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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쉬기로 한 날이 밝았다. 보통은 안나푸르나 라운드 중 고도적응을 위해 마낭에서 하루를 쉰다고 한다. 우리는 고도적응이 아니라 쏘롱라로 올라갈 건지 말것인지 결정을 위한 대기상태로 마낭에서 하루를 보내게 됐다. 아침에 일어나 세수할 물을 구하려 방을 나서니 파샹이 잠깐 기다리란다. 파샹은 금방 김이 나는 따뜻한 물을 한주전자 구해서 가져왔다. 따뜻한 물이 얼마나 반갑고 고맙던지 물을 아껴 아내와 양치와 세수를 하고 다이닝룸에 올라갔다. 어제 하이캠프 등에서 하산했다던 청년들은 아침을 먹고 아쉬운듯 머뭇거리다 호텔을 떠나고 고스란히 상행중인 일행만 다이님룸에 남았다.  

 


피상에서 같이 올라온 트레커들은 우두커니 오늘 하루 무엇을 하고 지낼지 걱정스런 얼굴이었다. 방에서 지내자니 춥고 할 일도 마땅찮다. 마낭 시내를 돌아다니고 가게도 들러 시간을 보내자니 문을 연 가게도 인적도 드물었다. 서로들 뭘 하고 지낼건지 궁금해 하고, 가이드가 전해오는 주변 지역의 기상과 길 상황에 대한 소식들을 취합하며 오늘 하루 계획과 이후 여정을 결정하기 위해 조금은 초조한 기색이었다. 한가한 아침 나절을 다이닝룸에서 머무는 동안 비관적인 소식이 속속 도착했다. '쏘롱라는 현재까지 내린 눈만으로도 넘을 수가 없을 뿐아니라 날씨가 계속 안좋아 더 많은 눈이 내릴지도 모른다.' '위로 올라가는 것은 꿈도 꾸지마라', '마낭에서 한나절만에 다녀올 수 있는 코스인 아이스 레이크로 가는 길도 눈이 많이 쌓여 도저히 접근이 불가능하다'. 틸리초로 가는 길 역시도 눈에 묻혀 접근하기에는 너무나 위험하단다. 그나마 강사르까지는 접근이 가능할지 모르지만 확신할 수는 없는 상태라고 했다.


아름다운 강마을 강사르는 이번 여정에 꼭 가 보고 싶었던 곳이었기에 파샹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접근이 가능할지 모른다는 소식에 과감히 호텔을 나서기로 했다. 침실로 돌아와 간단한 비상식량을 챙기고 가장 가벼운 차림으로 길을 나섰다. 강사르 쪽으로 가다가 조금이라도 위험해 보이면 돌아올테니 파샹은 쉬고 싶으면 호텔에서 쉬어라고 권했다, 하지만 결국 파샹도 우리부부만 보내기가 걱정스러웠나보다. 혹시 위험할지도 모른다며 자신도 같이 가겠다고 따라나섰다. 다른 트레커들도 나름의 여정을 잡거나 아니면 상황파악 겸 산책겸 마을 주변을 둘러보겠다며 모두 호텔을 나서기 시작했다.


