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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일본여행에 앞서 사전정보가 아무것도 없이 떠났던 첫여행의 실패를 만회하고자 열심히 책도 사보고 인터넷도 뒤졌다. 그리고 죄종단계에서 집을 떠나기 몇일전 휴대용 여행안내서가 필요할듯해서 이 책을 구입했다.

결론적으로 잘못된 선택이었다.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개인마다 다 다르겠지만, 그리고 특히 후쿠오카 여행의 목적이 먹고 사는 것이 일반적이겠지만 조금은 심하다 싶을 만치 쇼핑정보와 업소정보뿐이다.

사실 쇼핑정보는 공항 등에 비치된 홍보지만 보아도 충분하고, 그리고 대부분의 소소한 정보들은 인터넷에 늘려있다. 그래도 굳이 돈을 주고 책을 사는 이유는 '책'만이 가질 수 있는 특성때문일 것이다. 정보를 일목요연하게 체계화시켜놓아 한눈에 원하는 정보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고, 또 가벼운 휴대용 여행안내서일망정 홍보지 이상의 깊이있는 정보를 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문제점에 대해 덧붙이면, 감성의 차이인지 모르지만 본문 편집디자인이 전혀 가독성을 고려한 것 같지 않다는 것이다. 결국 책을 충분히 알아보고 사야하는데 이번 경우는 실패한 선택이 되어버렸다.  결국 이 책은 여러가지 면에서 만족할 수 없었고, 짐이 될 것 같아 여행을 떠나면서 가져가지도 않게 되었다. 모든 면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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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전 일본농촌마을 선진지 견학으로 규슈여행을 다녀왔다. 즐겁고 의미있는 연수이긴 했어도 공적인 일정이 주는 아쉬움도 많았다. 나는 짧은 연수기간이었지만 일본의 멋에 매료되었고 특히 일본 농촌의 아름다움에 빠져버렸다. 연수를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안에서 작은 다짐 하나를 했다. 빠른 시일내에 다시한번 가족과 함께 유후인이랑 야나가와를 보러가겠다고. 그리고 작년 10월이 결혼 20주년이다보니 충분히 핑게도 되었고, 틈틈히 웹을 뒤져 규슈여행 정보를 모아나갔다. 가까운 규슈지만 엄연히 외국인데 일본어도 못하고 영어도 못하는 사람이 자유여행을 가려고 하니 사전 준비가 많아야 했다. 늦었지만 난생 처음하는 단독 해외여행의 불안감을 떨치기 위해 여행안내서적들도 사서 읽고, 오랜 세월 방치되었던 일본어회화에다, 영어회화 공부까지 하기 시작하고 이러저런 블로그를 찾아 여행기를 읽어나갔다. 나중에는 유후인과 후쿠오카를 가지않고도 모스버거와 벌꿀 아이스크림 그리고 금상고로케의 맛을 논하는 유후인, 후쿠오카 전문가가 되다 시피했다. 그리고 10월이 다가오면서 드디어 교통편과 숙박편 예약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딸애의 합류와 이런저런 다른 사정까지 겹쳐 일정은 12월로 연기되고,  '대기'상태의 배편을 구한 상태에서 숙소를 예약한뒤, 배편이 틀어지면서 예약된 숙소의 일정을 바꾸기도 하는 우여곡절끝에 해를 넘기고 지난 1월 22일 드디어 배낭을 매고 집을 나섰다. 일주일동안 집을 지켜야되는, 자기가 사람인줄 착각하고 사는 우리집 똥강아지 초롱이가 서운한 눈빛으로 우릴 배웅했지만 개무시하고 악세레다를 밟았다. 


안동 강변의 한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부산까지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안동역을 들어섰다. 한달전 예매를 하고 프린터해 둔 티킷을 주머니를 뒤척여 찾아 놓았지만 승무원 누구도 기차표를 확인하지 않았다. 예매를 하면서 안동에서 부산까지 버스로 2시간 30분이 걸리지만 기차로는 4시간이 넘게 걸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빨리 가고싶은 마음이랑, 기차를 타고 싶은 마음이랑 한참을 갈등했지만 근 7~8년만에 하게 될 기차여행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다. 플랫폼을 들어서는 나의 가슴은 벌써 여행의 흥에 벅차오르기 시작했다.


