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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슐라르의 새로운 과학정신

- 과학과 예술의 관계에 적용될 철학의 가능성

- 지훈


어렵게 바슐라르를 읽었다. 사실 길지 않은 글에 너무나 많은 내용을 담고 있어 이것을 다시 축약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노동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지금까지 나는 바슐라르를 철학자라기 보다는 예술철학자로 이해하고 있었다. , 불 등 상상력의 4대근원에 대한 글을 오래전에 읽었던 것으로도 기억된다. 하지만 알고보니 바슐라르는 콩트의 문제의식과 같은 선상에서 당대 과학의 발전을 토대로 한 실증정신을 확립하여 새로운 과학정신을 수립코자 시도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제시된 그의 인식론은 과학을 넘어 예술의 영역에까지 적용코자 시도했고, 그 시도의 결과가 바로 저가 이전에 읽었던 바슐라르의 저작들이었나 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지훈은 이 글에서 바슐라르의 과학인식론만을 살피고 있다. 물론 그것마저도 너무 내용적으로 많고, 논변은 복잡하다 .

 

먼저 바슐라르는 새로운 과학정신에 입각한 인식론을 수립하기 위해 과학의 불연속적 발전에 주목하고 이를 지속적 단절로 개념화한다. 그는 상식과 감각, 또는 기존 이론의 전제 등 새로운 문제의 해결을 가로막는 인식의 걸림돌을 문제를 발생시킨 인식의 틀을 대체함으로써 해소하는 것을 인식적 단절이라고 보고, 이런 단절은 과학의 거시적 역사는 미시적 차원에서 상시적으로 지속된다는 의미에서 바로  지속적 단절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는 과학이 현상영역이 아니라 그와 같은 현상을 산출하는 근원인 본체를 이해할 수 있다고 보는 비실증주의적 주장을 펼치기도 하는데 이는 인간의 창조성이 현상을 만들어내는 만치 그 현상의 배후가 되는 본체를 이해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여기서 그가 제시한 방법론이 바로 현상-기술개념이다. 이 개념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바슐라르는 현상과 본체의 괴리를 극복하는 인식론적 단절을 넘어 인간존재론 차원의 단절을 제시한다. 이를 통해 열린 정신의 합리적 유물론에 도달 할 수 있고, ‘폐쇄적 코기토에서 실천적 코기토로 나아갈 수 있다고 제시한다.

 

이렇게 주어진 인식의 걸림돌과 맞서는 능동성을 욕망과 욕구의 구분에서 찾고 꿈을 향한 욕망의 무한 긍정을 통해 주관적 심리적 오류를 극복하고 단절과 상승의 원동력을 회복할 것을 주문한다. 바슐라르는 현실적 유용성에 바탕을 둔 욕구와 상상력의 원천인 욕망을 구분한다. 그는 욕구가 만들어내 주관적 오류는 사이비과학을 낳는데 반해 욕망에 원천한 꿈의 역동성은 진정한 과학의 역사를 낳는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과학사의 불연속과 귀납적 종합을 규명하며, 신생이론과 선행이론 사이의 관계에 적용되는 개념으로 형이상학적 귀납’ ‘포섭을 제시하기도 한다.

 

바슐라르의 인식론은 오류에 대한 개방성새로운특성으로 하며 기존의 합리성에서 벗어난 꿈, 상상력, 욕망, 의지 같은 개념을 원동력으로 포함시켰다는 측면에서 의의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물론 푸코에 와서 무한 긍정되는 비합리적 요소가 여전히 긍정적 억압의 통제 대상으로 남아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지훈의 글을 읽고 여전히 남는 의문은 바슐라르의 인식론이 현대 과학의 성과를 과연 과학적으로 수용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과학 속에 있는 비과학적 요소의 개입양상을 해명하여 새로운 과학철학의 장을 개척한 의의를 인정하지만 그의 인식론은 문학적요소가 너무나 깊이 개입한 것 같은 의혹을 지울 수가 없다. 바슐라르의 인식론의 수립과정에서 스스로 긍정적 억압을 어는 정도 성공하고 있는가하는 의문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철학적 입론이 합리성을 잃으면 주의주장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철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바슐라르는 문학적 상상력, 예술적 상상력에 그의 지적 궤적이 가 닿아 있고 그곳에 인식의 닻을 내린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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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세르의 인식론 : 공존의 모색

