘롱라를 넘을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는데 아무도 없다. 올라가는 무리와 내려가는 무리가 뒤엉키고 나면 다시 올라가는 사람들끼리 얻은 정보를 나눈다. 결론은 연초부터 지금까지 러시아 트레커 1명만이 유일하게 쏘롱라를 패스했다는 것이다. 갈수록 절망적이다.  


티망을 출발한지 2시간을 조금 지나, 무장한 군인들이 삼엄한 경계를 하고 있는 마을에 들어섰다. 붉은 깃발이 걸려있고, 마을 초입의 건물에 [HILALI AUTONOMOUS STATE]라고 적혀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안나푸르나 산자락에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이 심어지고 자라고 있었던 흔적들이다. '자치'라는 단어를 보자 뜬금없이 나의 가슴도 뜨거워진다. '중앙'권력을 배제하고 공동체의 구성원이 스스로의 삶을 결정해 나가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은 아마 '자본'과 '국가'가 소멸하는 먼 훗날까지 인류의 가슴에 불을 지필 것이다. 물론 안나푸르나 산자락 마을의 '자치'와 '해방'은 추상적인 꿈이 아니라 지주의 횡포, 폐습의 억압 등 현실적인 질곡을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꿈과 열정이  마오주의 분파 등 좌파 정당으로 모아져 네팔은 큰 정치적 격변을 겪었고 지금도 그 여진이 진행중이다.  마오주의 공산당이 합법정당화되고  집권에 성공하면서, 1997년에 시작된 내전이 2006년에 종식되었다는 네팔. 이어서 2008년에 국민투표를 통해 왕정이 폐지 되어 네팔은 해방되었지만 '정권획득'보다 더 심원한 문제는 부정부패의 척결, 기득권 일소, 가난으로부터의 국민의 구제였다. 가난한 소국 네팔이 이 아름다운 자연만치 정의롭고, 풍요로운 사회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문제의 해결은 지연되고 40여개 이상의 정당이 난립한 정치는 혼란스럽단다. 그와 같은 현실에 합류하기를 거부하는 일부좌파는 나름의 자치구, 해방구를 기반으로 현정부에 저항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15,000명의 목숨을 앗아간 내전의 총소리는 사라졌지만 인민의 삶을 옥죄던 근원적인 악이었던 부패하고 무능하고 폭압적인 왕정이 폐지 되었을 뿐 그로 인해 야기된 네팔의 사회적 과제들은 아무것도 해결된 것이 없어 보인다. 
 


차메에 도착한 것이 11시 30분. 차메는 마냥주의 HeadQuart란다. 마을의 초입에 안전한 식수를 유상으로 공급하는 [SAFE DRINKING WATER STATION]이 있고, 얼마 안가서 일종의 보건소인지 사설 병원인지 [HAMRO MEDICAL HALL]이 있다. 이들 역시 계절탓인지 문이 굳게 잠겨있다. 초라한 [MEDICAL HALL]의 외양이 이곳 의료상황을 말해주는 것 같다. 시가지로 접어드니 일종의 농업기술센타, 경찰서가 있고 은행도 있다. 은행은 무장한 군인이 길 양쪽을 경계하고 있는 것이 참 인상적이다. 그만치 치안이 불안전하다는 증거인가? 아니면 아직 내전의 여진이 남아 있는 걸까?


어제 딸에서 티망까지 오르는데 조금 힘들었기 때문에 오늘은 차메까지만 오르고 남는 시간을 쉬기로 했다. 도착하자마자 짐을 부리고 바로 커리라이스를 주문한뒤 차메의 거리를 나섰다. 차메는 베시사하르를 떠난 뒤 만난 제일 큰 마을이다. 사실 마낭주의 수도라지만 그렇다고 도시라고 이름 붙이기에는 마을의 규모를 넘지 않는다. 차메는 단지 조금 큰 마을인 셈이다. 한 주의 행정 중심답게 있을 것은 다 있지만 산골마을의 정취를 헤칠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마을의 곰파를 돌고,  마을길을 따라 마니차를 돌리며 온천이 있다는 파샹의 말을 듣고 찾아나섰다. 차메의 끝단, 강이 흐르고 있고 그 강을 건너 온천이 있단다. 막상 다리를 건너 온천을 가리키는 표지를 따라가니 온천 시설이 아니라 그냥 강둑 여기저기 바위 밑에서 온수가 솟아오르고 온수가 솟는 바위마다 서너명씩 모여 빨래도 하고 목욕도 하는 그야말로 노천온천이다.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비치는 큰 바위위에 앉아 안나푸르나의 눈이 녹아 내린 찬 강물과 안나푸르나의 땅속에서 솟은 뜨거운 물이 만나는 진풍경을 바라다본다.


