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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5 10일 화요일

오귀스트 콩트(Auguste Comte, 1798~1857)

 

<참고문헌>

이지훈, “콩트와 실증주의 인식론의 기초, [현대철학의 모험]

[서양철학사] 램프레이트, 을유문화사

 

콩트는 19세기의 과학적 성과를 철학적 사고의 토대로 끌어들였다. 그는 생시몽으로부터 인류 문명의 진보에 대한 확신을 얻고, 스스로의 과학적 연구를 통해 과학적 지식의 엄밀성과 확실성에 대한 확신에 이르렀다. 콩트는 과학적 지식에 대한 확신에서 기반해 실증 가능한 것만을 철학의 영역, 학문의 영역에 남기고 실증 불가능한 지식들, 비과학적 인식론을모호하고 불분명한 것들로 팽개쳐 버렸다.

그는 인류의 사고 단계를 3단계로 나누고, 신학적 단계와, 형이상학적 단계를 이어 과학적 단계로 불렀다. 신학적 단계는 미지의 세계를 인격적 정서에 의해 설명하고, 가상적 공상적으로 이해한다. 형이상학적 단계는 인격적 힘을 이용한 세계 이해에서 벗어나 경험적 현상을 넘어 선본질이나실체등과 같은 추상적인 술어로 세계를 설명한다. 과학적 인식의 단계에 접어들면 현상을 실증적인 소여로 받아들이고 이 현상들의 상호관계를 탐구하여 일반화하는 데로 나아간다. 그와 같이 분류한 인류의 사고 단계를 바로 인류 문화의 발전 단계로 등치 시키면서, 콩트는 자신이 살아가던 당대를 <과학적-실증적 단계>로 이해한다. 그리고 과학적 사고를 가장 뒤떨어진 영역인 인류의 도덕적, 정치적, 종교적 방면에까지 적용하려고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과학을 사회학의 영역까지 확장하여사회물리학즉 사회과학을 정립하는 사상적 성과를 낳기도 했다. 이후 사랑하던보오부인과의 사별이라는 아픔을 겪으면서 개인의 정감활동이 이성의 힘의 지배를 벗어남을 깨닫고 이를 제어하기 위한 교육, 종교적 훈육에 골몰하게 되고 급기야는 <인류교>라는 종교의 창시에 이르게 된다.

그의 주요한 철학적 성과는 지훈의 글에서 다루고 있듯 <실증주의 인식론>에 있다.

콩트의 실증주의는 실학으로 볼 수 있으며, 상대주의적 성격을 가진다. 실증주의의 상대성은 세계에 대한 유일한 설명이라는 통일과학의 이념을 부정하고 과학에서의 다원주의를 인정한다는 데 있다. 그 점에서 실증주의는 과학주의와 차이가 있는데 과학주의가 과학이론은 모두 경험적 명제로 구성된다는 입장과 모든 학문이 자연과학으로 뒷받침되어야만 한다는 입장을 가진 반면 실증주의는 현실성, 유용성, 확실성, 정확성, 유기적 상대성 등을 중시하는 입장이다.

또한 콩트는 과학에서 수학의 역할을 높이사지만 모든 과학지식의 수학화는 인정하지 않는다. 실증주의는 수학적 형식화를 과학의 보편토대로 보지 않고 개별과학의 고유성, 상대성을 인정한다.

나아가 실증주의는 과학을 합리적 허구로 본다. 과학은 문학적 상상력을 필요로 하고, 그 연구 과정에서 가설을 도입하나 가설은 수학적 성격을 가진다. 그런데 수학은 추상적 허구적 성격을 가지며, 실험은 주관적이고 상대적이기 때문에 과학은 허구적 성격을 가질 수 밖에 없다고 본다. 허구지만 합리적이라고 하는 것은 실증주의가 과학지식은 역사적, 상호주관적, 집체적 동의를 통해 정립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지식에 대한 상대주의와 역사성의 인정은 지식의 유연성과 개방성을 부여한다.

콩트는 인식의 추상적인 발생근거 자체보다는 인간의 앎, 지식의 성립 근거를 있는 그대로 탐구했다. 그 과정에서 콩트는 철학의 토대는 인식론이라고 보고  인식론은 과학의 성찰을 통해 구성하고, 과학의 성찰은 과학의 역사에 관한 성찰이라는 전통을 세우게 되었다. 이를 통해 공상적인 통일성을 부여하는 철학체계를 거부하고, 철학적 주장이 과학의 성과와 모순을 일으키지 않도록 조정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핵심 개념>

실증

연역과 종합의 통일

경험과 법칙의 대등화

과학의 상대성

수학의 허구성

 

<문제제기>

1. 실증적 방법과 과학적 방법의 차이는 무엇일까?

