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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한 잠을 푹잤다. 눈은 일찍 떴지만 잠은 충분했다. 남은 경비를 계산해 보고 필요한 선물목록을 만들고, 남은 일정을 살펴보고 일어나 세수를 하고 전날 사둔 빵으로 아침을 떼우고도  7시가 되지 않았다. 다시 침낭속으로 들어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 '바가바드기타'를 읽었다. 브라만과 아트만, 그리고 현신인의 이야기들, 행동하지도 느끼지도 않는 경지, 절대지... 아침부터 머리가 지끈 거렸다.

8시 30분 더이상 견디지 못하고 숙소를 나왔다. 타멜 거리를 벗어나 오늘 목적지인 세계문화 유산에 등제된 박타푸르행 버스파크를 향해 길을 더듬어 나갔다. 하지만 지도와 실제를 일치시키기엔 지도는 너무 단순했고 길은 너무 복잡했다. 한참을 걷다가 출근중인 행인에게 길을 묻고 우리 위치를 확인해보니 우리는 반대 방향으로 걸어 버스파크에서 더 멀어져 있었다. 박다푸르행 버스 파크는 타멜에서 걸어가도 될 만치 가까운 곳이었는데, 아침부터 지치기 싫어 결국 택시를 타고 버스 파크에 도착했다. 버스를 타고 가다 개통한지 얼마되지 않는 멋진 도로를 달렸다. 네팔와서 한번도 보지 못한 신호등까지 설치되어 있는 도로 곳곳에는 일본의 원조로 만들어졌음을 알리는 안내 간판이 있었다. 버스를 탄지 30여분 지나 박타푸르에 도착했다. 한 사람당 15달러나 하는 비싼 입장료 때문에 잠시 망설였지만 그냥 포기하기엔 너무 아쉬웠다.

막상 박타푸르 구역안으로 들어서니 박다푸르가 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고 입장료가 그만치 비싼지 금방 공감이 되었다. 지금은 사라져버린 옛왕국의 영화를 느끼면서 살아있는 문화 유산사이를 걸었다. 박다푸르 구역내의 모든 건물은 대부분 붉은 벽돌로 지어진 2백년이상된 건물들이지만 여전히 사람이 살고 있었다. 전시용 으로 만든 '민속촌'이거나 거주민이 없이 보전되고 있는 박제화된 유적지가 아니라 그대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시가지 자체가 그냥 살아있는 문화유산이었다. 카트만두 시내에서 만난 아산바자르의 골목에서 보았던 낡은 건물의 때묻고 썩고 삯은 문지방, 갈라진 벽돌 그리고 골목을 넘쳐나는 쓰레기와 가난한 네팔리의 삶은 지금은 사라진 네팔의 옛 영화를 증명하기에 조금은 부족해 보였다. 하지만 박타푸르에 들어서자 여전히 가난한 사람들의 삶이 가감없이 드러나는 중에도 밀집한 적벽돌 건물과 사원, 탑과 길을 덮은 붉은 벽돌의 화려한 문양 등이 지금은 떼가 타고 낡고 삯았지만, 한 때 이 왕국이 얼마나 번창했고 아름답고 위대한 문명을 자랑했는지 쉬 느낄 수 있었다.

아침 일찍 박다푸르를 찾은 덕분에 우리가 도착했을 때 구역내에는 관광객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관광지가 아니라 주민들의 삶의 터전인 박타푸르의 모습을 느낄 수 있어 오히려 좋았다. 등교하는 학생들과 출근중인 주민들의 분주한 발걸음으로 고색창연한 박다푸르는 삶의 훈기가 돌고 생동감이 넘쳐났다. 오늘 하루 다른 일정은 전혀 잡혀있지 않았고 오직 박다푸르만 보고 느끼고 걸으면 되었기 때문에 출근길에 바쁜 네팔리 사이로 너긋하니 골목과 광장을 오가며 박다푸르의 과거와 현재를 소요했다. 골목 모퉁이에 차려진 구멍가게의 물건들을 살피고, 시골장터같은 골목을 지나면서는 우리 역시 장보러 나온 사람마냥 네팔리와 휩쓸려 난전을 두루 살폈다.