마낭의 거리는 눈더미에 묻혀있었다. 간혹 추위에 웅크린 주민들과 조우하곤 했지만 그래도 상당히 큰 산중도시인 마낭의 거리치고는 너무나 사람의 발길이 드물었다. 쏘롱라 쪽으로 방향을 잡고 마을을 관통하자 왼쪽으로 갈라지는 길이 틸리초 방향이라고 가리키고 있는 표지를 만났다. 막상 마낭시가지를 벗어나 틸리초쪽으로 방향을 잡고나니 파샹은 조금 걱정스런 얼굴로 눈속에 묻혀버린 길을 찾을 수 없어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결국 대여섯번 안나푸르나 라운드를 했지만 틸리초쪽은 한번도 가본 적이 없단다. 길을 모른다고 뒤 늦게 고백한 파샹은 자신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우리 부부보다 몇십미터 앞서서 둔턱에 올라 길을 살피기도 하면서 용감히 앞서나갔다. 파샹은 길을 찾지 못하고 눈밭을 헤메기 시작했다. 길을 물을 사람을 찾은 수도 없어 난감한 상황이 조금 이어졌지만 오래지않아 다행히 바람에 눈이 쓸려 지나간 길의 자락을 발견하게 되었고 본격적으로 강사르 쪽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왼편으로 마르샹디 강을 끼고 가파른 절벽을 따라 이어진 평탄한 길을 걸으며 눈과 산, 그리고 마르샹디 강이 이룬 환상적인 풍경에 빠져들었다. 마르샹디 강은 상류쪽 협곡에서 내려오는 두줄기의 강이 합쳐져 넓은 수역과 광활한 고수부지를 형성하고 있었다. 오른쪽 협곡은 쏘롱라쪽에서 내려오는 줄기고, 왼쪽의 협곡은 틸리초에서 발원하여 강사르를 지나쳐 오는 강이라고 했는데, 이들 두 줄기의 강이 합쳐지는 지점에서 강사르 쪽으로 건너가는 다리가 있었다.


 
다리를 향해 나아가는 중에 갑자기 시야에 가파른 절벽을 타고 올라 길을 가로질러 뛰어가는 야생염소의 무리가 들어왔다. 파샹은 이들 야생염소를 Tahr라고 한다며 너무 반가워했다.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하다가 일정 고도 이상에서 이들 야생염소를 만날 수 있지만 아주 드문 경우라도 했다. 어디선가 읽었는데 이들 야생염소를 만나면 행운이 온다는 속설이 있단다.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믿을 만치 귀한 야생염소를 이렇게 쉽게 그것도 바로 지척에서 무리로 만나다니 이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며 염소 무리를 따라 나섰다. 하지만 절벽을 타는 야생염소의 발걸음을 내가 따라갈 수는 없었다. 더 큰 문제는 강쪽으로부터 가파른 절벽을 타고 올라 길을 가로질러 산쪽 언덕으로 뛰어가는 야생염소을 뒤따르자니 그들이 굴리고 간 돌이 내 쪽으로 쏱아져 내려서 더이상 접근하기가 불가능했다. 파샹의 말로는 야생염소가 지나가면서 자연스레 구르는 돌도 있지만 사람이 따라오지 못하도록 염소가 의도적으로 돌을 굴리기 때문에 정말 위험하단다. 그래도 그들 야생염소의 모습을 그럭저럭 사진에 담아 뿌듯한 마음으로 행운을 현실화할 방도를 생각하며 길을 이어갔다. 나는 아내에게 귀국하자마자 로또를 사볼까며 농을 치며 로또가 당첨된 상황을 상상하는 재미에 신이났다.


마르샹디강을 건너 좁고 가파른데다가 눈이 무릎까지 빠지는 길을 올랐다. 오른쪽은 강바닥까지 떨어지는 수십미터의 수직 낭떠러지다. 그냥 돌아가기에는 아쉬움이 너무 크고 계속 전진하자니 감수해야할 위험이 너무 컸다. 마음속에 공포가 자라기 시작할 때쯤 갑자기 파샹이 절벽쪽으로 넘어져 수십미터 낭떠러지를 미끄러내려가려는 것이 아닌가. 나는 순간적으로 슬라이딩을 하여 파샹이 메고 있는 배낭의 끈을 움켜쥐고 당겨 올렸고, 파샹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눈을 털며 일어섰다. 나는 너무 놀라 가슴이 뛰고 이마에 땀이 솟았다. 그런데 파샹은 얼굴 가득 웃음을 띠는 것이 아닌가? 파샹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장난이었다고 했다. 나는 화를 누르고 다시는 그런 장난을 하지마라고, 장난이 장난으로 끝나지 않고 사고로 이어진다고 재차 주장을 했고 파샹은 조금 머슥한 표정을 지었다. 진정을 한뒤 언덕길을 마저 올라 멀리 강사르 마을이 보이는 지점까지 도달했다.


