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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당은 어떤 사람들일까? 그들은 왜 무당이 되었을까, 그리고 어떤 과정을 통해 무당이 되어갈까? 나는 솔직히 만신 이해경을 만나기 전까지 이런 유의 물음들에 대해서 별로 호기심을 가져본 적이 없다.

나는 지독한 반종교주의자라고 스스로 자부하고, 특히나 한국 교회의 추악한 물신숭배에 대해 몸서리를 치는 사람이다. 하물며 무속에 대해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 사람이 우연한 인연에 만신 이해경을 만나고 무속의 세계에 매료되었다. 지난 달에는 바쁜 일상 중에도 만신 이해경을 다룬 다큐 [사이에서]를 보고, 그의 자서전을 틈틈이 읽었다. 두권으로 된 그녀의 자서전을 덮으며 다시 생각해 보지만 나는 결코 무속의 세계를 제대로 이해하거나 내면 깊이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해경의 자서전을 알리는 글을 쓰고 이 책을 일독을 권유하고 싶은 소명감 같은 걸 느꼈다. 그것은 순전히 '이해경'이라는 사람의 매력 때문이기도 하고, 또 설령 나와 같이 무속의 세계를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일지라도 그 세계의 매력을 공유하고 사회적, 문화예술적 의미를 읽어내는데 지대한 도움을 줄 책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책을 펼져 드는 순간 나는 급속히 책 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그녀의 삶은 한 사람의 개인이, 그것도 한국적 상황에서 한명의 여자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혹독한 시련의 연속이었다. 만신 이해경의 한 많고 원 많은 넋두리를 따라가다 보면 나는 어느새 책을 읽는다는 행위를 잊어버리고 그녀와 마주앉아 그녀의 넋두리에 맞장구를 치면서 같이 울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렇게 구구절절이 이어지는 그녀의 삶의 여정을 동반하면서 나는 전적으로 그녀의 편이 된다. 그래서 그녀에게 고통의 원천이 되었던 그 모든 것과 맞서 주먹을 쥐기도 하고 같이 퍼질러 앉아 엉엉 울기도 한다. 그리고 결국 나는 그녀가 무당이 될 수 밖에 없는 운명의 소유자란 사실을 인정하게 되고, 무당이 된 그녀가 사는 무속의 세계를 이해하게 된다.




(상권)을 통해 이해경은 고통의 바다를 항해하며 자신의 운명을 극복해 나가는 외로운 선장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녀에게 만신의 길은 좌절이 아니라 극복의 결과로 성취된 것이었다. 그녀는 무당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귀신이 되어도 남을 혹독한 고난의 과정을 이겨낸 사람이고, 그래서 그녀는 ‘특별한’ 무당이 되었다. 고난을 극복하는 과정이 절로 고행과 득도의 과정에 다름 아니었고, 그래서 인간적 경지를 넘어 신과 인간의 경계에 선 그녀는 당당하다 못해 의연하기조차하다.

(하권)에서 내림굿을 받고 드디어 무당이 된 이해경은 이때부터 시작하게 된 또 다른 싸움의 과정을 풀어나간다. 그녀는 무속에 대한 한국사회의 편견과 홀대에 맞서 조용한 싸움을 전개하면서 동시에 그녀는 타락한 한국 현대 무속세계에 메스를 들이민다. 그녀는 사회적으로 천대받는 만치 스스로 물신주의에 빠지고, 상업화의 길로 접어든 한국 무속을 질타한다. 그리고 무속의 원시적 건강성을 회복할 길을 찾아 나선다. 하지만 그 길은 쉬 드러나지도 않고 그녀를 둘러싼 안팎의 세계는 모두 그녀에게 등을 돌린다.

그와 같은 고난의 과정에서 그녀는 운명인 듯 한국 무속의 사회적 건강성을 찾아 예술로 승화하는 기회를 포착한다. 다시 상권을 되돌아보면 그녀는 무병만을 앓은 것이 아니라 예병까지 앓아왔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녀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무녀로서만 만족할 수 없는 예술적 끼로 똘똘 뭉친 사람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녀는 무수리이면서 동시에 굿을 주관하고, 나아가 무대 위에서 예술로 승화된 무속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물론 그녀는 철저히 사제이고자 하고, 예술의 장에 세워진 ‘굿’일지라도 철저히 그 신성함을 지키는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만신 이해경의 삶을 통해 볼 때, 한국 무속이 종교성을 탈각한 문화예술로서만 존립한다고 해도 충분히 의미 있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다. 본인은 철저히 부인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해경을 통해 사제가 아니라 예술가의 모습을 본다.

책을 덮으며 생각해 본다. 40여 년 전 어린 시절 밤새 동네 골목 안에 울러 퍼지던 꽹과리 소리는 어린 소년에게 단지 무서움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리고 정규 교육과정에서 누누이 반복해서 제도화된 종교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미신’의 어리석음과 그 병폐에 대해 들어왔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성인이 된 뒤에 그렇게 비난하던 ‘미신’의 속성을 제도화된 종교가 더 철저히 맹신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바로 그 지점에서 무속인 이해경의 삶은 타 종교와 동등한 사회적 지위를 위한 인증투쟁과 병행해서 한국 무속세계를 정화하는 과제를 동시에 안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기성 제도 종교에 대해 비판적이지만 존재의 신성, 생명의 영성, 나아가 세계의 종교성 자체에 대해 거부하지 않는다. 내가 받아들이지 않을 뿐이지 타인의 심성 속에 일어나는 신비체험을 손가락질하거나 비하할 이유가 없다. 단 종교의 이름으로 물질과 권력을 탐하는 현 한국사회의 종교현상에 대해 비판적일 뿐이다.