- 지훈


바슐라르의 새로운 과학정신은 그의 제자이자 나중에 푸코의 스승이 되는 캉길렘을 통해 계승된다. 캉길렘은 바슈라르의 문제의식을 계승해서 이를 생물학의 영역에까지 확대하고 과학사연구의 인식론적 성격을 극대화한다. 그는 콩트의 세포이론 해석에서 바슐라르의 욕구/욕망범주를 보다 객관적인 사회정치적 범주로 전환했고, 이는 한 시대의 지식 형성에 개입하는 사회적 힘과 규율의 문제를 다루는 푸코 사상의 출발점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셸 세르는 콩트의 연속성’, 바슐라르의 단절과 다른 입장으로 과학의 진보는 인정하지만 과학이라는 단수의 용어로 묶을 만한 단일한 진리의 연대기적 축적은 없다고 보는 특이한 입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르는 이성의 역할을 신뢰하고, 이성의 역할을 극대화할 것을 주장한다. 이 입장에서 세르는 바슐라르를 비판하는데, 바슐라르가 이성을 과학의 영역에 한정시키고 예술, 인문학 등을 몽상의 영역으로 밀쳐버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세르의 입장은 이성의 폐쇄적 절대주의로 나가지 않고, 개방적 합리성이라는 입장을 고수한다. 이는 한 체계로 세계를 설명하려는 이성이 아니라 다른 체계들과 서로 작용하고 보충하는 이성으로서의 개방적 합리성을 말하는 것이다. 한 체계의 개방성은 자기체계의 한계를 인정하는 데서 출발하고 바로 그로부터 합리성이 나온다고 본다. 다시 말해 세르의 인식론은 전체로서의 체계라는 근대적 이상을 완전히 벗어나 있다. 그의 입장에서 한 체계의 절대적 완결성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체계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세르는 철학이 바다를 떠돌다 잠시 만나는 작은 섬에 불과하다고 보고, 영원히 정착할 안정된 대륙, 세계를 한 번에 구성해줄 철학은 없다고 본다. 바로 이점에서 세르는 맥루한과 비교되기도 한다.

 

맥루한은 미디어가 메시지라고 보면서, 모든 미디어의 내용이 또 다른 미디어의 형식이 되는 내용/형식의 상호 순환적 영향관계를 제기하며 궁극적인 기원, 최종적인 원형을 거부한다. 화자와 청자, 내용과 형식, 주체와 객체는 끊임없이 순화하며 상호 반전되는 관계일 뿐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점에서 맥루한의 입장은 기원의 신화를 해체하고, 기원을 통해 성립하는 닫힌 체계를 논박하는 세르의 입장과 상통한다. 다시 말해 중심은 끝없이 이동하기 때문에, 한 체계 내부의 교환을 모두 매개하고 제어하는 초월존재를 인정할 수 없지만 체계 외부의 끊임없는 유입은 인정할 수 밖에 없다고 본다. 즉 열린 구조는 소통을 긍정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세르와 맥루한은 이질적인 매체, 이질적인 지식의 공존에 대한 입장에서 갈라진다. 세르는 맥루한과는 달리 공존의 관점에서 소통의 숨은 요소인 소음에 주목한다. 세르는 이 소음의 개입과 간섭을 긍정함으로써 인간사유 발전의 가능성을 열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또한 정보에 대한 입장에서도 세르와 맥류한은 갈라선다. 맥루한은 in-formation에서 ‘in’의 의미를 중립적인 질료를 형상 속에 집어넣기라는 관점에서 이해하고, 세르는 ‘in’을 고정된 형상이 없는것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맥루한에게 개별 매체는 자기완결적이지만, 세르에게 매체들은 이질동상적이다. 세르는 이와 같은 입장에서 정보를 천사에 비유하며 소통하고 이동하는 정보자체의 특징을 드러낸다.

