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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보통 추위가 아니었나보다. 일어나 물병을 찾아 컵에 물을 부으니 물이 나오질 않는다. 물병을 때리자 얼음가루가 컵안으로 쏱아진다. 방에 난방이 따로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티망에서부터 눈길로 접어들었지만 확실히 3,000m가 넘는 고지인 피상은 추위가 확연히 다른 것 같다. 이렇게 본격적으로 추워지면 4천, 5천 고지로 올라가서는 얼마나 더 추워질지 걱정이다. 어제 만난 하산 트렉커들은 견디기 힘들만치 추웠다고들 호들갑을 떨었다. 마낭이 영하 20도 정도라고 했다. 내가 사는 곳도 겨울아침이면 영하20도정도씩 자주 내려가니깐 못견딜 정도는 아니겠구나 안도가 되었다.
 


아침으로 삶은 감자와 애플팬케익을 먹고 8시 45분 Tilicho Hotel을 나섰다. 어제 추위에 쫒기며 대충 둘러봤던 마을을 다시 한번도 찬찬히 들여다 보았다. 마을을 벗어나자 마자 작은 강을 건너고 오른쪽으로는 Upper Pisang쪽으로 가는 길이고 왼편으로 마낭쪽으로 갈라지는 지점에 탑이 하나 있다. 무슨 탑인지 멀리서 사진을 찍고 가까이 다가가 보니 생각지도 않은 곳에 한국인 위령탑이 아닌가. 찬찬히 읽어 보니 1989년 9월 나와 동갑내기 산악인이 이곳에서 생을 마감한 것이다. 그때라면 내가 대학을 막 졸업하고 취업과 학문, 그리고 또 다른 인생길을 놓고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잠시 헤메다가 다시 대학원을 준비하던 시기가 아니던가? 그 시퍼런 청춘에 그분들은 이곳 낯선땅 안나푸르나의 눈속에 잠이 드신 것이다. 대학원 진학이라고는 하지만 마땅히 하고 싶은 것도 없고, 살고싶은 삶은 살 용기는 부족하여 단지 결정을 유보하기 위한 고육지책에 불과했던 것이 사실인데, 그 분들은 이곳 피상의 설산을 오르며 자신의 삶의 가능성을 찾고 대자연의 신비 앞에서 주어진 자신의 삶을 축복하며 마지막 생명의 에너지를 불사른 것이 아닌가?


그시절 그 나이 때는 보통사람이 외국여행을 한다는 것은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이었지만, 만약 내가 기회가 주어져 이곳 안나푸르나를 밟았다면 나의 삶의 또 다른 가능성을 확인할 수도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때 내게 주어진 우주는 좁았고, 눈은 어두웠고, 심장은 약해빠졌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망설임 속에서 나이만 먹어 온 나의 긴 삶과 청춘을 불살라 그렇게 낯선 설산에서 생을 마감한 그 분들의 짧은 삶이 대비되면서 앞으로 살아갈 내 인생의 무게가 묵직하게 느껴졌다. 두 분의 명복을 빌며 걸음을 재촉했다.



한시간이나 걸었을까? 멀리 비행장이 있다는 홈데가 보이는 언덕엘 올라섰다. 나로다라 언덕이란다. 전망대가 있고 홈데와 홈데 넘어 안나푸르나 연봉들이 한눈에 들어오는 멋진 조망이다. 배낭을 벗고 한참을 쉬며 고도가 높아감에 따라 억지로 줄이고 있던 담배를 한대 피웠다. 삶의 곡절이 많은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살아가다가 이렇게 한번씩이라도 전망이 확 터이는 그런 경험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는 얼토당토 안한 생각이 일었다. 하지만 내 삶의 전망이야 그 자리에 그냥 만들어져 있는 풍경이 아니고 스스로 만들어나가야하는 걸, 내가 게을러서, 그리고 소심한 탓에 지금 답답한 삶을 살고 있는걸 누구탓을 하겠는가? 다시 배낭을 짊어지고 내리막길로 들어섰다.



길은 눈속에 파묻히고 온데 간데 사라졌지만, 눈 속에 숨은 길을 찾아 네팔리들이 내놓은 발자국을 따라 끝없이 걷었다. 눈은 점점 깊어졌다. 잠시 쉴 때는 아름다운 설경에 감탄하면서도, 길을 걷기 시작하면 이내 풍경은 다 잊어버리고 오직 시야는 앞사람의 발자국만 쫒아 기계적인 걸음에 내몰였다. 풍경에 빠져들기엔 발길이 너무 바쁘기 때문이다.