콩트는 과학적 방법을 절대화하는 과학주의를 배격하면서 상대주의적 입장의 실증주의를 피력한다. 실증주의가 학문 영역간 방법론의 상대주의를 인정하지만 과학주의를 배격한다고해서 과학적 방법에 대한 신뢰를 버리는 것이 아니다. 실증주의는 과학적으로 검증가능한 것만 인식의 대상으로 제한하며 모든 형이상학적 인식론을 배격한다는 측면에서 과학적 방법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드러낸다. 나는 어디까지가 형이상학적 방법이고 어디부터 과학적 방법인지 정확히 구분하지 못하겠다.

 

2. 실증가능한 것의 범주는 어디까지 일까?

콩트는 물리적 세계를 포함해, 사회적, 정신적 현상까지 실증 가능한 영역으로 보았다. 그가 시큐러리스트(비종교적 도덕주이자)인 점을 보면 신학을 거부한 것으로 보이는데 예술영역까지도 실증적 인식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검증(실증) 가능한 것의 영역을 그렇게 넓게 잡을 수 있는지 확신할 수 없다.

 

3. ‘경험의 모호성, 주어진 소여의 불확실성을 제기하는 다양한 논지에 대해 실증주의는 어떻게 대응하고 있을까?

철학은 주어진 경험의 주관적 성격과 모호성, 나의 감성적 인식의 불활실성, 일반화된 지식의 오류가능성 등에 대한 자각으로부터 시작된 인간 사고의 흔적이다. 그와 같은 인식비판의 기초를 외면하고 곧바로 주어진 소여, 경험, 과학적 검증 가능성이라는 지평으로 철학적 인식론을 한정하는 것은 실용적태도인지 몰라도 인간의 궁극적인 철학적 물음에 대해 외면하는 것이 아닐까? 실증할 수 없는 많은 것들 - 생명의 신비와 죽음, 영적 경험과 예술적 환타지, 그리고 당장 이렇게 봄비 소리를 듣고 있는 나의 우울…-  바로 이것들이야 말로 인간이 철학하는 이유가 아닐까? 과학조차 끝내 건드리지 못한 미지의 영역와 끊임없이 생성되는 신비가 넘쳐나는 세계내 존재인 인간은 항상 주어진 경험 그 이상의 것을 탐구하려는 경향을 가지며 그와 같은 이유로 철학이 학문으로 성립하고 존속되는 것이 아닐까? 어떤 면에서는 칸트의 인식비판으로부터 후퇴한 것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앞으로 더 공부가 필요한 과제가 아닐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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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다고는 하지만  나는 제대로 철학공부를 해본 적이 없다.  또 늘 마음 한구석엔  인식에 대한 목마름이 남아있었지만 먹고 사는 일에 쫒기고 게으름에 밀려 공부는 늘 뒷전이었고 이렇게 그냥 나이만 먹었다. 그렇게 먹은 나이 마흔 후반에서 쉰언저리를 맴도는 비슷한 처지의 이웃 지인 두어분이 '철학'공부를 같이 하자고 찾아왔다. 사실 농사로 밥벌어 먹고 아이 대학보내는 것도 감당하기 힘든 처지고, 또 겁없이 벌여놓은 마을 사업이 갈수록 태산이다보니, 마음을 끌렸지만 사양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시 찾아오신 두분의 절실함이 끝내 나로 하여금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게 만들었다. 

공부에 대한 절박함없이, 공부를 할 만한 삶의 여건도 되지 못하는 형편에서 허욕으로 시작한 철학공부지만 철학적 사유 이전에 철학서적에 대한 독서의 편린이나마 편지 글로 정리하여 블로그에 정리해 보고 싶었다. 외적인 성과에 대한 기대 없이 그냥 그렇게 늘 더불어 공부하는 삶이 진정 아름답고 알찬 삶이 아니겠는가는 믿음 하나로 나는 편지를 썼다.
 



벌써 달이 바뀌었습니다. 비나리 천지는 소생하는 생명들이 내뿜는 연두빛으로 가득합니다. 언제부턴가 새 봄을 맞으면 이 봄을 보지 못하고 지난 겨울 세상을 버린 뭍 생명을 애도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세상에 무슨 희망이 있고, ‘나’라는 한 생명은 또한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봄을 맞는 환희는 의미보다도 더 근원적인 것인가 봅니다.

