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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철학의 발흥, 프레게와 러셀 - 언어와 논리, 의미

- 이지훈

 

분석철학은 독일의 관념론에 대한 반발에서 촉발되었다. 프레게는 [산수의 기초]에서 칸트의 초월론적 관념론을 공격하고 수가 자립적인 대상이라고 주장하며 실제론을 옹호한다. 러셀은 절대적 관념론의 일원론에 대항하여 논리적 원자론이라는 다원론을 제기하고, 무어는 관념론이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을 구분하지 못한다고 비판하면서 실재론을 주장한다. 이 과정에서 사용한 방법론을 분석철학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데, 분석철학은 언어분석을 통해 철학적 문제의 많은 부분을 해결 혹은 해소할 수 있다고 보는 일군의 철학자들이 가진 방법론적 입장을 지칭한다.

 

분석철학의 방법론은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에서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의 경계를 긋기 위한 시도가 이루어지면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말할 수 있는 것은 생각할 수 있는 것으로, 언어의 한계는 사유의 한계로 이해했다. 이점 이성의 한계를 긋고자 한 칸트의 철학적 기획과 일맥 상통한다. 칸트는 인간의 이성, 오성, 감성의 능력과 작용을 탐구함으로써 이 기획을 실현코자 했지만,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매개로 세계에 접근해 나갈 수 있으며, 의미와 논리의 문제를 천착했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입장을 같이하는 논리실증주의자들은 한 명제의 뜻은 그 명제의 검증방법이라는 검증원리를 통해 형이상학 등의 교설이 무의미한 헛소리임을 천명한다.

 

의미이론은 한 언어적 표현의 의미를 탐구하여 유의미한 것과 무의미한 것을 구분하는 방법과 원리를 탐구하는 이론으로 존재론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달리 말해 특정한 의미이론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나름의 존재론을 상정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의미이론은 크게 3부류로 나눌 수 있다.

1. 플라톤의 지시의미이론 : 한 언어적 표현의 의미는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이다

2. 관념의미이론 : 한 언어적 표현은 그것이 표상하는 관념이다.

3. 사용 의미이론 : 한 언어적 표현은 그것의 사용에 있다.

 

지시의미이론은 고유명사에만 설득력이 있으나 마이농의 황금산 같은 가능한 존재자의 문제에 봉착하고 만다. 지시의미이론을 거부하면 유명론에 빠진다. 이 난점을 해결하기 위한 시도가 관념의미이론이다. 한 언어적 표현의 지시대상인 존재자가 없어도 그 언어적 표현의 의미는 그것이 표상하는 관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관념의 주관성은 관념의미이론의 치명적 약점이다.

 

프레게는 지시의미이론의 약점을 언어분석을 통해 극복하고자 시도하고, 관념론이 수학적 진리마저 주관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심리주의적 경향을 가지고 있다고 비판하며 이를 배격하는 것은 자신의 철학적 과제로 삼았다.  이를 위해 지시의미이론과 실재론을 바탕으로 수학의 진리와 개념을 논리학의 진리와 개념으로 환원가능 하다는 논리주의입장을 제기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어-술어 논리학을 거부하고 대신 논항-함수의 논리학을 제시함으로써  현대 논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프레게는 1) 수학의 함수개념을 일상언어와 논리학에 도입하고, 양화사를 발명했으며, 2) 수의 개념을 최초로 정의했고, ‘논리주의라는 수학철학의 입장을 수립하고, 3) 의미를 뜻과 지시체로 구분하여 수학철학에서 심리주의와 주관주의를 배격했다.

 

러셀은 프레게의 뜻과 지시체 구분에 대해 비판하면서 은 여전히 심리주의의 잔재라고 보고 지시체만 인정했다. 그러면서 그는 지시의미이론과 실재론을 고수하면서 마이농의 과도한 존재론을 벗어나기 위해서 문장의 논리적 분석을 통해 확정기술구를 축출해 내어 무의미함을 밝히는, 비존재자 지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기술이론을 제시함으로써 돌파하고자 했다.

 

기술이론은 고유명사와는 다른 확정기술이 지시체를 지닐 필요가 없다는 점을 보여줌으로써,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을 판명하는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황금산같은 것이 꼭 존재한다고 간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그래서 여전히 보편자의 존재를 수용하는 실재론을 벗어날 수 없었다.