 롯지로 돌아오는 길에  우리가 머무는 롯지 바로 옆 건물 2층에 여성인권보호센타가 있다. 작은 빨래를 하고, 배낭의 짐을 정리하다보니 우리가 가진 짐을 줄이면서 작은 도움이 될만한 것들이 나온다. 이번 여정을 떠나면서 집에 뒹굴던 묵은 상비약을  챙겨왔는데, 또 한의사 친구와 약사친구가 집나선 친구를 위해 챙겨준 상비약까지 필요이상의 약을 가져오게 되었다.  오늘 [여성인권보호센타] 를 보고, 마을 초입의 보건소를 생각해보니 우리가 가진 상비약을 나눈다면 도움이 될 것 같았다.  파샹과 아내는 너무 많이 가져온 물휴지와 상비약을 들고 여성인권센타를 다녀왔다. 아내는 용도와 투약법을 설명하기에 힘이 들었지만 그들의 정말 고마워하는 모습에 감명받았단다. 기부는 작은 것을 나누고 큰 마음을 같이하는 것인가보다.



차메에서 첫 롯지다운 롯지를 만났다. 위로 올라올수록 롯지의 시설은 좋아지고 트레커의 발길이 잦다. 길을 걷기 시작한지 5일만에 한국인 트레커를 만나고, 다이닝룸에서 난로불을 사이에두고 자리가 마련되었다. 독일인 3명, 프랑스인 1명, 한국인 5명, 그리고 국적이 기억나지 않는 서너명의 백인들...그리고 몇명의 네팔리가이드와 포터가 둘러 앉으니 거의 국제적 모임이 된 셈이다. 짧은 영어 탓에 숯한 대화의 주제는 포기되고 대화의 주제는 하나, 우리 모두 쏘롱라를 건너갈 수 있을까 없을까다.  오직 인도서 인턴과정을 마치고 여행길에 올랐다는 대구청년만이 영어로 대화를 나눈다. 독일인들은 원래 과묵한 성격탓인지 서먹한 자리가 이어지다 결국 자국인끼리의 수다로 모아진다. 특수학교 선생님, 대학생인 제주 아가씨 이렇게 모두 오랜만에 사람과 사람이 만나 길떠난 자의 설레임을 서로 나누다 보니 여행의 참맛이 느껴진다.


장작 난로만치나 훈훈한 저녁시간을 가지고 룸으로 돌아오니 하루의 피로가 몰려온다. 잠에 골아 떨어져 다시 눈을 떠니 새벽 2시 50분. 초저녁 9시에 잠이 들어 새벽 3시전에 눈을 뜨니 새벽 시간이 너무길다. 모처럼 여행경비를 정리하고 일기를 쓰고 싶어 안경을 찾으니 보이질 않는다. 온방의 짐을 다 뒤적이다 보이질 않는 일기를 쓰고 다시 잠을 청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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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핏 잠이 들고 새벽일찍 눈을 뜨 2012년의 첫날을 맞았다. 오늘부터 라운드가 시작점인 불불레로 로컬버스를 타고 떠난다. 먼지와 진동 소음과 밀폐공포와도 싸워야할 것이다. 7시간에서 길게는 9시간이 걸린다는 여정. 기대되고 또 걱정되기도 한다. 카트만두는 해발 1300m 정도지만 먼지와 매연때문인지 고도때문인지 가벼운 제체기와 콧물이 나고 호흡이 조금은 불편하다. 이제 시작인가?


7시가 조금 넘어 오늘 길을 떠나는 트레커들과 함께할 가이드와 포터분들이 자이언트 민박을 들이닥쳤다. 모두 너댓명. 그중 한명이 우리 부부와 안나푸르나 라운드를 같이할 포터다. 먼저 다른 코스로 떠나는 트레커들과 식탁에 앉았고, 네팔리 분들은 따로 상을 차렸다. 식사를 하고 나서 이구대장님께서 그 중 가장 젊어 보이는 한 사람을 소개해 준다. Pashang Kagi Sherpa. 