철학’을 같이 공부하겠다고 말씀을 드린뒤 [현대철학의 모험]을 구입하고, 지금은 잊혀진 어린시절의 친구 얼굴을 억지로 기억해내려 애쓰듯 이미 생소해진 개념들을 뒤적거리며 조금씩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개념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릴 뿐 저의 손에는 지푸라기 하나 조차 잡히는 게 없습니다.

난해한 - 저한테만 그런지 모르지만 – 책을 읽어 내려가다보면 또 생각은 옆길로 빠져듭니다. 이걸 읽으면, 이걸 이해하면 나는 지혜로와지나? 아니면 삶의 의미, 존재의 의미에 조금이라도 다가가는데 도움이 될까? 그렇게 책을 읽지 않아도 좋은 이유를 찾는 나태한 의식을 깨워 다시 책속으로 들어가지만 그러한 물음은 앞으로도 책을 읽는 도정 내내 하나의 문제의식으로 계속남아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철학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면 더 혼돈스럽습니다. 우리가 공부하는 철학은 대부분 서양철학의 편린에 불과할 것이고, 그나마 학교를 다닐 때 잠시잠깐식이라도 맛을 보았던 것은 인도철학이나 중국철학 그리고 그 연장선에서 한국철학 정도 였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보다도 훨씬 넓고 심원합니다. 인디언들은 또 그들 나름대로 세상을 이해하고 삶의 의미를 묻고 답하는 나름의 철학이 있을을 터이고 그것은 아프리카사람이든 필리핀사람이든 다 마찬가지 였을 것입니다. 한국만 해도 책으로 묶어 질 수 없는 제도권밖의 무속신앙과 불교와 유교, 도교 등이 결합하고 상호 침투하여 이룩한 다양한 세계관이 다 그 나름의 가치를 가지고 존재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문제의식은 인식의 성실성을 촉발하기는 커녕, 그냥 인식의 끈을 놓아버리는 의식유기의 상태로 저를 몰았습니다. 치밀하고 집요한 인식의 추적을 포기하고 그냥 그대로 대충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인연에 힘입어 다시금 철학책을 손에 쥐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도저히 도달하지 못할 지평이기에 미리 포기하는 삶대신, 좋은 분들 만나 마음 편하게 인류의 철학적 사유의 자취를 곱씹어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조금씩 읽기 시작한 책이 이제사 제2부의 끝에 다다랐습니다. 이제까지 통독한 생성존재론과 해석학, 현상학에 대한 정리는 불행히도 다음으로 미뤄야할 것 같습니다. 일단 엘레야학파, 플라톤의 사고가 어떻게 서양의 철학적 사고를 지배해 왔고 그것이 이떻게 서양 근세 철학까지 이어져 왔는지 추적하는 것이 필요해 보입니다. 또한 이정우가 현대 철학의 분기점을 ‘시간’의 복권에서 찾고, 생성과 시간을 일차적인 존재로 격상시킨 사고를 “생성 존재론”이라 이름을 붙인 것이 정당한가에 대한 검토 역시 필요하다고 보여집니다.

그리고 해석학과 현상학은 이전에 공부할 때도 그렇지만 여전히 저에게는 명료하게 다가오지 않는 미지의 영역입니다. 가볍게 통독한 수준에서 그 많은 내용을 스스로 정리하기가 벅차기도 합니다. 나중에 다시 그렇게 분류되는 철학자 한명한명에 대한 이해의 과정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전문적인 학자가 하는 철학공부와 먹고사는 일에 거의 대부분의 생을 받쳐야만하는 생활인이 할 수 있는 철학공부는 애초에 같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전문적인 학자들이 내린 최종적 성과를 나의 삶의, 인식의 지표로 받아들여도 좋을까라고 스스로 생각해 보면 쉬 납득할수도 없습니다. 사실 마르크스가 말한 노동자면서 동시에 시인이고 철학자인 삶이 가능한 세상의 꿈은 아직 구현되지 못했고 저 개인의 삶조차 그와같은 이상과는 한참 동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철학’하는 삶의 고통, 혹은 부담을 차라리 종교에 귀의 함으로써 들어버리려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대중들의 안일함이 한국 종교산업의 번영을 초래했겠지요.