강사르 마을은 시야에 들어오는데 마을로 가는 길은 강을 건너기 전의 길과는 달리 쌓인 눈의 깊이와 길의 여건이 또 달랐다. 이런 식으로 계속 전진하기에는 위험이 너무 크게 느껴졌다. 결국 강사르마을과 마르샹디 강, 그리고 산과 강의 조화가 만들어 낸 풍경에 한참을 빠져있다가 더이상의 전진을 포기하기로 하고 뒤돌아섰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마낭 거의 다 와서야 강사르를 찾아 길을 나선 한국인 트레커들을 만났다. 길 상황을 전하고 모두 같이 호텔로 돌아왔다.

다이닝룸에 난로를 피우자, 강가푸르나 딸까지 다녀왔다며 독일인 트레커들이 들어섰다. 강가푸르나까지는 그렇게 힘들이지 않고 접근이 가능했단다. 조금있으니 오늘 피상에서 올라왔다는 한국인 남성 트레커 한분이 들어섰다. 그분은 가이드나 포터도 없이 포카라서 부터 트레킹을 시작하셨다는데 베시사하르에 이르기 전에는 마을을 찾기 전에 날이 저물어 노숙까지 하며 강행군을 하셨다고 했다. 한국에서 물리 선생님을 하신다는 그분은 보통 배짱이 아니신 분 같았다. 그분이 한국에서 준비해 오신 누룽지 차를 얻어 마시며 오랜만에 구수한 한국 밥의 맛과 향을 기억해 보았다.

늦은 오후 네팔리들이 마을회관 같은데서 영화상영이 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우리부부는 난로가를 떠나기 싫어 그냥 다이닝룸에 머물렀고 트레커들은 주변 나들이를 갔다가 속속 도착했다. 눈에 갇혀 내일의 여정을 결정할 수 없는 트레커들과 네팔리들이 모여 담소를 나누며 마낭에서의 이틀째 밤을 맞았다. 그리고 그 순간까지 접한 정보와 이날 강사르 쪽으로 접근해왔던 경험을 아울러 최종적으로 하산을 결정했다. 독일인팀도 동생과 제수가 고산증을 보이며 두통에 시달리는 상황때문에 하산을 결정했다. 오늘 도착한 한명의 한국인 트레커만 남기고 같은 호텔에 묵은 모든 트레커가 하산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방으로 돌아와 또 내리기 시작한 눈발을 유리창 너머로 확인하며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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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보통 추위가 아니었나보다. 일어나 물병을 찾아 컵에 물을 부으니 물이 나오질 않는다. 물병을 때리자 얼음가루가 컵안으로 쏱아진다. 방에 난방이 따로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티망에서부터 눈길로 접어들었지만 확실히 3,000m가 넘는 고지인 피상은 추위가 확연히 다른 것 같다. 이렇게 본격적으로 추워지면 4천, 5천 고지로 올라가서는 얼마나 더 추워질지 걱정이다. 어제 만난 하산 트렉커들은 견디기 힘들만치 추웠다고들 호들갑을 떨었다. 마낭이 영하 20도 정도라고 했다. 내가 사는 곳도 겨울아침이면 영하20도정도씩 자주 내려가니깐 못견딜 정도는 아니겠구나 안도가 되었다.
 


