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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핏 잠이 들고 새벽일찍 눈을 뜨 2012년의 첫날을 맞았다. 오늘부터 라운드가 시작점인 불불레로 로컬버스를 타고 떠난다. 먼지와 진동 소음과 밀폐공포와도 싸워야할 것이다. 7시간에서 길게는 9시간이 걸린다는 여정. 기대되고 또 걱정되기도 한다. 카트만두는 해발 1300m 정도지만 먼지와 매연때문인지 고도때문인지 가벼운 제체기와 콧물이 나고 호흡이 조금은 불편하다. 이제 시작인가?


7시가 조금 넘어 오늘 길을 떠나는 트레커들과 함께할 가이드와 포터분들이 자이언트 민박을 들이닥쳤다. 모두 너댓명. 그중 한명이 우리 부부와 안나푸르나 라운드를 같이할 포터다. 먼저 다른 코스로 떠나는 트레커들과 식탁에 앉았고, 네팔리 분들은 따로 상을 차렸다. 식사를 하고 나서 이구대장님께서 그 중 가장 젊어 보이는 한 사람을 소개해 준다. Pashang Kagi Sherpa. 


일단 건실한 인상에 젊어서 마음에 들었다. 인사를 나누고 나이를 물으니 스무살이란다. 내 딸 보다 두살어린 학생이다. 카트만두의 한 대학에서 생물학을 공부중인데 방학중에 아르바이트로 포터일을 한단다. 인사를 마치고 먼길 갈 짐을 쌌다. 포카라행 비행기를 타야하는 트레커들이 먼저 숙소를 떠나기 시작했고, 한팀 두팀 배웅을 하다보니 마지막으로 우리 부부만 남았다.
이틀 밤을 자고 많은 시간을 같이 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벌써 정이들기 시작한 이구대장님, 그리고 [네팔 히말라야 트레킹 길라잡이]의 저자이시고,  내가 아는 한 한국에서 가장 네팔을 잘 알고 사랑하시는 분이신 '백두산'님과 인증샸을 찍고, 앞으로 스무날 넘게 한길을 가야할 파샹, 그리고 자이언트민박에서 주방일을 맡고 있는 상냥하고 이쁜 아가씨 찬드라와도 출발에 앞선 인증샷을 찍었다.


8시15분에 집을 나섰다. 그 순간 자이언트 민박의 울타리를 완전히 벗어나 낯선 나라로 접어드는 기분이 들었다. 일차 목적지인 베시사하르행 버스를 타기 위해 겅거부 버스파크로 향했다. 숙소에서 걸어서 10여분 거리밖에 되지 않았지만 도착한 버스파크는 내가 상상했던 버스터미날이 아니었다. 매표소라고는 구멍가게보다도 작았고, 버스의 종류나 출발 시간, 목적지 도착예정 시간 등 없으면 안될 것 같은 정보는 하나도 없었다. 버스터미날임을 알려주는 표식은 단지 도로를 따라 이런저런 종류의 차량들이 여러대 서있다는 것이 전부였다. 사실 정보에 대한 강박이 현대병인지 모르겠지만 그 모든 당연한 것들의 부재에도 버스는 나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황량한 겅거부 버스터미날을 떠나기 까지 또 여러명의 거지들과 곤혹스런 조우를 하고, 우리의 대형 배낭 두개는 봉고 지붕으로 올려졌다. 출발 직전에 앞타이어 하나를 똑같이 닳아 더 나아 보이지도 않은 다른 타이로로 교체한 버스는 9시가 다 되어 출발했다. 버스비는 외국인 트레커와 네팔인사이에 이중가격제가 행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파샹으로부터 들었고 3명분 1,145루피를 지불했다. '가난한 나라에 그렇게라도 해야지 먹고살지.'라는 생각을 잠시잠깐하고 있는데, 버스는 시내의 복잡한 도로를 따라 수많은 오토바이들과 뒤엉켜 질주하기 시작했다. 예상했던 일이지만 손에 땀을 쥐게하는 공포의 질주를 하루 온종일 감수해야된다는 사실에 곤혹스러웠지만 그 역시 한국인의 '신경증'에 지나지 않을터... 마음을 다잡았다.