일단 건실한 인상에 젊어서 마음에 들었다. 인사를 나누고 나이를 물으니 스무살이란다. 내 딸 보다 두살어린 학생이다. 카트만두의 한 대학에서 생물학을 공부중인데 방학중에 아르바이트로 포터일을 한단다. 인사를 마치고 먼길 갈 짐을 쌌다. 포카라행 비행기를 타야하는 트레커들이 먼저 숙소를 떠나기 시작했고, 한팀 두팀 배웅을 하다보니 마지막으로 우리 부부만 남았다.
이틀 밤을 자고 많은 시간을 같이 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벌써 정이들기 시작한 이구대장님, 그리고 [네팔 히말라야 트레킹 길라잡이]의 저자이시고,  내가 아는 한 한국에서 가장 네팔을 잘 알고 사랑하시는 분이신 '백두산'님과 인증샸을 찍고, 앞으로 스무날 넘게 한길을 가야할 파샹, 그리고 자이언트민박에서 주방일을 맡고 있는 상냥하고 이쁜 아가씨 찬드라와도 출발에 앞선 인증샷을 찍었다.


8시15분에 집을 나섰다. 그 순간 자이언트 민박의 울타리를 완전히 벗어나 낯선 나라로 접어드는 기분이 들었다. 일차 목적지인 베시사하르행 버스를 타기 위해 겅거부 버스파크로 향했다. 숙소에서 걸어서 10여분 거리밖에 되지 않았지만 도착한 버스파크는 내가 상상했던 버스터미날이 아니었다. 매표소라고는 구멍가게보다도 작았고, 버스의 종류나 출발 시간, 목적지 도착예정 시간 등 없으면 안될 것 같은 정보는 하나도 없었다. 버스터미날임을 알려주는 표식은 단지 도로를 따라 이런저런 종류의 차량들이 여러대 서있다는 것이 전부였다. 사실 정보에 대한 강박이 현대병인지 모르겠지만 그 모든 당연한 것들의 부재에도 버스는 나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황량한 겅거부 버스터미날을 떠나기 까지 또 여러명의 거지들과 곤혹스런 조우를 하고, 우리의 대형 배낭 두개는 봉고 지붕으로 올려졌다. 출발 직전에 앞타이어 하나를 똑같이 닳아 더 나아 보이지도 않은 다른 타이로로 교체한 버스는 9시가 다 되어 출발했다. 버스비는 외국인 트레커와 네팔인사이에 이중가격제가 행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파샹으로부터 들었고 3명분 1,145루피를 지불했다. '가난한 나라에 그렇게라도 해야지 먹고살지.'라는 생각을 잠시잠깐하고 있는데, 버스는 시내의 복잡한 도로를 따라 수많은 오토바이들과 뒤엉켜 질주하기 시작했다. 예상했던 일이지만 손에 땀을 쥐게하는 공포의 질주를 하루 온종일 감수해야된다는 사실에 곤혹스러웠지만 그 역시 한국인의 '신경증'에 지나지 않을터... 마음을 다잡았다.


가파른 내리막길에, 길 왼편은 천길 낭떠러지고, 노면의 아스팔트 포장은 거의 다파헤쳐져 있고, 가드레일도 제대로 설치되지 않은 길이지만 버스는 고속도로 달리듯 질주를 계속했다. 클락션 하나로 다른 차량들과 모든 신호를 주고 받으며 가파른 커버길에 구애받지 않고 거의 대부분의 차량을 추월했다. 한국에서 질주하는 택시를 위해 다른 차들이 양보해 주는게 일종의 불문률이듯, 네팔에서 봉고버스는 미친듯이 질주했고 다른 차량들은 거의 대부분 역시 클략선으로 신호를 주고 받으며 길을 양보했다. 베시사하르까지 가면서 길가에 쳐박힌 두어대의 차를 볼 수 있었지만 다행히 큰 인명 피해는 아닌것 같아 보였다. 이런 길에서 이런 차로 그렇게 운전하고도 사고가 이렇게 많지 않은 것이 오히려 신기했다. 아니, 내가 느끼는 공포는 그와 같은 생활이 일상인 사람들에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몰랐다. 사고의 공포, 죽음의 공포가 망상으로 까지 확대된 사람과 죽음과 삶이 너무 가까이 있고 서로가 낯설지 않은 세상과의 조우... 이 역시 네팔이라는 나라에 와서 겪게되는 또 하나의 색다른 경험인지도 모르겠다.


어느새 나의 시선은 멀리 산자락의 계단식 논으로 향했다. 가파른 산을 깍아 계단식으로 논을 만들어 농사를 지어 자식을 먹이고 가르키며 살아가는 네팔리들의 삶이 다가왔다. 여행객인 내가 어떻게 그들의 삶을 속속들이 알수 있겠냐마는 계단논의 경사를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고단한 삶과 숨가쁜 일상이 가슴저미게 느껴져 왔다. 역시 농사를 지어 밥먹고 살아보려고 헉헉되는 삶을 사는 같은 처지지만 네팔 농부들의 삶을 한국 농부의 삶과 비교하는 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했다. 버스를 타고 스쳐지나가며 네팔농촌의 삶을 들여다보며 감상에 젖는 불경을 피하기 위해 그냥 창밖 풍경을 무심히 관조하기 위해 애썼다.



