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인간 문명의 발전은 아마 공감능력의 확대와 보조를 같이할 겁니다.
나의 고통이 전부인 단계에서 가족의 안위를 걱정하는 단계로,
그리고 씨족과 부족을 넘어 민족과 국가의 안위를
자신의 삶과 일치시켜나가는 단계로 이어졌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인류애라는 인간에 대한 보편적 사랑이
일반화되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인류를 넘어
생명 가진 모든 것에 대한 자비와 연민이 화두가 되는 세상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이 모든 단계는 시간적 전후와 무관하게 
서로 얽히고 섥혀 중첩되기도 합니다.

부처님이 오신날 저는 밭에 일을 나갔습니다.
작년 봄에 심어 놓고 그 동안 돌보지 못한 사과나무를 살펴보고,
활착에 실패해 말라죽은 나무를 뽑고
새 나무를 심기위해서 였습니다.

하루의 고단한 일과를 마칠 때쯤,
밭 한가운데서 놓여있는 덫을 발견했습니다.

처음에는 왜 덫이 내 사과밭 한가운데에 있지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농산물 피해가 있어도
덫을 이용해 산짐승을 해치는 것에 반감을 가지신 분이

누군가 설치해 놓은 덫을 뜯어 내 밭에 던져놓았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덫 가까이에 다가가 살펴보는 순간
섬짓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조그마한 고라니의 발목이 덫에  끼여있었습니다.
유추해보니 덫에 끼인 고라니가
어떻게 발버둥을 치다 덫을 매어놓은 줄이 풀리고
발목을 파고 드는 덫의 쇠이빨에 고통 받으면서
발목이 썩어 절단될 동안 덫을 달고 다니다가
내 사과밭에 와서야 섞은 발목과 함께 덫을
내려놓을 수 있었든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그나마 생명을 건지고,
발목과 함께지만 살을 파고 드는 덫의 쇠이빨로부터
벗어난 고라니의 눈물어린 눈빛에
슬픈 안도의 빛이 돌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뭏튼 덫의 이빨에 여전히 물려있는  
고라니의 떨어진 발목을 바라다 보면서

고라니의 고통과 인간의 삶을 생각해 봅니다.
비나리 같은 산간마을은 고라니등의 산짐승에 의한
농작물 피해가 심각합니다.

그러다보니 어떻게든 산짐승을 몰아내고 농산물을 지키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하게 됩니다.

극약을 묻힌 곡식으로 산새들을 잡기도하고 
여러가지 덫으로 산돼지나 고라니를 잡기도합니다.
물론 총으로 이루어지는 사냥도 가장 일반적인 방법의 하나입니다.

저는 농사를 짓고 산짐승에 의한 농작물 피해를 매년 당하지만
그냥 참고 사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지 10여년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산짐승을 잡는 이웃 농민을 욕하진 못합니다.
그분들의 피해도 보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최소한 덫처럼 극단적인 고통을 주는 
산짐승 대처 방법은 피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다른 방법을 찾아 고라니를 쫒아버리든지,
꼭 죽여야 하다고해도 고통을 덜 주는 방법을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사과밭에 자신의 발목과 함께
덫을 남겨놓은 고라니의 고통을 통해