오후 1시나 되어서야 홈데에 도착했다. Maya 식당이라는 곳에 들어서니 미리 도착한 분들이 반갑게 인사를 해온다. 우선 음식을 시켜놓았는데 뒤쳐진 제주 여학생이 감감 무소식이다. 눈구덩이에 혹시라도 길을 잃으면 보통 일이 아니다. 모두다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15분 정도 늦게 도착한다. 추위에 쫒겨 너나할 것 없이 모두 롯지의 부엌에 몰려든다. 좁은 부엌이 조리에 불편할 만치 사람들이 들어서자 가이드 한분이 남자들은 다이닝룸으로 나가달란다. 와이프와 학국인 여선생님은 부엌에 남아 롯지 주인의 아이들과 놀아준다. 역시 특수학교 선생님 이셨어 그런지 말이 통하지 않는 네팔 아이들 조차 소통하고 공감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나중에 식사가 끝나가자 아이들이 다가와 'pen'을 요구했다. 아내가 가방에서 한개를 꺼내 주자, 자기 언니 것도 하나 더 달라고 한다. 어쩔 수 없이 또 하나를 주고 나니 우리가 쓸 게 없을까봐 걱정스럽다.


체크포스트에 들러 체크를 하고 홈데 비행장의 상황을 살폈다. 혹시라도 쏘롱라 패스가 불가능해질 경우 비행기로라도 이동해야하는 상황이 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자갈밭 활주로에 소형비행기를 별로 타고 싶지 않았지만 상황이 악화되면 그역시 어쩔 수 없는 선택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래에 비행기가 오지도 않았고 가지도 않았단다. 역시 활주로는 두터운 눈이 그대로 쌓여있어 혹시라도 지금 비행기가 온다고해도 활주로에 눈을 치우는데만 몇일은 족히 걸릴 것같다. 소형 비행장에 짧은 활주로지만 장비라고는 하나도 없이 오직 육체노동으로 눈을 치워야하기 때문이다. 되돌아 하산 하게 될 경우 홈데에서 비행기를 이용하는 대안은 가능성이 없어 보였다.


뭉지와 브라카는 어떻게 지났는지 기억도 없다. 미리 카투만두에서 듣고서 기대했던 '베이커리'를 만날 수 있었지만 모조리 휴업중이었다. 오래 실망하고 할 것도 없이 군침만 삼키고는 그냥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 오직 눈만보고 하루를 보낸 것 같다. 예상보다 눈이 깊어 시간이 지체되어 날이 저물기 전에 마낭에 도착하려면 여유가 없었다. 홈데를 떠난 뒤로는 빨리 마낭에 도착하는 목적말고는 아무생각없이 발을 내디뎠던것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덕위에 자리한 마낭을 들어설 때는 산그늘이 짙어 저녁 어스름으로 변해가는 시간이었다. 하루의 트레킹을 마치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지만 그나마 어둠이 길을 삼키기 전에 도착한 것에 안도했다. 마낭을 둘러보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고, 또 사람의 활기가 사라진 마을을 구경할 흥도 나지 않았다.


지난 몇일 알고보면 파샹이 늘상 이용하고 안면이 있는 롯지에서 묵게 되었지만 파샹은 꼭 마지막 나의 의사를 물었다. 내가 롯지의 선택권을 줬음에도 불구하고 꼭 롯지를 선택하기 전에 나의 의사를 물었는데 사실 '이러러저러해서 이 롯지가 좋고 저 롯지는 좋지 않다. 어떤 롯지를 선택하겟는가?'는 식으로 물어오니 솔직히 물어보나 마나다. 나의 'OK! This is good!' 한 마디는 단지 파샹을 존중하는 제스추어불과했다. 특별히 고집할 이유가 없는한 가이드나 포터가 선택하는 롯지에 대부분 머무는가보다. 우리도 그랬고, 다른 팀들도 다 그랬는데, 오직 한명만 다른 롯지로 향했다. 그분의 포터가 원하는 단골롯지로 향한것 같다, 우리는 'Yeti Hotel'을 들어섰다.