 

시간이 지나고 하나둘 관광객의 발길이 늘어나자 우리는 다시 그들과 어우려져 관광객의 눈으로 다시 박다푸르를 보기 시작했다. 같이 광장을 가로지르며 탑과 석조 조형물을 배경으로 사진도 찍고, 군인들이 경비중인 흰두사원을 이교도가 들어갈 수 있는 지점까지 들어가도 보고, 박다푸르의 과거와 현대의 예술작품이 동시에 전시되어 있는 박물관도 들렀다. 광장은 점점 더 관광객의 발길이 늘어났지만 의외로 박물관 안은 한적했다. 사실 박물관 안에 전시된 작품보다 박물관 바같에서 만날 수 있는 네팔리의 삶과 삶을 이어가는 공간, 그리고 삶이 묻어나는 각가지 생활용품, 장식 등이 더 예술적이라서 굳이 박물관에 입장료를 내고 들어올 필요가 없는지도 물랐다. 박물관에 전시된 작품보다 전시공간이 된 건물이 더 멋있는 박물관을 나왔다. 광장을 내려다볼 수 있는 탑에 올라 박타푸르 광장들을 쓸고 지나가는 관광객과 네팔리의 걸음속에 묻어나는 박다푸르의 옛 향기를 맡고, 현재의 삶을 느끼고, 그 미래를 점쳤다.  

박다푸르의 중심 듀발스퀘어에 이르자 수년전 아내가 네팔 여정중에 잠시 들렀지만 정확히 기억해 내지 못해 안타까워했던 네팔의 사원을 회상해 내었다. 분명 카트만두 어디 전통 시장 같은 곳이었다며 카트만두에 도착하자 마자 이야기를 꺼냈지만 아산바자르와 타멜을 포함해 카트만두 시내를 다 뒤지고도 찾아 내지 못한 추억의 장소를 박타푸르에 와서 확인하게 되었다. Cafe Nyatapola! 듀발스퀘어 한켠에 자리잡고 있는 3층 짜리 낡은 목조건물로 바로 그 카페가 아내와 여성문화계 선배 동료들과 함께 티벳을 거쳐 잠시 네팔에 들렀을 때 차를 마시며 네팔의 향기를 느껴볼 수 있었던 곳이었다. 배도 출출해지고 다리고 지쳐갈 즈음 Cafe Nyatapola에 들어섰다. 제일 위층 듀발스퀘어 전체가 내려다 보이는 모퉁이에 자리에 잡아 간단한 샌드위치를 들고 커피를 마셨다. 이제 한가롭게 차라도 마시는 시간이면나의 가슴에는 여행의 설레임보다 끝나가는 여정에 대한 아쉬움이 차올랐다. 다 지나가리다. 하지만 세상의 섭리가 어그러지는 숱한 순간들이 있었듯 내 작은 삶을 이루는 지금의 시간도 잠시 잠깐이나마 흐름을 멈춘다면 얼마나 좋을까...