아침으로 삶은 감자와 애플팬케익을 먹고 8시 45분 Tilicho Hotel을 나섰다. 어제 추위에 쫒기며 대충 둘러봤던 마을을 다시 한번도 찬찬히 들여다 보았다. 마을을 벗어나자 마자 작은 강을 건너고 오른쪽으로는 Upper Pisang쪽으로 가는 길이고 왼편으로 마낭쪽으로 갈라지는 지점에 탑이 하나 있다. 무슨 탑인지 멀리서 사진을 찍고 가까이 다가가 보니 생각지도 않은 곳에 한국인 위령탑이 아닌가. 찬찬히 읽어 보니 1989년 9월 나와 동갑내기 산악인이 이곳에서 생을 마감한 것이다. 그때라면 내가 대학을 막 졸업하고 취업과 학문, 그리고 또 다른 인생길을 놓고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잠시 헤메다가 다시 대학원을 준비하던 시기가 아니던가? 그 시퍼런 청춘에 그분들은 이곳 낯선땅 안나푸르나의 눈속에 잠이 드신 것이다. 대학원 진학이라고는 하지만 마땅히 하고 싶은 것도 없고, 살고싶은 삶은 살 용기는 부족하여 단지 결정을 유보하기 위한 고육지책에 불과했던 것이 사실인데, 그 분들은 이곳 피상의 설산을 오르며 자신의 삶의 가능성을 찾고 대자연의 신비 앞에서 주어진 자신의 삶을 축복하며 마지막 생명의 에너지를 불사른 것이 아닌가?


그시절 그 나이 때는 보통사람이 외국여행을 한다는 것은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이었지만, 만약 내가 기회가 주어져 이곳 안나푸르나를 밟았다면 나의 삶의 또 다른 가능성을 확인할 수도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때 내게 주어진 우주는 좁았고, 눈은 어두웠고, 심장은 약해빠졌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망설임 속에서 나이만 먹어 온 나의 긴 삶과 청춘을 불살라 그렇게 낯선 설산에서 생을 마감한 그 분들의 짧은 삶이 대비되면서 앞으로 살아갈 내 인생의 무게가 묵직하게 느껴졌다. 두 분의 명복을 빌며 걸음을 재촉했다.



한시간이나 걸었을까? 멀리 비행장이 있다는 홈데가 보이는 언덕엘 올라섰다. 나로다라 언덕이란다. 전망대가 있고 홈데와 홈데 넘어 안나푸르나 연봉들이 한눈에 들어오는 멋진 조망이다. 배낭을 벗고 한참을 쉬며 고도가 높아감에 따라 억지로 줄이고 있던 담배를 한대 피웠다. 삶의 곡절이 많은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살아가다가 이렇게 한번씩이라도 전망이 확 터이는 그런 경험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는 얼토당토 안한 생각이 일었다. 하지만 내 삶의 전망이야 그 자리에 그냥 만들어져 있는 풍경이 아니고 스스로 만들어나가야하는 걸, 내가 게을러서, 그리고 소심한 탓에 지금 답답한 삶을 살고 있는걸 누구탓을 하겠는가? 다시 배낭을 짊어지고 내리막길로 들어섰다.



길은 눈속에 파묻히고 온데 간데 사라졌지만, 눈 속에 숨은 길을 찾아 네팔리들이 내놓은 발자국을 따라 끝없이 걷었다. 눈은 점점 깊어졌다. 잠시 쉴 때는 아름다운 설경에 감탄하면서도, 길을 걷기 시작하면 이내 풍경은 다 잊어버리고 오직 시야는 앞사람의 발자국만 쫒아 기계적인 걸음에 내몰였다. 풍경에 빠져들기엔 발길이 너무 바쁘기 때문이다.


오후 1시나 되어서야 홈데에 도착했다. Maya 식당이라는 곳에 들어서니 미리 도착한 분들이 반갑게 인사를 해온다. 우선 음식을 시켜놓았는데 뒤쳐진 제주 여학생이 감감 무소식이다. 눈구덩이에 혹시라도 길을 잃으면 보통 일이 아니다. 모두다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15분 정도 늦게 도착한다. 추위에 쫒겨 너나할 것 없이 모두 롯지의 부엌에 몰려든다. 좁은 부엌이 조리에 불편할 만치 사람들이 들어서자 가이드 한분이 남자들은 다이닝룸으로 나가달란다. 와이프와 학국인 여선생님은 부엌에 남아 롯지 주인의 아이들과 놀아준다. 역시 특수학교 선생님 이셨어 그런지 말이 통하지 않는 네팔 아이들 조차 소통하고 공감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나중에 식사가 끝나가자 아이들이 다가와 'pen'을 요구했다. 아내가 가방에서 한개를 꺼내 주자, 자기 언니 것도 하나 더 달라고 한다. 어쩔 수 없이 또 하나를 주고 나니 우리가 쓸 게 없을까봐 걱정스럽다.