두어시간을 달린 버스가 아무런 시설도 없는 길가 공터에 차를 세웠다. 승객들은 우르르 몰려나가 듬성듬성 시들어 있는 수풀 사이에 적당한 거리를 두고 남녀 가릴 것 없이 볼일을 보기 시작했다. 다시 버스가 지그재그 커브길을 달리기 시작하자 승객들은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플라스틱!"
한국에서 '비닐 봉지'라 부르는 것을 이곳에서 '플라스틱 봉지'라고 하는가 보다. 한 뭉치의 '플라스틱 봉지'가 뒷자리로 넘어가면서 필요한 사람들이 한장씩 뜯어 챙겼다. 구토가 끝난 승객은 창문을 열고 봉지를 길가로 던져버렸다. 우리 앞자리에 않은 어린아이가 구토를 하기 시작했고 순간 아이의 얼굴이며 옷이 토사물로 범벅이 되었다. 배낭에서 물휴지를 꺼내 건네자 아이 엄마는 미소로 답례를 했다. 염치없이 물휴지 몇장으로 누군가에게 작은 도움이 되는 기쁨을 느꼈다. 모두가 지쳐갈 무렵 버스는 휴계소 같은 곳에 도착했다. 다시 화장실에 줄을 서고, 마당 건너편 식당에서 음식을 사 먹기 시작했다. 파샹은 식사를 하러 가 버렸고 우리는 어떻게 음식을 사서 먹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름도 모르고, 맛도 모르는 여러 음식을 남들처럼 접시에 조금씩 퍼 담고, 스파게티같은 것도 한 주걱 받아 네팔의 첫 '노상'음식을 아내와 나누어 먹었다. 알고보니 각자 음식을 담아 음식의 종류와 양에 따라 값을 치루고 먹어야 했는데 우린 그걸 모르고 다먹고 나서 빈접시를 들고 카운트로 갔다. 곤혹스러워하는 직원에게 우리가 먹은 음식의 종류와 양을 바디랭귀지로 전하고 '90'루피라는 너무나 저렴한 음식값을 지불했다. 우리는 휴계소 마당가에서 팔고 있던 토마토를 100루피 주고 한 봉지 샀고, 파샹은 별도로 오렌지를 3개 구입했다.



토마토와 오렌지를 먹으며 바깥풍경을 보고있으니 오전의 여정에 비해 휠씬 편안하고 시간도 빨리 흘러 오후 2시 30분 즈음 버스는 베시사하르에 도착했다. 베시사하르는 '람중'주의 수도로 나름 꽤 큰 시가지를 형성하고 있었고 중심을 가로 지르는 길도 넓고 상가들도 많았다. 버스를 내리자 다시 불불레행 버스를 타러 15여분을 걸었다. 불불레행 버스는 베시사하르의 도심에서 벗어난 언덕 아래 공터에 있었는데 드디어 배낭을 지고 걷기 시작하는 기분이 들었다. 아내는 배낭을 지고 10분도 걷기 전에 숨이 차고 가슴이 쿵광거린다며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안나푸르나에 발을 들여놓기도 전에 가슴이 죄여오는 것 같다니 정작 고산지대로 접어들면 어떡할 지 걱정이 들었지만 시간이 약이거니 여길 수 아밖에 없었다.