박타푸를를 빠져나와 타멜행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곧바로 카트만두로 접어들었고 트리뷰반 공항을 스쳐지나갔다. 카트만두-박다푸르간 새길을 따라 번화가를 달리자 건물외벽에 늘어선 간판과 광고판이 눈에 들어왔다. 익숙한 삼성과 엘지같은 한국기업은 물론 코카콜라, 소니같은 세계적 자본의 간판이 즐비했다. 척박한 땅 네팔에서도 자본은 자신의 지배 공간을 확장하며 무한 증식을 계속하고 있었다. 익숙한 세계적 자본의 광보판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어학학원을 홍보하는 플랭카드였다. 네팔은 편집광처럼 영어 공부에 몰빵하는 한국보다도 어쩌면 더 외국어 공부에 자신의 미래를 거는 사람이 많은지도 몰랐다. 대부분의 초등학교에서 외국어를 가리키고 아예 '외국어 초등학교'까지 있는 모양이었다. 외국어를 배워 외국으로 나가 돈을 벌고 자신의 꿈을 실현하는 기회를 잡거나, 네팔에 남아서도 관광을 위시한 비지니스에 외국어가 필수적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아니면 영어와 네팔어의 구조적 유사성 때문인지 초급 교육을 받은 정도면 다 영어를 어느정도 구사한다고 했고 실제로 만나보니 그런것 같았다. 대학나온 한국사람보다 초등학교만 나온 네팔사람들이 영어를 더 잘 하는것 같았다.

그런데 학원 안내 플랭카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드러나듯 몇년전부터 네팔에는 한국어 붐이 일어났다고 했다. 한국은 그들에게 기회의 땅이고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고 했다. 네팔리에게 물어보니 일본을 더 선망하지만 일본은 현실적으로 들어가 일자리를 덛기가 너무 힘들고 두번째로 한국을 선호하는데 한국은 자신만 잘하면 들어가 일을 구할 수 있는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 나라로 여긴다고 했다. 그러다보니 최근에는 한국어가 제일 인기있는 외국어가 되었다고 했고, 역시 여행중에 가이드든 포터든 지나는 사람들이건 우리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이야기하면 자가와 말을 걸고 자신이 아는 두어마디의 한국어를 자랑하기도 했다. 박타푸르를 나와 카트만두거리를 달리면서 한국 자본의 힘을 느껴야 하는 이율배반적인 묘한 감정을 안고 타멜에 도착했다.

인드라쵸크, 아산바자르 그리고 타멜거리를 배회하다 다시 J.Vill을 찾아나섰다. 다행히 안나푸르나 라운드 때 차메에서 만났던 한국학생들을 만났다. 참체에서 포카라로 먼저 떠난 학생들은 반디푸르에서 머물다 오늘 카트만두에 들어왔다며 J.Vill의 위치를 알고 있었다. 드디어 파샹을 상봉했다. 혹시라도 카트만두에서 만나 맛있는거 사먹자고 한 약속이 빈말이 될까봐 걱정했었는데 다행히 파샹을 만나게 되어 너무 기뻤다. 파샹과 청량음료와 피자를 먹고 파샹의 소개로 자신의 친구가 운영한다는 '캐시미르 샾'에 들러 야크와 야생 염소의 속털로 만들었다는 머플러를 구입하고 파샹의 삼촌이 운영한다는 여행사에 들러 인사를 나누었다. 파샹까지 봤으니 마음에 남을 일들이 다 다 끝나 마음도 편해졌다. 해도 저물어 숙소에 들러 구입한 선물을 내려놓고 '경복궁'이라는 한식당에 들러 맛있는 된장찌게를 먹었다. 그리고 내일의 여정을 그리며 '네팔짱'의 두번째 밤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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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출국준비와 비행스트레스까지 참 피곤한 하루였다. 그래도 시차때문인지 설레임때문인지 
새벽일찍 눈이 뜨인다. 3시 30분! 한국시간으로 7시 정도 되었겠지. 어제 초저녁부터 정전이 되더니 새벽에 또다시 정전이다. 창밖 골목은 불빛 구경조차 하기 힘든 암흑천지였지만 다행히 자이언트 민박은 충전지가 설치되어 있어 기본 조명등이나마 들어왔다. 트레킹에 앞서 오늘 하루 카트만두 '관광'을 위해 지도를 펼치고 헤드라이트를 켰다. 헤드라이트를  안나푸르나로 접어들기 전부터 그것도 네팔의 수도인 카트만두에서 사용하기 시작할 줄은 미처 몰랐다.
 