세식구가 함께 챙겨야될 가방의 수를 확인하고  각자가 책임져야할  몫을 나누다보니 금방 기차가 도착했다. 12시 12분 안동발, 16시 27분  부산 부전역도착예정인 무궁화호는 넉넉하게 좌석이 비어 있었다. 그래도 좌석번호를 찾아  선반에 짐들을 올려놓고 
차창밖으로 사라져가는 안동의 익숙한 풍경들을 두 눈에 담았다. 낯선 풍경들이 차장을 스치기 시작할 즈음 카페열차칸을 운영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카페열차칸에서 마시는 커피 한잔의 낭만을 찾아 들어선 카페열차는 텅텅 비어있었고, 매장은 빈약했지만 그래도 창을 스치는 겨울 산하의 풍경을 바라보며 따끈한 원두 커피 한잔의 향기에 취했다. 카페칸 차창을 스치는 풍경은 객실 차창을 스치던 바로 그 풍경이 아니었다. 커피향 가득한 까페열차칸에서 바라다보는 차창밖 풍경은 지난 추억을 고스란히 환기시켰다. 어린시절 무서운 꿈을 꾸다 잠은 깬뒤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식구들 사이에서 혼자 두려움과 외로움에 떨든 새벽, 소년의 귀에 울려오던 새벽기차소리는 두려웠던 밤이 다 가고 새날이 밝아오고 있음을 알려주는 구원의 소리에 다름아니었다. 중학교3학년 시절 갑자기 공부에 신명이 붙어 책보다 더 많은 도시락을 담은 무거운 가방을 들고 새벽 기차를 타고 전교 1등으로 등교를 하기 시작했다.  그 시절 시발역인 진해역에서 경화역까지 짦은 시간동안 새벽기운이 걷혀가는 세상을 차창밖으로 바라다보던 소년의 가슴은 온갖 굴레에 묶인 지금이 아니고 모든 것이 가능할 미래에 대한 꿈들로 벅차올랐다. 
 


안동을 벗어난 기차는 간혹 낙동강을 나란히 달리다가 낙동강의 지류들을 건너기도 하고, 의성과 군위를 지나면서는 낙동가의 본류를 가로지르기도 했다. 하지만 마음 편히 아름다운 겨울강을 바라다불 수만은 없었다. 한달쯤 전 구미에 일이 있어 갔다가 4대강사업으로 구미보를 설치하는 공사장 주변을 지나칠 일이 있었다. 그때 말로만 듣던 4대강사업 현장을 직접 두눈으로 보면서 강변 농토에 끝없이 쌓여있는 준설토 무더기와 거대한 보기둥을 보면서 경악했다. 한 인간의 야욕이 무참히 뭉개버린 자연을 바라다보면서  21세기에도 여전히 야만이 지배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 절망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저 평화의 강이 끊기고 무자비하게 파괴된 공사 현장이 곧 나타날 것만 같아 창밖 강풍경을 바라다보는 마음이 불안으로 가득했다. 


기차는 부산 부전역에 도착하고, 우리는 짐을 들고 부전시장쪽으로 빠져나왔다. 지하철을 타고 중앙역으로 가기 위해서 였지만, 승선수속까지는 아직 2시간이 남아있었고, 가야할 전철 구간은 몇개되지 않았다. 가방을 끌고서 부전시장을 구경하자는 아내와겨루다가 그냥 길가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는 포장마차에서 말로만 듣던 부산오뎅을 사먹기도하고, 중앙역에서 국제여객터미날까지 굳이 걸어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부산 국제 여객터미날에 도착하고보니 아직도 시간이 많이 남아있었다.  좁은 대합실을 들어서니 의외로 인파가 넘쳐나고 여행객의 설레임으로 후끈겨렸다. 비행기 삯에 비해 배삯이 싸서 그런지, 아니면 승객의 수가 적어서 그런지 알 수 없지만 왠지 어설프고 조금은 지저분한 여객터미날은 여행사별, 단체별로 무리를 지어 인원을 점검하고 여권과 승선티킷을 나누어주는 등 부산했다. 개별 자유여행에 오른 우리가족만 일행이 없이 홀가분하게 보였고 넓지 않은 터미날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승선시간을 기다렸다. 


발권을 하고 한참을 서성거린뒤에 먼저 출항할 시모노세끼행 성희호 승객들이 승선을 하는 과정을 구경을 했다. 그러고 나서야 우리가 타고갈 하카다행 뉴카멜리아호 승객들의 승선이 시작된다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아침에 집을 나와 이제사 후쿠오카행 배를 타게되는구나 하는 안도감과 설레임을 안고 들어선 승선장에는 면세점이 있었지만 잠깐 구경만하고는 곧장 배에 첫발을 디뎠다. 뉴카멜리아호 갑판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그렇게 큰 배였지만 생각지도 않은 울릉거림이 전해져 왔다. 그 울릉거림이 파도때문인지 설레임때문인지는 알수 없었다. 


