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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전 오성윤 감독이 황선미 원작인 동화 [마당을 나온 암탉]을 만화영화로 만들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한참뒤 친구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부분적으로 만들어진 캐릭터와 동영상을 보이며 친구들과 아이들의 평을 구했다. 그리고 잊혀져버린 지 몇년만에 [마당을 나온 암탉]이 언론의 대대적인 호평과 지원을 받으며 우리 앞에 나타났다.  내가 사는 곳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안동의 극장을 찾았다. 2개의 개봉관 중 한 곳에서 바로 상영을 시작했지만 낮시간대에 한정되어 있는 상영시간때문에 지난 주말에야 조조 타임으로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이번 영화를 급히 보게 된 것은 오성윤 감독이 만든 영화를 꼭 봐야되겠다는 의무감과 더불어 한국 애니메이션영화의 역사를 다시 쓰게 만든 수작이라는 언론 평가에 솔깃했기 때문이다. 조조타임에 들어선 극장에는 아이들끼리 오거나 아이를 포함한 가족  단위의 관객들만 가득했고 아이를 다 키워버린 우리같은 어른 관객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일단 만화영화에 대한 한국 관객의 선입견, 혹은 지금까지 만화영화가 단지 아이들 영화에 머문 한국 만화영화의 현실을 확인하면서 영화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한국 만화영화의 맥을 짚고 있지 못한 관객의 한사람의 눈으로 한국 만화영화사에 있어서 [마당을 나온 암탉]의 위상을 가름한다는 것은 주제 넘는 일이고 일단 가능한한 원작의 내용을 잊고, 영화 자체에 몰입하기 위해 노력했다.

90여분의 상영시간이 금방 지나고 관객들이 서둘러 빠져나간 뒤에 마지막으로 극장을 나섰다. 언론의 극찬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는 측면도 있었지만 이제까지의 다른 만화영화들에 비해 장명장면의 아름다움이 매우 독보적이었고, 서정성을 강조하면서도 그것에 매몰되지 않고 생명의 리얼리티를 살리고 있는 측면, 알려진 제작기간이 6여년인 것 처럼 오랜 시간동안 조탁을 거듭해 거둔 높은 완성도가 기억에 남았다. 그리고 재미와 교훈이 적절한 조화를 이룬 속에서 , 특히 오성윤 감독이 어느 인터뷰에서 말한 작품의 회화성과 캐릭터의 연기력을 살리는데 중점을 두었다는 의도는 일정정도 달성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아뭏튼 개봉 일주일을 넘기면서 관객 동원에 성공하고 언론의 폭발적인 호평을 끌어낸 성공적인 만화영화 한편으로 등극한 [마당을 나온 암탉]은 한국 영화사의 한페이지에 기록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오성윤 감독이 한국을 대표하는 애니메이션 영화감독을 넘어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감독으로 성장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영화를 뒤짚고 곱씹어 봤다. 그래서 관객의 한사람으로서 앞으로 나올 더 좋은 작품을 바라는 욕심에 아주 사소한 그리고 주관적이기까지 한 희망사항을 몇가지 정리해 봤다.
 

먼저  사실적인 파스텔톤의 풍경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그 위에서 나그네와 족제비의 싸움, 잎싹과 족제비의 싸움, 초록의 경주 장면 등 박진감 넘치는 활극을 전개함으로써 목가적인 서정성과 속도감을 동시에 추구한 것으로 보이는데 왠지 조금의 부조화가 남는 듯했다. 서정적 배경과 강력한 색체와 형태의 캐릭터의 부조화도 마찬가지 느낌이다.
또한 영화가 원작동화에 기반하다보니 전체 내용적 측면에서 원작의 틀에 갇힐 수밖에 없겠지만 원작이 가지는 가족주의적 태도 - 엄마가 입양한 자식을 잘 키워 세상에 내보내는 것으로 삶을 마감하는 설정은 너무 평범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각각의 캐릭터가 갖는 좀 평면적인 성격도 어린이용 만화영화임을 감안하더라도 너무 단순화한 것 같았고, 관객의 흥미를 유발하기 위해 도입한 몇몇 장치들이 스트레오 타입에 빠져 있는 것 같아 조금은 불편했다. 달수를 보면 인어공주의 세바스찬이 생각이 나고, 초록이의 파수꾼선발 경주대회를 보면 헤리포터가 생각이 나고, 또한 각각의 캐릭터는 디즈니 냄새가 나는 것은 왜인지 모르겠다.  
한 사람의 관객이 가지는 이와같은 주관적인 희망사항에도 불구하고 [마당을 나온 암탉]은 지금 까지 한국 애니메이션 역사를 다시 써야할 만치 중요한 수작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더 늦기 전, 온 가족이 손잡고 꼭 영화관을 찾아 다른 어떤 영화보다 [마당을 나온 암탉]을 볼 것을 이웃에게 권하고 싶다.   그리고 먼 훗날
 오성윤감독의 또 다른 작품이 세계 만화영화사에 한 획을 긋게 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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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당을 나온 암탉](황선미저, 사계절출판사)을 읽고

동화는 기본적으로
"아이에게 들려주는 어른들의 이야기"이다. 동화는 어른들의 꿈, 어른들의 가치, 어른들의 세상살이에 대한 지혜가 담겨있다. 그렇다고 동화가 어른들의 세계만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동화의 스토리는 항상 아이들의 세계에서 펼쳐지고, 그 이야기의 주인공은 물론 아이들이거나 아니면 아이들의 분신인 동물들이다.  그러면 동화는 어른들이 아이들의 세계를 빌어 아이에게 들려주는 싶은 내용을 전달하는 수단에 불과한 것인가?