그런 나태한 의식에 빠지지 않기위해 이번주부터 콩트에서 시작해 매주 한 꼭지씩 읽고 정리한 생각을 메일로 나누겠습니다. 우선 보내주신 두 꼭지의 글-사르트르와 콩트-은 잘 읽었습니다. 지적, 인식적 성실성에 경의를 표하는 것 말고 저가 토를 달 수 있는 글이 아닌것 같습니다. 사실 토론이 되면 좋겠지만 토론이 아니라 그냥 각자의 감상 만이라도 나눌 수 있다면 좋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렇게 생각을 나누다가 기회가 되면 차라도 나누면서 자리 함께 하면 좋겠습니다. 사실 올해 주 1회 봉화문화원에서 배우기 시작한 기타강좌는 표기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주 6일을 마을사업관련 공사판에서 노가다를 뛰고 또 하루 시간 내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그렇게 한해를 보내다 겨울에 집중해서 공부했으면 좋겠습니다. 마음의 짐을 내리지 못하고 한달은 지고 다니다가 이제사 마음을 정하고 그 짐을 내려놓고 편하게 잠자리로 기어듭니다.

20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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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을 전공했다는 이유로 주변 사람들에게 자주 질문을 받는다. 도대체 철학이 무엇인지, 뭐 하는 것인지. 하지만 그 질문에는 꼭 아무 쓸모없는 철학 공부는 왜 했냐는 공격적인 뉘앙스를 담고 있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질문 끝에는 꼭 능청스런 표정으로 철학을 [철학관]과 관련 지으며 혹시 사주 팔자 볼 줄 아냐고 물어오곤 한다. 하지만 1980년대 초반에 대학을 들어가 1990년대 초반까지 다녔지만, 나는 그뒤 어떤 '철학적 사유'도 없이 막 사는 삶을 살아왔고, 그나마 학교다니면서 얻었던 빈약한 철학적 지식마저 2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깡그리 잊어버린지 오래다. 그 세월동안 '철학'과 관련해서는 그런 성가신 질문을 모면하는 나만의 메뉴얼을 갖추었을 뿐이다. 일단은 '철학'이 무엇인지 물어오면 웃고 넘기지만 알만한 사람이 그것도 집요하게 추궁해 들어올 때는 일단 상대를 무시하는 전략을 구사한다 .

아이고 무식하기는, 남들 공부할 때 공부 안하고 뭐했는데요?” 

좀 더 편한 관계일 땐 악담도 서슴지 않는다.

니 상판데기 관상을 보니 올해 넘기기 힘들겠다. 우야면 좋노!”

그리곤 이런저런 개론서에서 배웠던 어원적인 분석을 보여주며 [philosophy = philos()+ Sophia()] 철학은 지식에 대한 사랑’, 혹은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고 말해주기도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한참 부족하다. 그래서 세상을 이해하는 틀이니, 세계관이니 그러다가도 안되면 철학자체의 개념 변천사까지 들먹여본다.



인간의 모든 지적인 행위 전체를 아우르며 학문'이 곧 '철학이었던 시대를 지나, 철학에서 자연과학이 분리되고, 다시 심리학마저 철학에서 분리 되면서 철학에 정체성의 위기가 초래되고 철학의 개념을 재정립하는 과정은 곧 철학의 영역을 축소하는 과정이었다고. 이렇게 말해 보지만 이것은 질문자가 원하는 답이 아니 것이 분명하다.


질문자가 원하는 것은 '철학'의 현실적인 쓰임새가 무엇인지, 철학을 공부함으로써 도대체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사실 나 자신도 그같은 질문자의 물음을 해소해 줄만한 답을 제시하기가 궁색하다는 데 있다.
   
그 궁색한 처지를 모면하기 위한 철학에 대한 이해, 혹은 나 자신의 태도가 이제와서 다시 철학을 공부하고싶은 나의 욕망을 근거짓는 주춧돌일 수 있다. 왜 아무짝에도 필요없는 철학공부가 다시하고싶은가! 지금 다시 하는 철학공부가 나에게 대단한 깨달음을 주거나, 세상을 바라다보는 통찰력을 가져다 줄 것같지도 않고, 내가 하는 농사, 마을일들, 그리고 직접적으로 나의 생계를 해결하거나 나의 사회적 활동을 북돋아주는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다. 더더군다나 이미 학자의 길을 가기에는 멀어져도 한참은 벗어난 인생을 살아왔고, 앞으로 대단한 저술가가 되거나, 하다못해 나름의 '인생철학'을 구축하고 어떤 수준에서든 한명의 사상가나 철학자로 입신할 가능성은 사실 제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다시 철학공부를 하고 싶은 것은  지극히 사적인 이유들과 더불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철학의 매력때문이다.

