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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의 슬픔을 놀아주랴]
홍인숙 저
서해문집, 2007년 10월

"누가 나의 슬픔을 놀아주랴"는 역사에서 배제된 "여성의 역사"를 한 시대를 풍미한 걸출한 여성예술가들의 "개인사"를 통해 복원하고 있다. 어디 우리 역사 속 여성의 삶만이 그러했겠는가마는 사실 "가부장제"가 지배하는 모든 시대의 모든 사회에서 여성의 역사를 "눈물"없이 "분노"없이 읽는다는 것이 어디 가능이나 하겠는가! 그래서 이책의 제목 "누가 나의 슬픔을 놀아주랴"가 공감될 수 밖에 없었다면 너무 감상적일까?

나는 이 책을 통해 우리의 친구이자, 멋진 예술가인 많은 "여성"을 만나게 된 것이 무엇보다 반가웠다. 물론 그 반가움은 분노로 슬픔으로 변해갔고, 결국 상처로 남아 오랫동안 가슴에 쓰린 통증을 일으키겠지만, 뛰어난 재주를 타고났으면서도 결코 뛰어날 수 없었던 배제와 억압 구조 속에서도 나름대로 분투한 위대한 여성 예술가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큰 기쁨이었다. 나아가, 조선과 근대를 있는 완벽한 가부장적 억압 구조속에서나마 여성 예술가의 삶이 단지 좌절과 굴종, 비애와 원통함만을 남긴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알게 된 것은 이 책을 통해 얻은 또다른 위안이었다.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여성예술가의 삶을 대하면서, 타고난 재주마저 다하지 못하고 삶을 마무리하거나, 열악한 삶의 조건을 뚫고 이룩한 예술적 성취마저 박탈되거나 가려져 전승된 예술적 성과물들이 미미하기 이를 데 없거나 아예 흔적조차 찾아보기 힘든 경우라 할지라도, 그들의 삶만으로도 현대를 사는 나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어쩌면 위장된 가부장주의가 그 야만적 본성을 버리지 못하고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시대를 딸을 키우며 살아가고 있는 한 아버지로서의 절박함이 일으키는 ‘공감’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 책을 통해 만난 허난설헌과 허소설헌, 황진이와 이매창 등등 많은 여성예술가 중에 누구 하나 애절하게 다가오지 않은 삶이 없었지만 끝내 그 애절함이 분노와 처절함으로만 남은 몇몇 여성예술가는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김명순과 이월화, 그리고 나혜석... 그들은 어떻게 ‘계명된’ 근대에 조차 구조화된 가부장주의가 교묘히 작동하여 적가부장주의자를 박멸하고 응징하는가를 보여준 극명한 실예기 때문일 것이다. 소위 '모델'소설이라는 야만적 무기로 가부장주의에 도전하는 여성예술가를 무자비하게 난도질하고 능욕하고, 삶에 대한 애착을 그 근원에서부터 파괴해버리는 근대의 계몽된 가부장주의의 수호자인 남성 예술가들의 작태는 차라리 등에 칼을 꽂는 직접적 살해보다도 더 잔인함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기독교의 마녀사냥이 있었다면, 우리 근대에는 '모델소설'이 있었다고 해야할 것이다.

그와같은 '모델소설'을 대하면서 나는 왜 소위 최근에 있은 '신정아 사건'이 떠올랐을까? 합법과 예술을 가장한 폭력장치를 통해 가부장주의에 도전하는 불온한 여성을 살해했던 "모델소설"이 학력위조 사건인 "신정아사건"과 어떻게 같은 맥락일수 있을까?

우리사회에 만연한 출세주의에 빠진 한 여성이, 역시 우리사회에 강고히 뿌리내린 기득권 보호장치인 "학력주의"의 틈을 비집고 권력의 언저리에서 출세가도를 달리다 낙마한 소위 "신정아 사건"의 진행과정을 보면, 가부장주의와 학력중심주의 그리고 여성상품화의 논리가 교묘히 결합된 한편 드라마를 보는듯했다.  

소위 잘난 여자에 대한 마초들의 숨겨진 적개심과 열등감이, 알고보니 가짜라는 사실에 직면하자 마자 "그 미친년이..."식의 폭발적인 대중적 반응으로 표출되고, 그러한 야만적 반응을 리더하는 보수신문은 연일 신정아에 대한 가십성기사로 도배를 하고 그리고 그 클라이막스가 된  "누드"로 신문 1면을 채운 문화일보의 인격살해행위까지... 그 과정에서 적어도 나는 현대문명의 기본적 합리성은 물론이고 소위 무죄 추정의 원칙이나 개인의 인격보호원칙은눈을 닦고 보아도 찾아볼 수 없었고, 한국 언론의 '언론자유'로 분칠 한 얼굴 이면의 간악함을 날얼굴 그대로 직면할 수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나는 감히 그것은 신정아가 "여자"이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고 단언한다. 다시 말해  김명순과 김일엽, 나혜석 그리고 이월화, 그리고 신정아 사이의 핵심적인 공통점 하나는 단지 그들이 여성이라는 것 말고는 이해될 수 없을 것이다.

근래에 들어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 늘고, 가부장주의에 대한 도전이 거세지면서 어쩔 수 없이, 가부장주의 이데올로기로 분칠한 “심사임당”이나마 고액권 화폐에 사용할 인물로 채택하니 마니 하는 논쟁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 한편 코미디를 보는 듯 우습기도 하지만 그러면서도 거부할 수 없는 변화가 근원으로부터 균열을 내며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희망을 주기도 한다.

난 그대들의 슬픔을 같이 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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