물론 답은 '아니!'라고 하고 싶지만 부정적 대답 뒤의 수습에 자신이 없기 때문에 무척 머뭇거리게 된다. 최소한 동화를 만드는 사람은 어른이지만, 동화를 만드는 과정은 어른의 욕망을 아이에게 투영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의 세상에 어른이 참여하는 방식이어야 할 것이다. 물론 쉽지 않지만 말이다. 그래서 동화는 아이들이 이해할 만한 수준으로 어른들의 세상을 단순화해서 꾸겨 담은 당의정이 아니라 아이들의 눈으로 재생상된 아이들의 꿈, 아이들의 가치, 아이들의 세상을 담고 있어야 한다. 동화는 기본적으로 환타지여야 할 것 같다.

[마당을 나온 암탉]은 스스로 '잎싹'이라 이름 붙인 암탉의 일대기를 담고 있다. 잎싹은 양계장에서 산란계로 살고 있는 '평범한' 암탉이다. 하지만 평범한 산란계가 꿈을 가지자 비상한 '잎싹'이 된다. 양계장의 좁아터진 공간을 벗어나 햇볕을 받는 넓은 마당을 마음껏 뛰어 노는 꿈, 알을 낳자마자 주인이 거두어 가버리는 산란장에서 벗어나 자신의 알을 스스로 품어 보고 싶은 '불순한' 꿈을 가지자마자 잎싹의 가짜 '행복'은 끝나고 고난의 여정은 시작된다. 하지만 그 고난은 스스로 선택한 삶이 가져다 주는 축복으로 그 고난의 과정을 통해 진정한 삶의 가치, 생명이 주는 희열을 만끽한다.

이 책을 읽자마자 어른들의 세계, 내가 속해 있고 살아가는 세상, 생존에 발버둥치며 보다 많은 부와 권력을 갈구하는 개인들로 가득 찬 세상이 떠올랐다. 잎싹이 사는 닭의 세상은 정확히 3가지 삶의 부류로 구분된다. 노예로 살아가는 산란계와 마당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닭들, 그리고 노예의 삶과 일상의 편안함에 안주하는 마당의 삶도 거부하고 자유의 꿈을 쫓아 위험 천만한 야생의 삶을 살아가는 잎싹의 삶이 그것이다. 세상은 지배하는 자와 지배 받는 자, 그리고 그 사이에서 반역을 꿈꾸는 혁명가가 있다면 잎싹은 금기된 것을 쫓아 고난의 길을 떠난 혁명가에 정확히 일치한다. 반성하지 않는, 반성하지 못하는 불임의 세상에 중독된 혹은 지배당하는 현대인의 삶은 양계장의 산란계가 아니면 출세한 마당닭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잎싹의 불순한 꿈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꿈을 이루는 도정에는 잎싹의 목숨을 쉬지 않고 노리는 족제비의 번들거리는 두 눈이 따라다닌다. 잎싹과 같이하거나 최소한 도와주어야 할 동료집단으로부터 따돌림 당하고 혹독한 야생의 조건에서 생명을 부지해야만 한다. 하지만 꿈이 있는 곳에 길이 있고,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잎싹은 또 다른 외토리 나그네 천둥오리를 만나 삶을 얻고, 알을 품는 꿈을 이룬다. 비록 스스로 낳은 알은 아니지만 입양자식을 가슴으로 낳은 자식이라고 하듯, 잎싹은 천둥오리가 남겨준 알을 품고 생명 창조의 희열을 만끽한다. 하지만 꿈을 이룬 잎싹의 삶은 달라지지 않는다. 여전히 족제비의 위협은 계속되었고, 외톨이의 삶은 변함이 없었다. 아니, 가슴으로 낳은 자식-'초록머리'조차 자신의 무리를 쫓고, 잎싹의 품에서 멀어져 간다. 그렇게 잎싹의 삶은 이어지지만 잎싹은 한번도 꿈의 허망함이나, 삶의 무의미에 빠지지 않는다. 비록 수만년전 잃어버린 비상의 꿈은 엄두도 낼 수 없고, 가슴으로 낳은 초록머리의 비상을 통해 대리 실현할 수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나도 가고 싶다! 저들을 따라서 날아가고 싶다.'

마침내 초록머리가 천둥오리의 무리를 따라 이국만리 먼 길을 떠나게 되고, 자신의 육신은 족제비의 먹이가 되기 직전 잎싹은 잃어버린 닭 종족의 영원한 꿈, 비상의 꿈이 자신의 가슴 깊이 자라고 있었음을 확인한다. 하지만 그 비상의 꿈은 족제비의 날카로운 이빨로 목이 꺽인 뒤에 빈사상태의 잎싹의 눈에 환영으로만 이루어진다

[마당을 나온 암탉]은 독자의 기대에 쉽게 타협해 해피앤딩으로 맺지 않았지만 결코 비극도 아니다. 차라리 다양한 꿈과 현실의 운동이 부딪히면서 빗어내는 복잡하고 현란한 교향곡 같은 세상살이의 진실을 드러내는 작품이다. 그렇지만 생뚱 맞은 의문은 남는다.

[마당을 나온 암탉]은 아이들이 좋아하는 작품일까, 아이들의 부모가 좋아하는 작품일까?    이 의문에 답하는 과정은 긴 공부와 깊은 생각을 필요로 할 것이다.

[마당을 나온 암탉]이 곧 MK픽처스 오성윤 감독의 손에 의해 애니메이션으로 출시된다고 한다. 애니메이션에 거는 기대를 안고 다시 읽은 [마당을 나온 암탉]은 왠지 모를 아쉬움이 있다. 세상과의 대비가 초래한 환타지의 부족이라고 하긴 나의 안목이 부족하지만 말이다. 하여튼 그 아쉬움이 애니메이션 작품을 통해 깨끗이 날아가 버릴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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