 

그런데 소통은 기본적으로 교환이며, 나름의 주고받는 규칙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규칙은 위반되고, 규칙을 위반한 요소는 배제되는데 여기에는 초월축출이 일어난다. 이상적인 교환체계는 이들 기식자를 효과적으로 축출함으로써 안전하게 닫힌 체계를 유지하려 한다. 하지만 완전한 축출은 불가능하고 외부와 내부에 걸쳐있는 기식자는 늘 상존한다. 이들 기식자는 체계의 안밖에 걸쳐 있으면서 한 체계의 외부를 지속적으로 체계의 내부와 공존토록 하고, 이를 통해 새로움의 가능성을 제기하고, 나아가 한 체계의 붕괴와 새로운 체계의 생성을 낳기도 한다.

 

세르는 이와 같은 소음, 기식자, 제외된 제3자 같은 것들의 의미를 찾는다. 이들 담론질서에 포함되지 않은 것들의 창조적인 성격에 주목함으로써 세르는 진정한 소통의 근거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과학 아닌 것과 과학의 관계에서 바슐라르는 비대칭적 시각인 바면 세르는 과학 아닌 것에서 과학성을 읽고, 과학 속에서 비과학성을 있는 대칭적 시각을 보인다. 그렇다고 세르가 과학과 비과학의 경계를 허물어버리고 지적 무정부상태에 빠지진 않는다. 그에게는 과학과 예술을 통일하는 근본원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과학사가 참의 역사만은 아니지만  참된 개념을 만들어 가려는 노력들, 개념화 형식의 집합이다. 따라서 세르는 연대기적 순서의 과학적 진보, 사회적 진보는 존재하지 않지만 세계를 보다 포괄해서 보여주는 관점의 존재가능성을 인정하는 수준에서 진보를 인정한다. 세르에게 시간개념은 비일적선적 개념으로 시간의 복잡성, 시간의 다발을 긍정하는 인식론으로 오늘날의 복잡성의 과학에 걸맛는 인식론이다.    

 

세르의 인식론은 정보유토피아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세르의 인식론을 바로 인터넷 소통, 정보사회 차원으로 환원함으로써 생길 수 있는 위험을 무시할 수 없어보인다. 이지훈의 이 글만을 통해 이해한 세르는 소음의 배제 과정에서 일어나는 갈등, 한 체제의 외부와 내부가 충돌하는 과정에서 야기되는 폭력성 등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 그리고 중심의 이동과 다극화에 대한 담론은 현실 이해와 일정 정도 괴리되는 측면을 가지기도 한다. 세상은 권력의 속성, 자본의 지배라는 틀이 여전히 온존하며 오히려 더 강화되는 면을 보인다. 정보의 홍수, 정보의 민주화라고는 하지만 사실 더 교묘하게 정보는 관리 통제되고 집중되는 양상도 드러난다. 정보의 유통구조가 복잡화 되고 점점 더 파악 불가능한 것으로 전화하면서 정보의 통제자는 빅브라더가 되고 보이지 않는 신이 되어가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르는 세계의 열린 구조를 이야기하지만, 세계지배질서는 여전히 닫힌 구조로 강건하게 유지 존속되고 있고, 닫힌 구조의 근원이 되는 계급구조는 고착화가 더 심각해지는 상황이다. 다시 말해 세르의 지식의 세계-대수학에 바탕을 둔 열린 구조는 현실의 세계-자본에 바탕을 둔 닫힌 구조와 합치하지 않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드는 생각이지만 과학과 철학의 행복한 맛남은 쉬운 일이 아닌 것 같다.철학자의 과학에 대한 해석은 종종 이론이 아니라 인식의 과정에서 가지는 심리적 반응, 정서적 반응일 경우가 많아 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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