마당은 통행이 가능할 정도의 공간만 남기고 모조리 누구덩이다. 사람이 사는지, 영업은 하는지 온기라곤 없고 인기척도 없다. 파샹이 윗층으로 올라갔다 오더니 룸번호를 알려주며 키를 준다. 키를 들고 가까스레 찾은 방에 짐을 부리고, 이틀밤을 지낼 곳이라서 빨래를 맡기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역시 세탁소는 많았지만 문을 연곳은 하나도 없었다. 지나가는 네팔리 말로는 주인이 카트만두로 겨울을 나러 갔단다 . '그래, 이 와중에 왠 빨래는... ' 쉽게 포기하고 롯지로 돌아와 양말이라도 빨 요랑이었지만 화장실은 물도 나오지 않는다.


맨 위층인 4층에 있는 다이닝룸으로 향했다. 겉에서 보기엔 영업을 하는지 마는지 의아했었는데 그동안 트렉커들이 몰려왔나보다. 호주 등에서 왔다는 20세전후의 예닐곱명의 젊은이들로 다이닝룸이 왁작지걸 소란스럽다. 같은 일행이 아니었지만 모두들 쏘롱패디나 하이캠프 등에서 이삼일씩 날이 좋아지기를 기다리다가 결국 쏘롱라를 넘어가는 것을 포기하고 되돌아 내려왔단다. 어디 미개척지를 정복이라도 하고 온양 의기양양한 젊은이들의 열기로 다이닝 룸이 후끈거렸다. 구석에 세워져 있는 기타를 들고 노래까지 부르며 차가운 안나푸르나의 밤을 뜨겁게 달구었다.


인적이 드문 산중 마을에서 사람을 만나는 것 만치 반가운 일이 없지만 올라가기위해 마낭에 도착한 사람들에게 등정을 포기하고 하산중인 사람들과의 만남은 썩반갑지 않을 수 밖에 없었다. 계속 올라 갈 것인가 되돌아 내려갈 것인가 하는 어려운 결정의 순간이 다가온 셈이다. 파샹은 계속 비관적인 전망을 내어놓으며 설사 쏘롱라를 통과한다고 해도 묵디나트, 까그베니까지 완전히 빙판이라서 위험하기 이를데 없단다. 솔직히 같이한 몇일사이 파샹은 항상 짧은 하루의 목표치, 그리고 느린 일정을 제안했다. 가이드가 편안한 일정을 원하는 것은 당연지사고 혹시라도 위험이 따르는 시도는 피하고자하는 당연한 일일것이다. 하지만 파샹의 판단을 전적으로 따르다보면 트렉킹이 그야말로 관광투어가 되어버릴 것이 붐명했다. 판단을 마낭에서 지내는 이틀동안 천천히 상황파악을 더 하고 내리자고 미루었지만 사실 나 역시 비관적인 생각이 들었다.


한고비를 넘기고 다음 일정을 확정한 청년들은 홀가분함때문인지 계속 들떠 있었고 시끄럽기까지 했다. 상행인 트레커들은 나이도 나이였지만 몸도 그만치 피곤한 상태인데다가 또 아직 쏘롱라 패스를 포기할 것인지 시도할 것인지 결정을 못한 상태의 긴장감 때문인지 난로가에 둘러앉아 묵묵히 불만 쬐고 있었다. 날이 저물고 상행인 일행은 모두 비슷한 시간에 저녁을 주문했는데 그때 먼저 주문한 청년들이 음식이 나왔다. 돌접시 위에서 계속 지글거리며 맛난 향과 김이 무럭무럭 나는 그 음식이 이곳에서 먹을 수 있는 최고급 음식인 야크스테이크라고 했다. 이 말을 듣는 거의 동시에 모두 '주문 취소'를 외치고는 주문을 다시 하겠다고 나섰다. 800루피면 비싼편에 드는 다른 음식값의 두배가 넘는 가격이지만 강행군을 한 이날 하루는 그래도 다들 그 정도의 저녁 식사비가 아깝지 않은 눈치였다. 안나푸르나 라운드를 떠나와 이날 최고의 음식으로 고단한 육신을 위로하고 따뜻한 다이님룸에서 밤이 깊어지기를 기다리다가 침실로 돌아왔다.