체크포스트에 들러 체크를 하고 홈데 비행장의 상황을 살폈다. 혹시라도 쏘롱라 패스가 불가능해질 경우 비행기로라도 이동해야하는 상황이 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자갈밭 활주로에 소형비행기를 별로 타고 싶지 않았지만 상황이 악화되면 그역시 어쩔 수 없는 선택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래에 비행기가 오지도 않았고 가지도 않았단다. 역시 활주로는 두터운 눈이 그대로 쌓여있어 혹시라도 지금 비행기가 온다고해도 활주로에 눈을 치우는데만 몇일은 족히 걸릴 것같다. 소형 비행장에 짧은 활주로지만 장비라고는 하나도 없이 오직 육체노동으로 눈을 치워야하기 때문이다. 되돌아 하산 하게 될 경우 홈데에서 비행기를 이용하는 대안은 가능성이 없어 보였다.


뭉지와 브라카는 어떻게 지났는지 기억도 없다. 미리 카투만두에서 듣고서 기대했던 '베이커리'를 만날 수 있었지만 모조리 휴업중이었다. 오래 실망하고 할 것도 없이 군침만 삼키고는 그냥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 오직 눈만보고 하루를 보낸 것 같다. 예상보다 눈이 깊어 시간이 지체되어 날이 저물기 전에 마낭에 도착하려면 여유가 없었다. 홈데를 떠난 뒤로는 빨리 마낭에 도착하는 목적말고는 아무생각없이 발을 내디뎠던것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덕위에 자리한 마낭을 들어설 때는 산그늘이 짙어 저녁 어스름으로 변해가는 시간이었다. 하루의 트레킹을 마치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지만 그나마 어둠이 길을 삼키기 전에 도착한 것에 안도했다. 마낭을 둘러보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고, 또 사람의 활기가 사라진 마을을 구경할 흥도 나지 않았다.


지난 몇일 알고보면 파샹이 늘상 이용하고 안면이 있는 롯지에서 묵게 되었지만 파샹은 꼭 마지막 나의 의사를 물었다. 내가 롯지의 선택권을 줬음에도 불구하고 꼭 롯지를 선택하기 전에 나의 의사를 물었는데 사실 '이러러저러해서 이 롯지가 좋고 저 롯지는 좋지 않다. 어떤 롯지를 선택하겟는가?'는 식으로 물어오니 솔직히 물어보나 마나다. 나의 'OK! This is good!' 한 마디는 단지 파샹을 존중하는 제스추어불과했다. 특별히 고집할 이유가 없는한 가이드나 포터가 선택하는 롯지에 대부분 머무는가보다. 우리도 그랬고, 다른 팀들도 다 그랬는데, 오직 한명만 다른 롯지로 향했다. 그분의 포터가 원하는 단골롯지로 향한것 같다, 우리는 'Yeti Hotel'을 들어섰다.


마당은 통행이 가능할 정도의 공간만 남기고 모조리 누구덩이다. 사람이 사는지, 영업은 하는지 온기라곤 없고 인기척도 없다. 파샹이 윗층으로 올라갔다 오더니 룸번호를 알려주며 키를 준다. 키를 들고 가까스레 찾은 방에 짐을 부리고, 이틀밤을 지낼 곳이라서 빨래를 맡기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역시 세탁소는 많았지만 문을 연곳은 하나도 없었다. 지나가는 네팔리 말로는 주인이 카트만두로 겨울을 나러 갔단다 . '그래, 이 와중에 왠 빨래는... ' 쉽게 포기하고 롯지로 돌아와 양말이라도 빨 요랑이었지만 화장실은 물도 나오지 않는다.