아침을 먹고 집을 나섰다. 숙소가 있는 따까리 바자르에서 타멜거리를 목표로 오직 간단한 지도에 의지해 걷기 시작했다. 막 문을 열고 가게 앞을 쓸고, 또 가게마다 집집마다 작은 종교의식 같은 것을 치르는 장면을 목도하면서 하루의 삶이 시작되는 카트만두 거리의 아침을 호흡했다. 몇번이나 길을 잘못들고, 다시 몇번이나 길을 물어 타멜거리에 도착했다. 서점에 들러 안나푸르나 라운드 안내 지도를 사고 뚜렷한 목적지 없이 그냥 길을 걸었고 아센바자르와 인드라초크, 그리고 듀발스퀘어 를 지났다. 아센바자르는 시내 중심부에 있는 재래시장 같은 곳이다. 카트만두 시민의 일상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아센바자르의 골목을 한참 누비고 다니며 낯설 네팔의 삶을 들여다 보는 재미에 다리 아픈줄 몰랐다.

 

 


나에게 카트만두는 [종교]의 도시로 다가왔다. 집집마다 종교적 예식에 따라 아침부터 예를 올리고, 쵸크라고 불리는 사거리마다 종교적 상징물이 자리하고 있고, 골목골목을 따라 블록마다 사원이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카트만두는 종교에 젖어 있었다. 왕정이 종식되고 좌파 정권이 들어섰다고는 하지만 네팔은 여전히 종교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 같았다. 과장하자면 그냥 카트만두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성전으로 보였다. 자료를 보니 국민의 80%이상이 흰두교인이고 나머지는 거의 티벳불교도라고 보아도 무관하단다. 흰두교와 불교도 서로 교차되고 융합되어 내부적으로는 모르지만 나같은 이방인의 눈에는 서로 다르지 않았고, 표면적으로는 종교분쟁이라곤 일어날 수 없는 곳으로 보였다. 거기다가 최근에 한국 기독교의 공격적인 선교까지 이루어지고 있다고하니 네팔은 당분간 종교의 '도가니'로 남아 있을 것 같다.


'종교'가 없는 네팔은 상상할 수도 없지만 네팔의 해방은 좌파정권에 의한 자본가 타도보다는, 인민의 삶을 종교로 부터 분리하는데서 시작되어야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주택가든 상가든 여기저기 산재한 흰두사원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넘쳐나고 노인네들 뿐아니라 청년들까지 종교적 예를 취하는 모습을 쉽게 목격할 수 있는 것으로 봐서 네팔의 종교적 전통이 그대로 신세대로까지 이어져 옮을 느낄 수 있었다. 전통적 가치를 지키고 살아가는 공동체의 모습에 안도를 하면서도 여전히 종교적 교리에 갖혀있는 인민의 삶은 지금의 가난과 혼란의 원인이면서 네팔의 미래를 옥죄는 장애로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이는 나의 주관적인 감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네팔을 얼마나 안다고!!


타멜에서 걸어서 30분 거리라는 스와얌부사원을 찾아 나섰지만 길을 잘못들어 1시간 가량을 헤멨다. 소떼가 쓰레기 더미와 검게 썩은 물을 헤집고 다니는 비슈누마티강을 건너 주택가의 비포장길을 한참을 걸어서야 국립박물관을 확인하고 이를 기준으로 삼아 스와얌부 사원을 찾을 수 있었다. 사원이 있는 언덕 아래 길게 늘어선 마니차를 참배 온 네팔리를 따라 돌리며 내 역시 불교도가 된양 세상에 가득 찬 고통이 조금이라도 줄기를 빌었다. 정문이 따로 있는지 모른채 일명 'Monkey Temple' 답게 원숭이가 무리지어 놀고 있던 스와얌부 사원의 후문으로 들어섰다.