더 나아가 나는 인정한다. 한국의 무속이 여타 종교들과 대등하게 각박한 세상살이에 지친 현대인의 삶에 활기를 불어넣어주는 하나의 치유 방법이라면, 거리에 산재한 신경정신과 못지않게 충분히 그 존재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평생 처음 접해 본 무속의 세계로 나를 안내한 만신 이해경님께 감사드린다. 그녀의 자서전 [혼의 소리, 몸의 소리]를 통해 나는 내가 사는 세계를 좀 더 넓힐 수 있었다. 무속의 세계를 인정하던 그렇지 않던 이 책을 읽는 사람은 보다 넓어진 세상의 지평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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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당은 신과 인간, 삶과 죽음, 그리고 현실과 비현실의 사이에 존재하는 특별한 존재다. 그들은 신의 권능을 빌어 권세를 얻고 간혹 세상을 호령하기도 하지만, 주로 세상의 권능이 비켜선 곳에 없는듯 숨어살면서 5,000년의 역사를 이어왔다. 5,000년 동안 무당은 시대에 따라 사회적 대우를 달리 받았지만 세상의 처분과 무관하게 항상 세상의 시시콜콜한 잡사에 관여해 왔다. 서구적 합리성이 우리사회를 지배한 현대에 들어와 그들의 사회적 존재감은 현격히 줄어들었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존재가 영영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들은 주류사회의 제도화된 종교를 통해 세상 속에 공인된 지위와 부, 권능을 인정받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종교상인'들과는 달리 제도권밖에 축출되어 음지에 숨어 살면서도 한번도 세상과의 끈을 놓친 적이 없다.  무당은 그들을 축출한 지배권력마저 존재의 실존적 한계와 탐욕의 괴리 속에서 그들의 힘을 빌릴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그 잘났다는 정치인들 조차 선거철이 되면 바리바리 돈보따리를 싸들고 그들 '무당'의 권능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기 때문이다.
   

있지만 없는 것으로 치부되어왔던 '무당'이 다큐멘타리를 통해 우리에게 다가왔다. 이창재 감독은 만신 이해경을 통해 이승과 저승의 사이에서, 합리와 광기의 사이에서 무당이 되어가는 법과 살아가는 법을 드러낸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합리의 영역에서 축출된 무속의 세계를 다시 합리와 광기의 사이에 걸쳐놓는다. 그럼으로써 이창재는  합리성의 단독지배로 만신창이되고 신성이 제거된 현대인의 삶을 구원하고자 하는지 모른다.

[사이에서]는 '인희'라는 20대 중후반의 여성이 무병을 앓다 무당의 길로 접어드는 과정을 전편을 통해 추적한다. 왜, 어떤 사람이, 어떻게 무당이 되는가? 그렇게 운명이든, 팔자든 무당이 된 사람들은 이세상에서 어떻게 자신의 삶을 영위하고 세상과 관계하는가? 감독의 시선은 주류종교인의 입장에서 보면 지극히 편향적일지 모른다. 카메라의 눈은 제3자적 입장을 견지하는 엑션을 취하지만, 관객은 금새 만신 이해경의 눈에서 감독의 눈길을 읽고 만다. 감독은 철두철미하게 카메라 앵글에 잡힌 바로 그 사람의 눈으로 다시 카메라를 들여다본다. 그 지점에서 공감과 연민이 피어나고, 관객인 나도 감독의 눈과 만신이해경의 눈으로 [사이에서]에 몰입해버린다.

관객의 관점을 훔친 다큐멘타리는 성공작일 것이다. 그점을 인정하면서도 끝내 남는 의문은 부정할 수 없다. [사이에서]는 탈아가 단순히 이상심리의 일종에 지나지 않는지, 합리성의 지배영역 바같에 있는 초자연적 광기가 있는 것인지, 제도권 종교와 달리 체계도 경전도 교리도 없는 무속이 우리 삶속에 5,000년의 역사를 끈질기게 이어올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지  다 말해주지 않는다. 이점 신성은 부정하지 않지만, 종교는 인정하지 못하고, 무속의 존재가치가 부당하게 폄화되는 현실에 대해 분개하면서도 스스로 무속의 권능을  인정할 수 없는 나 스스로의  인식이 갖는 한계가 야기하는 의문인 것이 분명할 것이다.  
아뭏튼 없는 것 같지만 사실은 우리의 삶, 우리의 의식속에 감춰진 샤머니즘을 드러냄으로써 최소한 '무당'이라고 불리는 우리사회의 한 부류의 소수자의 삶을 양지로 끌어내어 그들 삶의 고유한 가치를 만천하에 공포한 [사이에서]는 명작 다큐멘타리임엔 틀림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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