하지만 러셀은 비트겐 슈타인을 만나 자신의 철학적 사고의 준칙이었던 오캄의 면도날이라는 원리와 기술이론은 논리적 원자론으로 한단계 진전을 이룬다. 

오캄의 면도날이란 존재론에서 최소의 존재자를 확보하려는 전략으로 어떤 추정된 실재가 있다면 그것을 구성하는 더 근원적인 실재로 대체하라는 원리로 러셀에 의해 논리적 원자론으로 구체화된다.

 

논리적 원자론에 따르면 임의의 명제는 기술이론을 적용하여 분석해 들어가면 더 이상 분석이 불가능한 최후의 잔여를 만나게 되는데 이를 원자사실(atomic facts)이라고 한다. 이들 원자사실을 위장된 고유명사가 아니라 논리적 고유명사로 이들이 세계를 궁극적으로 구성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논리적 원자론은 절대적 관념론에 대항해 다원론과 실재론을 옹호하기 위해 제시된 철학적 입장이지만 문제제기 후 엄밀하고 통일적인 체계를 세우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단지 세계에 대한 철학적 탐구에 있어 언어, 논리, 의미에 대한 연구의 중요성을 확인하고, 그와 같은 입장의 분석철학의 조류를 20세기를 대표하는 철학적 입장으로 세우는데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러셀이나 프레게에 대한 비판은 주로 프레게의 실재론이나 러셀의 논리적 원자론이 그 자체 하나의 형이상학적 기획이라는 점에 맞춰져 있다. 이후 분석철학은 콰인 등에 의해 의미의 존재론과 형이상학을 모색하려는 움직임으로 전개되어 나간다.

 

문제의식>

1. 철학적 작업이 문명비판적 측면을 가진다고 볼 때, 프레게와 러셀의 문제의식은 관념론의 어떤 측면에 대한 공격이었을까?

 

2. 프레게의 실재론이나 러셀의 논리적 원자론도 그 자체 하나의 형이상학적 주장이라는 공격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까? 이 문제를 푸는 해답은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시작될 것 같다. 인간이 가진 사고 체계 중 형이상학적이지 않은 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이 역시도 의문이다.

 

3. 분석철학이 철저한 분석을 통해 도달한 지점에서 남은 잔여는 몇 개의 언어학적 지식들 뿐인 거시 아닌가? 분석적 방법이 언어의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된 인식적 오류를 극복하는데 기여했다고 해도 과연 그것을 하나의 세계관, 하나의 존재론으로 받아들일수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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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슐라르의 새로운 과학정신

- 과학과 예술의 관계에 적용될 철학의 가능성

- 지훈


어렵게 바슐라르를 읽었다. 사실 길지 않은 글에 너무나 많은 내용을 담고 있어 이것을 다시 축약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노동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지금까지 나는 바슐라르를 철학자라기 보다는 예술철학자로 이해하고 있었다. , 불 등 상상력의 4대근원에 대한 글을 오래전에 읽었던 것으로도 기억된다. 하지만 알고보니 바슐라르는 콩트의 문제의식과 같은 선상에서 당대 과학의 발전을 토대로 한 실증정신을 확립하여 새로운 과학정신을 수립코자 시도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제시된 그의 인식론은 과학을 넘어 예술의 영역에까지 적용코자 시도했고, 그 시도의 결과가 바로 저가 이전에 읽었던 바슐라르의 저작들이었나 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지훈은 이 글에서 바슐라르의 과학인식론만을 살피고 있다. 물론 그것마저도 너무 내용적으로 많고, 논변은 복잡하다 .

 

먼저 바슐라르는 새로운 과학정신에 입각한 인식론을 수립하기 위해 과학의 불연속적 발전에 주목하고 이를 지속적 단절로 개념화한다. 그는 상식과 감각, 또는 기존 이론의 전제 등 새로운 문제의 해결을 가로막는 인식의 걸림돌을 문제를 발생시킨 인식의 틀을 대체함으로써 해소하는 것을 인식적 단절이라고 보고, 이런 단절은 과학의 거시적 역사는 미시적 차원에서 상시적으로 지속된다는 의미에서 바로  지속적 단절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는 과학이 현상영역이 아니라 그와 같은 현상을 산출하는 근원인 본체를 이해할 수 있다고 보는 비실증주의적 주장을 펼치기도 하는데 이는 인간의 창조성이 현상을 만들어내는 만치 그 현상의 배후가 되는 본체를 이해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여기서 그가 제시한 방법론이 바로 현상-기술개념이다. 이 개념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바슐라르는 현상과 본체의 괴리를 극복하는 인식론적 단절을 넘어 인간존재론 차원의 단절을 제시한다. 이를 통해 열린 정신의 합리적 유물론에 도달 할 수 있고, ‘폐쇄적 코기토에서 실천적 코기토로 나아갈 수 있다고 제시한다.

