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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오스터의 [브루클린 풍자극]을 읽고
 

뉴욕의 다섯 자치구중 하나로 <브루클린>은 '브루클린 다리'로 맨하턴과 이어져 있는 현대적 도시다. 하지만 브루클린은 다섯자치구중 인구가 가장 많을뿐 아니라 다른 자치구, 아니 미국의 하고 많은 도시와는 다른 특별한 곳이다. 사실 브루클린은 이미 하나의 상징이다.  '브루클린'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책만해도 여러권이고 무엇보다 내 개인에게는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로 깊게 각인되어 있다. 제니퍼 제이슨 리가 열연한 창녀 "트랄라"의 사랑이 중심적인 이야기로 남겨진 이 영화는 사실 브루클린의 거리보다 그 강력한 음악에 더 매혹되었던 게 사실이다. 이 영화를 통해 다가온 브루클린은 산업화의 결과만 취한 모던하고 이기적인 '강남'같은 시가지가 아니라, 산업화의 혼탁한 과정을 날것 그대로 다 싸안고 있는 혼란한 공업도시, 항국도시인 '안산'이나 '인천'같은 도시의 하나였다. 이 영화 속 브루클린에서 나는 더이상 잃은 것도 밀려날 곳도 없는 바닥인생의 악다귀같은 삶들이 뒤엉켜 있고, 마약과 범죄, 절망만이 거리에 가득한 속에서도 사랑을 피우고 인간적 삶의 아름다움을 일궈내는 질긴 생명력을 가진 잡초같은 인간군상을 만날 수 있었다. 서구인에게 인도의 시궁창같은 거리가 인간 삶의 원초적 아름다운, 그 숭고함을 찾을 수 있는 싱싱한 삶의 현장이듯, 브루클린은 인간 욕망의 배설구, 만악의 찌꺼기가 흘러드는 시궁창같은 현대도시 속에서도 꿋꿋하게 지켜가는 아름다운 세상에 대한 희망이 있음을 상징하는 문화코드였다.

하지만 이책 [브루클린 풍자극]에서 다가온 브루클린은 또 조금은 다른 이미지다. 암에 걸리고 이혼마저 당하고, 거기다가 하나 있는 딸과도 불화에 빠진 의지가지 없는 초로의 전직 보험모집인 네이선 글래스가 '조용히 죽을 만한 곳을 찾아'들어 온 곳이 바로 [브루클린]이다. 브루클린은 네이선 그래스의 고향으로 3살때 부모의 손을 잡고 이사를 떠나야 했던 이미 기억속에 남은 거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평범한 시가지이고 주택지다.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에서 보였던 산업화의 부정적 상징성 같은 것도 없고, 어떤 극적인 사건이라고는 애당초 일어날 것 같지 않은 평화롭고 단조로운 도시의 하나일 뿐이다. 하지만 [브루클린 풍자극]의 작가 폴 오스터가 주인공 네이선 글래스의 시각으로 브루클린의 거리를 '줌인'하는 순간 브루클린의 작은 카페며, 거리를 스치는 택시안, 그리고 집으로 가는 작은 길모퉁이에도 이름없는 초라한 삶들이 변주하는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책 가득 넘쳐난다. 독자인 나는 또 거리두기에 실패하고 눈 깜짝할새 브루클린의 거리로, 해리의 고서점 구석진 서가 옆으로 빨려들어간다.

폴 오스터의 제기발랄한 입담에 매혹되지 않을 독자가 없을 것같지만 사실 이책 [브루클린 풍자극]의 매력은 단지 그것만이 아니다. 도시적 삶이 인간개개인을 철저히 고립시키고, 고립된 개인이 생존을 위해 무한 경쟁하는 밀림이 바로 도시라면 이 책은 폴 오스터의 문명비판적 시각을 통해 그와 같은 도시속에서 살아가는 독자에게 다시 가족주의가 회복된 아름다운 서정과 이야기가 있는 도시를 보여주고, 인간적 삶에 목마른 독자의 목을 축여준다.

이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며 이야기는 바로 사랑의 이야기 즉 '러브 스토리'다. 서로 교차하며 엉키고, 불가능할 것 같은 상황을 돌파하며 끝내 사랑으로 발전하는 인간 군상의 삶을 통해 폴 오스터는 바로 사랑의 전도사이고자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추상화된 사랑, 지고지순한 이상화된 사랑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는 않다. 지극히 현실적이고 철저히 속된 사랑 이야기이기에 독자인 나는 솔깃할 수밖에 없었고 그 사랑을 인간 구원의 메시지로 받아들일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책을 덮고나서 남는 희미한 의문이 있다. 도대체 '풍자극'은 또 무엇일까? 왜 이소설은 '풍자극'이라 이름붙였을까? 작가 폴오스터는 브루클린의 사랑이야기로 무엇을 풍자하고자 했을까? 사랑없는 시대? 가족없는 시대? 사랑만이 희망이다고 하면서 사실은 '희망의 허구성'을 풍자했을까? 이와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를 끝내 소화되지 못한 이야기가 있다. 먼저 행간 곳곳에 등장하는 부시와 공화당에 대한 조롱은 나의 정치적 입장과 맞물려 나름의 쾌감을 주었지만 이 창치는 이 소설의 전체맥락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까, 그리고 이 소설이 끝나는 2001년 9월 11일 오전 8시는 '위대한 아메리카'의 상징인 뉴욕 맨하탄의 세계 무역 센타가 이슬람 해방전사의 공격으로 무참히 무너져 내리기 46분 전이다. 다시말해 브루클린 풍자극이 주인공 네이선 글래스가 브루클린에서 회복한 인간에 대한 사랑과 희망을 평범한 사람을 위한 전기 집필 대행이라는 새로운 사업 구상을 통해 자신의 삶속에서 구현하고자 결심하면서 이 소설이 끝나는 시점이다. 개인 '네이선'의 희망의 전주곡이 울러 퍼지고 그리고 46분뒤 세계를 지배하는 초강대국 '미국'의 상징성이 붕괴되는 교차점에서 분명 폴 오스터는 무엇인가를 풍자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어리석은 독자의 한명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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