침실 화장실은 물도 나오지 않고, 방안에는 화장실 냄새가 가득했다. 창밖은 눈발이 다시 굵어지고 바람역시 거세져 약한 외창을 부서져라 흔들어댔지만 곤한 몸은 아랑곳하지 않고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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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째 비걱정을 하면서 잠이 들었다.
건기에 이게 무슨 일이람! 물소리에 흠뻑 빠져 깊은 잠이 들었다가 창문을 스미는 빛을 느끼며 놀라 깨었다. 눈을 뜨자마자 오늘 날씨가 어떤지 제일 먼저 궁금했다. 창문에 비치는 밝은 기운과는 달리 여전히 귓가에는 물소리가 맴돌았다. 이상하다 싶어 창을 열어  젖혔을 때 왠걸, 검은산과 대비되며 더욱 파랗게 보이는 하늘이 눈안에 가득찼다. 나도 모르게 '우와' 함성을 질렀다. 지난 밤 폭포와 강물과 비가 어우려져 내던  물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는데, 밤새 빗소리가 슬그머니 빠져버린지도 모르고 아침을 맞은 것이다.
 


마당을 내려서니 롯지 주변에는 온통 조랑말이다. 롯지는 트렉커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짐을 지고 올라가는 사람들과 조랑말 무리에게도 쉬어가고, 자고 가는 곳이었던 것이다. 다이닝 룸에서 우리 부부와 독일인 트렉커 3명, 그리고 2마리의 검은 개와 하산중인 백인 트렉커 한명이 같이 식사를 했다. 그동안 마부는 조랑말들에게 옥수수가 든 자루를 하나씩 입에다 달아주었다. 입에 옥수수가 든 자루를 달고 각자 머리를 처박고 자루안에서 우물우물 아침을 먹는 모습이 너무 재미있었다. 아마 모든 조랑말이 고루 먹을 수 있도록 하는 조치 같았다.


부메랑 롯지의 사오지가 길 떠나는 우리에게 맑게 개인 하늘을 가리키며 'Clear sky! Good luck!'을 외치며 활짝 웃어주셨다. 기분 좋은 출발을 하고, 파샹이 'Short cut'이라며 제안하는 길을 벗어난 가파른 산등성을 한참을 올랐다. 그때서야 저 멀리 롯지에서 막 출발해 우리를 뒤따르는 독일인 트레커들의 모습이 보였다. 포터나 가이드 없이 2명의 남자와 한명의 여자가 모두 100리터짜리로 보이는 배낭을 지고 있었다. 큰 키에 건장한 체격 때문인지, 100리터 짜리 배낭을 지고 걷는 그들의 모습이 우리가 조그만 백펙하나 짊어지고 걷는 모습과 별반 달라보이지 않았다. 아내와 잠시 외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보통 네팔리의 두배는 되어 보이는 저들의 저 건장한 체격만으로도 최초의 조우에서 저들은 얼마나 우월해 보였고, 또 네팔리는 얼마나 주눅이 들었을까. 외모가 주는 선입견은 어떻게 형성이 되는건지 외모가 강박이 된 한국에 사는 사람으로서 한참을 이야기를 나누며 길을 걸었다.


차가 들어올 수있는 마지막 마을인 참체에 도착했다. 얼마전까지만해도 상계까지 차가 들어왔는데 최근에 사륜짚차가 참체까지 들어올 수 있게 된었단다. 지금도 로컬버스는 불불레까지만 들어오는데, 길 공사가 진척되면서 차가 올라갈 수 있는 한계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오래전 안나푸르나 라운드 출발점은 베시사하르였다고 한다. 해가 가고 길이 만들어지면서 라운드 출발점이 점점 북쭉 마을로 옮겨져왔다. 아직도 과정을 중시하는 서양 트레커들중 일부는 고집스럽게 베시사하르부터 라운드를 시작하기도 하지만, 결과를 중시하는 풍조는 라운드 출발점을 점점 북쪽으로 옮겨버렸다. 라운드 코스에서 실제적으로 배제된 마을들은 손님이 줄어들면서 차차 사그라들고 있었다. 베시사하르는 그나마 람중주의 수도라서 괜잖아 보였지만 불불레를 기점으로 롯지의 외관이 확연히 달라보였고, 벌써 불불레마저 기울어가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었다. 더 많은 트레커를 끌어들이기 위한 길때문에 그렇게 사라져가여하는 마을들이 생긴다는 사실이 가슴아팠다.
 