가파른 내리막길에, 길 왼편은 천길 낭떠러지고, 노면의 아스팔트 포장은 거의 다파헤쳐져 있고, 가드레일도 제대로 설치되지 않은 길이지만 버스는 고속도로 달리듯 질주를 계속했다. 클락션 하나로 다른 차량들과 모든 신호를 주고 받으며 가파른 커버길에 구애받지 않고 거의 대부분의 차량을 추월했다. 한국에서 질주하는 택시를 위해 다른 차들이 양보해 주는게 일종의 불문률이듯, 네팔에서 봉고버스는 미친듯이 질주했고 다른 차량들은 거의 대부분 역시 클략선으로 신호를 주고 받으며 길을 양보했다. 베시사하르까지 가면서 길가에 쳐박힌 두어대의 차를 볼 수 있었지만 다행히 큰 인명 피해는 아닌것 같아 보였다. 이런 길에서 이런 차로 그렇게 운전하고도 사고가 이렇게 많지 않은 것이 오히려 신기했다. 아니, 내가 느끼는 공포는 그와 같은 생활이 일상인 사람들에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몰랐다. 사고의 공포, 죽음의 공포가 망상으로 까지 확대된 사람과 죽음과 삶이 너무 가까이 있고 서로가 낯설지 않은 세상과의 조우... 이 역시 네팔이라는 나라에 와서 겪게되는 또 하나의 색다른 경험인지도 모르겠다.


어느새 나의 시선은 멀리 산자락의 계단식 논으로 향했다. 가파른 산을 깍아 계단식으로 논을 만들어 농사를 지어 자식을 먹이고 가르키며 살아가는 네팔리들의 삶이 다가왔다. 여행객인 내가 어떻게 그들의 삶을 속속들이 알수 있겠냐마는 계단논의 경사를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고단한 삶과 숨가쁜 일상이 가슴저미게 느껴져 왔다. 역시 농사를 지어 밥먹고 살아보려고 헉헉되는 삶을 사는 같은 처지지만 네팔 농부들의 삶을 한국 농부의 삶과 비교하는 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했다. 버스를 타고 스쳐지나가며 네팔농촌의 삶을 들여다보며 감상에 젖는 불경을 피하기 위해 그냥 창밖 풍경을 무심히 관조하기 위해 애썼다.



두어시간을 달린 버스가 아무런 시설도 없는 길가 공터에 차를 세웠다. 승객들은 우르르 몰려나가 듬성듬성 시들어 있는 수풀 사이에 적당한 거리를 두고 남녀 가릴 것 없이 볼일을 보기 시작했다. 다시 버스가 지그재그 커브길을 달리기 시작하자 승객들은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플라스틱!"
한국에서 '비닐 봉지'라 부르는 것을 이곳에서 '플라스틱 봉지'라고 하는가 보다. 한 뭉치의 '플라스틱 봉지'가 뒷자리로 넘어가면서 필요한 사람들이 한장씩 뜯어 챙겼다. 구토가 끝난 승객은 창문을 열고 봉지를 길가로 던져버렸다. 우리 앞자리에 않은 어린아이가 구토를 하기 시작했고 순간 아이의 얼굴이며 옷이 토사물로 범벅이 되었다. 배낭에서 물휴지를 꺼내 건네자 아이 엄마는 미소로 답례를 했다. 염치없이 물휴지 몇장으로 누군가에게 작은 도움이 되는 기쁨을 느꼈다. 모두가 지쳐갈 무렵 버스는 휴계소 같은 곳에 도착했다. 다시 화장실에 줄을 서고, 마당 건너편 식당에서 음식을 사 먹기 시작했다. 파샹은 식사를 하러 가 버렸고 우리는 어떻게 음식을 사서 먹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름도 모르고, 맛도 모르는 여러 음식을 남들처럼 접시에 조금씩 퍼 담고, 스파게티같은 것도 한 주걱 받아 네팔의 첫 '노상'음식을 아내와 나누어 먹었다. 알고보니 각자 음식을 담아 음식의 종류와 양에 따라 값을 치루고 먹어야 했는데 우린 그걸 모르고 다먹고 나서 빈접시를 들고 카운트로 갔다. 곤혹스러워하는 직원에게 우리가 먹은 음식의 종류와 양을 바디랭귀지로 전하고 '90'루피라는 너무나 저렴한 음식값을 지불했다. 우리는 휴계소 마당가에서 팔고 있던 토마토를 100루피 주고 한 봉지 샀고, 파샹은 별도로 오렌지를 3개 구입했다.



