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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다고는 하지만  나는 제대로 철학공부를 해본 적이 없다.  또 늘 마음 한구석엔  인식에 대한 목마름이 남아있었지만 먹고 사는 일에 쫒기고 게으름에 밀려 공부는 늘 뒷전이었고 이렇게 그냥 나이만 먹었다. 그렇게 먹은 나이 마흔 후반에서 쉰언저리를 맴도는 비슷한 처지의 이웃 지인 두어분이 '철학'공부를 같이 하자고 찾아왔다. 사실 농사로 밥벌어 먹고 아이 대학보내는 것도 감당하기 힘든 처지고, 또 겁없이 벌여놓은 마을 사업이 갈수록 태산이다보니, 마음을 끌렸지만 사양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시 찾아오신 두분의 절실함이 끝내 나로 하여금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게 만들었다. 

공부에 대한 절박함없이, 공부를 할 만한 삶의 여건도 되지 못하는 형편에서 허욕으로 시작한 철학공부지만 철학적 사유 이전에 철학서적에 대한 독서의 편린이나마 편지 글로 정리하여 블로그에 정리해 보고 싶었다. 외적인 성과에 대한 기대 없이 그냥 그렇게 늘 더불어 공부하는 삶이 진정 아름답고 알찬 삶이 아니겠는가는 믿음 하나로 나는 편지를 썼다.
 



벌써 달이 바뀌었습니다. 비나리 천지는 소생하는 생명들이 내뿜는 연두빛으로 가득합니다. 언제부턴가 새 봄을 맞으면 이 봄을 보지 못하고 지난 겨울 세상을 버린 뭍 생명을 애도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세상에 무슨 희망이 있고, ‘나’라는 한 생명은 또한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봄을 맞는 환희는 의미보다도 더 근원적인 것인가 봅니다.

철학’을 같이 공부하겠다고 말씀을 드린뒤 [현대철학의 모험]을 구입하고, 지금은 잊혀진 어린시절의 친구 얼굴을 억지로 기억해내려 애쓰듯 이미 생소해진 개념들을 뒤적거리며 조금씩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개념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릴 뿐 저의 손에는 지푸라기 하나 조차 잡히는 게 없습니다.

난해한 - 저한테만 그런지 모르지만 – 책을 읽어 내려가다보면 또 생각은 옆길로 빠져듭니다. 이걸 읽으면, 이걸 이해하면 나는 지혜로와지나? 아니면 삶의 의미, 존재의 의미에 조금이라도 다가가는데 도움이 될까? 그렇게 책을 읽지 않아도 좋은 이유를 찾는 나태한 의식을 깨워 다시 책속으로 들어가지만 그러한 물음은 앞으로도 책을 읽는 도정 내내 하나의 문제의식으로 계속남아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철학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면 더 혼돈스럽습니다. 우리가 공부하는 철학은 대부분 서양철학의 편린에 불과할 것이고, 그나마 학교를 다닐 때 잠시잠깐식이라도 맛을 보았던 것은 인도철학이나 중국철학 그리고 그 연장선에서 한국철학 정도 였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보다도 훨씬 넓고 심원합니다. 인디언들은 또 그들 나름대로 세상을 이해하고 삶의 의미를 묻고 답하는 나름의 철학이 있을을 터이고 그것은 아프리카사람이든 필리핀사람이든 다 마찬가지 였을 것입니다. 한국만 해도 책으로 묶어 질 수 없는 제도권밖의 무속신앙과 불교와 유교, 도교 등이 결합하고 상호 침투하여 이룩한 다양한 세계관이 다 그 나름의 가치를 가지고 존재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문제의식은 인식의 성실성을 촉발하기는 커녕, 그냥 인식의 끈을 놓아버리는 의식유기의 상태로 저를 몰았습니다. 치밀하고 집요한 인식의 추적을 포기하고 그냥 그대로 대충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인연에 힘입어 다시금 철학책을 손에 쥐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도저히 도달하지 못할 지평이기에 미리 포기하는 삶대신, 좋은 분들 만나 마음 편하게 인류의 철학적 사유의 자취를 곱씹어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조금씩 읽기 시작한 책이 이제사 제2부의 끝에 다다랐습니다. 이제까지 통독한 생성존재론과 해석학, 현상학에 대한 정리는 불행히도 다음으로 미뤄야할 것 같습니다. 일단 엘레야학파, 플라톤의 사고가 어떻게 서양의 철학적 사고를 지배해 왔고 그것이 이떻게 서양 근세 철학까지 이어져 왔는지 추적하는 것이 필요해 보입니다. 또한 이정우가 현대 철학의 분기점을 ‘시간’의 복권에서 찾고, 생성과 시간을 일차적인 존재로 격상시킨 사고를 “생성 존재론”이라 이름을 붙인 것이 정당한가에 대한 검토 역시 필요하다고 보여집니다.

그리고 해석학과 현상학은 이전에 공부할 때도 그렇지만 여전히 저에게는 명료하게 다가오지 않는 미지의 영역입니다. 가볍게 통독한 수준에서 그 많은 내용을 스스로 정리하기가 벅차기도 합니다. 나중에 다시 그렇게 분류되는 철학자 한명한명에 대한 이해의 과정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전문적인 학자가 하는 철학공부와 먹고사는 일에 거의 대부분의 생을 받쳐야만하는 생활인이 할 수 있는 철학공부는 애초에 같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전문적인 학자들이 내린 최종적 성과를 나의 삶의, 인식의 지표로 받아들여도 좋을까라고 스스로 생각해 보면 쉬 납득할수도 없습니다. 사실 마르크스가 말한 노동자면서 동시에 시인이고 철학자인 삶이 가능한 세상의 꿈은 아직 구현되지 못했고 저 개인의 삶조차 그와같은 이상과는 한참 동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철학’하는 삶의 고통, 혹은 부담을 차라리 종교에 귀의 함으로써 들어버리려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대중들의 안일함이 한국 종교산업의 번영을 초래했겠지요.

그런 나태한 의식에 빠지지 않기위해 이번주부터 콩트에서 시작해 매주 한 꼭지씩 읽고 정리한 생각을 메일로 나누겠습니다. 우선 보내주신 두 꼭지의 글-사르트르와 콩트-은 잘 읽었습니다. 지적, 인식적 성실성에 경의를 표하는 것 말고 저가 토를 달 수 있는 글이 아닌것 같습니다. 사실 토론이 되면 좋겠지만 토론이 아니라 그냥 각자의 감상 만이라도 나눌 수 있다면 좋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렇게 생각을 나누다가 기회가 되면 차라도 나누면서 자리 함께 하면 좋겠습니다. 사실 올해 주 1회 봉화문화원에서 배우기 시작한 기타강좌는 표기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주 6일을 마을사업관련 공사판에서 노가다를 뛰고 또 하루 시간 내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그렇게 한해를 보내다 겨울에 집중해서 공부했으면 좋겠습니다. 마음의 짐을 내리지 못하고 한달은 지고 다니다가 이제사 마음을 정하고 그 짐을 내려놓고 편하게 잠자리로 기어듭니다.

20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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