객실은 카멜리아호의 3층,4층,5층에 나누어져 있었고, 우리가족은 4층의 12명이 들어가는 한 다인실에 여장을 풀었다. 남녀실이 다르거나 혹은 비슷한 가족여행객들로만 같은 호실 손님을 몰아준다든지 한다는 이야기를 들어왔지만 우리 선실은 전부 개인 남자 승객뿐이었다.  우리가족은 조금의 불편함과 불안감을 갇지 않을 수 없었지만 다행이 우리 호실의 승객은 7~8명에 불과해 넉넉한 자리에 트렁크를 벽삼아 내려놓을 수가 있었다. 여행이란게 이런 불편함을 즐기기 위한 것이 아니겠는가며 스스로를 위무하며 저녁 7시 승선후 11시 30분 출발까지 선상의 여행을 시작했다. 배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구경도 하고, 각종 자판기를 사용해보기도 하고,  갑판으로 나가  어둠에 싸인 부산항과 부산시의 야경을 사진에 담기도 하고 기념 사진도 찍었다. 카멜리아호는 일본 선적인지 선내에서는 엔화밖에 사용할 수가 없었고 자판기로 판매하는 상품들 역시 일본 상품들 이었다. 배를 타는 순간 왠지 모르게 이미 일본에서의 시간이 시작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가만히 서 있는 배에서 보내는 시간의 지루함을 줄일 순 있었지만 4시간 30분이라는 시간은 한 공간에서 보내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배도 고파왔지만 선내 레스토랑은 예약된 단체 손님을 우선 받고 8시40여분이 지나서야 일반 개인 손님을 맞기 시작했다. 일부 메뉴는 이미 매진이 된 상태였지만 다양한 음식을 먹어보자며 3명이 각각 다른 메뉴를 주문했다. 음식값은 각 850엔 정도 였고 그런데로 한끼 식사를 해결하기에 부족함이 없었지만 이날 압권인 음식은 단연 연어알밥이었다. 국내에서 먹던 일반적인 알밥만을 생각하고 연어알밥을 주문했다. 주문을 받는 아가씨가 몇번을 반복해서 연어알밥을 드실 수 있으시겠냐고 되물어왔다. 먼저 국적을 묻고 연어알밥은 비린내가 많이 나서 한국사람 입맛에 맞지 않을 수 있다는 친절한 안내를 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뭐든지 먹을 수 있습니다!' 라고 소리치고는 고집스레 주문을 하고 말았다. 하지만 차려진 그릇의 뚜껑을 열자마자 와이프는 스필버거의 인디아나존스에 나오는 눈알이 둥둥 떠 있는 스프를 연상시킨다면 질겁을 했다. 나는 돈이 아까워 억지로 먹어보려 시도했지만 연어알이 입안에서 터질때마다 비릿한 생선 썩은 냄새 같은게 입안에 퍼지면서 거의 구토가 날 지경이었다. 남은 2인분의 다른 음식을  3명이 나누어 먹으면서 웃고 떠들며 부산앞바다의 밤은 깊어갔다. 식사를 마치고 부산항 밤바다를 바라다보고 기념사진도 찍다가 선실에 들어가 잠을 청했다. 


잠이 설핏 든 사이 배의 출렁거림이 느껴져 눈을 떴다. 배가 출항을 했는지 확인해 보기 위해 나선 갑판에서 바라다 보는 부상항을 점점 멀어져가고 있었다.  멀어져 가는 부산항을바라다 보며 멀어져 가는 나의 지난 시간들도 더불어 작별했다.  

배를 타고 떠나는 일본여행을 꿈꿔온지 오래다. 선상에서 밤바다를 보고 싶었다.  망망대해 한가운데서 맞는 일출, 그리고 일몰, 바다 한가운데서 보는 밤 하늘의 별들... 그리고 파도소리. 하지만 이번 여행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밤바다에 별도, 일출도 볼수가 없었다. 빛마져 다 빨아들이는 블랙홀 한가운데 남아있는 것 같은 느낌... 그리고 멀미까지. 

 

여행을 준비하면서 갖는 여행의 꿈은, 막상 길 떠나게 되면서 막닥뜨리는 구질구질한 현실과 의외의 변수들에 의해 뭉개져 버리지만 그래도 현실은 그 꿈보다 훨씬 풍부하고 아름답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된다.