 

이렇게 주어진 인식의 걸림돌과 맞서는 능동성을 욕망과 욕구의 구분에서 찾고 꿈을 향한 욕망의 무한 긍정을 통해 주관적 심리적 오류를 극복하고 단절과 상승의 원동력을 회복할 것을 주문한다. 바슐라르는 현실적 유용성에 바탕을 둔 욕구와 상상력의 원천인 욕망을 구분한다. 그는 욕구가 만들어내 주관적 오류는 사이비과학을 낳는데 반해 욕망에 원천한 꿈의 역동성은 진정한 과학의 역사를 낳는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과학사의 불연속과 귀납적 종합을 규명하며, 신생이론과 선행이론 사이의 관계에 적용되는 개념으로 형이상학적 귀납’ ‘포섭을 제시하기도 한다.

 

바슐라르의 인식론은 오류에 대한 개방성새로운특성으로 하며 기존의 합리성에서 벗어난 꿈, 상상력, 욕망, 의지 같은 개념을 원동력으로 포함시켰다는 측면에서 의의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물론 푸코에 와서 무한 긍정되는 비합리적 요소가 여전히 긍정적 억압의 통제 대상으로 남아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지훈의 글을 읽고 여전히 남는 의문은 바슐라르의 인식론이 현대 과학의 성과를 과연 과학적으로 수용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과학 속에 있는 비과학적 요소의 개입양상을 해명하여 새로운 과학철학의 장을 개척한 의의를 인정하지만 그의 인식론은 문학적요소가 너무나 깊이 개입한 것 같은 의혹을 지울 수가 없다. 바슐라르의 인식론의 수립과정에서 스스로 긍정적 억압을 어는 정도 성공하고 있는가하는 의문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철학적 입론이 합리성을 잃으면 주의주장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철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바슐라르는 문학적 상상력, 예술적 상상력에 그의 지적 궤적이 가 닿아 있고 그곳에 인식의 닻을 내린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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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세르의 인식론 : 공존의 모색

- 지훈


바슐라르의 새로운 과학정신은 그의 제자이자 나중에 푸코의 스승이 되는 캉길렘을 통해 계승된다. 캉길렘은 바슈라르의 문제의식을 계승해서 이를 생물학의 영역에까지 확대하고 과학사연구의 인식론적 성격을 극대화한다. 그는 콩트의 세포이론 해석에서 바슐라르의 욕구/욕망범주를 보다 객관적인 사회정치적 범주로 전환했고, 이는 한 시대의 지식 형성에 개입하는 사회적 힘과 규율의 문제를 다루는 푸코 사상의 출발점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셸 세르는 콩트의 연속성’, 바슐라르의 단절과 다른 입장으로 과학의 진보는 인정하지만 과학이라는 단수의 용어로 묶을 만한 단일한 진리의 연대기적 축적은 없다고 보는 특이한 입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르는 이성의 역할을 신뢰하고, 이성의 역할을 극대화할 것을 주장한다. 이 입장에서 세르는 바슐라르를 비판하는데, 바슐라르가 이성을 과학의 영역에 한정시키고 예술, 인문학 등을 몽상의 영역으로 밀쳐버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세르의 입장은 이성의 폐쇄적 절대주의로 나가지 않고, 개방적 합리성이라는 입장을 고수한다. 이는 한 체계로 세계를 설명하려는 이성이 아니라 다른 체계들과 서로 작용하고 보충하는 이성으로서의 개방적 합리성을 말하는 것이다. 한 체계의 개방성은 자기체계의 한계를 인정하는 데서 출발하고 바로 그로부터 합리성이 나온다고 본다. 다시 말해 세르의 인식론은 전체로서의 체계라는 근대적 이상을 완전히 벗어나 있다. 그의 입장에서 한 체계의 절대적 완결성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체계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세르는 철학이 바다를 떠돌다 잠시 만나는 작은 섬에 불과하다고 보고, 영원히 정착할 안정된 대륙, 세계를 한 번에 구성해줄 철학은 없다고 본다. 바로 이점에서 세르는 맥루한과 비교되기도 한다.