토마토와 오렌지를 먹으며 바깥풍경을 보고있으니 오전의 여정에 비해 휠씬 편안하고 시간도 빨리 흘러 오후 2시 30분 즈음 버스는 베시사하르에 도착했다. 베시사하르는 '람중'주의 수도로 나름 꽤 큰 시가지를 형성하고 있었고 중심을 가로 지르는 길도 넓고 상가들도 많았다. 버스를 내리자 다시 불불레행 버스를 타러 15여분을 걸었다. 불불레행 버스는 베시사하르의 도심에서 벗어난 언덕 아래 공터에 있었는데 드디어 배낭을 지고 걷기 시작하는 기분이 들었다. 아내는 배낭을 지고 10분도 걷기 전에 숨이 차고 가슴이 쿵광거린다며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안나푸르나에 발을 들여놓기도 전에 가슴이 죄여오는 것 같다니 정작 고산지대로 접어들면 어떡할 지 걱정이 들었지만 시간이 약이거니 여길 수 아밖에 없었다.


버스파크의 매표소는 곧게 잠겨 있었고 직원은 온데간데 없었다. 가게에서 음료수를 한잔씩 나누고 30분쯤 기다리고 있는데 직원같은 사람이 나타났다. 오늘 버스는 마지막 1대가 남았다며 공터에 세워져 있던 폐차 직전의 버스를 가리켰다. 퍄상은 곤혹스러워하며 그래도 타겠나 아니면 내일 떠나겠냐를 물어왔지만 라운드 첫날부터 일정이 어그러지는 것도 싫고해서 그냥 타기로 했다. 몇몇 승객이 더 타고 나서 버스는 출발을 하려고 했지만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한참을 부르렁거리다 조수가 내리고 기어를 후진으로 넣고 다시 스타트를 거는 순간 조수는 바퀴를 받쳐놓은 돌을 빼내자 기사는 다시 기어를 전진으로 바꾸며 버스는 언덕길을 구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번의 시도 끝에 드디어 시동이 걸렸다.
'젠장! 이걸 타고 그 위험한 길을 가야만하나!' 나도 모르게 혼자 구시렁거리는 사이 버스는 우리의 포터 퍄상을 남겨둔채 호기롭게 언덕길을 치고 올라갔다. 퍄상은 손을 흔들며 웃음짓고 있고, 버스는 마냥 달리고 순간적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 지 몰랐지만 파샹의 표정을 보니 심각한 상황은 아닌듯했다. 버스는 베시사하르 시내를 돌았고 조수는 연신 '불불레'를 외쳤다. 이내 버스는 승객으로 가득차고 지붕까지 사람들을 태우기 시작해서야 다시 출발했던 버스파크로 돌아가 파샹과 나머지 승객을 싣었다. 버스는 그제사 불불레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오전에 탄 버스는 9인승정도 되는 소형버스에 지붕까지 포함해 24명까지 타는 것을 확인하고 이후 더 이상 세지 않았는데, 오후의 로컬 버스에는 조금 덩치가 크다고 40명 이상의 승객을 싣었다. 가다가 서고 사람을 싣고 또 가다가 사람을 싣고 나중에 더 이상의 공간이 나오지 않자 남자 승객을 종용해서 지붕으로 보내고 조수 역시도 지붕으로 올라갔다. 지붕으로 올라간 조수는 버스가 달리는 중에도 창문을 통해 버스안으로 들어오기도 하고 다시 창문을 통해 지붕으로 올라가는 곡예를 부리면서 요금을 받기도 했다. 목적지 거의 다와서는 한무리의 어린 학생들이 버스에 오르고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달리는 버스가 노면이 고르지 못한 곳에서 속도를 줄이면 뛰어내리기도 하고 다시 버스 꽁무니를 잡고 지붕으로 올라가기도 했다. 처음에는 이런 아이들의 행태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 들여지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꼭 그런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어떤 마을 앞을 지나자 외모가 비교적 단정해 보이는 남자가 버스를 세웠고, 버스를 세우자 마자 아이들이 지붕에서 뛰어내려 도망을 가기 시작했다. 그 분을 버스 지붕까지 올라가 숨어 있는 아이들을 확인하고, 다시 버스를 내려 버스 기사와 조수를 향해 삿대질을 하고 심하게 꾸짓는 것으로 보였다.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버스를 발길질까지 하고서야 그분은 돌아섰고 대꾸도 한마디 못하고 눈치만 보던 버스 기사는 다시 버스를 몰기 시작했다. 당당해 보이고 씩씩해 보이던 버스 기사가 대꾸도 못하고 당하는 걸 보니 많이 잘못했거나 아니면 항의 하던 그 분이 경찰이나 공무원 아니면 지역의 무슨 실력자일까 상상해 보았지만 내가 알 도리는 없었다.


