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인생에 한번은 순례여행을 떠나라'(경민선)


뉴스뱅크F 서비스가 종료되었습니다
시코쿠 지방의 88개 성지순례 사찰 중 75번 사찰인 젠츠우지를 순례 중인 일본인들. 이들은 이승의 업장을 없애기 위해서 흰색 수의를 입고 다니며 88개 사찰을 순례한다./김은진 기자
 

책 제목만 보고 나는 대답했다.

'그래. 떠나자 한번쯤은...'

하지만 금새 의문이 떠올랐다.

'중세도 아닌데 갑자기 순례길이라니?'

'나는 종교인도 아니잖아?'

그리고 짧은 망설임끝에 보다 근본적인 결론에 도달했다.

'그래 역시 일생에 한번은 순례길을 떠나야지.

아니 우리 인생이 바로 순례길의 연속이 아니든가?'

 

'' '걷기'가 유행이 되는 시절을 낳은

인간이 지나온 역사를 뒤돌아보자.

인간은 어느날 스스로 만물의 영장이기를 포기했다.

그것은 지상의 모든 존재를 식민통치하는 신으로부터 버림받아서가 아니라,

인간 스스로 낡은 신과 더불어 새로운 신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신을 통해 인간은 지상의 천국을 열망했고,

그리고 지상의 천국이 세워지는 하늘에는 항상 낡은 신의 호위가 있었다.

그렇게 인간은 세계를 지배하려했지만,

새로운 신은 또다시 인간을 통해 세계를 지배하고자 했다.

결국 낡은 신은 두터운 철문과 높은 담이 둘러처진 교회에 갇혔고,

인간을 지배하기 시작한 새로운 신은 베일을 벗고 본색을 드러냈다.

그것은 '자본'이었다.

위대한 조물주와 만물의 영장인 인간의 계약은 깨어지고,

세상은 '자본'의 식민통치를 받게 되었고,

인간은 자본의 지배를 수행하는 '총독'이 되었다.

 

그 결과는 참혹했다.

인간은 스스로의 가치를 포기하고,

자본의 노예로서 인신포기각서에 서명해야했다.

이제 인간은 물량화되고, 계량화되고

그리고 이윤을 위한 '투입 요소'가 되었다.

그것도 위대한 '자본'의 하위 범주로 말이다.

 

그리고 자본의 지배가 정교해지는 만치

인간은 인간 본연의 모습에 목말라했다

인간은 세계를 지배하고자하는 꿈에 의문을 제기했고,

이제 그 스스로의 삶의 지배자가 되고자 했다.

그렇게 인간은 새로운 신도 낡은 신도 아닌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섬기는 존재가 되었다.

인간은 섬기면서 동시에 섬김을 받는자가 되고자 했다.

 

그 깨달음의 끝에 사람들은 갑자기 길을 나서기 시작했다.

스스로 자기 삶의 가치를 찾아 길을 떠난단다.

신경정신과가 보편화되고, 우울증이 마음의 감기 정도로 받아들여지는 세상,

온갖 치유 프로그램이 범람을 하고,

기성종교의 틀을 넘어 새로운 종교마저

위대한 과학의 시대를 침범하는데

 

인간은 다시 흙과 바람과 태양과 몸이 만나는 원초적 경험을 찾아 나선 것이다.

'걷기'는 그렇게 붐이 되었고, 카미노데 산티아고가 오시코쿠순례길이

그리고 올레길과 지리산 둘레길이 탄생했다.

 

순례길에서는 지친 다리의 노고를 들어주고,

순례 도중에 죽음을 맞이할 경우 비목으로 쓸 지팡이 츠에는

어쩌면 순례가 끝난 뒤에서 영원히 가슴 속에 담고 다녀야할 지팡이 인지도 모르겠다.

살아서 의지타가, 죽어서 비목으로 남길 손때 찌든 지팡이 하나쯤 가슴속에 안고 산다면,

우리는 자신의 삶을 그래도 덜 천대하고 더 사랑하게 되지 않을까?