 
참체를 지나자 다시 흰눈 쌓인 산넘어에 짙은 구름이 이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비가 대수냐, 그냥 하루 더 머물면 되지!'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도 이 비가 산정에서는 눈이고, 눈이 길을 막으며 일정은 중단되고, 일정이 중단되면 다시 올라온 길을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면서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참체에서 만난 트레커들은 피상에서 눈에 길이 막혀 쏘롱라 패스를 포기하고 하산중이라고 했다. 피상에는 눈이 30~40cm나 쌓였고, 쏘롱라는 짐작하기 조차 어려울만치 많은 눈이 쌓였다고했다. 지난 이틀 내린 비가 모조리 산정에서는 눈으로 쌓인 것이다. 올라 가면서 내려오는 트렉커들을 한명 두명 만날 때 마다 걱정은 점점 현실성을 얻었다. 아직 눈을 밟지도 않았는데 벌써 멀리 눈덮인 산정을 올려다보면서 구체적으로 하산을 고려해야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어떻게 온 안나푸르나 라운드인데 피상에서 돌아가다니... 파샹말로는 짐작할 수가 없단다. 나는 정답을 빨리 얻기를 원했고 산은 쉬 그 답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May be... May be...' 파생을 말끝을 흐리며 쏘롱라 패스가 불가능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가능하다고도 할수 없단다. 일단 마낭 까지 3일 정도 더 올라가야하니깐 그때까지 바람이 눈을 쓸어가거나, 햇살이 좋아 눈이 녹거나, 그것도 아니면 쏘롱라를 넘기 위해 대기중인 트레커들이 모여 무리지어 함께 쏘롱라 패스를 시도해 볼 수가 있을 거하고 했다. 모든 것은 바람과 햇빛 그리고 운수에 달린 셈이다.


자가트 입구를 들어서는 곳에 학교가 보였다. 어제 묵은 롯지의 사우지가 학교 교사라고 했었는데, 아침에 롯지를 나와 한시간쯤 지나 티하우스에서 쉬고 있다가 그를 다시 만났다. 학교로 출근 중이란다. 그는 담배를 원했고 나는 담배를 건네며 잠시 한두마디를 나누다 시간이 없다며 먼저 출발을 했다. 바로 그 사우지가 아이들을 가르키다가 나를 알아보고 반가운 인사를 하며 손을 흔들었다. "나마스테!!" 학교 건물은 수업중인 다른 학생들이 들어있는지 아니면 그냥 실외의 햇살이 좋아 실외수업을 하는 건지 알수 없었지만 10명의 아이들 세무리가 따로 수업을 받고있었다. 그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한참을 바라다 보았다. 저들의 가난을 뛰어 넘는 아름다움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나만의 감상에 불과한 것일까? 객관적인 행복을 평가하는 기준이 있고 그 기준에 비추어 저들의 삶이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걸까? 지금은 고난을 벗어난 자가 이제는 가진 자의 눈으로 가지는 복고적 취향일뿐일까? 이런저런 생각이 일었지만 나는 염치없이 얼굴가득 미소를, 가슴에 가득 온기를 얻고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자가트를 지나면서 조롱말 행렬이 이어진다. 조롱망은 이곳 안나푸르나의 유일한 교통수단이다. 피상을 지나 해발 3280m의 홈데에 비행장이 있어 소형비행기가 트렉커들을 싣어 나르기도 하지만 이곳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비행기를 이용한 운송은 꿈도 꾸지 못한다. 쌀과 커피, 나아가 집을 짓는데 쓰일 양철스레이트며 목재까지도 사람이 직접나르거나 조롱말을 이용한다. 대여섯마리 혹은 이삼십마리의 조롱말이 무리를 지어 등에 프로판 까스통이나 석유통, 음료수나 곡식 같은 무거운 짐을 지고 가파른 산길을 오른다. 아내는 길가로 비켜서며 저 조랑말들은 전생에 무슨 업이 많아 여기서 조랑말로 태어나 저 고생을 하냐며 안스러워한다. 그렇다고 조랑말을 이끌고 길을 가는 마부의 삶이 그 조랑말보다 뭐 특별히 나을 것도 없어 보였다.