베시사하르를 출발한 버스는 2시간 만에 불불레에 도착했다. 드디어 트레킹 출발점인 불불레에 도착한 것이다. 퍄샹의 안내로 '투어리스트 체크 포스트'에 들러 '팀스카드'에 확인 도장을 받고 저녁 어스름이 내리기 시작한 마르상디 강을 건너 롯지들이 촘촘이 들어선 골목으로 들어섰다. 퍄샹은 롯지를 선택할 것을 요청했지만 선택권을 퍄샹에게 일임했다.
"너가 숙소를 더 잘 알것아닌가. 너의 선택에 따르겠다." 퍄샹은 밝은 얼굴로 "호텔 마낭"이란 롯지로 들어섰다.


오늘 모든 것이 처음이었듯 말로만 듣던 '달밧'도 처음 마주했다. 도착하자마자 롯지 한켠에서 어린 아이가 냄비에 콩을 삶기 시작했고 그것이 바로 콩국인 '달'이었고, 밥을 '밧'이라고 한다고 하니 달밧은 '콩국과 밥' 인 셈이다. 예상대로 달밧은 내 입맛에 아무런 거부감이 없었고 커리와 나물까지도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식사를 하고 나자 긴장이 풀리고 몸도 고단해져 왔다. 판자로 얼기설기 엮은 이층 숙소로 올라가 잠을 청했다. 하지만 밤이 깊어갈수록 계곡을 따라 불어내리는 바람소리와 마르상디 강물소리가 커졌고 급기야는 양철지붕을 때리는 빗물까지 듣기 시작했다. 두달 동안 비 한방울 내리지 않아 먼지가 너무 많다던 카트만두를 떠나오자 마자 비가 내리기 시작하니, 트레킹을 떠나온 입장에서 반가워할 수도 안할 수도 없었다. 판자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찬바람과 강물소리, 그리고 양철지붕을 때리는 빗줄기에 거의 잠들지 못했다. 라운드 첫날밤 숙면을 취한다면 오히려 그것이 이상한 일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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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잠들지도 못했는데 새벽이 다가오자 수선한 발걸음이 더 이상 누워있지도 못할 정도다. 시간이 많이 남았지만 '스파 온 에어'를 나와  따끈한 우동으로 배를 채우고 티켓을 끊고 검색대를 지나 바로 면세구역으로 들어갔다. 면세 구역에서 면세혜택을 전혀 보지 못한채, 2시간을 배회하며 현대문명의 꽃, 한국자본주의의 기념탑 '인천국제공항'을 만끽했다. '공항'은 인간 욕망의 결정체다. 항공기술의 비약적 발전에 힘입어 '자본'은 세상에 대한 지배력을 확대했고, 물질적 정신적 장악력을 키워나왔을 것이다.  인천 국제 공항은