맨 위층인 4층에 있는 다이닝룸으로 향했다. 겉에서 보기엔 영업을 하는지 마는지 의아했었는데 그동안 트렉커들이 몰려왔나보다. 호주 등에서 왔다는 20세전후의 예닐곱명의 젊은이들로 다이닝룸이 왁작지걸 소란스럽다. 같은 일행이 아니었지만 모두들 쏘롱패디나 하이캠프 등에서 이삼일씩 날이 좋아지기를 기다리다가 결국 쏘롱라를 넘어가는 것을 포기하고 되돌아 내려왔단다. 어디 미개척지를 정복이라도 하고 온양 의기양양한 젊은이들의 열기로 다이닝 룸이 후끈거렸다. 구석에 세워져 있는 기타를 들고 노래까지 부르며 차가운 안나푸르나의 밤을 뜨겁게 달구었다.


인적이 드문 산중 마을에서 사람을 만나는 것 만치 반가운 일이 없지만 올라가기위해 마낭에 도착한 사람들에게 등정을 포기하고 하산중인 사람들과의 만남은 썩반갑지 않을 수 밖에 없었다. 계속 올라 갈 것인가 되돌아 내려갈 것인가 하는 어려운 결정의 순간이 다가온 셈이다. 파샹은 계속 비관적인 전망을 내어놓으며 설사 쏘롱라를 통과한다고 해도 묵디나트, 까그베니까지 완전히 빙판이라서 위험하기 이를데 없단다. 솔직히 같이한 몇일사이 파샹은 항상 짧은 하루의 목표치, 그리고 느린 일정을 제안했다. 가이드가 편안한 일정을 원하는 것은 당연지사고 혹시라도 위험이 따르는 시도는 피하고자하는 당연한 일일것이다. 하지만 파샹의 판단을 전적으로 따르다보면 트렉킹이 그야말로 관광투어가 되어버릴 것이 붐명했다. 판단을 마낭에서 지내는 이틀동안 천천히 상황파악을 더 하고 내리자고 미루었지만 사실 나 역시 비관적인 생각이 들었다.


한고비를 넘기고 다음 일정을 확정한 청년들은 홀가분함때문인지 계속 들떠 있었고 시끄럽기까지 했다. 상행인 트레커들은 나이도 나이였지만 몸도 그만치 피곤한 상태인데다가 또 아직 쏘롱라 패스를 포기할 것인지 시도할 것인지 결정을 못한 상태의 긴장감 때문인지 난로가에 둘러앉아 묵묵히 불만 쬐고 있었다. 날이 저물고 상행인 일행은 모두 비슷한 시간에 저녁을 주문했는데 그때 먼저 주문한 청년들이 음식이 나왔다. 돌접시 위에서 계속 지글거리며 맛난 향과 김이 무럭무럭 나는 그 음식이 이곳에서 먹을 수 있는 최고급 음식인 야크스테이크라고 했다. 이 말을 듣는 거의 동시에 모두 '주문 취소'를 외치고는 주문을 다시 하겠다고 나섰다. 800루피면 비싼편에 드는 다른 음식값의 두배가 넘는 가격이지만 강행군을 한 이날 하루는 그래도 다들 그 정도의 저녁 식사비가 아깝지 않은 눈치였다. 안나푸르나 라운드를 떠나와 이날 최고의 음식으로 고단한 육신을 위로하고 따뜻한 다이님룸에서 밤이 깊어지기를 기다리다가 침실로 돌아왔다.


침실 화장실은 물도 나오지 않고, 방안에는 화장실 냄새가 가득했다. 창밖은 눈발이 다시 굵어지고 바람역시 거세져 약한 외창을 부서져라 흔들어댔지만 곤한 몸은 아랑곳하지 않고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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