먼저 나는 학생시절 제대로 공부를 한 적이 없다. 공부를 너무 하지 않은 학부시절이 끝나면서 그 사실이 너무 아쉬워 무작정 대학원을 진학했다. '대학원'이 나의 삶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생각은 전혀없이 오직 나태한 학부시절 못한 공부를 다시 한번 재대로 해 보겠다는 얄팍한 욕구에 이끌려 대학원에 진학했지만, 사실 대학원 시험을 준비했던 7~8개월동안 공부한 것 말고는 대학원 시절 역시 학부시절을 지배했던 게으름의 연속이었다. 더군다나 결혼과 여타 사회적 활동까지 부가된 대학원시절은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면서 끝내 학위조차 얻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다. 결국 못다한 지적 탐구에 대한 미련이 그 솔직한 이유의 하나다.

그리고 이제 나는 내 스스로 받아들이기가 참 곤혹스럽긴하지만 적은 나이가 아니다. 나이를 잊고 살다가도 동년배의 나온 배와 벗겨진 이마를 마주하거나, 나와 친구들의 다 자라버린 자식을 대하게되면 움찔 놀라지 않을 수 없는 나이가 되었다. 대학진학은 물론 군대를 간 아이들도 하나둘이 아니고, 반갑지않은 청접장이 날아들 날도 얼마남지 않은게 사실이다. 마흔 아홉은 결코 적은 나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참 막연하지만 내삶의 의미를 묻고 싶은 욕구가 마음 한켠에서 자라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이 허무의 바다인 세상에서 무의미한 삶을 살고 있지만 결코 그 무의미가 삶의 전부는 아닐 것이라는 느낌들을, 세상의 본질이 허무만을 아닐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을 천착하고 싶은 나이가 된 것 같다. 

사실 서양 철학은 재정립을 거듭하다가 비트겐슈타인에 와서는
가치판단마저 배제되고 철학이 순전히 언어의 의미를 명학히하는 작업으로 국한되기도했지만 사실 철학이 삶의 의미를 묻는 지적 사유가 아니라면
철학은 그 존재 이유가 없다고 본다. 내가 스스로 이해하는 철학은 인간이 자신의 삶의 근거를 묻는 인식적 작업이 아닐까 생각한다. 왜사는지, 생물학적 생명의 연장이 아니라, 인간적 삶의 지속성을 담보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사는 이유를 만들어 나가는 작업이 바로 철학이라는 것이다.

철학을 업으로 삼는 학자들이 이해하는 철학이,
대중들이 일상생활속에서 사용하는 철학과 같은 의미일 순 없다.
'철학'을 검색어로 웹검색을 해보면 당장 드러나지만
우리는 일상속에서 수없이 많은 경우에 '철학'이라 용어가 사용되고 있음을 알수 있다.
정치가들의 '통치철학', 자본가들의 '경영철학', 교사들의 '교육철학' 등등
대중적 의미에서 '철학'은 어떤 판단이나 사고의 저변에 그것을 가능케하는 근본 원리같은 걸 말하는것 같다. 다시말해 학문의 한 분과가 아니라 여전히 인간이 영위하는 모든 학문, 모든 사고, 모든 행위의 저변을 형성하는 인식의 틀이나, 가치의 근거같을것을 '철학'이라는 용어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한술 더 떠 '철학'을 비학문적 도닦기를 포괄해서 사용하는  경우도 많다대중들의 뇌리속에서 철학은 '학문'과 '득도'를 다 포괄하는 인간의 인식적 노력을 말하는 것이다.

나는 철학을 철저히 학문적 견지에서 이해한다. '득도'는 도인들의 몫이고 나는 득도에 관심이 없다. 나는 단지 명징한 세계인식과 나의 삶을 근거짓는 자연과 사회 속에서, 그리고 인간의 역사속에서 나의 작은 삶의 의미를 찾고 싶을 뿐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럼 어떻게 철학공부를 할 것인가에 있다.
사실 대학시절, 학자의 길을 나의 인생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는 그때에는 학자만치 시시껄렁한 삶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대학이라는 틀, 교수라는 직업이 나의 삶의 다양한 가능성을 옭아매는 걸 허용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제와서 그런 길로 인도하는 방식의 철학공부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
농사로 밥벌어먹고살아야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철학공부는 좀 달라야한다는 생각이지만 아직까지 명확한 결론을 얻지 못하고 있다.
우선은 어쩔수 없이 주제중심으로 공부를 하고 생각을 정리할 만한 지적 성과도 시간적 여유도 없는 처지에 맞춰 철학사를 중심으로 공부하는 과정을 이어갈 생각이다.

'철학하기'와 '철학자로 살기'가 괴리된 현실에서  '재미'와 지적 허영으로 하는 철학공부를 벗어날 방도를 미리 알지 못한 상태로 시작하는 철학공부가 그 과정에서 바른 길을 찾을 수 있기를 막연히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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