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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철학의 발흥, 프레게와 러셀 - 언어와 논리, 의미

- 이지훈

 

분석철학은 독일의 관념론에 대한 반발에서 촉발되었다. 프레게는 [산수의 기초]에서 칸트의 초월론적 관념론을 공격하고 수가 자립적인 대상이라고 주장하며 실제론을 옹호한다. 러셀은 절대적 관념론의 일원론에 대항하여 논리적 원자론이라는 다원론을 제기하고, 무어는 관념론이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을 구분하지 못한다고 비판하면서 실재론을 주장한다. 이 과정에서 사용한 방법론을 분석철학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데, 분석철학은 언어분석을 통해 철학적 문제의 많은 부분을 해결 혹은 해소할 수 있다고 보는 일군의 철학자들이 가진 방법론적 입장을 지칭한다.

 

분석철학의 방법론은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에서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의 경계를 긋기 위한 시도가 이루어지면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말할 수 있는 것은 생각할 수 있는 것으로, 언어의 한계는 사유의 한계로 이해했다. 이점 이성의 한계를 긋고자 한 칸트의 철학적 기획과 일맥 상통한다. 칸트는 인간의 이성, 오성, 감성의 능력과 작용을 탐구함으로써 이 기획을 실현코자 했지만,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매개로 세계에 접근해 나갈 수 있으며, 의미와 논리의 문제를 천착했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입장을 같이하는 논리실증주의자들은 한 명제의 뜻은 그 명제의 검증방법이라는 검증원리를 통해 형이상학 등의 교설이 무의미한 헛소리임을 천명한다.

 

의미이론은 한 언어적 표현의 의미를 탐구하여 유의미한 것과 무의미한 것을 구분하는 방법과 원리를 탐구하는 이론으로 존재론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달리 말해 특정한 의미이론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나름의 존재론을 상정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의미이론은 크게 3부류로 나눌 수 있다.

1. 플라톤의 지시의미이론 : 한 언어적 표현의 의미는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이다

2. 관념의미이론 : 한 언어적 표현은 그것이 표상하는 관념이다.

3. 사용 의미이론 : 한 언어적 표현은 그것의 사용에 있다.

 

지시의미이론은 고유명사에만 설득력이 있으나 마이농의 황금산 같은 가능한 존재자의 문제에 봉착하고 만다. 지시의미이론을 거부하면 유명론에 빠진다. 이 난점을 해결하기 위한 시도가 관념의미이론이다. 한 언어적 표현의 지시대상인 존재자가 없어도 그 언어적 표현의 의미는 그것이 표상하는 관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관념의 주관성은 관념의미이론의 치명적 약점이다.

 

프레게는 지시의미이론의 약점을 언어분석을 통해 극복하고자 시도하고, 관념론이 수학적 진리마저 주관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심리주의적 경향을 가지고 있다고 비판하며 이를 배격하는 것은 자신의 철학적 과제로 삼았다.  이를 위해 지시의미이론과 실재론을 바탕으로 수학의 진리와 개념을 논리학의 진리와 개념으로 환원가능 하다는 논리주의입장을 제기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어-술어 논리학을 거부하고 대신 논항-함수의 논리학을 제시함으로써  현대 논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프레게는 1) 수학의 함수개념을 일상언어와 논리학에 도입하고, 양화사를 발명했으며, 2) 수의 개념을 최초로 정의했고, ‘논리주의라는 수학철학의 입장을 수립하고, 3) 의미를 뜻과 지시체로 구분하여 수학철학에서 심리주의와 주관주의를 배격했다.

 

러셀은 프레게의 뜻과 지시체 구분에 대해 비판하면서 은 여전히 심리주의의 잔재라고 보고 지시체만 인정했다. 그러면서 그는 지시의미이론과 실재론을 고수하면서 마이농의 과도한 존재론을 벗어나기 위해서 문장의 논리적 분석을 통해 확정기술구를 축출해 내어 무의미함을 밝히는, 비존재자 지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기술이론을 제시함으로써 돌파하고자 했다.

 

기술이론은 고유명사와는 다른 확정기술이 지시체를 지닐 필요가 없다는 점을 보여줌으로써,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을 판명하는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황금산같은 것이 꼭 존재한다고 간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그래서 여전히 보편자의 존재를 수용하는 실재론을 벗어날 수 없었다.

하지만 러셀은 비트겐 슈타인을 만나 자신의 철학적 사고의 준칙이었던 오캄의 면도날이라는 원리와 기술이론은 논리적 원자론으로 한단계 진전을 이룬다. 

오캄의 면도날이란 존재론에서 최소의 존재자를 확보하려는 전략으로 어떤 추정된 실재가 있다면 그것을 구성하는 더 근원적인 실재로 대체하라는 원리로 러셀에 의해 논리적 원자론으로 구체화된다.