삶은 항상 의외의 사건들로 가득차고, 늘 미지의 것을 남겨 놓고 있지. 그래서 세상은 신비롭고,  삶은 살만하지 않은가? 낯선 여행만큼이나 설레임 가득찬 나의 삶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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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박5일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이 후딱 지나가버리고
드디어 마지막날이 밝았다.
전날 저녁 난생 처음으로 일본 술집에서 맥주를 마시고,
저녁늦게 까지 호첼객실에서 2차 술자리를 한 탓으로
몸이 무거웠지만 그래도 일본에서의 마지막 하루를 보다 즐겁고 값지게 보내야된다는
기대때문인지 아니면 의무감때문인지 일찍 눈이 떠졌다.
벌떡 일어나 세수를 하고 아직 문을 열지도 않은 
식당에 제일 먼저 도착했다.
곧이어 몇몇 외국인이 줄을 서고 뒤이어 우리 일행들이 한명 두명 내려왔다.
아침부페를 간단히 들도 곧바로 우리 일행은 새벽 청과물 도매시장으로 향했다. 

아사쿠라농산물도매시장은 인구 120만 도시인 후쿠오카에 있는 다섯개의 농산물 도매시장 중 하나라고 했다. 규모나 시설로 봐서는 사실 이웃 안동농산물 도매시장보다 훨씬 초라한 모습이었다 시장은 노천에 지붕만 씌운 시설에 불과했고 경매시스템도 현대식 전자경매가 아니라 재래의 방식 그대로 였다.
하지만 우리 공판장과 다른 모습도 확인할 수 잇었다. 우리나라 공판장에 가면 주변에 농산물 포장재로부터 폐농산물 까지 주변에 쓰레기가 늘려 있는데, 아사쿠라도매시장 바닥 어디에도 한개의 쓰레기도 확인하기 힘들 정도로 깨끗했다.  그리고 출하된 농산물의 상태는 그대로 슈퍼 진열대에 올려놓을 수 있는 완벽한 선별과 세척 그리고 소량포장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일행중 몇몇분이 '뭐, 일본도 별거아니네.'라고 하시면서도 농산물의 선별포장 상태에 대해서만은 감탄을 아끼지 않으셨다.  사실 고급스런 포장재를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오직 정성으로 완벽한 선별포장을 한 일본사람의 완벽주의를 엿볼 수 있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4박5일 여행내내 일본사람이 소리를 지르거나 씨끄럽게 떠드는 것을 본 적이 없었는데 이곳 농산물 도매시장에 와서야 처음으로 일본사람이 고함을 지르고 떠드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가까운 이웃이면서도 참 다른 일본인과 한국인^^*) 


아사쿠라 농산물 도매시장을 나와 하카타 포트타워로 향했다.
부산에서 카멜리아호라는 여객선을 타면 도착한다는 하카타항이 내려다 보이는
별로 멋지거나 화려하지 않은 하카타 포트타워를 잠시 들러 사진을 찍고,
곧바로 태재부(다이자이후) 천만궁으로 향했다.
후쿠오카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다이자이후 시에 있는 신사인 천만궁은 9세기무렵 살았던 스가하라 미치스네라는 사람을 학문의 신으로 받들고 있는데, 입시철이 되면 시험을 잘보게 해달라고 비는 참배객들로 엄청나게 붐빈다고 했다. 인근 학교에서 아예 버스를 대절해 단체로 참배를 오기도 할 정도라고 했다. 우리가 찾았던 그날도 적지않은 학생들이 소원종이(?)를 사서 자신의 이름을 적어 나무에 매달거나 신사에 헌금을 내고 복을 비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쉬운 연수가 마무리되고 김해를 향한 비행기에 오르고 부터 뇌리에 떠나지 않는 상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짧지 않은 여정이었지만. 일본의 모든 것은 고사하고 일본의 농촌과 농업에 대해서 만이라도 일정한 이해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참 좋았을 것이지만 사실 모든 것이 겉핡기에 불과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일본인과 인본 문화에 대한 이해, 일본 농업 농촌에 대한 이해는 뒷날의 과제로 남겨두고 이번 연수를 통해 얻었던 다양한 문제 의식만은 정확히 기록해 두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항에서도 일행과 계속 주고받은 생각들이지만 어떤 분들은 이번 여행을 통해 일본의 '침체'를 절감했다고도 하고, 일본농촌정책은 실패작이라는 판단도 많은 분들이 공유했다. 사실 일본여행중에 호텔 TV를 통해 JAL의 부도 소식을 접했고, 귀국해서도 도요타 사태라든지, 일본의 유명 백화점의 연쇄부도 소식 등 일본에 대한 부정적인 뉴스가 끊이질 않았다. 현제 일본이 막다뜨린 침체의 문제는 일본의 관료주의가 근원이라는 판단듣도 있었고,  부의 불균등한 분배구조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피력하시는 분들도 있었다.

