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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마을 네트워크]가 제천 대전리에 [마을 이야기 학교]를 펼쳐놓은지 아직 1년이 되지 않았는데 벌써 2번째 마을 기획전을 가진다고 했다. 오래전 시간이 멈춰버린 공간은 살려 마을주민의 발길을 모으고, 지난 겨울내내 주민의 열의를 모아 마을기획전을 마련했단다. 지난 토요일, [생전 처음]이라는 이름의 마을기획전이 궁금하기도 했고, 예마네 식구님들도 보고싶은 마음에 문경 사불암 걷기 모임에 갔던 길에 바로 대전리로 향했다.
 
오픈시간이 오후 2시로 잡혀있었는데 우리가 대전리에 도착한 것은 거의 오후 4시가 다 되었을 무렵이었다. 교정에는 예마네 대장이신 김정헌선생님께서 방송국 카메라앞에서서 인터뷰를 진행중이셨다. 눈인사만 나누고 전시가 열리고 있는 교실로 들어섰다. 이미 전시 오픈식은 끝났고, 이날 전시의 주인공이신 주민들과 손님들은 자리를 떠나고  없었다. 교실 한켠에는 오픈 상이 그대로 차려져 있었다. 다시 복도로 나와 전시 공간과 작품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복도에서 부터 전시를 펼친 한 칸의 교실에는 주민의 열정이 담긴 자화상에서 부터 풍경화, 그리고 겨울내내 공부했던 국어공부 영어공부의 흔적들, 그리고 입주작가의 도움으로  만든 돌 전각 작품과 이들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들 그리고 그들 강좌에 참여하고 과정을 마쳤음을 증명하는 수료증까지 온갖종류의 작품들이 작은 공간을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그야말로 생전 처음으로 붓을 들었고, 영어를 공부했고, 그리고 마을 행사의 주인공이 되신 주민들의 작품은 오래전 바로 그 교실을 채웠을 아이들이 일으켰을 소란과 열기를 되살려주고 있었다. 소박한 전시물들을 산만하게 배치하여 더더욱 지난 시간의 아이들이 북적거렸을 정감 넘치는 교실의 정서가 그대로 살아나는 듯 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들어오신 김정헌 선생님과 박명학선생님 그리고 송이양과 송이양의 친구와 함께 손님들이 다 떠난 오픈상에 둘러앉아 막걸리를 나누었다. 그동안 예마네의 활동에 대해 듣기도하고, 나의 비나리 마을 사업에 대한 말씀도 드리면서 잔을 나누다 보니 어느새 대전리분교 교정에 저녁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했다. 교실을 나와 수리중인 교장사택을 같이 둘러보고, 해가 지는 교정의 풍경을 카메라에 담았다. 벌써 수리해서 숙소로 사용중인 교사사택에 다시 모여앉아 송이양 친구가 난생 처음으로 만든 돼지등뼈감자탕을 안주로해서 남은 막걸리를 비웠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마을 이야기 학교"는  작년에 만화가 한분이 입주하면서 상설화되었고, 그분들의 자발적 봉사로 주민과 함께하는 한글교실, 영어교실, 그림교실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겨우내 진행할 수 있었단다. 그리고 김정헌 선생님이 마을노인회에 가입한 이야기며, 예마네 식구들이 마을주민과 친해져가는 과정도 듣고, 또 도시이주민들의 친화력 부족과 주민과의 불화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작별을 하고 돌아오는 길 이런저런 생각들이 들었다. 이번 전시가 주민들에게 기쁨을 주고 쓸쓸한 마을에 활력을 불어넣는데 작은 충격을 주었을 것이지만 이날 전시가 있기까지 예마네 식구들을 비롯한 많은 분들의 열정과 희생이 요구되었다. 생활근거지인 서울에서 계속 오고가며 길에서 보낸 비용과 시간도 그렇고, '대중문화활동'이 가지는 작가의 개인적 작업과의 괴리를 감수해야하는 부분도 보통 부담스러운 것이 아닐 것 같았다.

아직도 교사는 자비를 들여 수리가 진행중이었고,  젊은 만화가 한분이 아예 입주를 해서 생활을 하는 바람에 그나마 학교가 상시 오픈되고 온기가 유지될 수 있었지만 겨우내 시설 여기저기는 동파라는 피해를 피해갈 수 없었다. 그리고 일부 공모에 참여해 기금을 받기도 했지만 산출없는 마을사업에 지속적으로 자비를 투여해야 하는 점도 마을과 문화예술인의 관계맺기를 가로막는 큰 장애로 작용할 것 같았다.  