스와얌부사원은 2천년이나 된 카트만두에서 제일 오래된 사원이라고 했다. 스와얌부사원은 티벳불교인 라마교사원이지만 네팔의 사원들이 다 그렇듯 흰두교의 영향을 깊게 받고 있어 보였다. 사실 흰두교의 영향인지 네팔불교 자체의 특징 인지 알 수 없었지만 한국 불교의 정갈하고 선적인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분주한 사람들의 발길이며, 관광 상품들을 파는 삼점과 사찰이 한 덩어리로 어우러진 어수선한 주변 풍경, 사찰의 풍경에 조금은 당혹스러웠다. 사원의 입구 한 켠에는 단체로 참배 온 듯한 사람들이 모여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난생 처음으로 손으로 직접 밥을 떠 먹는 장면은 조금 역겹기도 했다. 또 사원 여기저기에 피워놓은 향불때문에 머리가 아프고 구토가 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네팔은 네팔 나름의 삶이 있고 문화가 있고 종교가 있을 터. 그래서 내가 네팔에 온 것이 아닌가! 이 모든 것에 익숙해 지는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스와얌부 사원의 구석구석을 둘러보고, 다른 관광객들과 섞여 사진을 찍고 카트만두 시내를 조망했다. 먼지와 매연으로 덮인 카트만두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래도 편안한 자리가 있으면 차분히 앉아 차라도 한잔 하며 쉬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스와얌부는 그럴만한 곳이 아니었다. 장터만치나 혼잡한 사원을 벗어나기 위해 올라갈 때와 반대편의 정문으로 가파른 계단을 내려왔다. 계단을 따라 거지 아이들이 여럿 보였고 그중에는 한 가족으로 보이는 여자와 서너명의 아이가 함께 구걸을 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사원은 또 다른 의미의 생활터전일진대 나는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할지 당혹스러웠다. 값싼 동정도 그렇다고 냉정한 합리성도 통하지 않는 지점으로 내몰린 듯한 당혹감을 느끼면서 나는 스와얌부 사원을 벗어났다.


스와얌부 사원을 벗어나 다시 타멜 쪽으로 한참을 걷다가 길가 구멍가게에서 음료수를 사 마시고 한참을 쉬었다. 아내와 이야기 끝에 파탄 듀발스퀘어를 가기로 하고 마침 앞을 지나가는 택시를 불렀다. 파탄 두발스쿼어를 외치고 말로만 듣던 택시비 흥정에 들어갔다. 기사는 700루피를 요구했지만 나는 300루피를 제시했다. 흥정이 이루어지지 않아 그냥 걸어서 가겠다며 출발을 한 뒤에야 택시는 따라오면서 그 가격에 타라고 해서 카트만두서 처음으로 택시를 탑승했다. 역시 예상했던데로 급가속, 급정거에 지그재그 운전을 진땀을 흘리며 감수한 뒤에야 목적지에 도착했다.


파탄은 카트만두일대의 옛 3대왕국중 하나이고 듀발스퀘어 왕궁을 말한다고 하니 카트만두 일대에는 3곳의 듀발스퀘어가 있단다. 오전에 지나왔던 카트만두 듀발스퀘어와 파탄 듀발스퀘어 , 그리고 아직 가 보지 못한 박타푸르 듀발스퀘어가 그것이다. 3곳 모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고 하는데 그중 2곳을 오늘 방문하게 되었고 스와얌부사원도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되어 있다고 하니 오늘 하루만에 3곳의 세계문화유산을 들른 것이 아닌가!


파탄 듀발스퀘어는 카트만두 듀발스퀘어와는 조금은 다른 분위기다. 밀집한 3~4층 벽돌목조 건문사이의 좁다란 골목을 따라 돌아가면 교차로가 나오고 교차로마다 어김없이 탐 등 종교적 상징물이 나오는 것은 똑 같았지만 파탄은 더 오래고 더 정갈해 보이고 왕궁도 규모면에서도 더 크 보였다. 사실 오전에 카트만두 듀발스퀘어와 아산 바자르 일대를 배회할 때는 더더욱 그랬지만 이날 하루 여정은 사전 공부가 없다보니 정확히 저 건물이 무엇인지. 저 탑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냥 카트만두의 삶을 느끼고 그 공기를 호흡하는데 만족했다.