사실 선진대국인 일본거리의 소박함(초라함?), 낡은 호텔이나 관광시설, 거리를 메운 소형차들, 작고 초라한 주택, 화려하지 않은 일본인의 옷차림 등등 일본을 세계2위의 선진국으로 알고 선망해오던 시골분들이 이런 일본을 직접접하고는 실망과 우리 나라의 경제수준에대한 자긍심을 일정가지는 것이 당연해 보이면서도 한편 나는 다른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사실 나는 과연 일본은 침체되었는가?라는 판단이 가장 어렵다. 일본의 관료주의, 가난한 개인과 잘사는 나라를 만드는 분배의 문제,  지향을 잃어버린 국가나 개인의 정체성의 문제, 불완전고용상태를 초래한 비정규직의 보편화와 고착화된계층 구조로 인한 활력의 상실 등등의 문제는 분명 일본사회가 처한 현실을 나타낼것이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이런 일본의 현실이 침체인지 안정화인지 면밀한 판단이 필요할 것이다., 사회적 지향을 가진 활력이 넘치는 사회가(일제시대 일본의 모습) 정상적인 사회인지 아니면 일상의 소소한 삶속으로 천착해 들어가는 지금의 일본인의 삶이 정상적인 모습인지 판단하는 것이 그리 쉬운 건 아닐 것 같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우리 사회가 오직 경제성장에 목을 매고 전사회가 매진하는 지금의 거의 광적인 모습이 비정상적인 상태이고,우리 사회역시도 10~20년 내에 지금의 일본의 '침체'된 모습을 띌 것이라는 사실이다.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인지도 모르지만 나는 지나치게 활력이 넘치는 사회가 싫다. 일본인같이 경제적으로 소박한 삶을 누리면서 내면의 가치를 천착하고 셰계와 삶에 대한 인식의 깊이를 심화하는 그런 삶의 자세가 보다 인간적인 세상을 만들지 않을까는 생각을 포기할 수 없다.

앞으로 공부하고픈 몇가지 주제나 소제를 정리하는 것으로 이번 여정의 기록을 마무리하고 싶다.
1. 일본은 주체성이 강한 나라인가 아닌가?
일본인은 서양지향적인 모습을 분명히 가지고 있다. 기독교식의 결혼식이 대표적일 것이다.  사실 일본은 타 종교에 대해 아주 개방적이다. 신도나 불교, 유교가 아주 자연스럽게 융합해 있고, 기독교같은 타종교에 대해서도 훨씬 개방적이다.  하지만 일본인은 우리보다 기독교의 역사가 깊으면서도 기독교 신자가 전국민의 1%도 되지 않는다. 한국은 조선의 붕괴와 함께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인 유교를 내팽겨치고 서양의 사상. 특히 기독교에 바져들었다. 사실 겉은 따라가도 정신만은 놓지 않는 일본이 더 주체적인 나라가 아닌가?

2. 일본의 농촌 정책은 성공적인가?
오래전부터 한국의 몇몇 교수등 전문가 집단은 일본의 정책을 그대로 뱃겨온 사례가 너무나 많다. 사실 별거아니지만 정보를 먼저 접했다는 것 하나로 뭐 대단한 성공사례인양 소개하고, 그리고 그 사례가 우리 농촌을 구원하는 비책이라도 되는 양 피력해 온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일본 농촌의 현실은 그리 성공적이지 않다. 먼저 농산물 자급률이 우리보다 훨씬 못하다.(한국 약 30% 전후, 일본 약 20%전후) 사실  일본 농촌 공동체의 붕괴는 한국보다 훨씬 덜한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성공적인 농촌정책때문이아니라 한국과는 다른 지방 중소도시의 활력대문이라고 보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 서울만 있는 한국과는 달리 일본은 아름의 지방 도시들이 자생력을 가지고 번영하고 있다. 그와같은 지방 도시를 둘러싼 일본 농촌은 인근 도시와의 교류와 소통속에서 농촌사회의 유지 발전을 꾀할 수가 있었다. 이는 일본 농업인의 많은 비율이 투잡, 쓰리잡이라는 사실이 잘 보여주고 있다.  한국 농민은 농한기에 인근 도시에서 일자리를 찾을 수가 없다. 서울 경기만 있고 지방은 다 죽었기 대문이다. 한국 농민은 아예 농촌을 떠날 수 밖에 없다.