버스파크의 매표소는 곧게 잠겨 있었고 직원은 온데간데 없었다. 가게에서 음료수를 한잔씩 나누고 30분쯤 기다리고 있는데 직원같은 사람이 나타났다. 오늘 버스는 마지막 1대가 남았다며 공터에 세워져 있던 폐차 직전의 버스를 가리켰다. 퍄상은 곤혹스러워하며 그래도 타겠나 아니면 내일 떠나겠냐를 물어왔지만 라운드 첫날부터 일정이 어그러지는 것도 싫고해서 그냥 타기로 했다. 몇몇 승객이 더 타고 나서 버스는 출발을 하려고 했지만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한참을 부르렁거리다 조수가 내리고 기어를 후진으로 넣고 다시 스타트를 거는 순간 조수는 바퀴를 받쳐놓은 돌을 빼내자 기사는 다시 기어를 전진으로 바꾸며 버스는 언덕길을 구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번의 시도 끝에 드디어 시동이 걸렸다.
'젠장! 이걸 타고 그 위험한 길을 가야만하나!' 나도 모르게 혼자 구시렁거리는 사이 버스는 우리의 포터 퍄상을 남겨둔채 호기롭게 언덕길을 치고 올라갔다. 퍄상은 손을 흔들며 웃음짓고 있고, 버스는 마냥 달리고 순간적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 지 몰랐지만 파샹의 표정을 보니 심각한 상황은 아닌듯했다. 버스는 베시사하르 시내를 돌았고 조수는 연신 '불불레'를 외쳤다. 이내 버스는 승객으로 가득차고 지붕까지 사람들을 태우기 시작해서야 다시 출발했던 버스파크로 돌아가 파샹과 나머지 승객을 싣었다. 버스는 그제사 불불레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오전에 탄 버스는 9인승정도 되는 소형버스에 지붕까지 포함해 24명까지 타는 것을 확인하고 이후 더 이상 세지 않았는데, 오후의 로컬 버스에는 조금 덩치가 크다고 40명 이상의 승객을 싣었다. 가다가 서고 사람을 싣고 또 가다가 사람을 싣고 나중에 더 이상의 공간이 나오지 않자 남자 승객을 종용해서 지붕으로 보내고 조수 역시도 지붕으로 올라갔다. 지붕으로 올라간 조수는 버스가 달리는 중에도 창문을 통해 버스안으로 들어오기도 하고 다시 창문을 통해 지붕으로 올라가는 곡예를 부리면서 요금을 받기도 했다. 목적지 거의 다와서는 한무리의 어린 학생들이 버스에 오르고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달리는 버스가 노면이 고르지 못한 곳에서 속도를 줄이면 뛰어내리기도 하고 다시 버스 꽁무니를 잡고 지붕으로 올라가기도 했다. 처음에는 이런 아이들의 행태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 들여지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꼭 그런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어떤 마을 앞을 지나자 외모가 비교적 단정해 보이는 남자가 버스를 세웠고, 버스를 세우자 마자 아이들이 지붕에서 뛰어내려 도망을 가기 시작했다. 그 분을 버스 지붕까지 올라가 숨어 있는 아이들을 확인하고, 다시 버스를 내려 버스 기사와 조수를 향해 삿대질을 하고 심하게 꾸짓는 것으로 보였다.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버스를 발길질까지 하고서야 그분은 돌아섰고 대꾸도 한마디 못하고 눈치만 보던 버스 기사는 다시 버스를 몰기 시작했다. 당당해 보이고 씩씩해 보이던 버스 기사가 대꾸도 못하고 당하는 걸 보니 많이 잘못했거나 아니면 항의 하던 그 분이 경찰이나 공무원 아니면 지역의 무슨 실력자일까 상상해 보았지만 내가 알 도리는 없었다.


베시사하르를 출발한 버스는 2시간 만에 불불레에 도착했다. 드디어 트레킹 출발점인 불불레에 도착한 것이다. 퍄샹의 안내로 '투어리스트 체크 포스트'에 들러 '팀스카드'에 확인 도장을 받고 저녁 어스름이 내리기 시작한 마르상디 강을 건너 롯지들이 촘촘이 들어선 골목으로 들어섰다. 퍄샹은 롯지를 선택할 것을 요청했지만 선택권을 퍄샹에게 일임했다.
"너가 숙소를 더 잘 알것아닌가. 너의 선택에 따르겠다." 퍄샹은 밝은 얼굴로 "호텔 마낭"이란 롯지로 들어섰다.


오늘 모든 것이 처음이었듯 말로만 듣던 '달밧'도 처음 마주했다. 도착하자마자 롯지 한켠에서 어린 아이가 냄비에 콩을 삶기 시작했고 그것이 바로 콩국인 '달'이었고, 밥을 '밧'이라고 한다고 하니 달밧은 '콩국과 밥' 인 셈이다. 예상대로 달밧은 내 입맛에 아무런 거부감이 없었고 커리와 나물까지도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식사를 하고 나자 긴장이 풀리고 몸도 고단해져 왔다. 판자로 얼기설기 엮은 이층 숙소로 올라가 잠을 청했다. 하지만 밤이 깊어갈수록 계곡을 따라 불어내리는 바람소리와 마르상디 강물소리가 커졌고 급기야는 양철지붕을 때리는 빗물까지 듣기 시작했다. 두달 동안 비 한방울 내리지 않아 먼지가 너무 많다던 카트만두를 떠나오자 마자 비가 내리기 시작하니, 트레킹을 떠나온 입장에서 반가워할 수도 안할 수도 없었다. 판자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찬바람과 강물소리, 그리고 양철지붕을 때리는 빗줄기에 거의 잠들지 못했다. 라운드 첫날밤 숙면을 취한다면 오히려 그것이 이상한 일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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