 

인생의 한번은, 최소한 한번은 스스로의 삶을 찾아 먼 순례길을 떠나야 한다. 그길은 영원한 방랑의 길이 아니라 잃어버린 자신의 삶의 가치를 찾아 출발지점으로 돌아오는 길이다. 그리고 순례를 떠나기 전과는 다른, 순례를 다녀왔던 사람의 새로운 삶을 살고 싶다.

 

이 책이 테어나도록 한, 필자의 우울에 경의를 표한다.

반응형
반응형

 

"살다보면 그런 날이 온다. 다 버리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기에는 이미 늦은 것 같고, 가던 길을 그냥 가기에는 왠지 억욱한 순간. '이렇게 살 수도, 이렇게 죽을 수도 없는 나이'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은 그런 날"



경향신문에실린 "[세계의 컬드여행지] 카미노 데 산티아고 800km도보 순례" 의 한 구절이다.

작년 어느날 가슴 저미게 다가오는 저 한 구절에 나는 갑자기 '산티아고 데 카미노'에 빠져들었다. 저녁 내내 인터넷을 뒤지고, 이런 사람 저런 사람들의 블로그 순례기를 쫒아 산티아고 길을 따라나섰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 되면 다시 '이렇게 살수도, 이렇게 죽을 수도 없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어는 순간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판단을 내리고 순례기를 서핑하는 일을 포기하면서 하나의 다짐을 하고  한권의 책을 선물 받았다.
하나의 다짐은 2010년 가을 걷이가 끝나면 나 역시 먼저 떠난 순례자들의 발자국을 따라 길을 나서겠다는 것이었고, 한 권의 책은 바로 그 길의 친절한 안내자가 되어줄 [산티아고 가는 길]이었다. [산티아고 가는 길]은 만날 때마다 내가 산티아고 이야기를 해대는 통에 도무지 궁금해서 베길수가 없었던 친구가 사서 읽고 나에게 선물한 책이다.
블로그의 짧은 순례기를 부담없이 읽다가 갑자기 한권의 책으로 다가온 산티아고 순례기가 사실은 좀 부담되었다. 미지의 길을 나서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지식 이상의 것을 취한다는 것은 그 길을 떠나느 설레임을 반감시킬 수 있다는 우려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우려는 금방 사라지고 서서히 책 속으러 빨려 들어갔고, 필자 최미선의 꽁무니를 쫒아 구멍난 운동화를 싣고 카미노를 쫄레쫄레 따라나서게 되었다. 그리고 페이지를 넘김에 따라 점점 더 구체화되는 스페인의 들녘, 마을들 그리고 순례객들의 표정은 나의 마음속에 큰 흔적을 남겼다. 눈을 감으면 파스타의 향기가 코끝에 느껴졌고, 잠이 들면 생장 피드포르를 지나 피레네 산맥을 넘었다.
그리고 마침내 책을 덮으며 다시금 '길'과 '인생'의 의미를 되돌아 보게 되었다. 사실 '여행'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의 여행은 여행이 아닐지도 모른다. 필자가 전하는 산티아고 보다 그 글을 통해 받아들이는 독자의 산티아고는 더 절실함을 가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생'은 생각한 것이 아니고 사는 것이다. 왜 사는지,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하는 의문을 10대에 가져 내일모레 오십이 다 된 지금까지 짊어 지고 온 인생길은 사실 좀 팍팍했다고 말 할 수 있을 것 같다. 
올 11월이면 산티아고 길을 떠나 2011년 신년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지나 '피니스테레'에서 맞이하고 싶다. 그리고 멀리 석양에 젖은 대서양을 바라보며 나의 짐들을 내려 놓고 싶다. 짐을 가득 담은 배낭보다 더 무거운 '왜사는지,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하는 강박을 낡은 운동화와 함께 불사르고 그 연기 냄새만 코끝에 조금 남겨서 지금 이자리로 다시 돌아오고 싶다.

[산티아고 가는 길]은 읽는 책이 아니라, 같이 떠나는 책이다.
주어진 자리에서 돈과 명예, 지위를 지키는 사람이 줄어들고 이 모든 것을 다 가볍게 여기고 같이 길을 떠나는 도반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