 

맥루한은 미디어가 메시지라고 보면서, 모든 미디어의 내용이 또 다른 미디어의 형식이 되는 내용/형식의 상호 순환적 영향관계를 제기하며 궁극적인 기원, 최종적인 원형을 거부한다. 화자와 청자, 내용과 형식, 주체와 객체는 끊임없이 순화하며 상호 반전되는 관계일 뿐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점에서 맥루한의 입장은 기원의 신화를 해체하고, 기원을 통해 성립하는 닫힌 체계를 논박하는 세르의 입장과 상통한다. 다시 말해 중심은 끝없이 이동하기 때문에, 한 체계 내부의 교환을 모두 매개하고 제어하는 초월존재를 인정할 수 없지만 체계 외부의 끊임없는 유입은 인정할 수 밖에 없다고 본다. 즉 열린 구조는 소통을 긍정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세르와 맥루한은 이질적인 매체, 이질적인 지식의 공존에 대한 입장에서 갈라진다. 세르는 맥루한과는 달리 공존의 관점에서 소통의 숨은 요소인 소음에 주목한다. 세르는 이 소음의 개입과 간섭을 긍정함으로써 인간사유 발전의 가능성을 열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또한 정보에 대한 입장에서도 세르와 맥류한은 갈라선다. 맥루한은 in-formation에서 ‘in’의 의미를 중립적인 질료를 형상 속에 집어넣기라는 관점에서 이해하고, 세르는 ‘in’을 고정된 형상이 없는것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맥루한에게 개별 매체는 자기완결적이지만, 세르에게 매체들은 이질동상적이다. 세르는 이와 같은 입장에서 정보를 천사에 비유하며 소통하고 이동하는 정보자체의 특징을 드러낸다.

 

그런데 소통은 기본적으로 교환이며, 나름의 주고받는 규칙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규칙은 위반되고, 규칙을 위반한 요소는 배제되는데 여기에는 초월축출이 일어난다. 이상적인 교환체계는 이들 기식자를 효과적으로 축출함으로써 안전하게 닫힌 체계를 유지하려 한다. 하지만 완전한 축출은 불가능하고 외부와 내부에 걸쳐있는 기식자는 늘 상존한다. 이들 기식자는 체계의 안밖에 걸쳐 있으면서 한 체계의 외부를 지속적으로 체계의 내부와 공존토록 하고, 이를 통해 새로움의 가능성을 제기하고, 나아가 한 체계의 붕괴와 새로운 체계의 생성을 낳기도 한다.

 

세르는 이와 같은 소음, 기식자, 제외된 제3자 같은 것들의 의미를 찾는다. 이들 담론질서에 포함되지 않은 것들의 창조적인 성격에 주목함으로써 세르는 진정한 소통의 근거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과학 아닌 것과 과학의 관계에서 바슐라르는 비대칭적 시각인 바면 세르는 과학 아닌 것에서 과학성을 읽고, 과학 속에서 비과학성을 있는 대칭적 시각을 보인다. 그렇다고 세르가 과학과 비과학의 경계를 허물어버리고 지적 무정부상태에 빠지진 않는다. 그에게는 과학과 예술을 통일하는 근본원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과학사가 참의 역사만은 아니지만  참된 개념을 만들어 가려는 노력들, 개념화 형식의 집합이다. 따라서 세르는 연대기적 순서의 과학적 진보, 사회적 진보는 존재하지 않지만 세계를 보다 포괄해서 보여주는 관점의 존재가능성을 인정하는 수준에서 진보를 인정한다. 세르에게 시간개념은 비일적선적 개념으로 시간의 복잡성, 시간의 다발을 긍정하는 인식론으로 오늘날의 복잡성의 과학에 걸맛는 인식론이다.    