그렇게 본다면 이날 하루의 여행은 참 만족스러웠다. 타멜에서 지도를 사고, Pyaphal광장의 한 레스토랑 옥상에서 토스트와 커피를 마시고, 네팔리와 부딪히며 시장골목골목을 누비고, 시내를 벗어나 주택지까지 헤메고 다니고, 3곳의 세계문화유산을 들르고, 그 유명한 네팔택시를 3번이나 타보고, 파탄의 왕궁에서 식사를 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솣한 네팔리와 어깨를 부딪고 발을 밟고 밟히고, 수십번 나마스테를 외친 오늘은 하루의 여정치고는 너무나 길고 풍성했다. 카트만두 시내의 거의 절반을 헤집고 다녔으니 나중에 지도를 보니 순전히 걸은 거리만도 15km는 족히 되는것 같았다.


파탄의 왕궁 한켠에서 운영중인 레스토랑에서 커피와 이른 저녁을 시켜 먹고 한참 휴식을 취한 뒤 다시 택시를 탔다. 지도만 보고 '싱가 듀바르'라는 명칭의 큰 건물 표식을 보고 무조건 그쪽으로 향했다. 택시를 내리고 보니 군인들이 경비를 서고 있는 그냥 현정부청사가 아닌가! 할 수 없이 걸어서 타멜로 향했다. 타멜로 가는 길에 석유공급이 딸려 정국이 혼란스럽다고 하더니 한 주유소는 군인들이 경비를 삼엄하게 서고 있었다.


그리고 카트만두 듀발스퀘어 쪽으로 방향을 잡아 걷다가 적기를 휘날리는 한 무리의 시위대와 마주쳤다. 시위대는 구호를 외치고 무엇인가를 주장하는 연설도 하고 있었지만 나는 시위대의 주장이 무엇인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무장 경찰들은 산만하게 여기 저기 무리를 지어 하품을 하며 서 있었고 길가는 시민들은 별반 관심을 보이지도 않아보였다. 폐지된 왕정을 복원하라는 주장을 펼치는 일부 정치세력들이 자주 시위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적기를 들고 있는 것으로 봐서 왕정복고주의자들은 아닌것 같았다. 어쩌면 좌파정권 수립뒤 부패한 자본과 관료 사회에 대한 응징과 재산환수를 요구하는 건 아닌지 짐작해 보았다. 왕정은 폐지되고 권력은 바뀌었지만 관료사회의 부패는 워낙 뿌리깊고, 종교와 결합된 상층 지배층은 칼을 들이밀기에는 너무나 강고하다. 이런 현실에서 국가 예산의 2/3를 외국 원조에 의존하는 네팔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걱정스럽다. 좌파정권도 어찌할 수 없는 네팔의 가난과 부패가 가슴아팠다.


하루의 긴 여정을 마치고 숙소에 돌아와서야 오늘이 한해가 끝나는 12월 31일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떠올렸다. 정전중인 깜깜한 거리를 나서기도 뭐했지만 막상 거리를 나선들 마땅히 하고 싶은 것도 없어 그냥 방안에서 가는 2011년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밤이 깊어가자 그래도 시내쪽 하늘에 가느다란 레이져 광선이 흔들리고 숙소와 가까운 거리에서 노래소리와 소란이 일기 시작했다. 소란은 밤늦게 까지 계속되었고, 한해를 낯선 땅에서 보내고 새해를 안나푸르나 라운드로 시작할 꿈을 부풀리며 아내와 지난 여정을 정리하고 이어질 일정을 계획하며 하루를, 2011년 한해를, 그리고 카트만두에서 보내는 2번째 밤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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