 

논리적 원자론에 따르면 임의의 명제는 기술이론을 적용하여 분석해 들어가면 더 이상 분석이 불가능한 최후의 잔여를 만나게 되는데 이를 원자사실(atomic facts)이라고 한다. 이들 원자사실을 위장된 고유명사가 아니라 논리적 고유명사로 이들이 세계를 궁극적으로 구성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논리적 원자론은 절대적 관념론에 대항해 다원론과 실재론을 옹호하기 위해 제시된 철학적 입장이지만 문제제기 후 엄밀하고 통일적인 체계를 세우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단지 세계에 대한 철학적 탐구에 있어 언어, 논리, 의미에 대한 연구의 중요성을 확인하고, 그와 같은 입장의 분석철학의 조류를 20세기를 대표하는 철학적 입장으로 세우는데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러셀이나 프레게에 대한 비판은 주로 프레게의 실재론이나 러셀의 논리적 원자론이 그 자체 하나의 형이상학적 기획이라는 점에 맞춰져 있다. 이후 분석철학은 콰인 등에 의해 의미의 존재론과 형이상학을 모색하려는 움직임으로 전개되어 나간다.

 

문제의식>

1. 철학적 작업이 문명비판적 측면을 가진다고 볼 때, 프레게와 러셀의 문제의식은 관념론의 어떤 측면에 대한 공격이었을까?

 

2. 프레게의 실재론이나 러셀의 논리적 원자론도 그 자체 하나의 형이상학적 주장이라는 공격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까? 이 문제를 푸는 해답은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시작될 것 같다. 인간이 가진 사고 체계 중 형이상학적이지 않은 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이 역시도 의문이다.

 

3. 분석철학이 철저한 분석을 통해 도달한 지점에서 남은 잔여는 몇 개의 언어학적 지식들 뿐인 거시 아닌가? 분석적 방법이 언어의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된 인식적 오류를 극복하는데 기여했다고 해도 과연 그것을 하나의 세계관, 하나의 존재론으로 받아들일수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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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을 전공했다는 이유로 주변 사람들에게 자주 질문을 받는다. 도대체 철학이 무엇인지, 뭐 하는 것인지. 하지만 그 질문에는 꼭 아무 쓸모없는 철학 공부는 왜 했냐는 공격적인 뉘앙스를 담고 있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질문 끝에는 꼭 능청스런 표정으로 철학을 [철학관]과 관련 지으며 혹시 사주 팔자 볼 줄 아냐고 물어오곤 한다. 하지만 1980년대 초반에 대학을 들어가 1990년대 초반까지 다녔지만, 나는 그뒤 어떤 '철학적 사유'도 없이 막 사는 삶을 살아왔고, 그나마 학교다니면서 얻었던 빈약한 철학적 지식마저 2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깡그리 잊어버린지 오래다. 그 세월동안 '철학'과 관련해서는 그런 성가신 질문을 모면하는 나만의 메뉴얼을 갖추었을 뿐이다. 일단은 '철학'이 무엇인지 물어오면 웃고 넘기지만 알만한 사람이 그것도 집요하게 추궁해 들어올 때는 일단 상대를 무시하는 전략을 구사한다 .

아이고 무식하기는, 남들 공부할 때 공부 안하고 뭐했는데요?” 

좀 더 편한 관계일 땐 악담도 서슴지 않는다.

니 상판데기 관상을 보니 올해 넘기기 힘들겠다. 우야면 좋노!”

그리곤 이런저런 개론서에서 배웠던 어원적인 분석을 보여주며 [philosophy = philos()+ Sophia()] 철학은 지식에 대한 사랑’, 혹은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고 말해주기도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한참 부족하다. 그래서 세상을 이해하는 틀이니, 세계관이니 그러다가도 안되면 철학자체의 개념 변천사까지 들먹여본다.



인간의 모든 지적인 행위 전체를 아우르며 학문'이 곧 '철학이었던 시대를 지나, 철학에서 자연과학이 분리되고, 다시 심리학마저 철학에서 분리 되면서 철학에 정체성의 위기가 초래되고 철학의 개념을 재정립하는 과정은 곧 철학의 영역을 축소하는 과정이었다고. 이렇게 말해 보지만 이것은 질문자가 원하는 답이 아니 것이 분명하다.


질문자가 원하는 것은 '철학'의 현실적인 쓰임새가 무엇인지, 철학을 공부함으로써 도대체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사실 나 자신도 그같은 질문자의 물음을 해소해 줄만한 답을 제시하기가 궁색하다는 데 있다.
   
그 궁색한 처지를 모면하기 위한 철학에 대한 이해, 혹은 나 자신의 태도가 이제와서 다시 철학을 공부하고싶은 나의 욕망을 근거짓는 주춧돌일 수 있다. 왜 아무짝에도 필요없는 철학공부가 다시하고싶은가! 지금 다시 하는 철학공부가 나에게 대단한 깨달음을 주거나, 세상을 바라다보는 통찰력을 가져다 줄 것같지도 않고, 내가 하는 농사, 마을일들, 그리고 직접적으로 나의 생계를 해결하거나 나의 사회적 활동을 북돋아주는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다. 더더군다나 이미 학자의 길을 가기에는 멀어져도 한참은 벗어난 인생을 살아왔고, 앞으로 대단한 저술가가 되거나, 하다못해 나름의 '인생철학'을 구축하고 어떤 수준에서든 한명의 사상가나 철학자로 입신할 가능성은 사실 제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다시 철학공부를 하고 싶은 것은  지극히 사적인 이유들과 더불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철학의 매력때문이다.