가파른 돌길을 조리를 신고 오르락 내리락거리는 마부의 잰 발걸음이 위태롭고 안스럽다. 저 마부는 또 무슨 팔라자 저 고생일까? 조롱말은 태어나면서 자신을 소유한 주인의 삶에 곧바로 종속되었겠지. 선택의 여지 없이 짐꾼 조롱말로 거친 안나푸르나를 오르락내리락 거릴 수 밖에 없었겠지. 그렇다고 조롱말 무리를 부리는 마부의 삶은 또 어떤가. 초라한 몸골, 조롱말보다 더 거칠어 보이는 발, 일본 조리같은 값싼 슬리퍼에 의지해 가파르고 날카로운 돌길을 오르내리며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잇는 그의 삶이 조롱말의 삶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거의 하루종일 조랑말 무리와 헤어지고 다시 만났다. 한번 헤어진 무리와 다시 만나기도 했겠지만 안나푸르나를 오르는 사람들보다 조랑말 수가 훨씬 많게 느껴진다. 어쩌면 그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저 조랑말이 우리 부부가 먹을 쌀과 야채를, 그리고 안나푸르나 골짜기에 터잡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식량과 생필품들을 다 나르고 있으니 말이다. 조랑말을 보고 마부를 보고 그리고 어느새 나의 눈길은 퍄샹을 향했다. 걸음을 재촉해 파샹과 나란히 걸었다. "파샹, 나는 전통 네팔리 노래를 하나 알고 있다." 파샹에게 말을 건넸다. 'Really?' 아마 파샹은 내가 어떤 노래를 알고 잇는지 이미 짐작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Resam Phiriri!"


"레쌈 삐리리"는 네팔을 한번이라도 다녀온 사람이나 최소한의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다 아는 노래다. 일명 '트레킹 송'이라고도 알려져 있는데 트렝킹 중에 포터나 네팔리 주민들이 부르는 모습도 볼 수 있고, 카투만두나 포카라의 관광지에 가면 그냥 거리에서도 들을 수 있을 만치 대중적인 노래다. 한국의 아리랑 만치 네팔리와 삶이 녹아들어있는 레쌈피리리는 네팔리의 삶과 사랑을 담고 있지만 우리의 아리랑이 그렇듯 수많은 버젼이 있다. 그중에서 트렉커들에겐 "I am a donkey. You are a monkey."라는 가사가 가장 절실하게 마음에 다가올 것 같다. 내가 이 구절을 읊조리자 파샹을 박장대소한다. 그렇게 같이 웃고 있었지만 나의 마음 한 구석이 조금은 아려왔다. 나의 딸보다 어린 스무살 짜리 청년에게 짐을 들리고 산을 걷다니!





사실 누군가에게 나 자신의 짐을 맡긴다는 것은 참 곤혹스런 일이다. 어린 시절 '김일의 레스링' 만치나 나를 사로잡았던 '타잔'을 보면서, 흑인에게 짐을 맡기고 낭만적인 정글탐험을 하는 백인을 증오했던 기억이 났다. 그런데 지금 내가 그 백인의 역할을 하고 있는것이 아닐까? 분명히 괜한 자의식에 불과할 것이다. 포터를 고용하는 일만치 네팔을 위한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네팔포터인권협회'인지 하는 단체에서 20kg이하로 포터의 짐을 싸라고 권장하는 데로 배낭 3개를 각각 18kg, 15kg, 5kg으로 나누어 쌌다. 파샹은 18kg배낭에 자신의 짐 2~3kg을 합쳐 20kg 전후의 짐을 졌고, 나 역시 15kg짜리 배낭에 한번씩 지친 아내의 배낭을 덤을 들다보니 사실 파샹과 나의 짐 무게 차이는 별로 없었다. 그래서 퍄샹은 아내의 배낭을 자기가 지겠다고 몇번이나 제안했고, 연신 'You are strong!'을 외치며 나를 치켜세우기도 했다.


파샹은 고향이 에베레스트가 있는 솔로쿰부의 해발 3500m에 있는 마을이란다. 루크라비행장까지는 걸어서 1주일정도 걸리고, 차가 들어올 수 있는 길까지는 한 이틀 정도 걸리는 오지 마을이라고 했다.
아직 나이는 어리지만 3~4년 전부터 포터를 하고 있고 꿈은 전문 산악인이란다. 어차피 학교를 나와도 취업할 때가 없으니 전공은 의미가 없단다. 벌써 에베레스트의 7500m, 8250m정상까지는 여러번 등정을 했고, 안나푸르나 라운드도 5번째라고 했다. 그렇게 벌어 파샹은 전문산악인의 꿈을 키우면서 여동생을 카투만두로 불러 학교를 시키고 있었다. 건실하고 믿음직그럽고, 눈치 빠르고 재취있는 파샹과 동행하게 된 것은 이번 여정에서 만난 가장 큰 행운의 하나였다.


