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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5시 물과 안개가 잔뜩 묻은 조랑말 방울 소리에 잠이 깼다. 방울소리는 같은 지상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아니라 멀리 하늘에서 내려오거나 아니면 땅속 깊이에서 솟아나는 소리같다. 중국영화의 귀신이라도 나오는 장면에서 배경음으로 사용하면 적격일 그런 소리다. 가만히 누워 한참을 가까워 졌다 멀어져 가는 방울 소리를 들으며 몽환속으로 빠져든다. 나에게 안나푸르나를 소리로 기억하라면 아마도 저 조랑말이 달고 다니는 방울소리가 될 것 같다. 조랑말 방울소리는 안나푸르나의 거친 자연과 네팔리의 고단한 삶, 그리고 어설픈 트레커의 설레임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아침을 먹기위해 들어선 다이닝룸에서 피상에서 리턴한다는 혼자 여행을 하는 독일인을 만났다. 그는 눈과 추위를 대비한 옷과 장비를 전혀 준비해 오지 않아 도저히 더 오을 자신이 없었다고 했다. 우리는 네팔라면이라는 Nuddle Soup을 먹으며, 리턴하는 독일인이 조그만 카메라에 담아 온 피상의 눈풍경을 구경했다. 그는 우리의 행운을 빌며 길을 떠났고, 우리는 짐을 챙겨 그가 내려온 길을 되짚어 올라가기 위해 롯지를 나섰다.

딸은 추웠다. 계곡 안에 위치한 딸은 해가 늦게 뜨고 일찍지고, 또 계곡을 따라 정상의 얼음바람이 쓸고 내려왔다. 으슬으슬 추운 게 아니라 본격적으로 추위가 느껴진다. 길을 걸으니 손과 귀가 시리다.

 

 

딸을 떠나 도착한 첫마을인 카르테 골목에 한국어 간판이 보인다. '맛있는 김치 있어요.' 그리고 길가 롯지 마당에서 모여있던 네팔리들이 말을 건넨다. 'Are you korean?' 나의 답이 떨어지자 마자 남한인지 북한인지를 다시 묻는다. 나중에 알았지만 네팔사람들에게 한국은 남과 북 공히 관심의 대상인가보다. 한 때는 북한과 관계가 좋았고, 다시 남한과 사이가 좋아졌지만 네팔은 집권당이 공산당인 나라다보니 남북 양쪽에 다 연이 닿아있다. 하지만 더 많은 네팔리들이 남한의 노동자로 인연을 맺고, 또 훨씬 많은 남한 사람들이 네팔을 왕래하다보니 네팔에서 지금은 남한이 더 인지도가 높은 것 같았다. 활짝 웃는 얼굴로 그는 나를 향해 엄지 손가락을 세워보이며 말한다. 'North korea is bad. South korea is good!' 하지만 내가 남한 사람이라서 기분이 좋을리가 없다. 우리의 분단현실이 그냥 씁쓸할 뿐이다.


다라파니를 지나면서 체크 포스트를 들르고, 바가르찹에서 점심을 먹었다, 우리는 토마토 스파게티를 먹었고, 파상은 달밧을 먹었다. 오늘 따라 달밧을 먹는 파상의 얼굴이 어둡다. 롯지를 떠나며 물으니 달밧의 밥이 식은 밥이었단다. 사오지에게 항의를 했고, 다시는 그 롯지에 들러지 않을 것이란다. 롯지나 레스토랑에 포터 한명이 트레커 두명을 데리고 오면 기본적으로 포터의 숙식은 무료로 제공되고 있는데 대부분의 경우 포터의 음식은 우리 트레커의 것보다 훨씬 좋았다. 우리는 보통 달밧을 먹고, 파샹은 야크고기나 계란 프라이가 덤으로 얹혀져있는 달밧을 먹었다. 보통 포터는 한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지 않고 주방 한구석에서 롯지 식구들이랑 같이 식사를 하는 것 같았는데 우리는 딸에서 부터 우리가 밥을 사지 않더라도 같은 테이블에서 먹기를 종용했다. 그러다보니 늘 파샹이 무얼 먹는지 알 수 밖에 없었는데 오늘 점심을 먹은 레스토랑은 파샹에게 큰 실례를 범한 셈이었다.



힘든 하루다. 길을 따라 끝없이 올라와 다시 올려다보면 안나푸르나의 남은 높이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간혹 마주치는 트레커들은 하나같이 쏘롱라 패스를 포기하고 되돌아가는 중이란다. 쏘롱라를 향해 가고 있는 사람은 우리 부부와 파샹, 슈리샤우르스의 부메랑롯지에서 같이 지낸 독인인 3명, 그리고 3명의 호주인이 전부다. 들리는 말로는 소롱패티와 마낭 등 쏘롱라를 가는 길목 마을에는 서른명 가량의 트레커들이 쏘롱라 패스를 시도하기 위해 대기 중이라고 했다. 그중 일부는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다시 올라갔던 길을 되돌아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쏘롱라 패스가 불가능하다면 다시 불불레로 리턴해서 버스로 포카라를 거쳐 베니, 따또파니 그리고 좀솜까지 이틀에 거쳐 버스여행을 해야한다. 끔찍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오직 일기가 좋아져 쏘롱라를 건널 수 있기를 빌 뿐이다.



첨으로 눈길로 접어들었다. 오늘의 목적지 피망이 가까워지면서 열대우림같은 수풀에 눈이 쌓혀있는 기묘한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눈을 밟기 시작하자 이제 본격적으로 겨울 안나푸르나에 접어든 느낌이 든다. 피망을 30여분 남겨둔 길에서 티벳탄 차림의 가족 무리를 여럿 만났다. 파샹이야기로는 그 중 한 가족은 틸리초 캠프에서 눈에 길이 막혀 트레커의 발길이 끊기면서 겨울을 나기 위해 저지대로 내려가는 중이란다. 오늘 만난 대부분의 네팔리들은 다 겨울을 견디기 위해 하산중인 것같았다. 마지막으로 만난 네팔리가족은 예닙곱살 되는 소녀와 그 부모다. 부모는 남루한 옷차림에 등짐을 하나씩 지고 있었고 , 아이는 떼국 떨어지는 무심한 표정의 얼굴로 눈덮인 길을 양말도 신지 않은 발로 조리만 신고 걷고 있었다. 우리와 마주친 소녀는 손을 내밀며 "Sweet! Pen!"을 읊조렸다. 순간 나는 괜한 혼란에 빠졌고 우물쩍 거리는 사이 소녀는 손을 거두고, 서운한거 하나없다는 듯 무심한 표정으로 부모를 따라 멀어져 갔다. 그 아이의 시린 눈망울이 오랫동안 나의 가슴에 남아있을 것 같다.



5시 30분이 지나 어둑어둑해질 무렵 티망에 도착했다. 티망은 사방이 눈덮인 산으로 둘러 쌓여있었다. 본격적으로 안나푸르나 안으로 들어서는 느낌과 함께 왠지 춥고 조금은 무섭기도 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너무 늦게 도착한 마을은 늘 그런 느낌이었다. 차라리 아침 일찍 출발하고, 오후에는 넉넉하게 도착해 햇살을 받고 동네를 한바퀴라도 돌게되면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티망은 해발 2200m다. 하루 일일정도 힘들었고 또 해발 2,000m에 도달한 기념으로 '락시'라는 로컬와인을 한잔씩 나누었다. 야생 과일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정종맛이 났다. 달밧과 락시 그리고 네팔 담배 한개비로 길었던 하루의 여정을 마무리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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