3. 일본 농촌 사업은 주민자치역량에 기반하는가, 고도화된 행정서비스에 의존하는가? 그린투어리즘이 침체된 농촌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잇는가?
연수중에 방문했던 많은 사업단위들에서 사실 주민의 모습을 별로 볼 수 없었다. 우키하마을, 오쿠니마을은 아예 공무원이 마을 사업을 주관하는 듯이 보였고, 전체적으로는 그린투어리즘에 기반한 도농교류를 통해 많은 농민이 생업기반을 가지는 모습도 확인할 수 없었다. 그린투어리즘이 활성화된 곳에서 마저 전체 농가의 1%미만만이 도농교류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린투어리즘을 한국 농촌의 활력을 되찾을 수 있는 대단한 비책인양 여기는 정책입안자들의 판단은 잘못된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는것같다. 그렇다고 다른 대책은 없지만 그린투어리즘에 대한 과대 평가는 조심해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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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1일부터 15일까지 4박5일간 일본 연수를 다녀왔다.
이번 연수는 경북 봉화군 명호면의 7개리로 꾸려진
청량산비나리권역 주민등 17명이
일본 규슈의 대표적인 농촌마을을 견학하며
마을 공동체 사업을 통해 마을을 활성화한 사례를
밴치마킹하기 위한 '주민역량강화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된 것이다.
넉넉하지 않은 일정과 사전 준비부족으로 충분한 연수의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적지않은 배움과 새로운 경험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던
값진 여행이었다.
5일간의 여정을 나름대로 3번에 나누어 정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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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수 첫날

5일간의 부재를 대비한 이런저런 정리와
여정을 위한 준비로 새벽1시가 되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잠이 설핏 들자마자 핸드폰 소리가 울리고
억지로 몸을 일으켜 전화를 받고 시계를 보니 새벽 2시반,
새벽 4시에 명호에서 출발하기로 되어있는데
위원장님께서는 한잠도 못주무시고
동행할 각 위원님과 관계자분들께 전화를 한 것이다.

다시 이불속으로 기어들어가 얕은 잠을 자다가
3시30분이 되어서야 일어나 세수를 하고 집을 나섰다.
두어번의 유럽과 후주 여행의 경험때문인지 그리 먼길을 떠나는 기분도 들지 않고
또 긴 일정도 아니어서 전날 간단히 배낭을 꾸려놓았었다.
세수를 하고 옷을 입고, 전날 꾸려 두었던 배낭을 매고
출발지인 명호에 도착해보니 벌써 일행들은 도착해 있었다.
 모두들 들떠있는 모습이었다.

급한 인사를 나누고, 5일간의 즐거운 여행을 서로 축원하면서
버스는 눈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김해공항에서 후쿠오카행 아시아나 항공기는 10시 30분에 이륙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눈길에다가 일본여행에 대한 설레임이 이른 출발을 재촉했다.
김해 공항을 30여분 남겨두고 청도 휴계소에서 이른 아침을 먹고,
공항에 도착하여 출국수속을 밟고 출국장에 들어서니
드디어 진짜 일본여행을 가긴 가는가보다는 설레임으로
가슴이 콩닥거리고 작은 긴장이 몰려왔다.

개인적인 여행이 아니라 일본 농촌사업을 벤치마킹하기위한
마을주민 연수다 보니 이번 여행의 목적은 사실 명확했다.
마을 사업 추진위원님들간의 유대와 단합의 계기가 되고
그리고 일본의 선진마을 사례를 통해
우리 지역공동체의 활성화를 도모한다는 것이
이번 여행의 목적이다.

그래도 이번여행에 거는 나의 개인적인 기대는 없을 수 없었다.
첫 일본여행이기도 하지만 일본에 대한 조금은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있었다.
2~3년전 와이프의 일본인 친구분들이 우리집에서 3일간 머문적이 있었고
그때나는 직접 그분들을 모시고 안동과 봉화지역을 돌며 안내를 했었다.
그리고 그분들이 떠나며 오사카 방문을 권유했고, 실제 와이프는
오사카 여성영화제에 초대받아 그분들의 집에 수일간 머문적도 있다.
그 이후 메일과 엽서 등을 통해 교류를 한 때문인지
일본이 세상 어떤 나라보다 관심이 가는 나라가 되어 버렸다.
     
꼭 그것때문은 아니지만 일본의 문화와 문물을 접하고
낯선 삶 속에서 익숙한 나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보는
그런 여정이길 기대했다.

가깝고도 먼나라 일본이라지만
사실은 가깝고도 가까운 나라가 일본이었다.
김해공항을 이륙한 비행기는 겨우 40여분이 될까말까하는 사이
후쿠오카공항에 착륙을 시도했다.
긴 줄을 따라 입국심사를 받고 공항을 나와 후쿠오카 공기를 들이쉬며
바라다본 도시는 낯선 이국이 아니라
너무나 친숙한 풍경이었다.