 

세르의 인식론은 정보유토피아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세르의 인식론을 바로 인터넷 소통, 정보사회 차원으로 환원함으로써 생길 수 있는 위험을 무시할 수 없어보인다. 이지훈의 이 글만을 통해 이해한 세르는 소음의 배제 과정에서 일어나는 갈등, 한 체제의 외부와 내부가 충돌하는 과정에서 야기되는 폭력성 등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 그리고 중심의 이동과 다극화에 대한 담론은 현실 이해와 일정 정도 괴리되는 측면을 가지기도 한다. 세상은 권력의 속성, 자본의 지배라는 틀이 여전히 온존하며 오히려 더 강화되는 면을 보인다. 정보의 홍수, 정보의 민주화라고는 하지만 사실 더 교묘하게 정보는 관리 통제되고 집중되는 양상도 드러난다. 정보의 유통구조가 복잡화 되고 점점 더 파악 불가능한 것으로 전화하면서 정보의 통제자는 빅브라더가 되고 보이지 않는 신이 되어가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르는 세계의 열린 구조를 이야기하지만, 세계지배질서는 여전히 닫힌 구조로 강건하게 유지 존속되고 있고, 닫힌 구조의 근원이 되는 계급구조는 고착화가 더 심각해지는 상황이다. 다시 말해 세르의 지식의 세계-대수학에 바탕을 둔 열린 구조는 현실의 세계-자본에 바탕을 둔 닫힌 구조와 합치하지 않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드는 생각이지만 과학과 철학의 행복한 맛남은 쉬운 일이 아닌 것 같다.철학자의 과학에 대한 해석은 종종 이론이 아니라 인식의 과정에서 가지는 심리적 반응, 정서적 반응일 경우가 많아 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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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5 10일 화요일

오귀스트 콩트(Auguste Comte, 1798~1857)

 

<참고문헌>

이지훈, “콩트와 실증주의 인식론의 기초, [현대철학의 모험]

[서양철학사] 램프레이트, 을유문화사

 

콩트는 19세기의 과학적 성과를 철학적 사고의 토대로 끌어들였다. 그는 생시몽으로부터 인류 문명의 진보에 대한 확신을 얻고, 스스로의 과학적 연구를 통해 과학적 지식의 엄밀성과 확실성에 대한 확신에 이르렀다. 콩트는 과학적 지식에 대한 확신에서 기반해 실증 가능한 것만을 철학의 영역, 학문의 영역에 남기고 실증 불가능한 지식들, 비과학적 인식론을모호하고 불분명한 것들로 팽개쳐 버렸다.

그는 인류의 사고 단계를 3단계로 나누고, 신학적 단계와, 형이상학적 단계를 이어 과학적 단계로 불렀다. 신학적 단계는 미지의 세계를 인격적 정서에 의해 설명하고, 가상적 공상적으로 이해한다. 형이상학적 단계는 인격적 힘을 이용한 세계 이해에서 벗어나 경험적 현상을 넘어 선본질이나실체등과 같은 추상적인 술어로 세계를 설명한다. 과학적 인식의 단계에 접어들면 현상을 실증적인 소여로 받아들이고 이 현상들의 상호관계를 탐구하여 일반화하는 데로 나아간다. 그와 같이 분류한 인류의 사고 단계를 바로 인류 문화의 발전 단계로 등치 시키면서, 콩트는 자신이 살아가던 당대를 <과학적-실증적 단계>로 이해한다. 그리고 과학적 사고를 가장 뒤떨어진 영역인 인류의 도덕적, 정치적, 종교적 방면에까지 적용하려고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과학을 사회학의 영역까지 확장하여사회물리학즉 사회과학을 정립하는 사상적 성과를 낳기도 했다. 이후 사랑하던보오부인과의 사별이라는 아픔을 겪으면서 개인의 정감활동이 이성의 힘의 지배를 벗어남을 깨닫고 이를 제어하기 위한 교육, 종교적 훈육에 골몰하게 되고 급기야는 <인류교>라는 종교의 창시에 이르게 된다.

그의 주요한 철학적 성과는 지훈의 글에서 다루고 있듯 <실증주의 인식론>에 있다.

콩트의 실증주의는 실학으로 볼 수 있으며, 상대주의적 성격을 가진다. 실증주의의 상대성은 세계에 대한 유일한 설명이라는 통일과학의 이념을 부정하고 과학에서의 다원주의를 인정한다는 데 있다. 그 점에서 실증주의는 과학주의와 차이가 있는데 과학주의가 과학이론은 모두 경험적 명제로 구성된다는 입장과 모든 학문이 자연과학으로 뒷받침되어야만 한다는 입장을 가진 반면 실증주의는 현실성, 유용성, 확실성, 정확성, 유기적 상대성 등을 중시하는 입장이다.