생명 누리는 것들간의 공감과 자비를 꿈꿔봅니다,
반응형
반응형
유러피언 드림 상세보기


'선진'이란 개념이 한국인의 삶을 토끼몰이하는 절대 명제로 이용되기 시작한 것은 박정희정권때 부터일 것이다. 그 시대부터 '수출입국'이란 모토로 국민을 몰아세우고, '선진국'이라는 이상향을 국가의 미래상으로 삼아 민주주의와 인권, 그리고 공동체나 환경 등의 가치를 '경제'에 종속시켜왔다. 불행히도 당시 절대적 가난에 처해있던 나라 사정에 비추어 봐서 일정정도 개발독재의 필요성에 대해 주장하는 자들에 공감하는 바는 아니지만 어쩌면 초기 자본축적의 폭력적 과정이 불가피한 자본주의의 발전 경로인지도 모르겠다는 의문의 여지는 있어 보인다. 결국 궁정동의 총소리로 개발독재시대는 막을 내렸지만 '선진조국 건설'이라는 모토는 개발독재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넘어 한국인의 삶을 규정하고 모든 가치판단의 근거가 되는 절대성과 더불어 아무데나 갖다붙이면 되는 보편성마저 획득하게 되었다. 그로말미암아 사실 '선진'이란 개념은 애매모호성을 더해가며 급기야 몰개념화의 길을 걸었다. 그렇다고 '선진'의 망령은 사라진 것일까? 천만에 말씀이다. 국민의 뇌리에 내면화된 선진병은 급기야 이명박이라는 기형정권을 낳았고 시대착오적인 정권을 통해 화려하게 부활했다.
MB정권이 출현하자마자 매스컴을 통해 끊임없이 선진노사관계, 선진 정치문화, 선진 농업, 선진, 선진, 선진... 이란 단어를 다시금 듣게 되었는데, 선진'이란 개념은 오랜세월 잠복해 있으면서 몰개념화를 넘어 개념변신까지 해 버렸다. MB정권에 의해 '선진'은 가장 낡은 것을 가리키지만 가장 앞선 것을 가리킨다는 환각을 국민에게 심어주는 악마의 주문이 된 것이다.
노동자의 권리는 없고 오직 자본가의 이익에 복종하는 노사관계가 '선진'노사관계가 되었고,야당도 안중에 없고 비판언론도 없고  정권이 입맛대로 권력을 휘두르는 것을 '선진정치'란다.  농민이 다 죽어 나가도록 농촌의 초토화를 앞당기는 것이 바로 '선진 농업 정책'이라 하고, 대미종속과 대북 대결주의의 확대를 '선진외교'라 한다. 
이런 세상에서 고노무현대통령께서 생을 마감하시기 직전까지 손에서 놓지 못했다는 책이 바로 이책 '유러피언 드림'이다. 유럽피언 드림은 진정한 선진이 무엇인지를, 우리사회가 미래에 구현해야될 사회의 전형, 가치지향은 무엇이어야하는지 고민하는 지점에서 꼭 읽어봐야할 책이다. 정명(正名)은 허위와 기만이 난무하는 혼탁한 시대일수록 꼭 필요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이책은 문명비판적 입장에서 현대 사회를 이끌던 가치인 '아메리칸 드림'에 사망선고를 내리고, 새로운 시대를 '유러피언 드림'이 리더할 것이라고 진단한다. 제레미 리프킨이 제시하는 유러피언 드림은 단순히 인류가 지향해야할 가치의 하나가 아니다. 이는 시장자본주의가 이끌어왔던 구시대의 한계를 돌파하는 미래지향적 프로젝트로, 지금까지의 세계는 개인의 사리추구가 사회를 움직이는 동력이었다면 다가올 사회는 공공선, 복지의 극대화가 사회를 움직이는 동력으로 대체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 두 패러다임의 교체를 강제하는 역사적 동인을 시민사회의 성장에서 찾았고, 그 최종적 실현 형태를 탈국가화 새로운 인류 공동체로 보았다. 지금까지 주류를 이루었던 민족국가라는 영토기반사회는 약화되고, 탈영토 탈국가화한 새로운 인류 공동체가 출현하는데 이는 영토기반 의무(국방의 의무 등)와 재산권에서 탈피해 집단 참여, 보편적 인권에 기반한 정치를 가능하게 하는 시민사회기구(Civil Society Organization)라는 시민권력의 출현으로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국가가 후퇴한 자리에서 시장 권력의 절대화가 완성되었지만 이제 시장권력은 시민사회기구에 의해 제어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결국 새로운 사회의 출현을 추동하는 세력을 노동계급이 아닌 시민사회기구로 대체한 제레미 리프킨의 시각은 많은 논쟁의 여지를 남기지만 현실성있는 노동개념의 정리가 뒤따른다면 필자가 제안한 CSO개념을 꼭 거부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유러피언드림]의 논지를 따라가다보면, 필자의 주장이 곧바로 우리사회의 현실을 들여다보고 내리는 적실성 있는 진단으로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사실 이제는 우리 국민이 박정희식 개발독재의 망령을 떨쳐버릴 때도 되었다. 박정희를 밟고 넘어서는 지점에서 진정한 선진화가 시작될 것이다. 이 정도의 경제적 발전이 있기까지 박정희가 기여한 몫을 인정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나아갈 가치 지향을 어디에 둘것인가를 두고 볼 때 이제 박정희식 개발독제 패러다임, 아메리칸 드림은 그 효용이 끝나도 한참 전에 끝나야했기 때문이다.

 

유러피언 드림이 품고 있는 가치와 핵심 개념을 나열해 보는 것으로 리뷰를 마무리해보자.

보편적 인권, 개방적 네트워크, 공감,다단계 통치체게, 포괄성, 자연의 내재적 가치, 자연과의 연대, 시스템적 사고방식에 기초한 도덕성...

이들 개념을 나열하다보면 '불교적 세계관'을 일정 반영하고 있는 것 같이 느껴진다.  나 혼자만의 느낌일까? 어쩌면  유러피언 드림은 아시안 드림의 서구버전인지도 모르겠다. 더 공부가 필요한 지점이다.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