루이비통, 샤넬, 같은 명품매장과 샘소나이트 그리고  스타벅스 같은 자본주의의 상징들을 집약된 공간안에 품고 있었다. 말로만 듣고 가까이 해 보지 못한 명품 매장들의 화려한 인테리어와 상품을 지척에서 살펴보는 재미는 사실 박물관의 낡은 유물들을 관람하기 보다 더 흥미로왔다. '샤넬 백'이 가지고 있는 어떤 요소가 그 상품을 '명품'이게 하는지 당연히 잘 알수 없었지만 반자본, 반문명의 땅으로 떠나는 비행기를 기다리며 명품백을 감상하는 마음은 자못 비장하기 조차 했다.

비행은 늘 그렇듯, 지루하고, 답답하고, 그리고 긴장되기 조차한다. 적지않은 비행기 탑승 경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내발이 땅에서 떨어져 하늘높이 나르고 있다는 사실이 주는 알 수 없는 긴장감은 곧 도착할 낯선 땅에 대한 설레임과 교차하면서 육체적 피로를 배가했다. 다행히 같은 열의 창가쪽 승객인 네팔 청년과 아주 짧고 간단한 대화로 지루한 시간을 조금이나마 죽일 수 있었다. 집은 포카라고 캐나다에 유학중인 이 청년은 캐나다에서 직항이 없어 한국을 경유해 다시 네팔로 들어가는 길이란다. 캐나다 유학중인 네팔리라면 네팔에서 내놓으라하는 부잣집 아드님일 텐데 예의바르고 순박해 보였다. 짧은 인연이었지만 그 청년은 내가 만난 첫 네팔리로 아마 오래 기억될 것 같다.  

7시간의 비행끝에 멀리 히말라야연봉이 희미하게나마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육체적 피로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비행기의 오른쪽 지평선 끝에 히말라야가 보이기 시작한다는 승무원의 안내방송이 나오기도 전에 승객들은 카메라를 꺼내고 오른쪽 창가로 다가서려 했지만 비행기 내부 공간이 그렇듯 카메라를 창유리에 들여될만한 곳은 별로 없었다. 복도쪽 좌석에 앉아 창가 승객의 양해를 구해 몇번의 셔터를 눌렀지만 나의 카메라 줌은 먼 히말라야의 자태를 당기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재대로 촛점을 맞출만한 경황도 없었다.



도착한 카트만두의 트리부탄국제공항은 소문대로 만만디다. 몇명의 직원이 있었지만 비자 발급을 기다리며 길다란 줄을 만들고 선 승객들에 아랑곳하지않고 유유자적이다. 그렇다고 비자발급이 안될 것도 아니고 나 역시 '빨리빨리'정신을 버리고 바로 현지화된다.