또한 콩트는 과학에서 수학의 역할을 높이사지만 모든 과학지식의 수학화는 인정하지 않는다. 실증주의는 수학적 형식화를 과학의 보편토대로 보지 않고 개별과학의 고유성, 상대성을 인정한다.

나아가 실증주의는 과학을 합리적 허구로 본다. 과학은 문학적 상상력을 필요로 하고, 그 연구 과정에서 가설을 도입하나 가설은 수학적 성격을 가진다. 그런데 수학은 추상적 허구적 성격을 가지며, 실험은 주관적이고 상대적이기 때문에 과학은 허구적 성격을 가질 수 밖에 없다고 본다. 허구지만 합리적이라고 하는 것은 실증주의가 과학지식은 역사적, 상호주관적, 집체적 동의를 통해 정립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지식에 대한 상대주의와 역사성의 인정은 지식의 유연성과 개방성을 부여한다.

콩트는 인식의 추상적인 발생근거 자체보다는 인간의 앎, 지식의 성립 근거를 있는 그대로 탐구했다. 그 과정에서 콩트는 철학의 토대는 인식론이라고 보고  인식론은 과학의 성찰을 통해 구성하고, 과학의 성찰은 과학의 역사에 관한 성찰이라는 전통을 세우게 되었다. 이를 통해 공상적인 통일성을 부여하는 철학체계를 거부하고, 철학적 주장이 과학의 성과와 모순을 일으키지 않도록 조정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핵심 개념>

실증

연역과 종합의 통일

경험과 법칙의 대등화

과학의 상대성

수학의 허구성

 

<문제제기>

1. 실증적 방법과 과학적 방법의 차이는 무엇일까?

콩트는 과학적 방법을 절대화하는 과학주의를 배격하면서 상대주의적 입장의 실증주의를 피력한다. 실증주의가 학문 영역간 방법론의 상대주의를 인정하지만 과학주의를 배격한다고해서 과학적 방법에 대한 신뢰를 버리는 것이 아니다. 실증주의는 과학적으로 검증가능한 것만 인식의 대상으로 제한하며 모든 형이상학적 인식론을 배격한다는 측면에서 과학적 방법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드러낸다. 나는 어디까지가 형이상학적 방법이고 어디부터 과학적 방법인지 정확히 구분하지 못하겠다.

 

2. 실증가능한 것의 범주는 어디까지 일까?

콩트는 물리적 세계를 포함해, 사회적, 정신적 현상까지 실증 가능한 영역으로 보았다. 그가 시큐러리스트(비종교적 도덕주이자)인 점을 보면 신학을 거부한 것으로 보이는데 예술영역까지도 실증적 인식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검증(실증) 가능한 것의 영역을 그렇게 넓게 잡을 수 있는지 확신할 수 없다.

 

3. ‘경험의 모호성, 주어진 소여의 불확실성을 제기하는 다양한 논지에 대해 실증주의는 어떻게 대응하고 있을까?

철학은 주어진 경험의 주관적 성격과 모호성, 나의 감성적 인식의 불활실성, 일반화된 지식의 오류가능성 등에 대한 자각으로부터 시작된 인간 사고의 흔적이다. 그와 같은 인식비판의 기초를 외면하고 곧바로 주어진 소여, 경험, 과학적 검증 가능성이라는 지평으로 철학적 인식론을 한정하는 것은 실용적태도인지 몰라도 인간의 궁극적인 철학적 물음에 대해 외면하는 것이 아닐까? 실증할 수 없는 많은 것들 - 생명의 신비와 죽음, 영적 경험과 예술적 환타지, 그리고 당장 이렇게 봄비 소리를 듣고 있는 나의 우울…-  바로 이것들이야 말로 인간이 철학하는 이유가 아닐까? 과학조차 끝내 건드리지 못한 미지의 영역와 끊임없이 생성되는 신비가 넘쳐나는 세계내 존재인 인간은 항상 주어진 경험 그 이상의 것을 탐구하려는 경향을 가지며 그와 같은 이유로 철학이 학문으로 성립하고 존속되는 것이 아닐까? 어떤 면에서는 칸트의 인식비판으로부터 후퇴한 것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앞으로 더 공부가 필요한 과제가 아닐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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