먼저 나는 학생시절 제대로 공부를 한 적이 없다. 공부를 너무 하지 않은 학부시절이 끝나면서 그 사실이 너무 아쉬워 무작정 대학원을 진학했다. '대학원'이 나의 삶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생각은 전혀없이 오직 나태한 학부시절 못한 공부를 다시 한번 재대로 해 보겠다는 얄팍한 욕구에 이끌려 대학원에 진학했지만, 사실 대학원 시험을 준비했던 7~8개월동안 공부한 것 말고는 대학원 시절 역시 학부시절을 지배했던 게으름의 연속이었다. 더군다나 결혼과 여타 사회적 활동까지 부가된 대학원시절은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면서 끝내 학위조차 얻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다. 결국 못다한 지적 탐구에 대한 미련이 그 솔직한 이유의 하나다.

그리고 이제 나는 내 스스로 받아들이기가 참 곤혹스럽긴하지만 적은 나이가 아니다. 나이를 잊고 살다가도 동년배의 나온 배와 벗겨진 이마를 마주하거나, 나와 친구들의 다 자라버린 자식을 대하게되면 움찔 놀라지 않을 수 없는 나이가 되었다. 대학진학은 물론 군대를 간 아이들도 하나둘이 아니고, 반갑지않은 청접장이 날아들 날도 얼마남지 않은게 사실이다. 마흔 아홉은 결코 적은 나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참 막연하지만 내삶의 의미를 묻고 싶은 욕구가 마음 한켠에서 자라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이 허무의 바다인 세상에서 무의미한 삶을 살고 있지만 결코 그 무의미가 삶의 전부는 아닐 것이라는 느낌들을, 세상의 본질이 허무만을 아닐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을 천착하고 싶은 나이가 된 것 같다. 

사실 서양 철학은 재정립을 거듭하다가 비트겐슈타인에 와서는
가치판단마저 배제되고 철학이 순전히 언어의 의미를 명학히하는 작업으로 국한되기도했지만 사실 철학이 삶의 의미를 묻는 지적 사유가 아니라면
철학은 그 존재 이유가 없다고 본다. 내가 스스로 이해하는 철학은 인간이 자신의 삶의 근거를 묻는 인식적 작업이 아닐까 생각한다. 왜사는지, 생물학적 생명의 연장이 아니라, 인간적 삶의 지속성을 담보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사는 이유를 만들어 나가는 작업이 바로 철학이라는 것이다.

철학을 업으로 삼는 학자들이 이해하는 철학이,
대중들이 일상생활속에서 사용하는 철학과 같은 의미일 순 없다.
'철학'을 검색어로 웹검색을 해보면 당장 드러나지만
우리는 일상속에서 수없이 많은 경우에 '철학'이라 용어가 사용되고 있음을 알수 있다.
정치가들의 '통치철학', 자본가들의 '경영철학', 교사들의 '교육철학' 등등
대중적 의미에서 '철학'은 어떤 판단이나 사고의 저변에 그것을 가능케하는 근본 원리같은 걸 말하는것 같다. 다시말해 학문의 한 분과가 아니라 여전히 인간이 영위하는 모든 학문, 모든 사고, 모든 행위의 저변을 형성하는 인식의 틀이나, 가치의 근거같을것을 '철학'이라는 용어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한술 더 떠 '철학'을 비학문적 도닦기를 포괄해서 사용하는  경우도 많다대중들의 뇌리속에서 철학은 '학문'과 '득도'를 다 포괄하는 인간의 인식적 노력을 말하는 것이다.

나는 철학을 철저히 학문적 견지에서 이해한다. '득도'는 도인들의 몫이고 나는 득도에 관심이 없다. 나는 단지 명징한 세계인식과 나의 삶을 근거짓는 자연과 사회 속에서, 그리고 인간의 역사속에서 나의 작은 삶의 의미를 찾고 싶을 뿐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럼 어떻게 철학공부를 할 것인가에 있다.
사실 대학시절, 학자의 길을 나의 인생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는 그때에는 학자만치 시시껄렁한 삶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대학이라는 틀, 교수라는 직업이 나의 삶의 다양한 가능성을 옭아매는 걸 허용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제와서 그런 길로 인도하는 방식의 철학공부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
농사로 밥벌어먹고살아야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철학공부는 좀 달라야한다는 생각이지만 아직까지 명확한 결론을 얻지 못하고 있다.
우선은 어쩔수 없이 주제중심으로 공부를 하고 생각을 정리할 만한 지적 성과도 시간적 여유도 없는 처지에 맞춰 철학사를 중심으로 공부하는 과정을 이어갈 생각이다.

'철학하기'와 '철학자로 살기'가 괴리된 현실에서  '재미'와 지적 허영으로 하는 철학공부를 벗어날 방도를 미리 알지 못한 상태로 시작하는 철학공부가 그 과정에서 바른 길을 찾을 수 있기를 막연히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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