참체에서 점심을 먹고, 마르샹디강과 나란히 길을 걸었다. 강 건너편은 깍아지른 절벽이지만 그 절벽을 깨고 길을 내고 있었다. 파샹이야기로는 벌써 3~4년째 공사중이란다. 말이 길 공사지 중장비를 볼 수도 없다. 그냥 다이나마이트와 사람의 힘을 주로 이용해 길 공사를 하다보니 진척이 없다고 했다. 머지않아 안나푸르나 라운드 코스가 차도로 대체되고 지금 걷는 이 길은 풀숲에 묻혀 사라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이길을 따라 이루어진 마을들 역시 수풀에 묻혀가겠지.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길 공사를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이 또한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세태의 흐름, 시대의 변화를 무시하고 그들의 '무지'와 '탐욕'을 비난하는 사람들의 뜻이 이해는 되지만 무조건 동의만을 할 수 없었다. 저 길을 통해 아이들은 도시로 떠나가겠지만, 그래도 저 길은 그들의 꿈이 이어지는 길이고, 그들을 위한 의료와 교육이 들어올 길이기도 하지 않은가? 그들의 불편함, 고통은 공유하지 않으면서 그들이 터잡고 살아가는 자연을 보전해라고만 하는 것은 이기적인 요구가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오후 2시반이되자 목적지인 딸에 가까워졌다. 오늘은 조금 일찍 걸음을 멈추고 양말도 빨고, 쉬기로 했다. 딸로 넘어가는 가파른 언덕을 마주하니 벌써 다 온 느끼이었지만 그 언덕을 오르는 일이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언덕에 접어들자 머릴 군이들이 나타났고 뭐라고 고함을 지르며 손짓을 해왔다. 한참 만에 파샹은 곧 건너 길공사장에서 다이나마이트 폭파가 있으니 빨리 몸을 피해라고 한다고 했다. 하지만 좁은 계곡에서 그것도 더 높은 위치에서 다이나마이트를 터뜨리면 도대체 어디로 몸을 감추라는 말인가. 오르막 길에 힘들어하는 아내를 재촉하여 땀을 뻘뻘 흘린뒤 군인들이 서있는 언덕위에 도착했다. 그 위치라면 폭파예정지보다 지대도 높고, 옆에 또다른 언덕이 막아서있기도 해서 안전해 보였다. 속속 도착하는 트레커와 네팔리, 그리고 군인들이 옹기종기 모여 폭파를 기다렸다. 산중에서 뜻하지 않은 구경거리를 만난 셈이었다. 군인들에게 물어보니 5분뒤 폭파한다고 했다. 땀을 뻘뻘 흘리고 올라왔는데 담배 한가치를 피우는 사이 땀이 가쉬고 한기가 들었다. 배낭을 열어 외투를 끄집어 내다가 보니 커피믹서가 한껏 부풀어 있었다. 고도 2,000m도 되기 전에 기압차로 인해 저렇게 커피믹서가 부풀어 오르니 고도 4천 5천에서는 커피믹서가 터지고 사람의 몸도 한껏 부풀어 오른다는 말이 실감이 났다. 트레킹 안내 간판을 읽고 있는데 갑자기 폭파는 일어났고 돌가루 먼지가 계곡을 덮고 멀리 딸쪽으로 날려가는 것을 보면서 가던 길을 마저 가기로 했다.


 5분도 걷지 않아 멀리 딸이 보이기 시작했다. '딸'은 좁은 계곡이 갑자기 넓어지면서 강물이 느려지고 모래밭이 넓게 형성된 지형에 자리잡고 있다. 강과 높다란 암석절벽사이에 형성된 모래밭에 세워진 마을이 조금은 위태롭게 느껴졌다. 우기에 강물이 넘치기라도 하면 도망갈 때도 없어 보였지만 어쨌던 사람들이 잘 살고 있으니 그런 일은 없었는가 보다. 역시 파샹의 선택에 따라 Peaceful Lodge에 짐을 풀고, 양말을 빨고, 맛있는 식사를 하고, 강물소리와 롯지 뒷편 절벽으로 부터 떨어지는 폭포소리에 빠져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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