사실 마을과 예술가의 관계맺기를 도덕적 차원, 예술가 혹은 지식인의 의무라는 차원에서 요청하기도 하지만 현실적으로 모범적 사례를 도출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잘 알려진 몇몇 예술가의 경우를 보아도,  20여년을 넘어 마을에 정착해 작업하면서 마을공동체와 호흡을 같이하려는 부단한 노력을 진행해 왔지만 성과는 더디고 삶은 너무 힘든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실 예술가가 살아가기에는 마을에 예술가가 숨쉬고 살아갈 삶의 공간이 쉬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기도하고, 또 예술가 자신의 문제도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삶 전체를 싣는 '마을로의 이주'를 결행하지 않고도 물론 다양한 결합방식이 있고, 이것이 보다 현실적이기도 할 것 같다. 그렇지만 이 경우는 또 마을이 대상화되고, 작가의 의도가 일방적으로 투영되거나, 외부에서 마을에 일시적으로 투입된 문화 예술적 자원이 마을과 어떤 트러블을 일으키기가 쉬울 것같다. 마을이 '작업'에 이용되기만 하고 마을주민이 향유하기에 너무나 거리가 먼 '예술'이 될 수도 있기때문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생활'속에 들어와 삶속에 녹아들지 않는 이벤트성 문화예술 '행사'는 마을에 활력을 증진하는 긍정적 변화를 추동하기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을 것 같다.  

어쨌던 예술가가 마을과 함께 살아가면서 마을 공동체에 문화예술의 향유기회를 넓혀나가고 궁극적으로는 마을이 활기가 넘치는 사람 사는 공간으로 거듭나게하는데 참여하기 위해서는 나름의 생존방식과 관계형식을 창출해야하는 과제를 더불어 짊어지고 나가야하는데 이는 사실 작가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 무거운 짐이기도 하다.

사실 예술이 무엇이고, 예술마을은 또 뭔지 잘 모르겠다. 예술이 마을주민의 관심사가 전혀 아니기도하고, 예술마을이 예술인의 동호인 마을이 아닌다음에는 입주한 작가에게 너무 큰 부담으로 과제가 부과되기도 하기에 쉽게 예술마을을 주장하기에는 두렵기도 하다. 궁극적으로는 주민 모두가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마을을 넘어 주민모두가 예술가일 수 있는 마을공동체를 꿈꾸지만 맑스가 말한 "노동자 농민이 동시에 예술가이지 철학자인 세상"의 꿈만치나 요원하기만 하다. 그래서 아직은 공동체 문화활동가는 외로운 혁명가일 수밖에없고 그러다보니 예술마을은 [예술마을네트워크]로  조직화되어야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참 값지고 의미있는 일이지만 또한 힘든 길이기도한 [마을예술네트워크]의 활동에 큰 성과가 있기를 발고 미력하나마 그들이 가는 길에 한발 걸치고 뒤따라라도 갈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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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문을 닫아 운동장 가득 개망초만 무성했던
충북 제천시 수산면 대전리 분교가
[마을 이야기 학교]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한때 650여명의 아이들의 뛰어놀던 '대전리분교'가 있어 
대전리 농민들은 힘든 농사일도 신나게 할 수 있었고,
암담한 현실에서 꿈과 희망, 자긍심을 잃지않고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학교는 마을의 심장이었고, 마을의 모든 이야기는 학교를 중심으로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산업화와 합리화라는 풍파에 밀려
농촌의 아이들은 마을을 떠나고, 마을의 심장은 멋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긴 세월, 학교는 잊혀졌고 마을은 그렇게
사라져버릴듯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다시 들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마을'을 잃고 '학교'를 잊고 아무 일도 없었던 양 살 수 없었습니다.
마을이 없는 세상의 모든 삶은 갈수록 팍팍해지고, 삶의 향기를 잃어갔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마을을 잊어버릴 즈음
조용한 마을에 사람의 온기 가득한 마을의 미래를 담은 풀씨가
하나 둘 날아들었습니다.  



그리고 '폐교'로 불리우던 대전리분교에도
김정헌, 박명학 그리고 김송이라는 풀씨가 날아들었습니다.
이들 풀씨는 잊어져가는 마을의 이야기를 찾아,
예술을 통해 생명력을 불어넣고,
마을의 심장인 학교를 일구고  삶의 향기 넘쳐나는
풍요로운 마을을 만들어나가겠다는 꿈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 8월 14일,
대전리 분교에 그 풀씨가 작은 마을 영화제라는 싹을 틔웠습니다.
그 싹이 어떻게 자라나서 어떤 꽃을 피우고,
어떤 열매를 맺을지 아직은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멀리서 찾아온 손님들의 관심과 사랑뿐 아니라,
흥이 넘쳐나는 마을 주민들의 표정속에서
그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마을 이야기 학교]가 있는 대전리는
세세년년 삶들이 이어져 내려가
작은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아름다운 마을로 이어져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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