한국인과 외모가 크게 다르지 않은 일본인들,
차, 건물, 도로 등 어느것 하나 이질적인 것이 없고 친숙했다.
그 친숙하고 다르지 않은 외양속에
또 얼마나 다른 점이 감춰져 있는지 알게 되는데는
그다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나에게
결코 낯선나라가 아니라 친숙하고 또 친절한 이웃으로 남게 되었다.


 김해공항 출국장 풍경.
낯선 나라로 떠나갈 분들의 가벼운 발걸음과 새로운 세상에 대한 동경과
새로운 만남에 대한 설레임이 가득하다.

후쿠오카에서 첫 식사를 한 식당이다.
가벼운 소고기 구이와 기무치, 밥과 미소된장국으로 이루어진 식단은
깔끔하고 맛깔스러웠다.
이번 일행중 가장 어린 이웃 욱이 아빠가 폼을 잡고 있다.


첫 식사를 마치고 들런 모모치해안이다.
방조제를 만들고 바다를 메궈 땅을 넓혀나간 자리에
인공으로 모래사장을 만들고 공원을 만들었다고 한다.

모모치 모래사장에서 주운 사랑의 기원을 적은 조개껍질이다.
신년에 바닷가에서 조개껍질에 소원을 적어 바다에 던지는 풍습이 있는지 모르겠다.
사랑의 기원이 이루어지기를 축원하면서 바다로 돌려 보냈다.

첫날 두번째 방문지인 아사히 맥주공장.
공장견학을 마치고 맥주 시음을 할수있는데
일인당 3잔까지 맥주를 공짜로 마실 수 있었다.
뭐 별다른 맛이 있는 것도 아니고,
공장이 인상깊었던 것도 아니고
그냥 맥주 석장 얻어마시러 귀한 여행일정을 소비해야 하는지
의아스러웠다.

일본의 거리는 겉으로 보이는 깨끗하다는 인상보다 훨씬더
우리와 비교해 다른 점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인의 삶의 태도를 이루는 많은 요소들중에
차와 관련된 것만 한정해서 보고 부러워하거나 비난하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겠지만
기본적으로 일본인의 운전문화는 우리가 많이 배워야할 것 같았다.
먼저 거리에서 쓰레기를 볼 수 없는 것은 물론,
차가 아무리 많아도 경적소리를 거의 들어볼 수 없었다.
그리고 정지선을 지키고 정지했을 때의 충분한 차간거리,
절대로 규정속도를 위반하지 않는 운전습관,
고속도로 규정속도가 시속 80KM라는 사실은 놀라울 정도였다.
일본 고속도로가 나빠서 규정속도가 작은 것도 아니고,
또 고속도록 규정속도가 작아서 일본의경쟁력이 뒤쳐지는 것도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 안전을 최우선시 하는 그들의 삶의 태도는
모든 가치를 다 내팽겨치고 오직 경제성장이라는 단일 가치를 향해 질주하는
한국사회에 어떤 메시지를 주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 일행이 4일간 타고 다닌 버스 기사님께
휴계소에서 아이스크림을 드렸더니
먹으면서 운전하면 불법이라고 하시면서
승객인 우리들의 양해를 구했다.
그뿐이 아니다.
도로가 갓길에 포크레인이 정지 작업을 하는데
프크레인 기사가 헬멧을 쓰고 작동을 하는 것을 보고
우리 일행은 모두 몰랬다. 한국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광경이라고.
거기다가 3방향에 각 1명씩 3명의 교통통제 요원이 포크레인을 감싸고
차량의 소통을 안내하고 있었다.
일본여행중에 안전과 관련된 그들의 철저한 준비 자세는
혀를 내두를 정도 였다. 참으로 부럽고 또 부러웠다.

구마모토에 도착,최고의 번화가인 '시모도오리(선로드)'를 1시간 정도 돌아봤다.
일본의 대중문화, 특히 청소년 문화를 접하고, 상가의 모습들도 불러볼 수 있었다.
이날은 일본의 공휴일의 하나인 성인의 날이었다고 했다.
거리마다 기모노를 입은 젊은 아가씨와 까만 양복의 청년들이
떼지어 몰려 다니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모두들 올해 스무살이 된 젊은이들이라고 했다.
일본의 성인의 날은 그해 성인이 되는 남녀가 기모노와 양복을 입고
성인식 같은 행사를 치루고 같이 파티도하고 의미있는 시간들도 가지는 그런 날이라고했다.