비자 발급만 늑장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짐을 찾는데도 한참을 기다려야했다. 지루한 것은 물론 허리통증을 느낄만치 기다린뒤 배낭을 찾고 공항을 나섰다. 택시와 찦 기사들이 우르르 달려들었지만 예약된 숙소 자이언트 민박에서 픽업을 나온 분과 쉽게 만날 수 있었고 다른 여행객 몇분과 함께 낯선 카트만두 거리를 달려 겅그부 '까따리 바자르'로 향했다. 픽업을 나오신 분은 Lal Prasad Bhattarai씨라고 한국에서 노동자로 11년을 보낸 동생이 있으시단다. 그 분 역시 동생 덕분에 한국을 여러번 오가며 적지않은 세월동안 노동자 생활을 하셨는데 그 경헝을 밑천으로 J Vill이라는 여행사를 운영하신다고 했다. 한국말은 거의 한국인과 다를바 없을 수준이고 착하고 친절한 인상이셨다.

카트만두 거리는 무질서했고, 지저분했고, 경적 소리로 씨끄럽고 먼지에 목과 눈이 따가웠다. 중앙선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신호등은 구경도 할 수 없었다. 도로 여기저기에 들어누운 소와 마음껏 돌아다니는 개, 그리고 질주하는 오토바이와 곡예 운전하는 택시, 그 사이를 비집고 길을 건너는 사람들로 카트만두 거리는 아수라장이다.

하지만 경적소리에 누구도 놀라지 않아 보였고, 쓰레기가 나뒹구는 거리에 먼지를 뒤집어 쓰고 앉아서도 얼굴찡그리는 사람은 없어보였다. 간혹 마스크를 사용한 사람들을 볼 수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먼지에 개의치 않아 보였고, 도로를 차지한 소나 개를 향해 분노를 표출하거나 곡예를 부리듯 차를 비켜 달려나가는 오토바이를 나무라지 않았다.


순간 카트만두는 문명의 산물인 '신경증'에서 자유로운 도시로 다가왔다. 계속 눌러되는 경적은 경계용, 협박용이 아니라 '나 당신을 의식한다', '인식한다'는 증표에 다름아니었다. 무관심과 무시로 익명의 관계라는 늪속에서 외로움에 지쳐가는 현대인의 삶이 왜 문명적이고 힘이 센지 순각 혼동스러웠다. 저들의 삶과 우리의 문명사이에 건널 수 없는 심연이 놓여 있음에도 우리는 동일한 잣대로 그들의 삶을 평가절하고 있는 건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 심연을 넘어 점령하고 포섭해 들어오는 자본- 펩시콜라, 삼성, 소니, 현대 등의 광고판이 눈에 들어왔다. 먼지 이는 도심의 시야를 점령하기 시작한 자본의 힘은 강했다. 가난은 불편하고, 약하고, 그리고 끝내 '악'이라는 가르침을 통해 이데올로기 전선에서 이미 자본은 승리하고 있었다.


상념에 빠져 있을 새가 없이 차는 이구대장님이 운영하고 있는 자이언트민박에 도착했다. 호인이시고 친절하신 이구대장님과 인사를 나누고 휴식을 취한 뒤, 푸짐한 저녁을 대접받고 담배를 사기위해 숙소앞 골목길을 나와 담배가게를 찾았다. 처음으로 아무런 보호막없이 타국을 느끼며 깜깜한 거리를 잠시 헤맨뒤 작은 등을 밝히고 있는 구멍가게에 들어섰다.  호의와 겸손함이 몸에 베인 것 같은 주인과 혹시라도 속거나 무엇이라도 잃어버리까봐 노심초사하는 한국인이 만나 230루피와 담배를 주고 받았다. 내가 "시가렛!"을 외치자 그는 말보루를 내 보였지만, 나는 다시 호기롭게 "네팔 시카렛!" 을 외쳤고 '태양'을 의미하는 Surya를 두갑 받았다. 


숙소에서 네팔 담배를 피우며,  '모택동주의자'가 집권을 하고 다시 공산당이 다수당으로 연합정부를 주도한다는 이 아름다운 여신의 땅이 자본의 침탈과 지배로 부터 영워히 자유롭기를, 그리고 우리 부부 필생의 여정인 한달여의 안나푸르나 라운드가 순탄하기를 또한 빌며 카트만두에서의 첫밤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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