출국전 딸아이가 나에게 특별히 부탁한 음악 CD가 있었다.
"동방신기" 일본어로는 '토호신끼'라고 한다는데
언어도 안되는 낯선 타국에서, 그것도 단체 행동을 해야하는 와중에
CD를 구입하기는 쉬운일이 아닐것 같았다.
연수 이틀째부터는 본격적으로 산골마을을 돌아다니며
견학을 해야하기 때문에 딸아이가 부탁한 음악 CD를 사기에는 이날이
절호의 기회였다. 다른분들이 거리를 돌아다니며
일본인의 삶과 문화를 만끽하고 계셨지만
나는 오직 레코드 가게를 찾기위해 온신경을 모았다.
가까스레 레코드 가게를 찾아 과업을 완수할 수 있었지만
돈만있으면 손짓과 표정으로도 충분히 의사를 나누고
물건을 사고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시모도오리거리를 산책을 마치고 일본에서의 첫날밤을 보낼 숙소인
시로가네호텔에 짐을 풀었다.

일본인의 친절에 대해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현지에서 느끼는 정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버스가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 호텔 직원들이
문앞에 나와 있다가 우리를 맞고, 우리 짐을 버스에서 내려
호텔 로비까지 들어다주었다.

침실에 들어가니 차와 간단한 비스킷이 준비되어 있었고,
이는 일본 여행 내내 숙소마다 만날 수 있는 작은 것이지만
낯선여관이 아니라 편안한 내집같은 느낌을 주게되는
소중한 서비스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료칸(온천이 있는 여관)마다 '유까타'라는 전통 옷이 있었다.
온천을 하거나 식사를 할때, 료칸 내에서 마음대로 입고 다닐 수 있는
편한 옷이었다. 짐을 풀자마자 모두들 우카타를 입고 호텔 로비로 내려와
서로의 모습을 보고 웃고 사진을 찍으며 저녁 식사 시간을 기다렸다.
이번 여행 일행중에 여성은 딱  두분인데 한분은 봉화군 개발위원인 박여사시고
또 한분은 무리마을 사무장이다. 두분이 우카타를 입고 있는 모습이
잘 어울린다.

료칸에서 받은 첫 식사다.
일본식 정식이라고 하는 데 먹을 게 없어 보이지만 사실은
푸짐하고 맛깔스런 음식이었다.
남길게 하나도 없는 슬기로운 식단에 매료되어 일본 여행 내내
한번도 음식을 남기지 않고 그릇을 다 비웠다.
몇몇분은 일본 음식이 입에 맛지않아 미리 준비해간 고추장을 찾으시거나,
음식을 남기는 경우도 있었지만
적어도 나는 5일 내내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어 너무 행복했다^^*

호텔 객실은 다다미가 깔린 화실로 2인실이었다.
낡은 듯하면서도 깔끔한 객실은 
한국에서 들렀던 현대적인 모텔에 비해 훨씬더 아늑하고 
잠이 잘 올것같은 그런 방이었다.

호텔 방에 있는 침실내 구닥다리  TV다.
사실 TV뿐 아니라 료칸의 이런저런 물품이나
건물을 살펴보면 어느것 하나 낡지 않은 것이 없었다.
새것에 대한 우리의 집착과는 달리
일본사람들은 낡은 것에 대한 애착이 상당히 강한가 보다.
사실 료칸의 등급을 매길때도 얼마나 역사가 깊은 곳인가 하는 것을
제일 중요하게 고려한다고 한다. 

일본 여행 첫날의 밤은 깊어가자
몇몇방에서는 한국에서 가져온 소주파티가 벌어졌다.
하지만 일본에 와서 호텔방에서 소주나 마시고 있는다는 게
나는 도저히 용납이 안되어 호텔을 나섰다.
호텔 입구에는 우리 일행 두명이 나와 같은 생각으로
나와있었지만 마땅히 갈 것을 몰라 서성이고 있었다.
우리가 지내는 호텔은 조금은 외진 구마모토 시의 외곽에 위치한
때문에 사실 호텔 문을 나서도 갈 곳이 없었다.
택시를 불러 시가지로 나서기에는 두려움도 있었고,
또 첫날이다보니 어두컴컴한 호텔 주변 주택가를 산책만 하고 돌아왔다.

호텔 6층에 있는 온천에서 목욕을 하고 방으로 돌아오니
들뜬 마음이 가라앉으면서 밀린 피곤이 몰려왔다.
새벽부터 움직이다보니 전날 거의 잠을 자지도 못한데다가
항공여행이 주는 긴장감이 피로를 더했는가보았다.

일본 여행 첫날, 잘 보고, 잘 먹고, 온천 잘하고,
편안한 잠자리에 누우니 너무나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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